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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어머니라 불리우는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의 생애와 작품(음악)

  같은 해, 같은 중부 독일 땅에서 태어난 두 거장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평생 독일을 떠나지 않고 교회 음악의 한 봉우리를 세웠고, 다른 한 사람은 독일을 떠나 이탈리아에서 단련을 거치고 영국에서 꽃을 피웠습니다. 한국에서 흔히 '음악의 아버지' 바흐와 짝을 이루어 '음악의 어머니'라 불리는 헨델, 그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깊이 들여다봅니다.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 1685~1759)은 1685년 독일 작센 지방의 할레에서 궁정 이발사 겸 외과의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후기 바로크 음악을 마지막 정점으로 끌어올린 작곡가입니다. 같은 해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난 바흐와 더불어 후기 바로크의 두 봉우리로 손꼽히지만, 평생 독일 안에 머문 바흐와 달리 헨델은 독일·이탈리아·영국 세 음악 문화를 직접 흡수하고 결합한 코스모폴리탄 작곡가였습니다.

— 작곡가 프로필 —
본명Georg Friedrich Händel (영국 귀화 후 George Frideric Handel)
생몰1685년 2월 23일 할레 — 1759년 4월 14일 런던 (향년 74세)
시대후기 바로크
주요 장르이탈리아어 오페라 · 영어 오라토리오 · 협주곡 · 관현악 모음곡 · 건반악곡
작품 수HWV 카탈로그 기준 약 612곡 (오페라 42편, 오라토리오 약 25편 포함)
대표작[메시아] · [수상음악] · [왕궁의 불꽃놀이] · [리날도] · [세르세] (※ 카탈로그 기준에 따라 작품 수에 차이)

1. 헨델의 생애

  헨델의 인생은 크게 네 시기로 나뉩니다. 음악적 재능을 발견한 할레 시기(1685~1703), 직업 음악가로 첫걸음을 뗀 함부르크 시기(1703~1706), 이탈리아 오페라 양식을 흡수한 이탈리아 시기(1706~1710), 그리고 평생의 무대가 된 영국 시기(1710~1759)입니다. 헨델은 이 네 무대 사이를 단순히 이동한 것이 아니라, 각 음악 문화를 자신의 양식 안에 차례로 녹여 들였습니다.

할레 시기 — 다락방의 클라비코드와 차하우의 가르침

  헨델의 아버지 게오르크 헨델은 작센-바이센펠스 공작 궁정의 이발사 겸 외과의였고, 아들이 음악가가 되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법률가의 길을 권한 아버지를 피해 어린 헨델이 다락방에 클라비코드를 숨겨 두고 몰래 연주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이 이야기는 헨델 사후 처음 출간된 헨델 전기에 실린 일화로, 후대에 덧붙여진 신화가 아니라 출처가 분명한 이야기에 속합니다.

  작센-바이센펠스의 요한 아돌프 1세 공작이 어린 헨델의 즉흥연주에 감탄해 아버지를 설득한 뒤, 헨델은 할레 마리엔교회의 오르가니스트 차하우(Friedrich Wilhelm Zachow, 1663~1712)의 제자가 됩니다. 차하우는 어린 헨델에게 대위법, 푸가, 다양한 작곡가의 양식을 두루 가르쳤고, 헨델 자신이 평생 인정한 거의 유일한 작곡 스승이었습니다. 1702년 17세 헨델은 할레 대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임명되어 첫 직업 음악가의 자리에 섭니다.

함부르크 시기 — 마타이슨과의 결투, 그리고 첫 오페라

  1703년 헨델은 할레를 떠나 독일에서 거의 유일하게 시민극장식 오페라가 운영되던 함부르크의 갠제마르크트 극장에 합류합니다. 처음에는 제2 바이올린, 곧 하프시코드 연주자로 활동했고, 이곳에서 평생의 친구이자 라이벌이 될 동료 작곡가 마타이슨(Johann Mattheson, 1681~1764)을 만나게 됩니다.

  1704년 12월 5일, 마타이슨이 자작 오페라 「클레오파트라」에서 안토니우스 역을 맡아 무대에서 노래를 마치고 하프시코드 자리로 돌아왔는데, 그 자리에는 이미 헨델이 앉아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격렬히 다투었고, 결국 극장 앞 광장에서 검을 빼들었습니다. 마타이슨이 찌른 검이 헨델의 외투에 달린 큰 금속 단추에 부딪혀 부러진 덕분에 헨델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이 일화는 흥미 위주의 야사가 아니라 마타이슨 본인이 만년에 펴낸 음악인 회고록에 직접 적어 남긴 기록이라, 출처가 분명한 일화로 다루어집니다. 두 사람은 곧 화해했고 평생의 음악 동료로 지냈으며, 마타이슨이 남긴 헨델 관련 기록은 헨델 함부르크 시기를 재구성하는 핵심 자료가 됩니다. 1705년 1월 헨델의 첫 오페라 [알미라]가 갠제마르크트 극장에서 초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고, 같은 해 [네로]가 뒤따랐습니다(악보 소실).

이탈리아 시기 — 로마와 베네치아의 단련

  1706년 가을 헨델은 이탈리아 오페라의 본고장에서 직접 단련받기 위해 알프스를 넘습니다. 피렌체의 페르디난도 데 메디치 공의 후원, 로마의 콜론나·오토보니·판필리 추기경의 살롱, 베네치아의 카니발 시즌이 이어지는 약 4년의 여정에서 헨델은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 코렐리,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같은 당대 거장들과 직접 교류했습니다.

  로마에서는 교황령이 오페라 공연을 금지했기에 라틴어 모테트와 이탈리아어 칸타타, 두 편의 오라토리오([부활], [시간과 깨달음의 승리])를 작곡하며 성악 어법을 다듬었습니다. 1707년 피렌체에서 초연된 [로드리고]의 성공에 이어, 1709년 12월 베네치아에서 초연된 [아그리피나]가 27회 연속 공연을 기록하며 폭발적 성공을 거두었고, 베네치아 청중이 "Viva il caro Sassone(독일 친구 만세)"라 외쳤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영국 정착 — 우연이 운명이 되다

  1710년 헨델은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루트비히의 궁정악장에 임명됩니다. 그러나 곧 휴가를 얻어 런던을 방문했고, 1711년 2월 헤이마켓 퀸즈 극장에서 초연된 [리날도]가 런던을 휩쓸었습니다. 영국에서 작곡된 최초의 본격 이탈리아어 오페라였고, 'Lascia ch'io pianga(나를 울게 하소서)'가 들어 있는 작품입니다.

후기 바로크의 거장 헨델의 초상
헨델의 초상

  1714년 앤 여왕이 사망하고 그의 옛 고용주 게오르크 루트비히가 영국 왕 조지 1세로 즉위합니다. 한국 자료에서 흔히 "하노버 궁정을 무단 이탈한 헨델이 조지 1세의 환심을 사려고 1717년 [수상음악]을 작곡해 강 위에서 연주했다"고 전해지지만, 이 화해 서사는 후대에 덧붙여진 윤색일 가능성이 큽니다. 동시대 영국 신문은 1717년 7월 17일 템스강 선상 음악회를 단순히 보도할 뿐 화해의 의도를 명시하지 않으며, 헨델과 조지 1세의 관계는 1714년 즉위 직후부터 이미 정상화되어 있었다는 것이 현대 헨델 연구자들의 정리입니다.

  1719년 영국 왕립음악원(Royal Academy of Music)이 설립되어 헨델은 음악감독으로 이탈리아어 오페라 시리즈를 이끕니다. [줄리어스 시저(Giulio Cesare)](1724)는 그의 오페라 가운데 후대 가장 많이 부활된 작품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1727년 정식으로 영국에 귀화한 헨델 앞에는 곧 시련이 닥칩니다. 1726/27 시즌 무대 위에서 소프라노 쿠초니보르도니 두 디바의 충돌과 후원 귀족들의 분파 다툼이 격해지며 왕립음악원이 1728년 해체되었고, 헨델은 두 차례나 새 오페라단을 직접 운영했지만 1734년 등장한 라이벌 '귀족 오페라단(Opera of the Nobility)'과의 경쟁 끝에 1737년 결국 파산 직전까지 몰립니다.

만년 — 뇌졸중, 시력 상실, 그리고 부활절

  1737년 4월 헨델은 중풍 또는 마비성 질환으로 해석되어 온 심각한 발작을 겪었습니다. 전통 전기에는 오른팔을 제대로 쓰지 못했고, 한동안 정신적 혼란도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다만 오늘날에는 이를 단순한 ‘뇌졸중’ 하나로 확정하기보다, 반복성 마비 증상과 당시 건강 상태를 함께 보려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는 독일 아헨의 온천에서 6주간 요양한 끝에 회복했고, 1738년 [세르세]의 'Ombra mai fù'(흔히 '헨델의 라르고'로 알려진 곡)를 비롯한 새 오페라를 작곡하며 무대로 복귀했습니다.

  그러나 런던의 이탈리아 오페라 시장은 이미 무너진 뒤였습니다. 헨델은 1741년을 끝으로 오페라 작곡을 사실상 중단하고 영어 오라토리오로 노선을 완전히 옮깁니다. [메시아](1741년 작곡, 1742년 초연), [삼손](1741년 작곡, 1743년 초연), [솔로몬](1748년 작곡, 1749년 초연), [예프타](1751년 작곡, 1752년 초연)가 이 시기에 이어졌습니다. 1750년 8월에는 네덜란드 헤이그 근처에서 영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차 전복 사고를 겪었고, 그 직후부터 시력이 빠르게 나빠져 1753년 무렵에는 거의 완전히 실명한 상태로 [예프타]를 마무리하고 옛 작품을 개정하며 마지막 시기를 보냈습니다.

  1759년 4월 14일 성토요일, 헨델은 런던 브룩 가의 자택에서 74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헨델이 친구이자 대본 작가였던 토머스 모렐(Thomas Morell)에게 "구원자를 만나는 부활절에 죽고 싶다"고 말했다는 증언이 남아 있어, 그의 죽음 시점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본인이 의식적으로 받아들인 결말로 해석됩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그를 안장한 영국은, 독일에서 태어나 영국 시민이 된 이 작곡가를 사실상 국민적 영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1762년 사원 본관에는 [메시아] 'I know that my Redeemer liveth'의 악보를 손에 든 헨델 입상이 세워져 오늘날까지 남아 있습니다.

2. 헨델 오페라의 음악사적 의의

  오늘날 한국 청중에게 헨델은 [메시아]의 작곡가로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그러나 헨델 자신이 평생 가장 많은 시간을 쏟은 장르는 이탈리아어 오페라 세리아(opera seria)였습니다. 1705년 [알미라]에서 1741년 [데이다미아]까지 약 36년간 그는 42편에 이르는 오페라를 작곡했고, 이 작품들은 18세기 전반 유럽 오페라의 한 정점을 이룹니다.

  헨델 오페라의 핵심은 다 카포 아리아(da capo aria)의 양식적 완성과 인물 심리의 음악적 묘사입니다. A-B-A 구조의 다 카포 아리아에서 가수는 처음 A를 그대로 부르지 않고 즉흥 장식음을 더해 다시 부르며 인물의 감정 변화를 표현했고, 헨델은 이 형식 안에서 분노·절망·사랑·복수·체념의 색채를 인물별로 정밀하게 분리해냈습니다. [줄리어스 시저]에서 포로가 된 클레오파트라가 절망 속에 내뱉는 아리아 'Piangerò la sorte mia(나는 내 운명을 슬퍼하리라)', [리날도]의 'Lascia ch'io pianga(나를 울게 하소서)', 그리고 나무 그늘에 감사하는 왕의 느릿하고 깊은 독백으로 흔히 '헨델의 라르고'라 불리는 [세르세]의 'Ombra mai fù'가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헨델 사후 오페라 세리아 양식 자체가 빠르게 구식이 되면서 그의 오페라는 19세기 내내 거의 무대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헨델 오페라 부활은 1920년대 독일 괴팅엔의 오스카 한(Oskar Hagen)이 시작한 '헨델 르네상스'와, 20세기 후반 카운터테너의 부활로 카스트라토 역할이 다시 무대에서 가능해진 흐름이 만나면서 본격화되었습니다. 오늘날 [줄리어스 시저], [아리오단테], [알치나], [로델린다], [리날도], [세르세]는 세계 주요 오페라하우스의 정규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헨델 자신이 자신의 음악 자료를 자유롭게 재활용했다는 사실입니다. 한 오페라의 아리아를 다른 오페라로 옮기거나, 옛 칸타타의 선율을 오라토리오로 가져오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이는 도덕적 의미의 표절이라기보다 18세기 작곡가 일반의 직업적 관행이었으며, 헨델 작품을 추적하는 흥미로운 단서이기도 합니다.

3. 오라토리오의 거장 — 메시아와 그 너머

  헨델의 진정한 음악사적 업적은 영어 오라토리오라는 새로운 장르를 사실상 창조했다는 데 있습니다. 1730년대 후반 런던의 이탈리아 오페라 시장이 무너지자, 헨델은 무대 장치 없이 콘서트 형식으로 상연되는 영어 오라토리오로 노선을 옮겼습니다. 이 전환은 단순한 후퇴가 아니라, 그가 평생 쌓아온 음악적 자원이 영국이라는 시장과 만나면서 일어난 자연스러운 결과였습니다.

왜 오라토리오였나

  외부 조건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영국 중산층이 이탈리아어 오페라보다 자기 언어로 부르는 작품을 원했습니다. 둘째, 무대 장치와 외국인 가수가 필요한 오페라보다 무대 없이 합창단과 솔리스트만으로 상연되는 오라토리오가 비용이 훨씬 적게 들었습니다. 셋째, 사순절 같이 무대 공연이 금지되는 시기에도 종교적 주제의 오라토리오는 상연이 가능했습니다.

  작품 내부 자원도 결정적이었습니다. 헨델은 함부르크 시기부터 독일 루터교 칸타타와 코랄 전통을, 이탈리아 시기에 라틴어 모테트와 합창 구성을, 영국 시기에 헨리 퍼셀의 영어 합창 전통과 영국 대관식 앤섬을 차례로 흡수해 두었습니다. 1727년 조지 2세 대관식을 위해 작곡한 [제사장 사독(Zadok the Priest)]은 이 모든 자원이 응축된 영어 합창의 시금석이었고, 이 한 곡 안에 이미 [메시아]의 합창 어법이 예고되어 있습니다. 이런 합창적 자원이 없었다면 다 카포 아리아 위주의 오페라 양식만 가지고는 영어 오라토리오로의 전환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메시아 — 24일의 기적과 더블린 초연

  [메시아]의 작곡 기간은 1741년 8월 22일부터 9월 14일까지 정확히 24일입니다. 자필 악보에 헨델 본인이 적어 둔 작곡 시작일과 종료일이 그대로 남아 있어, 이 24일이라는 기간은 후대의 과장이 아니라 헨델 자신의 손이 증명한 사실입니다. 24일 만의 작곡은 동시대 다른 작곡가에게도 드물지 않은 속도였지만, [메시아]의 음악적 완성도와 결합되면서 후대에 '신성한 영감'의 일화로 각색되었습니다. "헨델이 작곡 중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자신을 보았다'고 말했다"는 일화는 헨델 사망 직후 출간된 첫 전기에는 등장하지 않고 100년 가까이 흐른 19세기 자료에서야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후대에 덧붙여진 신화로 보는 편이 안전합니다.

  대본은 영국의 부유한 지주이자 아마추어 음악가 찰스 제넨스(Charles Jennens)가 흠정역(KJV) 성서와 시편 영어 운율역에서 직접 발췌·편집해 헨델에게 전달했습니다. 일반 오라토리오와 달리 [메시아]에는 등장인물도, 줄거리 전개도 없습니다. 제1부는 그리스도 탄생의 예언과 강림, 제2부는 수난과 속죄와 부활, 제3부는 영원한 생명과 최후의 승리를 다루지만, 인물의 대사 형식이 아니라 성경 본문을 합창과 독창이 명상하듯 펼치는 구조입니다.

  초연은 1742년 4월 13일 더블린의 피셤블 거리 음악당에서 자선 공연으로 이루어졌고, 800명 가까운 관객이 몰려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메시아]가 처음부터 교회를 위한 음악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더블린과 1743년 런던 공연 모두 콘서트홀에서 자선 모금을 위해 상연되었으며, 이 점에서 [메시아]는 세속 콘서트홀용 오라토리오의 전형이라 부를 만합니다.

할렐루야 기립 전통의 진실

  한국과 일본 자료에서는 흔히 "1743년 런던 코벤트 가든 초연 때 조지 2세가 할렐루야 합창 첫 마디에서 자리에서 일어났고 청중도 따라 일어선 이래 오늘까지 그 전통이 이어진다"고 표현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동시대 영국 신문이나 일기·서한 어디에도 이 기립 사건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이 일화는 19세기 중반 자료에서야 회고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도널드 버로우즈(Donald Burrows)를 비롯한 현대 헨델 연구자들은 이를 후대에 만들어진 일화로 보거나 신중하게 의심하는 입장을 취합니다. 다만 할렐루야 기립이라는 공연 관습 자체는 19세기 영어권에서 정착해 오늘까지 이어지는 살아 있는 전통이며, 그 기원이 1743년 조지 2세에게 있다는 서사가 후대의 신화화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 지금 학계의 중심 견해입니다.

"For unto us a Child is born", "Hallelujah", "I know that my Redeemer liveth", "Worthy is the Lamb that was slain"… [메시아]의 합창과 독창들은 음악사상 가장 보편적으로 사랑받는 영어 성악곡들로 자리 잡았습니다.

메시아 너머의 오라토리오 — 솔로몬·예프타·삼손

  [메시아]는 헨델 오라토리오 중 가장 유명하지만, 음악적으로 더 야심찬 작품들이 그 옆에 있습니다. [삼손](1741)은 밀턴의 「Samson Agonistes」를 바탕으로 한 극적 오라토리오로 [메시아]보다 무대적 성격이 강하고, [솔로몬](1748)의 3막 도입 합창 'Arrival of the Queen of Sheba(시바 여왕의 도착)'는 오늘날에도 자주 단독으로 연주됩니다. 헨델 자신이 마지막으로 완성한 오라토리오 [예프타](1751)는 작곡 도중 시력을 잃기 시작한 작품으로, 자필 악보 한 페이지에 헨델이 직접 "이 정도까지 작곡한 1751년 2월 13일 수요일, 왼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고 적어 둔 메모가 남아 있어, 그가 시력을 잃어가던 정확한 순간을 후대에 알려줍니다.

4. 헨델 vs 바흐 — 후기 바로크의 두 봉우리

  같은 1685년에 태어나, 같은 1750년대에 시력을 잃고 세상을 떠난 두 거장 — 헨델과 바흐의 동시대성은 자주 강조되지만, 두 사람의 동시대 평가는 결코 대등하지 않았습니다. 헨델은 살아생전 유럽적 명성을 누리고 영국에서 국민적 영웅이 된 반면, 바흐는 죽은 뒤 거의 잊혔다가 1829년 멘델스존의 [마태 수난곡] 부활 연주를 계기로 19세기에 재발견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만난 적은 없습니다. 바흐가 두 차례 헨델을 직접 찾아가려 시도했으나, 헨델이 마침 영국에 머물거나 다른 도시로 이동한 뒤여서 어긋났다는 일화가 양측 자료에 함께 전해집니다. 두 거장은 한 번도 같은 방에 앉아본 적이 없는 채, 한 사람은 라이프치히 토마스교회의 칸토르 자리에서 평생 독일 교회를 위한 음악을 쓰고, 다른 한 사람은 런던 무대를 위한 이탈리아어 오페라와 영어 오라토리오를 쏟아냈습니다.

항목 헨델 바흐
출생·사망1685 할레 ~ 1759 런던1685 아이제나흐 ~ 1750 라이프치히
활동지독일·이탈리아·영국 (코스모폴리탄)중부 독일 한정 (튀링엔·작센)
음악 무대극장·콘서트홀교회·궁정
주요 장르오페라(42편)·오라토리오·관현악칸타타·수난곡·건반·기악곡 (오페라 없음)
작품 수HWV 약 612곡BWV 약 1,128곡
대표작[메시아], [수상음악], [리날도][마태 수난곡], [평균율], [b단조 미사]
동시대 명성유럽적 명성, 영국 국민 영웅독일 지역 한정, 사후 거의 잊힘
후대 부활[메시아] 중심, 1920년대 오페라 르네상스1829년 [마태] 연주 이후 재발견

  한국에서 헨델은 바흐의 '음악의 아버지'라는 별칭과 짝을 이루어 '음악의 어머니'로 불려 왔습니다. 다만 이 표현은 영미·독일어권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별칭은 아니며, 한국과 일본식 음악 교육 문화 안에서 정착한 표현으로 보는 편이 안전합니다. 베토벤은 만년에 "헨델은 우리 모두 가운데 가장 위대했다(Handel was the greatest of us all)"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동시대성과 후대 평가의 비대칭이 빚어낸 한 단면입니다.

5. 기악곡 — 수상음악과 왕궁의 불꽃놀이

  헨델은 성악곡 위주의 작곡가였지만, 그가 남긴 기악곡은 후기 바로크 관현악의 정점에 자리합니다. 가장 유명한 두 곡, [수상음악]과 [왕궁의 불꽃놀이]는 모두 영국 왕실의 야외 의식을 위해 작곡된 모음곡으로, 32년의 시간차를 두고 헨델 영국 시기의 시작과 끝을 상징합니다.

  [수상음악(Water Music)]은 1717년 7월 17일 조지 1세가 템스강 선상 음악회를 즐기기 위해 위촉한 곡으로, 동시대 영국 신문이 선상 50명의 음악가가 헨델의 새 음악을 세 차례 반복 연주했다고 보도했습니다. F장조·D장조·G장조 세 모음곡 약 22개 악장으로 구성되며, 호른·트럼펫·오보에·바순·현악이 어우러지는 야외 음악 특유의 밝고 의식적인 분위기가 특징입니다.

  [왕궁의 불꽃놀이(Music for the Royal Fireworks)]는 1749년 4월 27일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을 마무리한 엑스라샤펠 조약을 기념해 런던 그린파크에서 열린 대규모 불꽃놀이를 위해 작곡되었습니다. 조지 2세는 군악적 효과를 위해 현악을 빼고 관악·타악만으로 작곡할 것을 요구했고, 헨델은 24개의 오보에·12개의 바순·9개의 호른·9개의 트럼펫·팀파니 3쌍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관악·타악 편성을 마련했습니다. 4월 21일 복스홀에서 열린 공개 리허설에 1만 2천 명이 몰려 런던 다리가 막혔다는 동시대 신문 기록이 남아 있어, 18세기 야외 음악의 흥행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두 모음곡 외에도 헨델 기악곡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합주 협주곡 Op.6 12곡(1739)입니다. 코렐리의 합주 협주곡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더 풍부한 화성과 다양한 악장 구조를 도입한 이 12곡은, 합주 협주곡 장르의 마지막 정점으로 자주 꼽힙니다. 그밖에 오르간 협주곡 Op.4·Op.7(헨델 자신이 오라토리오 막간에 직접 연주한 작품), 하프시코드 모음곡 8곡(1720), 합주 협주곡 Op.3 등이 그의 기악곡 핵심 목록을 이룹니다.

[메시아] 완전 해설 · [수상음악] - 정치적 화해를 담은 여름날의 선율 · [왕궁의 불꽃놀이] 자세히 보기

6. 헨델 주요 작품 목록

  HWV(Händel-Werke-Verzeichnis) 카탈로그를 기준으로 헨델은 약 612곡을 남겼습니다. 아래는 입문 또는 감상 우선순위가 높은 장르별 대표곡 정리입니다.

오페라 (42편 중 대표 8편)

작품 초연 특징
[알미라]1705 함부르크현존하는 첫 오페라
[아그리피나]1709 베네치아이탈리아 시기 정점, 27회 연속 공연
[리날도]1711 런던'Lascia ch'io pianga', 영국 진출의 대성공
[줄리어스 시저]1724 런던왕립음악원 시기 대표작
[로델린다]1725 런던서정적 정점, 'Dove sei'
[아리오단테]1735 런던코벤트가든 첫 시즌
[알치나]1735 런던마법 오페라의 걸작
[세르세]1738 런던'Ombra mai fù'(헨델의 라르고)

오라토리오 (약 25편 중 대표 8편)

작품 초연 특징
[부활]1708 로마이탈리아 시기 라틴어 오라토리오
[에스더]1732 런던최초의 영어 오라토리오
[이집트의 이스라엘인]1739 런던합창 비중이 압도적인 작품
[메시아]1742 더블린24일 만에 작곡, 'Hallelujah'
[삼손]1743 런던밀턴 원작, 극적 오라토리오
[유다 마카베우스]1747 런던'See the conqu'ring hero comes'
[솔로몬]1749 런던'시바 여왕의 도착'
[예프타]1752 런던마지막 오라토리오, 시력 상실 자필 메모

관현악·협주곡

장르 대표곡
관현악 모음곡[수상음악](1717) · [왕궁의 불꽃놀이](1749)
합주 협주곡Op.3 (6곡, 1734) · Op.6 (12곡, 1739)
독주 협주곡오르간 협주곡 Op.4(6곡, 1738) · Op.7(6곡, 1761 출판) · 하프 협주곡
건반악곡하프시코드 모음곡 제1집(8곡, 1720) — '쾌활한 대장장이' 변주곡 포함

합창·앤섬

장르 대표곡
대관식 앤섬[제사장 사독(Zadok the Priest)](1727) — 1727년 이래 모든 영국 군주 대관식에서 연주
송가[디틴겐 테 데움](1743) · [성 세실리아 송가](1739)
기타 합창[알렉산더의 향연](1736, 드라이든 시 기반)

자주 묻는 질문

Q. 헨델은 왜 '음악의 어머니'로 불리는가?

한국에서 헨델은 바흐의 '음악의 아버지'라는 별칭과 짝을 이루어 '음악의 어머니'로 불려 왔습니다. 다만 이 표현은 영미·독일어권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별칭은 아니며, 한국과 일본식 음악 교육 문화 안에서 정착한 표현으로 보는 편이 안전합니다.

Q. 헨델과 바흐는 만난 적 있는가?

같은 해(1685년) 같은 중부 독일 지역에서 태어났지만, 두 사람이 직접 만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바흐가 두 차례 헨델을 찾아가려 했으나 헨델이 마침 영국에 있거나 다른 도시로 떠난 뒤여서 어긋났다는 일화가 양측 자료에 함께 전해집니다.

Q. 헨델은 왜 영국에 정착했나?

1710년 하노버 궁정악장에 임명되었으나 곧 휴가를 얻어 런던으로 향한 헨델은 1711년 [리날도]의 대성공으로 런던 무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후 앤 여왕의 연금과 귀족 후원이 그를 영국에 묶어두었고, 1714년 그의 옛 고용주 게오르크 루트비히가 조지 1세로 영국 왕위에 오르면서 정치적으로도 자연스러워졌습니다. 1727년에는 의회법으로 정식 영국 시민이 됩니다.

Q. 메시아 할렐루야 합창 기립 전통은 사실인가?

1743년 런던 초연 때 조지 2세가 할렐루야 합창에서 기립했고 그 이래 청중도 따라 일어나게 되었다는 일화가 통설처럼 전해지지만, 동시대 신문 기사나 일기에는 이 사건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며 100년쯤 뒤인 19세기 자료에서야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후대에 만들어진 일화로 의심하는 견해가 우세합니다. 다만 할렐루야 기립 관습 자체는 19세기 이래 영어권 공연 전통으로 오늘까지 이어집니다.

Q. 수상음악과 왕궁의 불꽃놀이는 어떻게 다른가?

두 곡 모두 헨델의 대표 관현악 모음곡이지만 시기와 목적이 다릅니다. [수상음악](1717)은 조지 1세를 위해 템스강 선상에서 연주된 야외 음악이며, [왕궁의 불꽃놀이](1749)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종전을 기념한 그린파크 불꽃놀이를 위한 음악입니다. 후자는 왕이 현악 없이 군악 편성으로 작곡할 것을 요구해 거대한 관악·타악 편성으로 초연되었고, 헨델은 후일 현악을 보강한 콘서트홀 버전을 따로 마련했습니다.

Q. 헨델 입문에 추천하는 작품은?

오라토리오 [메시아](특히 'Hallelujah' 합창과 'I know that my Redeemer liveth'), 관현악 [수상음악]과 [왕궁의 불꽃놀이], 오페라 [리날도]의 'Lascia ch'io pianga', [세르세]의 'Ombra mai fù'(헨델의 라르고)가 입문에 적합합니다. 깊이 들어가려면 오라토리오 [솔로몬]·[예프타], 오페라 [줄리어스 시저], 합주 협주곡 Op.6를 권합니다.

  헨델은 한 도시에 머물지 않고 한 장르에 갇히지도 않은 작곡가입니다. 할레의 어린 오르가니스트에서 함부르크의 신예 오페라 작곡가로, 이탈리아 살롱의 사랑받는 외국인에서 영국 왕실의 국민 작곡가로, 그는 18세기 유럽의 주요 음악 문화를 자신의 양식 안에 차례로 끌어안았습니다. 동시대 청중이 사랑한 이탈리아어 오페라 작곡가 헨델과, 후대가 기억하는 영어 오라토리오의 거장 헨델 사이에는 분명한 거리가 있고, 그 거리를 메우는 작업이 20세기 이래 헨델 르네상스의 핵심이었습니다. 오늘 처음 헨델을 만나신다면 [메시아]의 'Hallelujah' 합창과 [수상음악]으로 시작해 보시고, 이미 그의 음악과 친숙하시다면 오페라 [줄리어스 시저]나 합주 협주곡 Op.6의 문을 두드려 보시기를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