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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마리아 폰 베버(Karl Maria von Weber)의 생애와 음악

  독일의 낭만주의 초기를 대표하는 음악가 카를 마리아 폰 베버(Karl Maria von Weber, 1786-1826)는 독일의 홀스타인주(Holstein) 오이틴(Eutin)에서 태어났다. 베버는 병약한 아이였는데, 태어날 때부터 고관절에 병이 들어 평생 절뚝거리며 다녔다.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순회극단 음악감독이었던 아버지와 성악가인 어머니를 따라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어릴 때부터 익힌 무대 감각은 훗날 오페라 작곡에 큰 보탬이 되었다.

 

  베버가 음악적 재능을 나타내기 시작하였을 때 그의 아버지는 순회극단이 방문하는 마을의 여러 교사들에게 가르침을 받게 하였다. 그중에는 요제프 하이든의 동생인 미하엘 하이든(Johann Michael Haydn, 1737-1806)도 있다.

 

  1799년에는 최초의 징슈필(Singspiel) <사랑과 술의 힘 Die Macht der Liebe und des Weins>을 작곡하였는데 초연되지는 않았다. 1803년 빈에서 음악교육가 게로르크 요제프 포글러(Georg Josehp Vogler, Abbé Vogler로도 불리움)의 제자가 되었고, 1804년 포글러의 추천으로 브레슬라우(Breslau, 현재 폴란드 브로츠와프) 오페라 극장의 악장이 되어 개혁을 추진하는데 미숙함을 보여 결국 그곳을 떠나야 했다.


카를 마리아 폰 베버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이미지입니다
출처 : 브리태니커

  
베버는 뷔르템베르크(Württemberg)의 오이겐 공작(Duke Eugen)의 음악 감독을 거쳐 1807-1810년까지 프리드리히 뷔르템베르크(Württemberg) 왕의 형제인 프리드리히 1세의 궁정에서 개인비서로 일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베버는 마가랭이라는 오페라가수와 불륜을 저질렀고, 그의 아버지는 루드비히 공작의 돈을 횡령해서 고발을 당하게 된다. 결국은 잠시 투옥된 이후 추방되어 베버와 그의 부친은 뷔르템베르크를 떠나야만 했다.

 

  이후 베버는 1813-1816년 프라하 오페라 극장의 감독으로 활동한 후, 1817년에 드레스덴 궁정극장의 음악감독이 되었는데, 같은 해 오페라 <실바나 Silvana>의 주역 가수였던 캐롤라인 브란트(Caroline Brandt)와 결혼하였다. 베버는 독일의 다른 도시들보다 낙후된 드레스덴에서 열정적으로 일에 몰두하여 오페라를 작곡할 시간이 거의 없었고 결핵으로 건강도 더 악화되었다.

 

  이탈리아 오페라와 상응하는 독일 오페라를 구축하기 위해 힘썼던 베버는 1821<마탄의 사수 Der Freischütz>를 베를린 궁정극장에서 초연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의 전통을 세운 <마탄의 사수>로 베버는 국민적 영웅이 되었고, 유럽 각지에서의 공연도 이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2년 후 오페라 <오이리안테 Euryanthe>는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리게 된 베버는 결핵으로 병약한 상태였지만 런던 로얄 오페라로부터 위촉을 받아 오페라 <오베론 Oberon>을 작곡하여 런던을 방문하여 초연을 지휘하였다. 하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채 에너지를 소진한 채 결핵으로 고통을 받던 베버는 39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하게 된다. 베버의 묘지는 처음에는 런던에 있었지만, 18년이 지난 후 그의 유물은 서쪽 드레스덴에 있는 가톨릭 가족 공동묘지로 옮겨졌다.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 <오이리안테>, <오베론>은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특히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극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베버는 오페라 외에도 많은 협주곡, 실내악 및 피아노 음악을 작곡했다.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베버가 지휘봉을 사용하고 오케스트라의 자리를 배치한 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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