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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Beethoven)의 생애와 업적(음악사적 의미와 중요성)

  음악의 성인(聖人) 또는 악성(樂聖)라 불리는 베토벤은 모차르트 보다 14년 늦은 1770년 독일 본에서 태어나, 고전파 음악을 최고의 경지로 발전시켰으며 낭만파 음악의 길을 열게 했다. 하이든, 모차르트와 더블어 빈고전파의 3대 거장으로 손꼽히며, 고전과 낭만의 교량적 역할을 한 작곡가이다.

1. 베토벤의 생애

  3대째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은 어린시절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바흐의 가족처럼 화목하지도 못했고, 모차르트의 아버지처럼 뒷받침을 해주지도 못했다. 궁중 가수 겸 바이올리스트였지만 알콜의존중에 빠진 아버지 요한은 모차르트처럼 신동으로 내세워 돈을 벌기 위해  베토벤을 혹독하게 연습을 시켰다. 나이가 어려야 신동의 가치가 높아지지 때문에 8세인 베토벤의 나이를 6세로 낮추어 소개했기 때문에 베토벤은 자신의 실제 나이를 중년이 되어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 

 16세가 되던 1787년 베토벤은 빈으로 갔지만 어머니의 사망 소식에 2주만에 본으로 되돌아 와야만 했다. 이때 모차르트를 만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도덕적 삶을 중시했던 베토벤은 17살 때부터 아버지의 알콜의존증이 더욱 심해진 상태에서 어린 두 동생을 부양해야 했고, 이런 처지로 결혼을 하고 싶어 했지만 하지 못했다(베토벤의 연인들에 대해서는 별도의 포스팅을 할 예정임). 하지만 베토벤은 브로우닝 가족을 통해 발트슈타인 백작의 후원을 받아 본 대학의 강의를 청강하여 인문학적 소양을 쌓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하이든에게 소개해주어 빈으로 오게 되면 제자로 받아주겠다는 약속을 받게 된다.

  1792년 베토벤은 다시 빈으로 향한다. 그는 귀족이나 부유한 집안의 잔치나 모임에서 연주를 하며 생계를 꾸려갔는데, 그의 뛰어난 즉흥연주 능력은 귀족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특유의 굽실거리지 않는 태도도 유명했는데, 이런 거칠지만 당당한 태도에 빈의 귀족들은 베토벤에게 믿음을 갖게 되었다. 베토벤은 리히노프스키 공작의 집에서 하숙을 하며 피아노와 연금을 지급받게 되어 생계에 곤란함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빈에서 베토벤은 하이든의 가르침을 받았으나 그가 너무 분주하여 두 사람의 관계는 불편했다. 배움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은 베토벤은 비밀리 생크 선생에서 교육을 받기도 했다. 하이든이 바쁜 것도 사실이지만 사실 베토벤이 성실한 제자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베토벤이 하이든에게 배운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고, 훗날 하이든의 76번째 생일 연주회에서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손에 키스하며 경의를 표했고, 그 다음해 그가 사망하자 공개적으로 스승에 대한 존경을 공개적으로 피력했다. 
  

베토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이미지입니다.
출처 : medium.com


  1795년부터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유럽 각지에도 점차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그러나 1800년 무렵부터 베토벤은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불운이 찾아오게 된다. 심해진 난청으로 사람 만나길 꺼려하며 엄청나게 괴로워했고, 하일리겐슈타트에서 동생에게 유서를 썼다. 하지만 유서를 쓴 후 자신에게 주어진 음악적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고 새롭게 결심하게 된다.

  음악을 표현하기 위해 버리지 못할 규칙은 없고, 음악이라는 언어로 인간의 삶을 말하는 철학자, 음악의 시인이 되겠다고 다짐하며 많은 곡을 작곡했다. 베토벤은 교향곡 9곡, 피아노 협주곡 5곡, 피아노 소나타. 바이올린 소나타, 첼로 소나타, 피아노 3중주, 현악 4중주 등 수많은 걸작을 잇달아 쏟아내기 시작했다. 

   베토벤의 작품은 모차르트의 4분의 1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적지만, 곡의 길이로 비교해보면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 점차 심각할 정도의 청력과 가족 간의 불화, 건강 악화로 1827년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혁명에 의한 해방적 시대를 배경으로 활동했던 베토벤은 음악의 형식적 완성과 내용의 숭고함 속에서, 양식의 정점을 형성함과 동시에 낭만파 시대로 접어들게 했다.

  베토벤은 평생 단 한 번도 누구에게 고용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누구에게도 고용되지 않았던 최초의 독립적인 음악가였다는데 음악사적 의미가 크다.

2. 베토벤의 피아노 음악의 음악사적 의미

  많은 작곡가들이 일단 연주자로 명성을 얻은 것처럼, 베토벤도 당시 빈에 진출한 후 일단 피아노 연주자로 명성을 알렸다. 특히 즉흥연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다른 음악 장르들은 띄엄띄엄 작곡되거나 특정시기에 몰아서 작곡되었지만, 피아노곡 만큼은 그의 음악 인생 내내 쉬지 않고 작곡되었으며, 당연히 그의 작품 중에서도 양적으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20개의 피아노 변주곡, 5개의 피아노 협주곡, 작품번호가 불은 피아노 소나타만 32개나 되는데, 이는 피아노의 바이블(Bible)로 평가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곡은 8번 비창, 14번 월광, 17번 템페스트, 21번 발트슈타인, 23번 열정, 26번 고별, 29번 함머클라비어 등이 있다. 32개의 소나타는 베토벤 음악의 모든 양식 기법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피아노 음악사에 나타난 양식의 변천까지도 가듬할 수 있게 한다. 베토벤의 피아노 음악에 대한 창작 열정은 그의 전 생애에 걸쳐 나타났고, 피아노 소나타에서 발견되는 음악 특징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음악의 특징을 모두 포함한다.

  베토벤에게 피아노라는 악기는 자신의 각종 음악적 상상력과 실험을 설계하고 구현해 볼 수  있는 최적의 도구였으며, 피아노곡에서 얻은 음악적 성과는 다른 악기와 다른 장르에도 두루 활용되었다. 

  따라서 이 피아노곡들은 베토벤의 음악의 발전과 변화 양상을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는 일종의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의 음악 연구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3. 베토벤 교향곡의 음악사적 의미

  베토벤의 9개의 교향곡은 음악사에 영원히 빛나는 기념비적인 작품들이다. 베토벤은 이 교향곡들을 위해, 그의 모든 음악 양식과 작곡 기법을 동원했다. 교향곡에 나타난 조성, 주제, 형식의 전개는 고전주의 기법의 완성을 보여주었고, 한편으로는 낭만주의를 지향하는 진보적 기법의 실제적 예를 보여주었다. 

  교향곡 1,2번은 초기 빈 시절에 작곡되었는데, 베토벤다운 특징이 보여지지 않는다. 1번 1악장은 고전주의의 전형적인 소나타 형식이고, 2번은 서정적인 곡이다. 이 시기의 교향곡을 모차르트와 비교해 보면, 베토벤은 관악기를 쓰고 에너지가 넘치며 굉장히 서정적인 특징을 보인다. 베토벤은 2번 교향곡을 작곡하고, 3번 교향곡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great leap을 갖게 된다. 

  이후 작곡한 교향곡을 보면 3,5,7,9번은 심각하고 4,6,8번은 덜 심각하다. 3번은 영웅 교향곡으로, 나폴레옹을 찬양해 달라는 프랑스 장군의 부탁을 받아 쓴 작품으로, 3번 2악장은 갑자기 분위기가 무겁고 어둡게 딴판으로 바뀌는 것이 특징이고, 4악장은 주제의 일부만 가지고 작곡가 마음대로 하는 특징변주곡의 형태를 띠고 있다.

  4,5,6번은 1806년에서 1808년 사이에 연속으로 작곡되었다. 5번은 청각장애를 극복한 베토벤의 강인한 의지를 표현한 운명 교향곡, 6번은 자연을 찬미하고 인간의 행복과 평화를 그린 전원 교향곡으로 알려져 있다. 7, 8번은 1812년에 작곡되었는데, 7번은 바그너와 리스트가 극찬한 작품이고, 8번은 소규모의 작품으로 형식과 조성 체계가 고전 양식에 기초하고 있다. 베토벤의 전 작품을 대표할 만큼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는 9번 합창 교향곡은, 관현악곡에 합창을 도입했으며, 9개의 교향곡 중에서 창작 기간이 가장 긴 6년에 걸쳐 완성했다. 이 작품은 세계의 인류를 향한 베토벤 자신의 철학과 사상이 담긴 작품으로, 인류의 형제애를 노래하고 있다. 또한 베토벤의 모든 창작 기법이 담겨 있기도 하다.

  교향곡에 관련하여 베토벤의 업적이라면, 4악장 소나타 형식이던 교향곡의 형식을 변형하고 다양화해 낭만파에 전해준 것인데, 실제로 베토벤의 교향곡 6번 전원은 5악장으로 편성이 되어 있고 교향곡 9번은 정규 악장은 4악장이지만 뒤에 합창부분까지 합하여 6부분으로 편성되어 있다. 9개의 교향곡들은 하나같이 유명하고 중요한 작품들이어서, 후세의 작곡가들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다.

4. 베토벤 실내악곡의 음악사적 의미


  실내악이란 적은 인원으로 연주되는 합주의 형태를 말하는데, 이미 바로크시대 무렵에 나타났고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이나 교향곡의 원류가 되는 음악이라 할 수 있다. 베토벤은 교향곡과 피아노곡 작곡가이기도 하지만, 실내악 분야에서도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작곡가이기도 하다. 실내악은 바로크 시대의 통주저음 양식이 쇠퇴함과 동시에 종래의 트리오 소나타를 주체로 하는 합주체에서 현악4중주로 바뀌었다. 이 형식은 하이든에 의해 확립되었는데, 이런 실내악을 예술적 최고봉으로 이끈 사람은 베토벤이었다.

  베토벤은 피아노 3중주를 시작으로 피아노 4중주, 현악4중주 등의 실내악 곡들을 작곡했다. 13곡의 피아노3중주와 2곡의 4중주는 1798년 이전에 작곡했고, 현악4중주는 1798년 이후부터 작곡하기 시작해 23곡의 현악4중주곡을 작곡했으며, 또한 3곡의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현악2중주와 5곡의 현악3중주도 작곡했다. 0p.11번 클라리넷과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3중주는 전형적이고 쉬운 소나타 형식의 실내악곡이다. 현악 4증주는 베토벤의 성숙한 창작 시기에 작곡되어서 그의 예술성과 작곡 기법을 볼 수 있는데, 푸가 스타일, 선율, 라인이 복잡해 너무 너무 어렵고 현대곡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당대의 청중들을 혼란시켰음은 물론, 오늘날의 청중들에게도 결코 쉽게 이해되는 곡들이 아니다.

5. 소나타 형식의 발전과 완성에 기여한 베토벤의 음악사적 중요성 

  서양음악사에 있어서 베토벤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는, 하이든이 창시한 소나타 형식을 발전시키고 확립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베토벤은 유년기부터 소나타 형식을 공부해 나가며, 그의 작곡과정의 중기 쯤에 이 형식을 확립시켰다. 소나타 형식은 서양음악에 있어 거의 모든 음악형식의 근본이고 바탕이다. 베토벤 시대의 표준적인 소나타는 3악장 내지 4악장으로 되어 있으며, 1악장은 필수적으로 소나타 형식을 취하고 있다. 소나타 형식을 구분하는 것은 조성형식으로, 반드시 조성의 변화가 있어야만 소나타 형식이다. 제1주제가 major key일 경우, 제2주제 key는 반드시 제일 처음 나온 key의 5도 위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소나타 형식은 크게 제시부, 발전부, 재현부로 나누어지고 제시부, 재현부, 발전부 순으로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제시부에서는 제1주제와 제2주제를 전개한다. 제1주제는 선언적이며, 제2주제는 서술적이다. 조가 바뀌지 않는 소나타 형식은 없으며, 반드시 제시부에서 조가 바뀌고, 바뀐 조가 재현부에 원래대로 돌아와야 한다. 제1주제의 끝부분에서 제2주제의 확실한 부분이 나오는데, 이를 bridge라고 하며 대부분은 bridge가 있다. 이 bridge는 조성을 바꾸기 위해 필요하며, 코드를 바꾸기 위한 장치인 셈이다. bridge 때문에 제시부보다 재현부는 짧으며, 재현부의 시작과 제시부의 시작은 99% 똑같다. 재현부 끝부분에는 coda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다.

  또한 베토벤은 비창 3악장에서 소나타 론도(Rondo, 주제가 삽입부를 사이에 두고 반복하여 나타나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곡) 형식의 곡을 쓰기도 했다. 소나타 론도가 되려면 2가지의 조건이 있어야 하는데, 첫째 ABA C ABA형식에서 처음에 있는 B와 뒤에 있는 B의 key가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ABA C ABA형식에서 C부분이 반드시 발전부(development) 성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C대신 D로 부르기도 한다. 길든 짧든, 복잡하든 단순하든 발전부 성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베토벤은 전통을 환기시키며, 전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냈는데, 바로 이러한 점이 우리가 베토벤을 위대하다고 말하는 척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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