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의 생애와 작품, 라이프치히는 그를 첫 번째로 부르지 않았다

작성자

카테고리:

,

  같은 해, 같은 중부 독일 땅에서 태어난 두 작곡가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독일을 떠나 이탈리아와 영국을 무대로 삼은 코스모폴리탄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독일 중부와 북부의 궁정과 교회를 옮겨 다니며 일했습니다. 소년 시절에는 북쪽 뤼네부르크(Lüneburg)에서 성가대 장학생으로 지냈고, 안할트 공국의 쾨텐 궁정에서 악장을 지냈으며, 1720년에는 영주를 따라 보헤미아의 카를스바트(Karlsbad)까지 다녀왔습니다. 한국에서 오래전부터 ‘음악의 아버지’라 불려 온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그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들여다봅니다.

  이 글이 붙들고 있는 것은 하나입니다. 바흐라는 사람은 전설보다 그가 자리를 옮길 때마다 남은 문서 속에서 더 잘 보인다는 점입니다. 교회 위원회의 회의록, 거리 싸움 뒤의 심문 기록, 궁정 서기가 적은 구금 기록, 본인이 옛 친구에게 쓴 편지, 아들이 쓴 부고에 그의 말과 행동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서들에는 오늘 우리가 그를 부르는 방식이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1723년 라이프치히 시의회는 그를 첫 번째로 부르지 않았고, 1734년 베를린의 한 유산 목록은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을 바흐의 이름도 없이 여러 거장의 협주곡 사이에 묶어 한 곡에 4그로셴으로 적었습니다. 아래에서는 확인되는 문서와 뒤에 붙은 이야기를 갈라 놓고 읽습니다.

작곡가 프로필

본명 Johann Sebastian Bach
생몰 1685년 3월 31일 아이제나흐 ~ 1750년 7월 28일 라이프치히 (향년 65세)
※ 출생일 3월 31일은 오늘날 그레고리력 기준이며, 당시 현지에서 쓰던 구력으로는 3월 21일에 해당합니다.
시대 후기 바로크
주요 장르 교회 칸타타 · 수난곡 · 오라토리오 · 건반악곡 · 협주곡 · 무반주 독주곡 (오페라 없음)
작품 식별 바흐 작품 목록 Bach-Werke-Verzeichnis (BWV)
※ BWV는 목록의 번호이지 확정된 진작의 수가 아닙니다. 진위가 논쟁 중인 곡에도 번호가 붙어 있습니다.
대표작 [마태 수난곡] ·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 [B단조 미사] · [골드베르크 변주곡] (※ 카탈로그 기준 변동 가능)
정본 자료 신 바흐 전집(Neue Bach-Ausgabe, NBA), 바흐 디지털(Bach digital), 라이프치히 바흐 아카이브(Bach-Archiv Leipzig)
바흐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초상화
가발을 쓰고 검은 웃옷을 입은 바흐의 초상 옆에 이름과 생몰 연도 1685~1750을 적은 그림이다(이미지 출처: christianitytoday.com)

1. 바흐의 생애는 직책이 바뀔 때마다 장르도 대체로 바뀌었다

  바흐의 인생은 직책과 도시로 나뉩니다. 아이제나흐·오르드루프 시기(1685~1700), 성가대 장학생으로 지낸 뤼네부르크 시기(1700~1702), 1703년 바이마르 궁정 악사를 잠시 거쳐 오르간 연주자로 일한 아른슈타트·뮐하우젠 시기(1703~1708), 궁정 오르가니스트로 시작해 1714년 콘체르트마이스터(악단 수석 연주자)가 된 바이마르 시기(1708~1717), 궁정 악장으로 세속 기악을 쓴 쾨텐 시기(1717~1723), 그리고 교회 음악 책임자로 보낸 라이프치히 시기(1723~1750)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시기마다 남은 작품의 장르가 대체로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오르가니스트 시절에는 오르간곡이, 궁정 악장 시절에는 기악이, 칸토르 시절에는 전례 음악이 대체로 몰려 있습니다. 예외도 있습니다. 바이마르에서는 오르가니스트이면서 1714년부터 매달 교회 칸타타를 썼고, 라이프치히에서는 칸토르이면서 콜레기움 무지쿰이라는 연주 단체를 맡아 기악을 연주했습니다. 헨델이 도시를 옮겨 다니며 무대를 바꾼 작곡가라면, 바흐는 한 직책에서 다음 직책으로 옮겨간 작곡가였습니다.

어린 시절 이야기는 아들의 부고에서 오고, 뤼베크 사건은 회의록에서 온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1685년 3월 31일, 독일 튀링겐의 작은 도시 아이제나흐(Eisenach)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현지에서 쓰던 구력으로는 3월 21일에 해당합니다. 바흐 가문은 16세기 이래 200년 넘게 연주자와 작곡가를 배출한 음악 가문이었습니다. 아버지 요한 암브로지우스 바흐는 시 음악가이자 바이올린 연주자였고, 어린 아들에게 바이올린과 기초 음악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바흐의 유년기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홉 살 무렵 어머니를 잃고, 10세가 되기 전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고아가 되었습니다. 이후 오르드루프(Ohrdruf)에 살고 있던 형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의 집으로 옮겨 생활하며, 교회 오르간 연주자였던 형에게서 음악 교육을 이어갔습니다.

  형이 내주지 않던 책장에서 거장들의 악보를 어린 바흐가 달밤마다 몰래 꺼내 여섯 달에 걸쳐 베껴 썼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 일화가 처음 글로 적힌 곳은 1754년에 나온 부고입니다. 아들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와 제자 아그리콜라가 함께 쓴 글이고, 사건이 있었다는 때로부터 50여 년 뒤입니다. 1802년 포르켈(Johann Nikolaus Forkel)의 전기는 이 이야기를 이어 적었습니다. 당대 문서로 뒷받침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간직해 온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 대목은 어린 바흐가 실제로 무엇을 했는지의 기록이라기보다, 가족이 기억한 바흐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로 읽는 편이 안전합니다.

  1700년, 열다섯 살의 바흐는 학교 친구 에르트만과 함께 북쪽의 뤼네부르크로 가서 성 미하엘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부고는 그가 보기 드물게 고운 소프라노 목소리 덕에 그곳에서 환영받았다고 적습니다. 그러나 얼마 뒤 변성기가 오면서 소프라노 음역과 함께 그 목소리를 잃었습니다. 뤼네부르크에 있는 동안 그는 때때로 함부르크까지 가서 카타리나 교회의 오르가니스트 라인켄(Johann Adam Reinken)의 연주를 들었습니다. 함께 길을 떠난 친구 에르트만은 30년 뒤 바흐가 속마음을 털어놓는 편지를 받게 되는 사람입니다.

  1703년 초 그는 바이마르 궁정의 악사로 첫 직장을 얻었고, 같은 해 여름 아른슈타트 새 교회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습니다. 열여덟 살이었습니다.

  아른슈타트 시절에는 거리 싸움의 심문 기록도 남았습니다. 1705년 8월 4일 밤늦게 집으로 가던 바흐에게 학생 가이어스바흐가 몽둥이를 들고 덤벼들었습니다. 가이어스바흐는 바흐가 전에 자기 파고트(바순) 연주를 깎아내렸다고 따졌고, 진술들에 따르면 바흐는 검을 뽑았습니다. 그 검으로 찔렀는지는 진술이 갈립니다. 위원회는 바흐에게 ‘사람은 불완전한 것들과 함께 사는 법’이니 학생들과 화해하라고 타일렀고, 어떤 처벌이 내려졌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뤼베크 여행도 사건 당시의 문서로 남아 있습니다. 1705년 아른슈타트 시기에 바흐는 북독일 오르간 음악을 대표하던 디트리히 북스테후데(Dietrich Buxtehude)를 만나러 뤼베크(Lübeck)에 갔습니다. 한국 자료는 흔히 이 일을 ‘수백 km를 걸어간 여행’으로 소개합니다. 걸어갔다는 말은 아들이 쓴 1754년 부고에 실제로 있지만, 사건 당시에 남은 문서는 1706년 2월 21일 아른슈타트 콘시스토리(교회 위원회) 회의록입니다. 회의록에서 감독관은 그가 ‘4주만 청했는데 네 배쯤 오래 자리를 비웠다’고 따졌고, 바흐는 ‘자기 기예에서 이것저것을 익히려고’ 뤼베크에 다녀왔다고 답했습니다. 위원회는 또 그가 찬송가(코랄) 반주에 ‘기이한 변주를 많이 하고 낯선 음을 많이 섞어 넣어 회중이 혼란스러워했다’고 나무랐습니다. 회의록의 ‘네 배’는 아른슈타트를 비운 전체 기간이고, 부고가 적은 ‘거의 석 달’은 뤼베크에 머문 기간입니다. 그가 무엇을 배웠는지, 그것이 성격의 증거인지는 이 문서들에 없습니다.

  같은 해 11월 위원회는 다시 그를 불러, 무슨 권한으로 최근 ‘낯선 처녀’를 성가대석에 올려 연주하게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바흐는 목사에게 미리 말해 두었다고 답했습니다. 그 처녀의 이름은 문서에 적혀 있지 않습니다.

쾨텐 6년에 남은 것은 교회 음악이 아니라 기악이다

  초기에 바흐는 아른슈타트(Arnstadt)와 뮐하우젠(Mühlhausen)에서 오르간 연주자와 교회 음악가로 일하며 오르간 작품에 집중했습니다. 1707년 그는 뮐하우젠으로 자리를 옮겼고, 같은 해 마리아 바르바라와 결혼했습니다. 흔히 이 시기 작품으로 소개되는 〈토카타와 푸가 d단조 BWV 565〉는 오늘날 오르간 레퍼토리의 핵심이지만, 바흐의 작품인지 자체가 학계 논쟁 대상입니다.

  1708년 이후 바이마르(Weimar) 궁정에서 그는 궁정 오르가니스트이자 실내악 연주자로 일했습니다. 이 시기 그는 비발디의 협주곡 악보를 입수해 건반악기용으로 편곡했습니다. 이탈리아식 리토르넬로 형식을 손으로 옮겨 적으며 익힌 셈입니다. 다만 이 편곡 작업과 뒷날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을 곧바로 원인과 결과로 잇는 것은 한 걸음 더 나간 해석입니다. 두 작업이 남아 있다는 것과 하나가 다른 하나를 낳았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바이마르에서 그는 더 나은 자리를 스스로 찾아 나섰습니다. 1713년 말에는 할레(Halle)의 음악 감독 자리에 부름을 받아 직접 가서 시연곡까지 연주했지만, 부고의 표현으로는 ‘거절할 이유를 찾아’ 그 자리를 받지 않았습니다. 이듬해 1714년 그는 콘체르트마이스터로 올라 매달 교회 칸타타를 쓰게 됩니다. 1717년 쾨텐 영주가 악장 자리를 제안하자 그는 떠나려 했지만, 바이마르 궁정은 순순히 내보내 주지 않았습니다. 궁정 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바흐는 그해 11월 6일 ‘고집스러운 태도와 면직을 강요하려 한 일’로 지방 판사실에 구금되었고, 12월 2일 공작의 불쾌한 뜻과 함께 면직을 통보받으며 같은 날 풀려났습니다. 그 무렵의 사정과 바흐의 수입은 바흐 통장으로 본 음악 경제학에 따로 정리해 두었습니다.

  1717년 바흐는 쾨텐(Köthen) 공국의 궁정 악장(Kapellmeister)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이 자리에서 그가 남긴 것은 교회 음악이 아니라 기악이었습니다. 여기에 궁정의 교파가 관련됩니다. 칼뱅파 궁정 예배는 루터교와 달리 화려한 교회 음악을 쓰지 않았으므로, 궁정 악장에게 맡겨질 일도 교회 음악 쪽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쾨텐 궁정의 업무 문서나 고용 조건이 남아 있지 않아, 교파가 유일한 이유였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브란덴부르크 협주곡〉(BWV 1046~1051),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BWV 1001~1006), 〈무반주 첼로 모음곡〉(BWV 1007~1012),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1권〉(BWV 846~869)이 모두 쾨텐과 이어져 전해집니다. 다만 이 곡들이 전부 쾨텐 6년 안에 처음부터 끝까지 쓰였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바흐는 앞서 쓴 악장을 뒤에 모으고 다듬어 한 권으로 묶는 일을 자주 했고, 작곡 시점과 정서(淨書)·헌정 시점은 서로 다른 날짜이기 때문입니다.

  쾨텐 시절에는 집안의 큰 일도 있었습니다. 1720년 그는 영주를 수행해 두 달 가까이 보헤미아의 카를스바트(Karlsbad)에 다녀왔는데, 돌아와 보니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는 이미 세상을 떠나 묻혀 있었습니다. 부고는 떠날 때 건강하던 아내가 병들었다가 죽었다는 첫 소식을 그가 집 문을 들어서면서 들었다고 적습니다. 이듬해 1721년 12월 3일 그는 쾨텐 궁정의 소프라노 가수 안나 막달레나와 영주의 명으로 집에서 혼례를 올렸습니다. 신부는 바흐보다 열여섯 살 아래였습니다.

라이프치히는 그를 첫 번째로 부르지 않았다

  1723년, 38세의 바흐는 라이프치히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Thomaskantor)로 임명되어 생애 마지막 27년을 이 도시에서 보냅니다. 그런데 시의회가 처음 부른 사람은 바흐가 아니었습니다. 시의회가 먼저 원한 사람은 함부르크의 텔레만이었고, 텔레만은 함부르크에서 봉급을 올려 받고 자리를 옮기지 않았습니다. 다음으로 지목된 다름슈타트의 그라우프너는 본인이 오려 했으나 고용주가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이 과정이 남긴 문서가 라이프치히 시의회 회의록입니다. 1723년 4월 9일 회의에서 참사회원 아브라함 크리스토프 플라츠(Abraham Christoph Plaz)는 “최선을 얻을 수 없으니 중간을 택해야 한다(da man nun die besten nicht bekommen könne, müße man mittlere nehmen)”고 말했습니다. 선출은 2주 뒤인 4월 22일 회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날 기록에는 발언자마다 바흐에게 표를 주었다고 적혀 있고, 반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바흐는 이 자리에서 ‘쾨텐의 악장이고 건반에 뛰어나다’고 소개되었고, 같은 날 ‘극장풍이 아닌 곡을 써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습니다. 그는 5월에 부임했습니다.

  이 한 줄은 자주 ‘시의회가 바흐를 낮춰 보았다’는 뜻으로 인용됩니다. 다만 회의록에서 플라츠의 문장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피르나 출신의 다른 지원자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즉 이 말이 바흐를 두고 한 것인지 다른 후보를 두고 한 것인지는 회의록만으로 확정되지 않습니다. 확정되는 것은 이것입니다. 텔레만과 그라우프너가 먼저였고, 두 사람이 오지 않은 뒤에 바흐가 선출되었으며, 기록된 표는 모두 바흐에게 갔다. 오늘 우리가 그를 부르는 순서와 1723년 라이프치히가 그를 부른 순서는 같지 않았습니다.

  부임 후 그는 토마스 학교의 음악 교육과 합창 지휘를 맡았을 뿐 아니라, 라이프치히 주요 교회의 음악을 총괄하는 도시 음악 감독(Director musices) 역할까지 수행했습니다. 그는 교회력에 맞추어 칸타타를 계속 써냈고, 라이프치히 초기 몇 해에 쓴 칸타타가 오늘날 남은 교회 칸타타의 큰 몫을 차지합니다. 1729년 그는 라이프치히의 연주 단체 ‘콜레기움 무지쿰(Collegium Musicum)’의 지휘를 맡았고, 1730년대 이후에는 새 교회 칸타타를 쓰는 일이 줄어 커피하우스 연주에 시간을 더 쓰게 됩니다. 여기서도 앞의 규칙이 이어집니다. 맡은 자리가 하나 늘자 남는 장르도 늘었습니다. 그 시절의 수입과 커피하우스 무대는 바흐 통장으로 본 음악 경제학에서, 그 무대에서 연주된 〈커피 칸타타〉는 커피 칸타타 해설에서 따로 다루었습니다.

  바흐가 쾨텐을 떠난 이유를 본인이 적은 문서도 있습니다. 1730년 10월 그는 뤼네부르크 시절의 학교 친구 에르트만에게 긴 편지를 썼습니다. 쾨텐에는 음악을 사랑하고 잘 아는 영주가 있어 그 곁에서 생을 마치려 했는데, 영주가 새로 맞은 공비가 음악을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고 아들들이 학업에 뜻을 두는 듯해 자리를 옮겼다는 것입니다. 악장이던 사람이 칸토르가 되는 일이 처음에는 내키지 않아 결심을 석 달이나 미루었다고도 적었습니다. 라이프치히에 대해서는 수입이 들은 것만 못하고 물가가 비싸며, 당국이 ‘괴팍하고 음악에 별 뜻이 없어’ 늘 불쾌와 시기 속에 산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가족만으로 성악과 기악 연주회를 꾸릴 수 있다고 자랑하며 ‘지금 아내는 아주 깔끔한 소프라노를 부른다’고 덧붙였습니다.

  라이프치히에서 나온 작품이 〈마태 수난곡〉(BWV 244), 〈요한 수난곡〉(BWV 245),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BWV 248), 그리고 여러 시기의 악장을 모아 만년에 정리한 〈B단조 미사〉(BWV 232)입니다. 가사와 전례 절기는 루터교 전통 위에 놓여 있습니다.

  라이프치히의 칸토르는 바깥의 칭호도 구했습니다. 1733년 그는 미사곡의 앞부분인 키리에와 글로리아를 드레스덴의 새 작센 선제후에게 보내며 궁정의 칭호를 내려 달라고 청원했습니다. 칭호는 3년 뒤에야 왔습니다. 1736년 11월 19일 ‘그의 지극히 공손한 청원에 따라’ 작센 궁정 작곡가 칭호를 내린다는 칙령이 나왔습니다. 이때 보낸 두 곡은 뒷날 〈B단조 미사〉의 첫머리가 됩니다.

  1747년 5월 7일 저녁에 그는 포츠담(Potsdam) 궁정에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을 만났습니다. 며칠 뒤 베를린 신문 보도에 따르면 왕은 그를 곧바로 들이게 하고 직접 건반 앞에 앉아 주제 하나를 쳐 주며 푸가로 풀어 보라고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무엇을 어디까지 즉흥으로 연주했는지는 기록마다 다릅니다. 아들의 부고는 왕이 여섯 성부 푸가를 청하자 그가 자기가 고른 주제로 곧바로 해냈다고 적습니다. 라이프치히로 돌아온 그는 왕의 주제로 쓴 곡들을 동판으로 찍어 왕에게 바쳤는데, 이것이 자비로 출판한 〈음악의 헌정〉입니다.

  만년의 바흐는 건강과 시력이 나빠지는 가운데 〈푸가의 기법〉(Die Kunst der Fuge, BWV 1080)과 〈음악의 헌정〉(BWV 1079)을 남깁니다. 〈푸가의 기법〉은 어떤 악기를 위한 작품인지 악보에 적혀 있지 않고, 마지막 콘트라푼크투스가 중간에서 끊깁니다. 의도된 미완인지, 시력을 잃어가던 작곡가가 끝맺지 못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오늘까지 학자들의 견해가 갈립니다.

  1750년 4월 초 그는 라이프치히에 머물던 영국 안과의사 존 테일러에게 눈 수술을 받았습니다. 부고는 수술을 한 번 더 되풀이해야 했는데도 결과가 매우 나빴고, 그 뒤 거의 늘 병약했다고 적습니다. 죽기 열흘 전쯤 눈이 갑자기 나아지는 듯하더니, 몇 시간 뒤 뇌졸중이 덮쳤고 이어 고열이 왔습니다. 그는 1750년 7월 28일 저녁 8시 15분이 지나 65세로 라이프치히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틀 뒤 작성된 장례 기록은 그의 나이를 67세로 적었습니다. 생년으로 따지면 틀린 숫자입니다. 문서도 이렇게 틀릴 때가 있습니다. 그는 요한 교회 묘지에 묻혔고, 1950년 토마스 교회에 새 무덤이 마련되었습니다.

  두 번의 결혼에서 그는 모두 스무 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첫 결혼에서 일곱, 둘째 결혼에서 열셋입니다. 1754년 부고가 나올 때 살아 있던 자녀는 아홉이었습니다. 아들 가운데 빌헬름 프리데만,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요한 크리스티안이 음악가로 이름을 남겼습니다.

  이렇게 문서를 따라가면 앞에서 본 규칙이 조금 달리 보입니다. 직책이 남는 장르를 대체로 정한 것은 맞지만, 그 직책은 바흐에게 그냥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할레의 부름을 받고도 거절했고, 바이마르를 떠나려다 갇혔으며, 쾨텐을 떠날 때는 석 달을 망설였고, 라이프치히 당국에 불만을 쌓으면서 드레스덴 궁정에 칭호를 청원했습니다. 바흐는 직책을 스스로 협상하고, 다투고, 갇히고, 청원해서 옮겼습니다. 다만 이 장면들로 그의 성격 전체를 한마디로 정할 수는 없습니다. 문서가 보여주는 것은 자리를 옮길 때마다 그가 무엇을 따지고 무엇을 견뎠는지까지입니다.

2. 바흐는 왜 오페라를 한 편도 쓰지 않았을까

  바흐는 평생 오페라를 한 편도 쓰지 않았습니다. 오페라만 수십 편을 남긴 헨델과 나란히 놓으면 이 사실이 더 도드라집니다. 그런데 바흐 자신이 그 이유를 적어 놓은 문서는 없습니다. 확인되는 것은 이유가 아니라 조건입니다.

  첫째, 그가 평생 맡은 자리 가운데 오페라를 요구한 자리가 없습니다. 오르가니스트·궁정 악장·칸토르는 모두 교회 음악이나 궁정 기악을 쓰는 자리였고, 라이프치히 시의회는 앞에서 보았듯 그를 뽑으면서 ‘극장풍이 아닌 곡을 써야 한다’는 조건까지 달았습니다. 둘째, 라이프치히에는 그가 부임했을 때 오페라 극장이 없었습니다. 이 도시의 첫 오페라 극장은 1693년에 문을 열었다가 1720년에 닫혔고, 바흐는 그 3년 뒤인 1723년에 왔습니다. 셋째, 그가 오페라에 쓰이던 어법을 몰랐던 것도 아닙니다. 수난곡의 레치타티보와 다 카포 아리아는 당대 오페라의 문법 그대로이고, 세속 칸타타 가운데는 등장인물이 주고받는 짧은 극처럼 쓰인 것도 있습니다.

  그러니 정확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바흐는 오페라의 언어를 쓰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언어를 극장이 아닌 교회와 커피하우스에서 썼습니다. ‘왜 안 썼는가’에 대한 그의 대답은 남아 있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그가 일한 자리와 그 도시의 사정입니다.

  그의 주된 영토는 여러 성부가 저마다 다른 선율을 연주하면서 함께 맞물리는 대위법(counterpoint)이었고, 그 안에 푸가(Fuga) 형식이 있습니다. 푸가는 하나의 주제가 여러 성부에서 차례로 등장하며 뒤쫓듯 전개되는 형식으로, 라틴어 ‘fuga'(달아남)에서 온 이름입니다. 처음 들을 때 잡을 단서는 간단합니다. 맨 처음 혼자 나오는 짧은 선율을 기억해 두고, 그 선율이 다른 높이에서 다시 들어오는 순간을 세어 보십시오.

‘평균율’은 오늘날의 평균율이 아니다

  바흐의 건반 작품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평균율 클라비어곡집〉(Das Wohltemperirte Clavier, BWV 846~893)입니다. 1722년에 정리된 1권과 1740년대에 정리된 2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 권이 24개 조성(장조 12·단조 12)마다 전주곡과 푸가를 한 쌍씩, 곧 24쌍을 담고 있습니다. 두 권을 합하면 48쌍이며, 흔히 말하는 ’48곡’은 이 48쌍을 가리킵니다.

  한국 자료에서 흔히 ‘바흐가 평균율을 발명했다’고 하지만 이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제목의 독일어 wohltemperirt는 ‘잘 조율된’이라는 뜻이고, 이 낱말은 바흐보다 앞서 베르크마이스터(Andreas Werckmeister)가 17세기 말에 이미 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잘 조율된’ 조율법과 오늘날의 12평균율은 무엇이 다를까요. 오늘날의 12평균율은 한 옥타브를 완전히 균등한 열두 조각으로 나눕니다. 그 결과 모든 조성이 똑같은 소리 성질을 갖습니다. C장조와 F#장조가 높이만 다르고 성격은 같습니다. 이에 비해 당시의 ‘잘 조율된’ 조율법들은 간격을 균등하게 나누지 않았습니다. 모든 조성을 연주할 수는 있되 조마다 화음의 맑기가 조금씩 달랐고, 당대 이론가들은 조마다 다른 성격을 글로 적어 두었습니다. 오늘날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이 곡집이 12평균율이 아니라 이런 부등(不等) 조율법을 전제로 쓰였다는 견해가 우세합니다. 다만 바흐가 정확히 어느 조율법을 썼는지는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조율 방법을 글로 남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년의 〈골드베르크 변주곡〉(Goldberg-Variationen, BWV 988)은 하나의 아리아와 30개의 변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변주가 저마다 다른 선율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 아리아의 베이스 진행을 공유한다는 점이 이 곡의 구조입니다. 세 번째마다 캐논이 놓이고 그 캐논의 음정이 하나씩 넓어지며, 마지막에 첫 아리아가 그대로 돌아옵니다.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은 한 곡에 4그로셴으로 값이 매겨졌다

  쾨텐 시기와 이어지는 〈브란덴부르크 협주곡〉(Brandenburgische Konzerte, BWV 1046~1051)은 여섯 곡으로 이루어진 협주곡 모음입니다. 바흐는 1721년 이 악보를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크리스티안 루트비히에게 헌정했습니다. 그 궁정에서 실제로 연주되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 악보의 뒷이야기가 이 글이 앞에서 붙든 문제와 겹칩니다. 1734년 변경백이 죽자 유산을 다섯 상속인에게 고루 나누기 위해 장서의 값을 매겨야 했습니다. 연구자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 목록은 이 협주곡들을 바흐의 이름 없이 ‘여러 거장의 협주곡’으로 묶어 적었고, 한 곡에 4그로셴을 매겼습니다. 그 뒤의 행방도 문서로 다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기록에 남은 다음 소유자는 바흐의 제자 키른베르거이고, 악보는 이어 아나 아말리아 공주의 장서로 들어갔습니다. 1849년 지크프리트 빌헬름 덴(Siegfried Wilhelm Dehn)이 그 장서에서 이 악보를 찾아냈고, 이듬해인 1850년에 처음 출판되었습니다. 헌정된 지 129년 만입니다.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BWV 1001~1006)와 〈무반주 첼로 모음곡〉(BWV 1007~1012)은 반주 없이 한 대의 악기가 음을 흩어 놓아, 듣는 쪽에서 선율과 화성을 함께 이어 듣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첼로 모음곡의 짜임은 무반주 첼로 모음곡 해설에서 따로 다루었습니다.

칸타타·수난곡·오라토리오·미사는 무엇이 다른가

  이름이 자주 섞여 나오므로 갈라 두겠습니다. 칸타타는 독창이나 합창에 기악이 함께하는 여러 악장의 성악곡이고, 길이는 곡마다 다릅니다. 바흐의 칸타타는 두 갈래입니다. 교회 칸타타는 예배 안에서 그날의 성경 본문과 설교에 맞춰 연주했고, 세속 칸타타는 예배 밖에서 연주했습니다(뒤 작품 목록의 BWV 211·212가 그렇습니다). 수난곡은 복음서의 수난 기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가며, 복음사가가 이야기를 낭독하듯 이끌고 합창이 군중을 맡습니다. 오라토리오는 무대·의상·연기 없이 연주하는 대규모 성악극이고, 바흐의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는 여섯 부로 나뉘어 절기마다 나누어 연주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미사는 가톨릭 전례의 고정 기도문(키리에·글로리아 등)에 붙인 곡입니다.

  〈마태 수난곡〉(St. Matthäus-Passion, BWV 244)은 마태복음 26~27장의 수난 기사를 두 개의 합창단과 두 개의 관현악, 독창자와 복음사가로 풀어낸 작품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한 직후의 알토 아리아 ‘Erbarme dich(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를 비롯한 자세한 짜임은 마태 수난곡 글에서 따로 다룹니다.

  〈B단조 미사〉(Messe in h-Moll, BWV 232)는 바흐가 여러 시기에 쓴 미사 악장을 모아 만년에 통합·정리한 작품으로, 가톨릭 미사 통상문 전체를 포괄합니다. 그 출발점은 앞에서 본 1733년의 청원입니다. 키리에와 글로리아는 루터교 칸토르의 예외적인 작업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궁정 칭호를 구하는 청원서와 함께 드레스덴으로 간 악보였습니다. 다만 만년에 나머지를 채워 미사 통상문 전체로 묶은 이유는 문서로 확인되지 않습니다. 이 작품을 ‘음악적 유언’으로 부르는 표현이 자주 쓰이지만, 그것은 후대의 해석이지 바흐가 남긴 말이 아닙니다.

  교회 칸타타는 교회력에 따른 성경 본문과 설교를 음악으로 풀어낸 것입니다. 교회력 한 해를 채우는 칸타타 묶음을 한 해치라 할 때, 아들이 쓴 부고는 바흐가 다섯 해치를 썼다고 적지만, 라이프치히 바흐 아카이브는 오늘 전하는 것이 세 해치에 조금 못 미친다고 봅니다. 곡 수로는 200곡 가까이입니다.

3. 바흐는 잊힌 것이 아니라 무대에서 내려와 있었다

  ‘서양음악의 정점 바흐’라는 평가는 19세기에 만들어졌습니다. 생전의 바흐는 작곡가로서보다 건반 연주자로 더 알려져 있었습니다. 앞에서 본 1723년 라이프치히 시의회 기록도 그를 ‘건반에 뛰어난’ 쾨텐의 악장으로 소개했습니다. 사후에는 음악의 취향이 바뀐 뒤 공개 연주회의 중심에서 물러났습니다.

  여기서 표현을 정확히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음악이 통째로 끊긴 적은 없습니다. 필사본은 아들들과 제자, 수집가의 손에서 계속 돌았고, 〈평균율〉은 건반 교육의 교재로 이어졌습니다. 다만 자료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뒤에 적듯 자필보 가운데 일부는 유산으로 흩어진 뒤 행방이 끊겼습니다. 정리하면 전해지기를 그친 것은 자료의 일부였고, 물러난 것은 공개 연주회의 자리였습니다. ’79년의 침묵’이라는 표현이 자주 쓰이지만, 79년은 바흐의 사망(1750)과 뒤에 나올 한 공연(1829) 사이의 간격일 뿐이고 그 사이가 비어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가 무대에서 내려와 있던 사정을 아들들의 취향 탓으로만 돌리는 설명도 자주 보입니다. 다만 아들들이 아버지의 어법을 구식으로 여겼다는 것을 직접 적은 편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확인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인쇄된 바흐 작품이 생전에도 소수였고, 사후 유산으로 자필보가 여러 사람에게 나뉘었으며, 일부는 그 뒤 행방이 끊겼습니다.

  19세기에 이른바 ‘바흐 르네상스’가 시작됩니다. 1802년 요한 니콜라우스 포르켈(Johann Nikolaus Forkel)이 첫 본격 전기를 냈는데, 그 책의 제목 자체가 이 시기의 성격을 드러냅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생애, 예술, 작품에 대하여: 참된 음악 예술을 사랑하는 애국적 숭배자들을 위하여』. 바흐를 다시 세우는 일이 처음부터 독일이라는 민족의 자부심과 함께 묶여 있었다는 뜻입니다.

  널리 알려진 전환점은 1829년 3월 11일 베를린 징아카데미에서 20세의 펠릭스 멘델스존이 지휘한 〈마태 수난곡〉 연주입니다. 바흐 사망 79년 만이었고, 원곡을 상당 부분 줄인 판본이었으며, 뒤이어 추가 공연이 이어졌습니다. 다만 이 한 번의 공연이 이후의 모든 확산을 낳았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보다 앞서 1802년의 전기가 있었고, 같은 무렵 출판사들이 바흐 건반곡을 인쇄하기 시작했으며, 뒤에는 협회와 전집이 있었습니다. 1829년은 그 흐름 위에서 가장 눈에 띄는 지점입니다. 그 공연에 이르는 경위는 마태 수난곡 글에 함께 정리해 두었습니다.

  BWV 카탈로그도 이 흐름의 산물입니다. 1850년 라이프치히에서 바흐 협회(Bach-Gesellschaft)가 결성되어 이듬해부터 46권의 첫 전집을 펴냈고, 1950년 음악학자 볼프강 슈미더(Wolfgang Schmieder)가 정리한 BWV(Bach-Werke-Verzeichnis)가 지금까지 표준으로 쓰입니다. 한 가지 짚어 둘 것은 BWV 번호의 개수를 곧 바흐가 남긴 곡의 수로 읽으면 안 된다는 점입니다. 이 목록에는 진위가 논쟁 중인 곡도 번호를 갖고 들어와 있고(앞서 본 BWV 565가 그렇습니다), 판이 새로 나올 때마다 항목이 조정됩니다.

  마지막으로 인용에 관한 것입니다. 베토벤이 말했다는 “그는 Bach(시냇물)가 아니라 Meer(바다)라고 불렸어야 한다”는 문장은 아주 자주 인용되지만 베토벤의 편지나 대화책에서 출처가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글은 그 문장을 베토벤의 말로 싣지 않습니다. 대신 출처가 있는 쪽은 이렇습니다. 1801년 1월 15일 베토벤이 라이프치히의 출판업자 프란츠 안톤 호프마이스터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바흐를 “화성의 원조(Urvater der Harmonie)”라 부르며 바흐 작품 출판 계획을 반겼습니다. 같은 해 4월 22일 편지에서는 자신을 예약 구독자로 올려 달라고 적었습니다.

시기 도시·직책 남은 작품이 몰려 있는 장르
1685~1700 아이제나흐·오르드루프 유년·학습 시기 (남은 작품 거의 없음)
1700~1702 뤼네부르크 (성 미하엘 학교 성가대 장학생) 학습 시기
1703~1708 바이마르 궁정 악사(1703) → 아른슈타트·뮐하우젠 (오르가니스트) 오르간 작품, 초기 칸타타
1708~1717 바이마르 (궁정 오르가니스트, 1714년부터 콘체르트마이스터) 오르간 작품, 교회 칸타타(1714년부터 매달)
1717~1723 쾨텐 (궁정 악장, 칼뱅파 궁정) 기악: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무반주 첼로/바이올린〉, 〈평균율 1권〉
1723~1750 라이프치히 (토마스 칸토르 · 도시 음악 감독) 전례 음악: 교회 칸타타 200곡 가까이, 〈마태 수난곡〉, 〈B단조 미사〉 (예외: 콜레기움 무지쿰의 기악)

4. 꼭 들어봐야 할 바흐 대표 명곡

①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제1권 1번 C장조 (BWV 846)

  프렐류드는 왼손과 오른손이 같은 화음을 흩어 놓는 것만으로 끝까지 갑니다. 선율이라 할 것이 따로 없고, 바뀌는 것은 화음뿐입니다. 이어지는 푸가는 네 성부로, 주제가 네 번 차례로 들어오는 지점을 세어 보기에 좋습니다.

②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제3번 G장조 (BWV 1048)

  바이올린·비올라·첼로를 각각 세 대씩 쓴 편성입니다. 독주와 합주가 나뉘는 보통의 협주곡과 달리 아홉 성부가 번갈아 앞으로 나옵니다. 1악장에서 같은 음형이 악기를 바꿔 가며 되돌아오는 대목을 따라가 보십시오.

③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 G장조 (BWV 1007)

  첫 곡 프렐류드는 영화와 광고에서 가장 자주 들리는 바흐입니다. 한 대의 첼로가 화음을 흩어 연주해 화성을 짐작하게 만드는 방식이 곡 전체를 끌고 갑니다.

  ‘카잘스가 발견하기 전까지 잊혀 있었다’는 설명과 달리, 첫 인쇄본은 1824년 파리에서 나왔고 19세기에 이미 무대에서 연주한 첼리스트들이 있었습니다. 파블로 카잘스가 열세 살 때(1889~1890년 무렵) 바르셀로나에서 만난 것도 그뤼츠마허가 엮은 인쇄 악보였고, 그가 바꾼 것은 발견이 아니라 연주 방식과 위상이었습니다. 그 내력은 무반주 첼로 모음곡 해설에 있습니다.

④ 마태 수난곡 (BWV 244)

  연주 시간이 약 3시간에 이르는 대규모 작품입니다. 합창, 코랄, 아리아, 레치타티보가 번갈아 놓이며, 코랄은 당대 신자들이 실제로 부르던 찬송 선율입니다. 처음 들으신다면 베드로의 부인 직후에 오는 알토 아리아 ‘Erbarme dich’부터 들어보시기를 권합니다.

⑤ 골드베르크 변주곡 (BWV 988)

  아리아와 30개의 변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조용한 밤에 한 변주씩 들어도 좋고,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 들어도 좋습니다. 1955년과 1981년 글렌 굴드의 두 녹음은 같은 악보를 전혀 다른 속도로 들려주어 자주 비교됩니다.

5. 바흐 유명한 곡, 주요 작품 목록

  아래는 입문·감상 우선순위가 높은 장르별 대표곡입니다. BWV 번호는 작곡 연도순이 아니라 장르별로 매겨져 있습니다.

건반 음악

작품 BWV 시기·특징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1권 846~869 1722 정리: 24개 조성마다 전주곡·푸가 한 쌍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2권 870~893 1740년대 라이프치히
2·3성부 인벤션 772~801 1723: 교육용
프랑스 모음곡 812~817 쾨텐: 6곡 모음
영국 모음곡 806~811 바이마르 후기~쾨텐: 6곡 모음
골드베르크 변주곡 988 1741: 아리아와 30개 변주
이탈리아 협주곡 971 1735: 하프시코드 한 대를 위한 협주곡

기악·협주곡

작품 BWV 시기·특징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1046~1051 1721 헌정: 6곡 모음, 편성이 곡마다 다름
관현악 모음곡 1066~1069 3번에 ‘G선상의 아리아’로 알려진 악장 포함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1001~1006 1720 정서본: 파르티타 2번에 ‘샤콘’
무반주 첼로 모음곡 1007~1012 쾨텐: 6곡 모음
바이올린 협주곡 1041, 1042, 1043 2대를 위한 d단조 협주곡 포함

성악·합창

작품 BWV 시기·특징
마태 수난곡 244 1727: 1829년 멘델스존 부활 연주
요한 수난곡 245 1724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248 1734: 6부 연작
B단조 미사 232 여러 시기 악장을 만년에 통합·정리
마니피카트 243 1733 D장조 개정판
교회 칸타타 (대표) 4, 80, 140, 147 등 200곡 가까이 현존
세속 칸타타 (대표) 211, 212 211은 ‘커피 칸타타’: 예배가 아니라 커피하우스 연주용

오르간·말년의 추상 작품

작품 BWV 특징
토카타와 푸가 d단조 565 바흐 작곡 여부에 학계 논쟁 있음
파사칼리아와 푸가 c단조 582 같은 베이스 선율 위의 변주
음악의 헌정 1079 1747: 프리드리히 대왕이 준 주제로
푸가의 기법 1080 악기 지정 없음 · 마지막 콘트라푼크투스가 중단된 채 남음(의도된 미완인지 견해가 갈림)

자주 묻는 질문

Q. 바흐는 왜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나요?

한국에서 오래 쓰여 온 별칭입니다. 다만 영어권·독일어권에서 바흐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별칭은 아니며, 이 표현이 한국에 자리 잡은 경위를 밝힌 자료를 이 글에서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세계 공통의 호칭’이라기보다 한국 청중에게 익숙해진 별칭으로 보아 두는 편이 안전합니다. 참고로 출처가 확인되는 동시대 이후의 호칭은 베토벤이 1801년 편지에서 쓴 ‘화성의 원조(Urvater der Harmonie)’입니다.

Q. 바흐와 헨델은 만난 적이 있나요?

두 사람이 만났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같은 해(1685년) 같은 중부 독일 지역(아이제나흐와 할레)에서 태어났지만, 만남을 적은 당대 문서가 확인되지 않습니다. 기록이 없다는 것이 만나지 않았다는 증명은 아닙니다. 바흐가 헨델을 찾아가려 했으나 어긋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이는 후대 전기에서 온 것이고 당대 문서로 뒷받침되지는 않습니다.

Q. 바흐 음악은 왜 한동안 잊혔다가 다시 발견되었나요?

엄밀히 말하면 잊힌 것이 아니라 공개 연주회의 중심에서 물러나 있었습니다. 필사본과 교재로는 계속 이어졌고, 사라진 것은 무대였습니다. 1802년 포르켈의 전기, 같은 무렵 시작된 건반곡 인쇄, 1829년 멘델스존의 〈마태 수난곡〉 연주, 1850년 결성된 바흐 협회의 전집 출판이 차례로 겹치며 19세기에 다시 무대의 중심으로 돌아왔습니다.

Q. 바흐 작품번호 BWV는 무엇인가요?

BWV는 ‘Bach-Werke-Verzeichnis(바흐 작품 목록)’의 약자로, 1950년 볼프강 슈미더가 정리한 카탈로그입니다. 작곡 연도순이 아니라 장르별로 번호를 매긴 점이 특징입니다. 〈마태 수난곡〉은 BWV 244, 〈평균율 1권 1번〉은 BWV 846,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은 BWV 1007입니다. 주의할 것은 번호의 개수가 곧 바흐가 남긴 곡의 수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진위가 논쟁 중인 곡에도 번호가 붙어 있고, 목록은 판을 거듭하며 조정됩니다.

Q. 바흐 입문에 추천하는 작품은 무엇인가요?

건반 작품으로는 〈평균율 1권 1번 C장조 BWV 846〉의 프렐류드와 〈골드베르크 변주곡 BWV 988〉의 아리아, 기악곡으로는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3번 BWV 1048〉과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 BWV 1007〉의 프렐류드, 성악곡으로는 〈마태 수난곡 BWV 244〉의 ‘Erbarme dich’가 적당합니다. 더 들어가려면 〈B단조 미사 BWV 232〉와 〈푸가의 기법 BWV 1080〉을 권합니다.

Q. 바흐가 오페라를 쓰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바흐 자신이 이유를 적어 놓은 문서는 없습니다. 확인되는 것은 조건입니다. 그가 맡은 자리(오르가니스트·궁정 악장·칸토르) 가운데 오페라를 요구한 자리가 없었고, 라이프치히의 오페라 극장은 그가 부임하기 3년 전인 1720년에 닫혀 있었습니다. 다만 그가 오페라의 어법 자체를 피한 것은 아닙니다. 수난곡의 레치타티보와 다 카포 아리아는 당대 오페라의 문법과 같습니다.

  이 글이 처음에 붙든 것은 하나였습니다. 남아 있는 문서와 뒤에 붙은 이야기를 갈라 놓고 보는 것입니다. 갈라 놓고 보면 이렇습니다. 1706년 아른슈타트 회의록은 그가 4주 휴가를 네 배 늘려 썼다고 적었고, 1723년 라이프치히 시의회 기록은 그가 첫 번째로 불린 사람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며, 1734년 베를린의 유산 목록은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을 바흐의 이름도 없이 한 곡에 4그로셴으로 적었습니다. 달밤의 악보 필사는 반세기 뒤 아들의 부고에서야 처음 나오고, 시냇물과 바다의 비유도, 헌책방의 발견담도 그 문서들 안에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의 음악은 남았습니다. 오늘 처음 바흐를 만나신다면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의 프렐류드와 〈평균율〉 1권 1번부터 들어보시고, 이미 익숙하시다면 〈B단조 미사〉의 ‘Et incarnatus est’와 〈마태 수난곡〉의 ‘Erbarme dich’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코멘트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 문의 및 쪽지함
반갑습니다!
문의사항은 이 쪽지함으로 남겨주세요!
🔒 관리자에게만 안전하게 전송됩니다.
⏰ 현재: —
🚀 최초: —
🕐 방금 접속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