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음악사 5] 바로크 음악의 특징과 역사: 오페라부터 기악곡까지 완벽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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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의 한 저택에 모인 인문학자와 음악가들이 고대 그리스 비극은 처음부터 끝까지 노래로 불렸을 것이라 믿고 새로운 가창 양식을 궁리했습니다. 이 믿음에서 출발한 실험이 훗날 오페라라는 장르를 낳았습니다. 바로크 시대는 오페라, 오라토리오, 칸타타 같은 성악 양식과 협주곡, 소나타, 무곡 모음곡, 푸가 같은 기악 형식이 자리를 잡고, 오늘날 우리가 쓰는 장조와 단조 체계가 굳어진 시기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를 부르는 이름은 처음에 욕이었습니다. 1734년 파리의 한 잡지에 실린 익명의 비평은 라모의 새 오페라를 두고 선율이 이어지지 않고 불협화음이 가득하며 조와 박자를 쉴 새 없이 바꾼다고 꼬집으며, 이런 음악을 바로크하다고 불렀습니다. 그 말이 한 시대의 이름이 된 것은 20세기의 일입니다. 이 글은 그 이름 아래 묶인 150년의 음악을 하나로 꿰는 것이 무엇인지, 곧 맨 아래에서 울리는 저음 한 줄과 그 위에 세운 소리를 따라가 봅니다.

바로크 음악 한눈에 보기

  • 시기: 대략 1600년부터 1750년경(J.S. 바흐 사망)까지, 이탈리아에서 시작
  • 이름: 18세기에는 기괴하다는 뜻의 비난어, 음악사의 시대 이름으로 쓰인 것은 20세기부터
  • 오페라 탄생: 피렌체 카메라타의 모노디 실험에서 시작,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1607)가 극음악의 가능성을 크게 넓힘
  • 기악의 발달: 통주저음·조성체계 확립, 코렐리와 비발디가 협주곡의 본보기를 만듦
  • 성악 3대 장르: 오페라·오라토리오(헨델)·칸타타(바흐)
  • 정점: 같은 해 태어났지만 평생 만나지 못한 바흐와 헨델

바로크 음악의 탄생과 특징

바로크라는 말의 어원은 하나로 못박기 어렵습니다. 흔히 울퉁불퉁한 진주를 뜻하는 포르투갈어 바로코에서 나왔다고 소개되지만, 이는 여러 학설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몽테뉴가 기괴하고 쓸데없이 복잡하다는 뜻으로 썼던 중세 스콜라 논리학 용어 바로코에서 나왔다는 설, 화가 페데리코 바로치의 이름에서 나왔다는 설도 함께 거론됩니다. 다만 처음에는 지나치게 화려하고 기괴하다는 부정적인 뜻으로 쓰였다는 점은 여러 설이 공통으로 짚는 대목입니다.

음악에서 이 말이 처음 확인되는 곳이 앞에서 본 1734년의 비평입니다. 대상은 1733년 10월 파리에서 초연된 라모의 오페라 〈이폴리트와 아리시〉였습니다. 1768년 장자크 루소도 바로크 음악이란 화성이 어지럽고 전조와 불협화음이 넘치며, 노래는 거칠고 부자연스럽고, 음을 잡기 어렵고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운 음악이라고 풀이했습니다. 18세기 사람들에게 바로크는 시대 이름이 아니라 흠잡는 말이었던 셈입니다.

미술에서도 이 부정적 평가는 1855년 역사가 야코프 부르크하르트가 바로크 예술가들이 세부를 경멸하고 남용했다고 혹평하는 데까지 이어지다가, 1888년 하인리히 뵐플린이 저서 〈르네상스와 바로크〉에서 이 시대 특유의 양식을 정색하고 다루면서 정당한 예술사조로 재평가받게 되었습니다. 음악사가 이 말을 시대 이름으로 체계 있게 쓰기 시작한 것은 1919년 음악학자 쿠르트 작스가 뵐플린의 틀을 음악에 옮겨 오면서부터입니다. 그래서 바로크 음악이 언제 시작되는지를 두고는 지금도 학자마다 경계가 조금씩 다릅니다. 이 글은 흔히 쓰는 대로 이탈리아에서 시작해 1600년부터 1750년경,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사망 연도까지를 바로크 시대로 봅니다. 이 시기 음악은 성악과 기악, 독주와 합주, 큰 소리와 작은 소리를 맞세우는 대비를 즐겨 썼습니다.

바로크 시대의 시대적 배경, 음악은 누구의 돈으로 울렸는가

이 시기 음악을 이해하려면 음악가가 어떤 조건에서 일했는지를 함께 봐야 합니다. 바로크 시대에는 각 지역 궁정의 힘이 커졌고, 음악가들은 여러 궁정을 옮겨 다니며 서로의 어법을 흡수했습니다. 그러나 늘 넉넉했던 것은 아닙니다. 바로크가 시작될 무렵 독일은 30년 전쟁(1618~1648)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궁정 악단이 급격히 줄었고, 하인리히 슈츠는 1636년에 펴낸 〈작은 종교 협주곡〉 서문에서 음악이 크게 쇠퇴했고 어떤 곳에서는 아예 버려졌다고 적었습니다. 전쟁 중 드레스덴에서 쓴 슈츠의 작품들이 그 전후보다 작은 편성인 데에는 취향만이 아니라 이런 형편이 함께 놓여 있습니다.

같은 시기 베네치아에서는 반대 방향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1637년 산 카시아노 극장이 오페라 극장으로 문을 열면서, 그때까지 귀족의 사저와 궁정 안에 있던 오페라가 요금을 낸 관객 앞으로 나왔습니다. 흔히 유럽 최초의 상업 오페라 극장으로 불립니다. 다만 이 통설의 핵심 근거인 1636년 트론 가문 문서는 1960년대에 한 연구자가 보았다고 보고한 뒤 소재가 확인되지 않고, 개관작이었던 마넬리의 〈안드로메다〉는 음악이 남아 있지 않으며, 당시 극장의 모습을 그린 그림도 전하지 않습니다. 널리 받아들여지는 이야기이되 결정적 문서는 지금 손에 없는 상태입니다.

연주자를 고용하는 방식도 오늘날과 달랐습니다. 비발디가 오래 일한 베네치아의 피에타 자선원이 그 예를 보여 줍니다. 그는 1703년 9월 연봉 60두카트의 바이올린 교사로 들어갔고, 이듬해 8월 비올라 알링글레세까지 가르치게 되면서 급여가 100두카트로 올랐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는 종신직이 아니라 이사회의 정기 표결에 매여 있었습니다. 1709년에는 7대 6의 표결로 자리를 잃었다가 1711년에 다시 고용되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1723년부터 1729년 사이 피에타는 그에게 협주곡을 적어도 140곡 지어 달라며 값을 치렀고, 1740년 빈으로 떠나기 전 그는 상당한 양의 악보를 피에타에 팔았습니다.

악보가 팔리는 길도 이때 열렸습니다. 비발디는 베네치아 인쇄를 접고 암스테르담의 출판사에 작품집을 넘겼습니다. 에스티엔 로제에서 그의 딸 잔 로제로, 다시 사위 르 센으로 이어진 한 집안입니다. 〈조화의 영감〉(Op.3)이 1711년 로제에서, 사계가 실린 〈화성과 창의의 시도〉(Op.8)가 1725년경 르 센에서 나왔습니다. 작곡가가 궁정 하나에 매이지 않고 유럽 전역의 구매자와 만나는 경로가 이렇게 생겼습니다. 덧붙이면 비발디 이름으로 유통되는 Op.13 〈일 파스토르 피도〉는 그의 작품이 아니라 니콜라 셰드빌이 그의 이름을 빌려 낸 것입니다.

통주저음과 조성 체계의 확립

바로크 음악은 인간의 감정을 다소 과장되더라도 생생하게 표현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대담한 화성과 불협화음이 자유롭게 쓰였습니다. 음악 형식과 양식 면에서도 확고한 흐름이 형성되었는데, 대표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 대조와 긴장감: 성악 대 기악, 독주 대 합주, 소규모 대 대규모 합주처럼 서로 대조되는 음향을 교대로 배치해 극적인 긴장감을 추구했습니다. 이탈리아어로 함께 겨룬다는 뜻의 동사에서 나온 콘체르타토 양식이 이것입니다.
  • 바소 콘티누오(통주저음): 베이스 파트를 첼로, 비올라 다 감바, 바순 같은 저음 악기와 쳄발로, 오르간 같은 화음 악기가 함께 맡아 음악의 뼈대를 받쳤습니다. 악보에는 베이스 음표 아래에 숫자만 적어 넣는 숫자 저음 기보법을 썼고, 건반 연주자는 이를 보고 화음을 그 자리에서 채워 넣었습니다. 이 방식이 널리 퍼진 계기로는 1602년 베네치아에서 나온 로도비코 비아다나의 〈교회 협주곡 100곡〉이 꼽힙니다. 숫자 저음을 처음 쓴 사람은 아니지만, 이 방식을 쓴 곡집을 처음으로 널리 퍼뜨렸습니다. 1607년에는 아고스티노 아가차리가 숫자 저음을 읽고 연주하는 법을 설명한 글을 냈습니다.
  • 조성 체계 확립: 기존의 선법에서 장조와 단조를 쓰는 조성 체계로 무게가 옮겨 갔습니다. 그 전 단계로, 1547년 스위스의 이론가 글라레안은 교회선법이 여덟 개가 아니라 열두 개라고 주장하며 오늘날의 장음계에 해당하는 이오니아 선법과 단음계에 해당하는 에올리아 선법을 더했습니다. 바로크 시대를 거치며 이 둘이 다른 선법들을 밀어내고 장조와 단조로 굳어집니다. 1722년 장필리프 라모는 〈화성론〉을 저술해 근음저음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며 화성학의 기초를 세웠고, 이 책 덕분에 당시 음악의 뉴턴이라는 평판을 얻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짚어 둘 만합니다. 이 책이 자연 배음에서 화성을 끌어냈다고 흔히 소개되는데, 1722년의 〈화성론〉은 아직 배음에 기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 책은 피타고라스 이래의 현 분할과 수 비율 위에 서 있었고, 울리는 물체(corps sonore)를 근거로 삼은 것은 4년 뒤인 1726년 〈새로운 음악이론 체계〉에서였습니다. 1734년 바로크하다는 비난을 들은 그 라모가, 화성의 규칙을 세운 이론가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통주저음이 들리는 방식을 알면 이 시대 음악이 한결 쉬워집니다. 바이올린이나 성악가가 가락을 노래하는 동안, 맨 아래에서는 첼로가 저음 한 줄을 쉬지 않고 이어 가고 쳄발로가 그 위에서 화음을 짚습니다. 바로크 음악을 들을 때 가락에서 잠시 귀를 떼어 맨 아래의 이 저음을 따라가 보면, 곡이 어디서 긴장하고 어디서 쉬는지가 저음의 움직임에서 먼저 보입니다. 무반주 독주곡이 아니라면 바로크 음악 대부분에서 이 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크 시대의 음악을 즐기는 연주자들
바로크 시대에 함께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을 그린 그림이다.

바로크 기악 음악의 특징과 협주곡의 완성

17세기에 들어서며 악기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가사 없는 음악으로도 감정을 전할 수 있다는 생각이 퍼졌고, 음악가들은 악기 고유의 음색과 성능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티, 과르네리, 스트라디바리 같은 크레모나의 장인들이 바이올린을 만들던 이 시기에, 현악기는 기악음악의 중심 자리를 차지해 갔습니다.

건반악기로는 쳄발로, 클라비코드, 오르간이 널리 쓰였습니다. 목관악기인 오보에, 바순, 플루트가 점차 개량되어 쓰였고, 트럼펫, 호른, 트롬본 같은 금관악기도 대규모 합주에 힘을 보탰습니다. 바로크 오케스트라는 현악기를 중심으로 통주저음의 쳄발로나 오르간이 더해지고, 곡에 따라 목관악기와 트럼펫이 함께하는 편성이었습니다.

기악 양식으로는 협주곡, 소나타, 무곡 모음곡이 유행했고 이를 전개하는 핵심 기법으로 푸가가 널리 쓰였습니다. 푸가는 첫 제시부에서 한 성부가 주제를 내놓으면 다른 성부가 보통 딸림음 관계의 응답으로 이를 받으며 시작합니다. 성부가 하나씩 늘어나는 동안 같은 가락이 높이를 바꿔 겹쳐 들어오고, 그 뒤로는 주제의 재등장과 주제 일부를 발전시키는 에피소드가 여러 방식으로 이어집니다. 무곡 모음곡은 같은 조성의 짧고 대조적인 춤곡들을 엮어 연주했습니다. 알망드는 독일 춤이라는 뜻의 이름이고, 지그는 영국과 아일랜드의 지그 춤에서 이름을 가져왔듯, 각 춤곡의 이름에는 출신지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반복되는 베이스나 화성 진행 위에서 변주를 이어 가는 샤콘느와 파사칼리아, 일정한 음형을 음높이만 바꿔 반복하는 동형진행 같은 기법도 널리 쓰였습니다. 샤콘느와 파사칼리아의 구별은 시대와 작곡가에 따라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협주곡이라는 장르가 오늘날 우리가 아는 모습으로 다듬어진 데는 두 사람의 공이 특히 큽니다. 아르칸젤로 코렐리는 바이올린 둘과 첼로로 이루어진 작은 독주군(콘체르티노)과 현악 합주를 맞세우는 콘체르토 그로소를 직접 발명한 것은 아니지만, 이를 정교하게 다듬어 후대가 따를 본보기로 만들었습니다. 1680년대에 쓴 것으로 보이는 그의 콘체르토 그로소 12곡(Op.6)은 그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714년에야 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되었고, 헨델은 1739년 같은 작품번호 Op.6을 단 12곡으로 그에게 경의를 표했습니다. 안토니오 비발디는 독주 협주곡 쪽에서 같은 일을 했습니다. 합주의 주제가 되풀이해 돌아오고 그 사이를 독주가 채우는 리토르넬로 형식은 앞 세대 토렐리의 협주곡에 이미 있었지만, 비발디가 이 틀을 수백 곡에 걸쳐 다듬으면서 빠른 악장 사이에 느린 악장을 두는 3악장 구성과 함께 18세기 작곡가들이 따르는 관례가 되었습니다. 그는 사계가 포함된 〈화성과 창의의 시도〉를 비롯해 500곡이 넘는 협주곡을 남겼고, 그 가운데 바이올린 협주곡만 230곡 안팎입니다.

개신교 회중 찬송가인 코랄 선율을 바탕으로 한 코랄 전주곡은 바로크 오르간 음악의 중요한 갈래로 자리 잡았습니다.

오페라의 탄생, 피렌체 카메라타에서 몬테베르디까지

선율 하나에 단순한 화음 반주가 따르는 모노디라는 새로운 가창 스타일이 등장하면서, 장소와 목적에 따라 세 가지 성악 장르가 비슷한 시기에 발전했습니다. 이 모노디의 바탕을 다진 것이 1570년대부터 피렌체에서 조반니 데 바르디 백작의 저택에 모인 인문학자, 음악가, 시인들의 모임, 이른바 피렌체 카메라타입니다. 기록으로 확인되는 첫 모임은 1573년 1월이고, 1577년부터 1582년 사이가 가장 활발했습니다. 갈릴레오의 아버지인 빈첸초 갈릴레이, 줄리오 카치니 등이 이 모임에 드나들었고, 고대 그리스 연구자 지롤라모 메이의 생각이 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들은 고대 그리스 비극이 처음부터 끝까지 노래로 불렸을 것이라 믿었고, 당대 복잡한 다성음악이 가사의 정서를 흐리게 만든다고 비판하며 선율과 단순한 반주만으로 가사를 또렷이 전달하는 양식을 고안했습니다. 갈릴레이는 1581년 무렵 〈옛 음악과 새 음악의 대화〉를 펴내 이 생각을 글로 남겼습니다.

다만 카메라타가 오페라를 직접 작곡한 것은 아닙니다. 1590년대에 이 양식을 극 전체로 넓힌 것은 작곡가 야코포 페리와 시인 오타비오 리누치니였습니다. 리누치니는 젊은 시절 카메라타에 드나들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피렌체에는 바르디의 모임과 경쟁하던 귀족 야코포 코르시의 모임도 있었으므로 초기 오페라를 카메라타 한 곳의 작품으로 묶기는 어렵습니다. 이탈리아어로 작품이라는 뜻을 지닌 오페라는 신화와 역사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의상, 연기, 무대장치, 무용을 함께 동원하는 종합 무대 예술입니다. 1598년 무렵 상연된 페리의 〈다프네〉가 최초의 오페라로 알려져 있으나 음악이 사라졌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오페라는 1600년 10월 피렌체 피티 궁에서 프랑스 왕 앙리 4세와 마리아 데 메디치의 혼인을 축하하며 초연된 페리의 〈에우리디체〉입니다. 카치니도 같은 대본으로 자기 〈에우리디체〉를 지었고, 페리보다 먼저 악보를 출판했습니다.

이 초기 오페라들이 걸음마 단계였다면, 오페라를 극음악으로 한 단계 끌어올린 작품은 1607년 만토바의 카니발 시즌에 초연된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입니다. 〈오르페오〉는 최초의 오페라는 아니지만, 오늘날까지 널리 무대에 오르는 오페라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꼽힙니다. 단순한 모노디에 머물던 이전 작품과 달리 다양한 악기와 합창, 아리아와 레치타티보를 극의 흐름에 맞춰 쓴 점에서, 〈오르페오〉는 오페라사의 전환점으로 평가받습니다. 몬테베르디는 이보다 앞서 1600년 이론가 아르투시에게 불협화음을 함부로 쓴다는 공격을 받았고, 1605년 마드리갈집 서문에서 가사의 표현을 위해 옛 규칙을 넘어서는 두 번째 작법을 내세웠습니다. 〈오르페오〉는 그 생각을 무대 위로 옮긴 작품이기도 합니다.

17세기와 18세기를 거치며 오페라는 지역마다 다르게 자랐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아리아 중심의 오페라가 진지한 오페라 세리아와 희극적인 오페라 부파로 나뉘었고, 궁정 발레의 전통을 이은 프랑스 오페라에는 무용 장면이 많이 들어갔습니다. 영국에서는 독일 출신의 헨델이 쓴 이탈리아어 오페라가 한동안 크게 유행했습니다.

오라토리오와 칸타타, 성악 장르의 확립

오라토리오라는 이름은 16세기 후반 로마에서 사제 필리포 네리가 이끈 모임이 쓰던 기도실(오라토리오)에서 왔습니다. 이 모임에서는 설교와 기도 사이에 신자들이 영적인 노래를 함께 불렀고, 이 노래가 점차 성경 이야기를 대화체로 들려주는 음악으로 자랐습니다. 오라토리오는 종교적인 줄거리를 독창, 중창, 합창, 관현악으로 연주하는 대규모 서사적 악곡입니다. 음악 구성은 오페라와 비슷하지만 연기, 의상, 무대장치가 없으며 합창의 비중이 큰 경우가 많습니다. 초기 오라토리오에는 해설자가 등장해 줄거리를 이어 주기도 했습니다.

초기에는 라틴어 오라토리오와 이탈리아어 오라토리오가 함께 쓰였습니다. 라틴어 오라토리오에서는 카리시미의 〈예프테〉가 이 장르의 첫 본보기로 꼽히고, 이탈리아어 오라토리오로는 스카를라티의 〈최초의 살인〉이 있습니다. 텔레만 등을 거쳐, 조지 프레드릭 헨델에 이르러 영어 오라토리오가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헨델의 〈메시아〉와 〈이집트의 이스라엘인〉은 지금도 이 장르에서 자주 연주되는 작품입니다.

이탈리아어 노래하다에서 유래한 칸타타는 독창, 중창, 합창과 기악 반주로 이루어진 다악장 형식의 성악곡입니다. 귀족의 사적인 모임에서 부르던 세속 노래에서 출발했고, 오라토리오에 비해 규모가 작아 해설자가 없으며 독창(아리아)이 중시됩니다. 내용에 따라 귀족의 결혼이나 생일을 축하하는 세속 칸타타와 예배용으로 쓰인 교회 칸타타로 나뉩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가 수백 곡의 실내 칸타타를 남겼고, 독일에서는 코랄 선율을 바탕으로 한 교회 칸타타가 발전했습니다. 독일 칸타타는 북스테후데, 텔레만을 거쳐, 200곡 남짓 전하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교회 칸타타에서 예배 음악으로 자리를 굳혔습니다.

후기 바로크의 정점, 바흐와 헨델

바로크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로는 몬테베르디, 카리시미, A. 스카를라티, 쿠프랭, 라모, 퍼셀, 북스테후데, 파헬벨, 텔레만, 비발디가 있지만, 후기 바로크를 이야기할 때 가장 자주 함께 불리는 두 이름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조지 프레드릭 헨델입니다. 둘은 1685년 같은 해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평생 한 번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1719년 헨델이 런던 오페라단의 가수를 구하러 독일에 왔을 때, 쾨텐에 있던 바흐가 헨델의 고향 할레까지 찾아갔지만 헨델은 이미 드레스덴으로 떠난 뒤였다고 전합니다. 1729년에는 바흐가 맏아들 빌헬름 프리데만을 통해 헨델을 라이프치히로 초대했으나, 헨델은 이 초대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이 걸어간 길은 서로 달랐습니다. 바흐는 교회음악과,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이나 〈푸가의 기법〉처럼 하나의 원리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대위법 곡집을 남겼습니다.

두 곡집이 무엇을 시험한 것인지는 목차만 봐도 드러납니다. 1722년 쾨텐에서 정리한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제1권은 전주곡과 푸가 24쌍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다장조와 다단조에서 시작해 반음씩 올라가며 열두 개의 장조와 단조를 한 번씩 모두 돕니다. 20년 뒤인 1742년 같은 짜임으로 제2권을 엮었습니다. 어느 조로 옮겨도 연주가 된다는 것을 곡집의 배열 자체로 보인 것입니다. 다만 제목은 따로 짚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바흐가 붙인 원제는 잘 조율된 건반악기라는 뜻이고, 한 옥타브를 똑같은 열두 반음으로 나누는 평균율을 가리킨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20세기 내내 평균율로 여겨졌지만, 바흐 자신은 어떻게 조율했는지 적어 두지 않았습니다. 아들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는 1753년 자기 책에서 모든 조를 쓸 수 있는 조율을 설명했지만, 이는 아버지의 조율법을 전한 기록이 아니고 그 설명이 정확히 어떤 조율을 뜻하는지도 논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제목은 모든 조를 쓸 수 있게 조율하되 조마다 미세한 색깔 차이가 남는 불균등한 조율을 뜻했을 가능성이 함께 논의됩니다. 평균율이 건반악기의 표준 조율로 자리 잡은 것은 바흐가 세상을 떠난 뒤입니다. 한국어와 일본어의 평균율이라는 제목은 이런 사정을 담지 못한 번역 관행입니다.

〈푸가의 기법〉은 반대 방향입니다. 주제 하나와 라단조 하나에서만 곡을 뽑아내는데, 처음 네 곡이 같은 주제를 쓰면서도 셋째 곡부터는 그 주제가 위아래로 뒤집힌 채 들어옵니다.

헨델의 길은 이와 반대로 극장에 있었습니다. 헨델은 오페라와 오라토리오 같은 극음악으로 런던 청중을 사로잡았고, 1730년대 이탈리아 오페라의 인기가 식자 영어 대본의 오라토리오로 방향을 틀어 영국식 오라토리오라는 장르를 세웠습니다.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성취가 나란히 놓이면서, 바로크 음악은 하나의 시대를 마무리하고 곧 이어질 고전주의로 자리를 넘겨주게 됩니다.

이 앞의 이야기는 [서양음악사 4] 르네상스 음악에서, 다음 시대는 서양음악사 6 고전주의 시대에서 이어집니다. 인물별로는 비발디의 생애와 작품, 바흐의 생애와 작품, 헨델 생애와 작품을, 악보에 없는 음을 연주자가 어떻게 채웠는지는 바로크 장식음을 보시면 됩니다. 다음에 바로크 협주곡을 듣는다면 독주 바이올린 대신 맨 아래 첼로와 쳄발로에 한 번 귀를 맞춰 보십시오. 150년 동안 이 시대 음악을 받쳐 온 소리가 거기서 들립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바로크라는 말은 정말 일그러진 진주를 뜻하는 포르투갈어에서 온 건가요?

그건 여러 학설 가운데 하나일 뿐, 확정된 정설은 아닙니다. 몽테뉴가 억지스럽고 쓸데없이 복잡하다는 뜻으로 썼던 스콜라 논리학 용어 바로코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고, 화가 페데리코 바로치의 이름에서 비롯됐다는 설도 있습니다. 음악에서는 1734년 라모의 오페라를 비꼰 비평에서 처음 확인되고, 음악사의 시대 이름으로 체계 있게 쓰인 것은 1919년 쿠르트 작스부터입니다.

Q. 피렌체 카메라타가 오페라를 만든 건가요?

정확히는 오페라의 씨앗을 뿌린 쪽에 가깝습니다. 1570년대부터 조반니 데 바르디 백작의 저택에 모이던 이 모임은 고대 그리스 비극이 노래로 불렸다고 믿고, 복잡한 다성음악이 가사를 흐린다고 여겨 단순한 반주 위에 선율 하나를 얹는 양식을 키웠습니다. 이 양식을 실제 오페라로 만든 것은 1590년대의 작곡가 야코포 페리와 시인 오타비오 리누치니였습니다.

Q.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가 최초의 오페라인가요?

아닙니다. 최초의 오페라로 꼽히는 것은 1598년 무렵 페리의 〈다프네〉지만, 음악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오페라는 1600년 초연된 페리의 〈에우리디체〉이고, 카치니도 같은 대본으로 곡을 써 먼저 출판했습니다. 〈오르페오〉(1607)의 의미는 최초라는 데 있지 않고, 아직 실험 단계에 머물던 이 장르를 극음악으로 크게 넓혔고 지금까지도 무대에 꾸준히 오르는 오페라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이라는 데 있습니다.

Q. 코렐리와 비발디는 협주곡이라는 형식을 처음 만든 사람들인가요?

발명자라기보다는 다듬은 사람들에 가깝습니다. 코렐리는 작은 독주군과 합주를 맞세우는 콘체르토 그로소와 트리오 소나타를 정교하게 다듬어 후대가 따를 본보기로 만들었고, 비발디는 독주 협주곡을 하나의 관용어법으로 정리했습니다. 리토르넬로 짜임새도 비발디가 처음 만든 것은 아니고, 토렐리 같은 앞 세대가 쓰던 틀을 비발디가 수많은 협주곡으로 다듬어 후대의 관례로 굳혔다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Q. 바흐와 헨델은 실제로 만난 적이 있나요?

없습니다. 1685년 같은 해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두 사람의 인생은 끝내 겹치지 않았습니다. 1719년 바흐가 쾨텐에서 할레까지 찾아간 적이 있지만 헨델은 이미 떠난 뒤였고, 1729년 바흐가 맏아들을 통해 보낸 초대에도 헨델은 오지 않았습니다.

Q. 바흐의 평균율은 오늘날의 평균율로 조율하라는 뜻인가요?

그렇게 단정할 수 없습니다. 원제는 잘 조율된 건반악기라는 뜻이고, 모든 조를 연주할 수 있게 조율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것이 반음 열두 개를 똑같이 나누는 평균율이었는지, 조마다 미세한 차이가 남는 다른 조율이었는지는 바흐가 직접 밝히지 않았습니다. 평균율이 건반악기의 표준이 된 것은 바흐가 세상을 떠난 뒤입니다.

Q. 오라토리오와 오페라는 어떻게 다른가요?

음악을 짜는 방식 자체는 비슷하지만, 오라토리오에는 무대장치나 의상, 연기가 없고 합창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름은 16세기 후반 로마의 필리포 네리가 이끈 기도 모임의 기도실에서 왔고, 그 출발 때문에 종교적인 줄거리를 다루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후 헨델의 영어 오라토리오에서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 크게 자랐습니다.

Q. 통주저음은 정확히 어떤 원리로 연주됐나요?

악보에는 저음 선율 음표만 적혀 있고, 그 아래 숫자로 화음을 암시해 두는 방식이었습니다. 첼로 같은 저음 악기는 적힌 저음을 그대로 연주하고, 쳄발로나 오르간 연주자는 숫자를 보고 어떤 화음을 채워 넣을지 그 자리에서 판단했습니다. 정해진 답이 없다 보니 연주자의 즉흥 감각과 기량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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