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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파 vs 브람스파, 어느 쪽이 승리했을까

  클래식 도서를 읽다보면 유럽 음악계가 브람스파와 바그너파로 양분되어 있었다는 내용을 언급된다. 이 글은 이런 갈등 가운데 어느 쪽이 승자인지를 살펴보고자 한 글이다.


  브람스와 바그너는 19세기 후반 베토벤을 계승했던 독일 음악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작곡가들이다. 바그너는 독일 오페라의 전통을 계승·발전시켜 음악극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독일 오페라로 혁신을 일으켰다면, 브람스는 독일 기악곡의 전통적인 형식은 유지하면서도 낭만적인 표현을 가미한 기악곡을 통해 독일 낭만주의 음악의 최고봉에 도달했다.


 브람스와 바그너는 같은 시대에 살면서 음악적인 성향이 다르다고 처음부터 적대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공연을 보러 가기도 했을 분만 아니라 상대방의 음악성을 칭찬하기도 했다.



브람스와 바그너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사진입니다.
브람스와 바그너의 모습


  하지만 어느 날 바그너가 브람스의 공연을 보고나서 "박힌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흑평을 한 후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브람스는 바그너의 여성 편력을 문제 삼아 유명 평론가인 한슬릭에게 그 이야기를 흘린다. 바그너의 복잡한 연애사를 통해 비판적인 분위기를 형상하려고 했던 것이다. 바그너 또한 브람스가 결혼도 못하고 독신인 것은 성기능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언급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멀어지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감정싸움은 서로를 싫어할 뿐 아니라 파벌를 형성하여 반대편를 비난하고 괴롭히는 것으로 커지게 된다. 그리하여 유럽 음악계가 '바그너파 vs 브람스파'로 나뒤어 다투는 대립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브람스파와 바그너파의 논쟁과 대립에서과 1876년은 상징성이 크다. 이 해에 브람스는 무려 20년간의 착상과 교정을 거쳐 교향곡 1번을 마침내 완성했다.또한 바그너도 총 상연시간만 무려 16시간에 이르는 4부작 음악극 [니벨룽의 반지]를 자신이 직접 설계한 바이로이트의 축제 극장에서 초연했다.


  그렇다면 두 파벌에서 어느 쪽이 승리한 것일까? 나는 이런 결말이 궁금했으나 책에서는 이런 내용을 다루지 않는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한쪽 편을 옹호하고 다른 한쪽 편을 배척하여 비난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음악이 흘러가는 양상으로볼 때 승리자는 바그너파 같다. 전통적인 형식을 벗어나 자유롭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은 음악뿐만 다른 분야에서도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바그너가 살아 있을 때에는 바그너파가 더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바그너 사후에는 브람스파가 더 득세하여 상황이 뒤바뀌게 된다. 그래서 구스타프 말러는 브람스를 따르는 척 했을 뿐이지 사실은 좋아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정도로 브람스파의 영향력이 컸다는 의미다.


  지금도 브람스와 바그너가 세계적인 작곡가로 인정받는 것을 볼 때, 브람스와 바그너는 서로 다른 음악 분야에서 큰 업적을 세웠기 때문에 사실 승자를 가리기 어려운 것 같다. 음악적 성향이 달랐을 뿐 두 사람 모두 아름다운 음악적 유산을 남겼기 때문이다.


  사족으로 바그너는 음악계의 금수저 멘델스존과도 사이가 나빴고, 이탈리아의 동갑내기 작곡가 베르디와도 경쟁하였다. 그래서 바그너는 평론가들로부터 "음악적으로 대단한 업적을 남겼으나, 성격은 쪼잔하고 소심하다."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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