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도서를 읽다 보면 유럽 음악계가 브람스파와 바그너파로 양분되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이 글은 그 갈등에서 어느 쪽이 승자인지를 제 나름대로 살펴보려고 쓴 글입니다. 다만 책에서 읽은 자극적인 일화 몇 가지를 이번에 직접 다시 찾아보니, 사실과 다르거나 근거가 불분명한 부분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글은 원래 알고 있던 이야기를 그대로 옮기지 않고, 확인한 만큼만 정리했습니다.
브람스와 바그너는 19세기 후반 베토벤을 계승한 독일 음악의 양대 산맥입니다. 바그너는 독일 오페라의 전통을 이어받아 음악극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혁신을 일으켰고, 브람스는 독일 기악곡의 전통적인 형식을 지키면서도 낭만적인 표현을 더해 독일 낭만주의 기악 음악의 정점에 도달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두 사람이 음악적 성향이 다르다고 해서 처음부터 서로를 미워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서로의 공연을 보러 가기도 했고, 상대의 음악성을 인정하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 브람스와 바그너의 모습 |
애초에는 앙숙이 아니었다
제가 원래 읽었던 이야기는 이랬습니다. 바그너가 브람스의 공연을 보고 나서 낡은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혹평했고, 이에 앙심을 품은 브람스가 평론가 한슬릭에게 바그너의 여성 편력을 흘렸으며, 바그너는 다시 브람스가 결혼도 못 한 것이 성기능 문제 때문이라고 되받아치면서 관계가 완전히 틀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찾아보니, 이 이야기는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두 사람이 갈라선 진짜 계기
실제 기록에 가장 가까운 갈등의 시작은 따로 있었습니다. 1860년, 브람스는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과 함께 리스트와 바그너로 대표되는 신독일악파의 영향력을 비판하는 선언문을 작성했습니다. 그런데 이 선언문이 완성되기도 전에 내용이 언론에 새어 나갔고, 서명자가 몇 명뿐인 어설픈 초안 상태로 공개되어 오히려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브람스는 공개적인 발언을 자제했지만, 평론가 에두아르트 한슬릭이 보수적 진영을 대표해 바그너 쪽 평론가들과 지면 싸움을 이어 갔습니다. 즉 애초에 갈등에 불을 붙인 것은 두 작곡가의 사적인 다툼이 아니라, 신독일악파를 둘러싼 음악적 노선 차이와 그것을 부풀린 평론가들의 지면 전쟁이었다는 것이 실제에 더 가까운 그림입니다.
이 갈등이 계속되면서 두 사람에 대한 지지자들이 각각 파벌을 이루어 반대편을 비난하는 분위기로 커졌고, 그렇게 유럽 음악계가 바그너파와 브람스파로 나뉘어 다투는 구도가 만들어졌습니다.
소문으로 부풀려진 이야기들
제가 원래 알고 있던 세 가지 자극적인 일화를 하나씩 다시 확인해 보았습니다.
첫째, 바그너가 브람스의 공연을 보고 낡은 형식에 갇혔다고 혹평했다는 이야기는, 실제로는 좀 더 구체적이고 흥미로운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1876년 11월 4일 카를스루에에서 브람스 교향곡 1번이 초연된 뒤, 바그너는 이 곡을 두고 오래된 형식으로도 그것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오면 아직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 준다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겉으로는 칭찬처럼 들리지만, 자신과 리스트가 이미 낡았다고 선언한 형식에 브람스가 여전히 매달려 있다는 뜻을 담은 빈정거림에 가까웠습니다. 원래 알려진 것처럼 특정 공연을 본 직후의 노골적인 험담이라기보다는, 브람스의 대표작을 향한 바그너 특유의 비꼬는 논평이었던 셈입니다.
둘째, 브람스가 바그너의 여성 편력을 한슬릭에게 흘렸다는 이야기는 이번 조사에서 이를 뒷받침할 1차 자료를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방향이 반대인 비슷한 소문은 확인됩니다. 바그너 쪽에서 브람스가 드보르자크에게 선물 받은 사냥용 활로 길고양이를 잡아 죽이고 다닌다는 소문을 퍼뜨렸다는 이야기가 여러 자료에 등장합니다. 즉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몰라도, 양쪽 진영이 서로에 대한 뒷소문을 주고받았다는 정황 자체는 신빙성이 있습니다.
셋째, 바그너가 브람스의 독신을 성기능 문제로 조롱했다는 이야기는 이번 검증에서 가장 근거가 약했습니다. 찾아보니 이와 비슷한 표현은 철학자 니체가 브람스의 음악을 두고 무능력의 우울, 결핍에서 창작한다고 평한 대목에서 나온 것에 가까웠습니다. 이는 브람스 개인의 성적 능력을 겨눈 말이 아니라, 그의 음악이 풍요가 아니라 결핍에서 나온다는 예술적 비유였습니다. 바그너 본인이 이런 말을 했다는 근거는 찾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니체의 비유가 세월이 흐르며 바그너의 발언으로 잘못 옮겨진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근거가 확인되지 않는 만큼 이번 글에서는 이 주장을 신뢰할 수 없는 이야기로 판단해 지웁니다.
1876년, 상징적으로 겹친 해
브람스파와 바그너파의 대립에서 1876년은 상징성이 큽니다. 브람스는 무려 21년, 1855년부터 구상하고 다듬어 온 교향곡 1번을 이 해 11월 4일 카를스루에에서 초연했습니다. 같은 해 8월 13일부터 17일까지, 바그너는 자신이 직접 설계한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서 4부작 음악극 니벨룽의 반지 전곡을 처음으로 무대에 올렸습니다. 두 사람이 평생을 바친 필생의 역작이 같은 해에, 불과 몇 달 간격을 두고 세상에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승자는 누구인가
그렇다면 두 파벌 중 어느 쪽이 승리한 것일까요. 저는 이 결말이 궁금했는데, 정작 책에서는 이 내용을 다루지 않았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굳이 한쪽 편을 들어 다른 한쪽을 깎아내릴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음악이 흘러간 양상으로 보면 승자는 바그너파 쪽에 가까워 보입니다. 전통적인 형식을 벗어나 자유롭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흐름은 음악뿐 아니라 다른 예술 분야에서도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바그너가 살아 있을 때는 바그너파가 더 우세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바그너 사후에는 상황이 뒤바뀌어 브람스파가 더 힘을 얻었습니다. 다만 구스타프 말러가 브람스를 좋아하는 척했을 뿐 사실은 싫어했다는 이야기는, 이번에 찾아보니 이를 뒷받침할 만한 근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말러는 브람스의 음악을 즐기기보다는 그 완성도를 존경하는 쪽에 가까웠다는 것이 좀 더 확인 가능한 설명이었습니다. 위선이라기보다는, 감정적으로 끌리지는 않지만 실력만은 인정하는 복잡한 태도였던 셈입니다. 그럼에도 이 시기 브람스파의 영향력이 상당했다는 점은 여러 기록에서 확인됩니다.
지금도 브람스와 바그너 둘 다 세계적인 작곡가로 인정받는 것을 보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음악 분야에서 각자 큰 업적을 남겼기 때문에 사실 승자를 가리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음악적 성향이 달랐을 뿐, 두 사람 모두 지금까지 남는 유산을 남겼습니다.
바그너와 다른 라이벌들
사족을 붙이자면, 바그너는 브람스 말고도 다른 작곡가들과 불편한 관계였습니다. 멘델스존과의 경우는 개인적인 감정싸움이라기보다 훨씬 무거운 사안입니다. 바그너는 1850년 유대인 음악이라는 논고를 익명으로 발표해 이미 세상을 떠난 멘델스존과 마이어베어를 겨냥해 그들의 음악이 기술적으로는 뛰어나지만 진정한 예술적 열정이 없다고 주장했고, 1869년에는 자신의 실명으로 이 글을 확장해 다시 펴냈습니다. 이 논고는 오늘날 독일 반유대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료로 취급됩니다. 단순히 사이가 나빴다는 말로는 담기지 않는, 훨씬 심각한 문제였던 셈입니다.
이탈리아의 동갑내기 작곡가 베르디와의 관계는 다른 방향으로 흥미롭습니다. 두 사람은 평생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고, 편지를 주고받은 기록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바그너는 베르디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조차 못 견뎌 했다고 전해지는 반면, 베르디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보고 이보다 더 놀랍고 경외로운 무대는 없었다고 평하는 등 오히려 바그너의 음악에 진지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서로 다른 나라, 다른 언어로 오페라를 썼던 두 사람의 경쟁은 실제로는 만난 적도 없는 일방적인 무관심과, 뜻밖의 존중이 뒤섞인 관계였습니다.
바그너의 성격에 대해서는 평론가들이 음악적으로는 대단한 업적을 남겼지만 비판에 예민하고 뒤끝이 길며 자기중심적이었다는 평가를 남기기도 합니다. 이런 성격이 그가 여러 사람과 불화를 겪은 배경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마무리
이번에 다시 찾아보면서 느낀 것은, 자극적인 소문일수록 오히려 출처가 허술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실제로 확인되는 사실들, 이를테면 1876년의 우연한 겹침이나 바그너의 빈정거리는 칭찬 같은 것들이 오히려 더 흥미로웠습니다. 어느 쪽이 승자인지는 여전히 답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이번에는 근거가 있는 이야기와 그렇지 않은 이야기를 구분해서 남기고 싶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바그너파와 브람스파는 왜 갈라졌나?
1860년 브람스와 요제프 요아힘이 리스트, 바그너로 대표되는 신독일악파를 비판하는 선언문을 작성했고, 이것이 언론에 새어 나가 조롱받으면서 갈등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이후 대립은 두 작곡가 개인의 감정싸움이라기보다 평론가 한슬릭과 바그너 진영 평론가들 사이의 언론전 양상으로 커졌습니다.
Q. 바그너가 브람스에게 성기능 문제를 언급하며 조롱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인가?
확인되지 않습니다. 이와 비슷한 표현은 니체가 브람스의 음악을 두고 남긴 무능력의 우울, 결핍에서 창작한다는 비유적 평가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며, 이것이 바그너 본인의 발언으로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번 개정에서는 근거가 확인되지 않아 이 주장을 삭제했습니다.
Q. 브람스가 바그너의 여성 편력을 한슬릭에게 흘렸다는 이야기는 사실인가?
이를 뒷받침하는 1차 자료를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바그너 쪽에서 브람스가 사냥용 활로 길고양이를 죽이고 다닌다는 소문을 퍼뜨렸다는 이야기는 여러 자료에서 확인되어, 양측이 서로에 대한 뒷소문을 주고받았다는 정황 자체는 신빙성이 있습니다.
Q. 1876년이 왜 상징적인 해인가?
브람스가 21년에 걸쳐 완성한 교향곡 1번이 1876년 11월 4일 카를스루에에서 초연되었고, 같은 해 8월 13일부터 17일까지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4부작 전곡이 자신이 설계한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서 초연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필생의 역작이 같은 해에 세상에 나온 것입니다.
Q. 바그너파와 브람스파, 결국 승자는 누구인가?
음악사적으로 정해진 답은 없습니다. 바그너가 살아 있을 때는 그의 새로운 음악극 형식이 더 큰 화제를 모았지만, 사후에는 브람스의 형식미를 따르는 흐름도 힘을 얻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이후 세대에 깊은 영향을 남겼기 때문에, 어느 한쪽의 완전한 승리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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