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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의 왕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의 생애와 작품

다시채의 클래식 카페 0
  베르디는 26편의 오페라를 작곡하였는데, 그의 오페라 작품들은 세계에게 가장 많이 공연되고 있으며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오페라의 왕이라 불리우는 베르디의 생애와 작품을 살펴보고자 한다.


19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오페라 작곡가 쥐세페 베르디(Giuseppe Fortunino Francesco Verdi, 1813-1901). 그가 87세 나이로 사망한 지 한 달 후 이장식이 거행되었는데, 거리와 창문에는 검은 상장과 조기가 내걸렸고, 연도에는 30만 명의 시민들이 그의 마지막 가는 길에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이는 베르디가 이탈리아에서 어떤 위치인지를 알려준다. 

  베르디가 국민들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받은 데는 그의 활동시기가 이탈리아에서 민족의식이 고취되던 시기와 맞물린 것도 한몫했다. 19세기 후반 이탈리아는 많은 군소 국가로 쪼개진 상태였는데, 특히 밀라노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베르디의 오페라는 국민들의 독립을 향한 열망을 폭발시켰다.

  베르디는 그의 항상 비교되는 바그너(1813-1883)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 두 사람은 독일과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오페라 작곡가가 되어 서로의 작품을 의식했지만 만난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한다.


베르디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이미지입니다.
출처 : classicfm.com


  아버지는 이탈리아 북부 부세토 근교의 작은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여관(식료품과 잡화 판매 병행)를 경영했다. 베르디는 성당을 통해 음악적 재능을 드러냈지만 다른 천재 음악가처럼 특출나지는 않았다. 베르디는 아버지의 부자 친구이자 음악 애호가 바레치의 후원을 통해 음악을 공부하게 되며, 밀라노 음악원 입학하려 했지만 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베르디는 밀라노 극장의 책임자인 라비냐에게 음악을 배우며 오페라의 매력을 깨닫게 된다. 

  베르디는 부세토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일하다가 라 스칼라 극장에서 그의 첫 오페라 [산 보니파초의 오베르토 백작]을 초연해 호평받았도, 3편의 오페라 의뢰도 받게 된다. 이렇게 성공의 길에 들어선 베르디에게 갑작스런 불행이 찾아온다. 그가 결혼한지 4년 만에 딸과 아들이 죽고 아내는 뇌수막염으로 사망하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 이후에 발표하는 작품이 흥행에 실패하면서 그는 깊은 슬럼프에 빠졌다.

  하지만 스칼락 극장의 지배인인 메릴리가 새로운 소재의 오페라를 추천하여 대성공을 거두게 되는데, 바로 그의 세 번째 오페라 [나부코, 1842년 초연]가 였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오페라에는 나부코 왕에게 노예로 꿀려간 유대인이 조국을 생각하며 노래하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나온다. 이 노래 속 가사인 '가라, 내 마음이여, 금빛 날개를 달고'는 타국에 점령당한 밀라노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이탈리아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노래가 되었는데, 현재까지도 이탈리아에서 '제2의 애국가'로 사랑받고 있다.

  베르디는 부세토에서 스트레포니(1815-1897)와 동거를 시작하면서 부모와 멀어지게 되지만 851년부터 1853년까지 지금까지도 크게 사랑받는 [리콜레토],  [일 트로바토레],  [라 트라비아타]를 작곡하게 된다. 이 작품들은 정치색이 짙은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 오페라가 아니라 개인적인 심리에 집중한 것들이다. 

  1859년 베르디는 스트레포니와 정식으로 결혼을 하고 그 해 9월 부세토의 대표로 선출되어 열심히 정치인으로 활동하게 된다. 1860년 통일 이탈리아가 탄생했을 때 베르디는 국회의원으로 선출된다. 국회의원이 되었어도 베르디는 [운명의 힘], [돈 카를로] 등의 오페라를 창착하는데, 웅장하고 스케일 있는 그랜드 오페라의 스타일을 풍기고 있다.

 60세를 넘긴 베르디는 [아이다], [오델로], [팔스타프] 등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특히 7년 동안 만들어진 [오델로]는 [리콜레토]이후 베르디가 오페라로서 표현하고자 했던 인간의 심리묘사가 극대화된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초연 이후 수 천 명의 사람들이 베르디의 숙소 앞으로 몰려와 환호를 보냈다고 한다.

  베르디는 1897년 스트레포니가 사망한 후 호텔에서 은둔하다가 1901년 죄졸증으로 쓰려져 세상을 떠나게 된다. 베르디의 시신은 그가 2년 전에 지어놓았던 '안식의 집'(지금 밀라노 사람들은 베르디의 집, Casa de Verdi)라고 부름)에 안장되었다. 안식의 집은 음악사상 가장 많은 재산을 벌어드린 사람중 하나인 베르디가 은퇴한 음악가들을 위한 양로원이었다. 베르디는 “그의 작품 중에 최고의 작품은?”이라는 질문에 '안식의 집'을 최고의 작품으로 꼽았다고 한다. 안식의 집은 1895년 시공에 들어갔지만 1902년에 운영을 개시하고 입주가 시작되었다. 그 이유는 베르디가  생전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피하고자, 자신이 죽은 이후 문을 열도록 결정했기 때문이다.

  베르디는 오페라 작곡 기법에 혁명적 변화를 시도했다. 본래 오페라는 한 곡 한 곡이 독립되어 있어서 이야기 순서대로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 형식을 취했는데(넘버 오페라), 베르디는 이 형식을 파괴했다. 그의 음악은 막이 시작되고 끝나는 내내 끊기는일 없이 쭉 이어진다. 아울러 베르디는 주인공은 무조건 테너라는 편견을 깨고 바리톤 등의 중저음 캐릭터에게 주연을 맡겼으며, 독창만을 중요시했던 틀을 깨고 중창과 합창에 비중을 두기도 하고, 오케스트라에게 성악을 받쳐주는 조연이 아니라 극의 분위기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도록했다. 

  베르디는 음악가로서만이 아니라 사업가로서도 능력이 탁월했다. 대표적 것이 오페라 작곡가의 저작권을 확보한 것이다. 이전까지 작곡가들은 오페라의 작곡료만 받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베르디는 명확한 계약서를 체결해서 작곡가의 저작권을 확보하고 상연 때마다 수입을 얻었다. 더욱이 타인이 제멋대로의 자신의 곡을 번경하는 것도 엄격히 금지했다. 베르디는 대본 작가를 고용했으며 대본의 권리도 자신이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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