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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의 생애와 작품

  낭만주의 후기에 교향곡에서 큰 업적을 남긴 구스타프 말러의 생애와 작품을 살펴보고자 한다. 작곡가의 삶이 작품에 반영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특히 말러의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의 삶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1911)는 오스트리아가 통치하는 보헤미아에서 유대인 사업가 아들로 태어났는데, 14형제 중 둘째였다. 행운의 7이 두 번 겹치는 7월 7일에 태어났지만 8명의 형제들이 일찍 사망하는 불행을 겪으면서 평생 우울하게 살았다. 그의 음악에 팽배해 있는 긴장, 냉소, 염세주의,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말러는 4세 때 아코디언을 연주했으며, 10세 때 첫 피아노 연주회를 열었다. 15살 때인 1875년, 말러는 오스트리아의 빈 음악원에 입학했다. 안톤 브루크너의 강의를 통해 교향곡의 진수를 접하고, 관현악법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다. 음악원에 다니는 동안 종합대학인 빈 대학에서 철학과 미술사 등을 청강하며 지식을 넓혀갔다.

  1878년 빈 음악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말러는 20세가 되는 2년후 지휘자로 생계를 꾸려간다. 이곳에 있는 동안 말러는 최초의 작품인 [탄식의 노래]를 완성해 베토벤 콩쿠르에 도전했지만 입상에 실패했다. [탄식의 노래]가 실패한 후, 말러는 작곡가보다는 지휘자가 되는 쪽을 선택했다.

  카셀, 프라하, 라이프치히 등 오페라 극장에서 지휘자로 활동했으며, 1888년에는 28세 나이로 부다페스트의 헝가리 왕립 오페라극장 음악감독으로 취임했다. 지휘자로 승승장구하던 말러는 틈틈히 작곡을 하여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교향곡 제1번 '거인']을 완성했다.

  하지만 1891년 외국인에게 배타적인 사람이 극장감독으로 취임하면서 말러는 쫓겨나게 된다. 말러는 함부르크 시립 오페라 극장 지휘자로 6년을 보냈지만 극장 측과 공연의 질적 수준을 놓고 끊임없이 대립했으며, 개혁을 싫어 하는 비평가들과도 충돌했다. 시즌 중에는 작곡할 시간이 없었던 말러는 휴가 기간에 집중적으로 작곡했는데, [교향곡 제2번 '부활'], [교향곡 제3번], 가곡집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를 완성했다. 

  1897년 유대인 말러는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을 한 후 빈 궁정 오페라 극장의 음악감독이 될 수 있었다. 빈에서 10년 동안 말러는 눈부신 활약을 펼치며 명실상부 최고의 지휘자로 군림했다. 그는 단순히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지휘자로서의 역할에 그치지 않고 무대 연출의 책임자로서 음악, 연기,무대미술 전반을 개혁해 나아갔다. 특히 바그너와 모차르트 연주에서 지휘자 말러의 진가가 빛을 발했다.
 

말러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이미지입니다.
말러의 모습 (출처 : deutschegrammophon.com)


  말러는 1902년 화가의 딸인 알마 마리아 신들러와 결혼했다. 예술적 재능이 넘치는 알마는 마러가 사랑한 여인이자 동시에 그를 불안에 빠지게 했던 여인이다.자유분방한 여성으로 화가 클림트의 연인으로도 유명했다. 결혼으로 안정을 찾은 말러는 휴가 중에는뵈르터 호숫가 별장에 머물며 작곡에 열중했다. 이 시기에 교향곡 제4번부터 제8번까지, 가곡집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가 탄생했다. 

  이렇게 왕성한 창작과 인생의 전성기를 열어가던 말러에게 불행이 찾아온다. 1907년 큰 딸이 사망하고, 말러 본인은 심장병 진단을 받게 된다. 알마는 딸의 죽음으로 우울증에 걸리는데 설상가상으로 말러의 비타협적인 태도와 반유대주의 영향을 궁정 오페라 극장의 음악감독에서 사임하게 된다. 

  1908년 말러는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 자리를 제안받고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말러는 미국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며 휴가 중에는 [대지의 노래]와 [교향곡 제9번]을 완성하게 된다. 하지만 미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알마는 1910년 둘째 딸과 함께 오스트리아의 그라츠 근교로 요양을 떠나게 되는데, 이때 알마는 발터 그리피우스를 만나 교제를 하게 된다. 그로피우스는 이 사실을 말러에게 편지를 보내 알리게 되고, 말러는 지크문트 프로이드를 찾아가 심리상담을 받게 된다. 

   1911년 2월 심장에 염증이 생긴 이후 치료를 받던 말러는 5월 18일, 5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말러의 작품은 교향곡과 가곡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말러는 오페라단이나 교향악단의 지휘자로 활동한 경험에서 얻은 관현악에 대한 감각을 바탕으로 교향곡의 가능성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작곡가이다. 그의 교향곡의 특징은 길이가 아주 길고, 형식이 복잡하며, 엄청난 연주 인원을 필요로 하고, 합창이나 독창 같은 성악이 들어가 있는 것이 많으며, 표제음악적이다.

  말러는 미완성 작품까지 포함해 모두 10편의 교향곡을 작곡했는데, 제1번 '거인', 제2번 '부활', 제6번 '비극적', 제7번 '밤의 노래'에는 제목이 붙여져 있다. 제8번을 '천인 교향곡(Symphony of a Thousand)'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말러가 붙인 것이 아니고 연주하는 데 엄청난 인원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별명이다. 

  말러의 또 다른 대표작인 [대지의 노래]는 교향곡으로 분류할 수 있지만 별도의 작품번호가 붙지 않았다. 그 이유는 작곡가들의 '9'자 징크스 때문이다. 베토벤이 9개의 교향곡을 작곡하고 사망한 이후 작곡가들인 슈베르트, 드보르자크, 브루크너 등이 비슷한 길을 걸어갔다. [대지의 노래]는 1908년에 완성한 관현악이 붙은 성악곡으로 6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말러가 음악에서 동양적 요소를 사용한 것은 이 곡이 유일하다.

  말러의 가곡은 여러 곡을 한데 묶은 가곡집의 형태를 딴 것이 대부분이며, 피아노가 아닌 관현악과 함께 연주하도록 작곡되었다. 가곡집으로는 [젊은 날의 노래],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 [어린이의 신기한 뿔피리], [방랑하는 젊은이의 노래] 등이 있다. 이중 1885년에 완성된 [방랑하는 젊은이의 노래]는 젊은 시절 말러의 낭만적인 감성이 집약된 걸작으로 꼽히는데, 카셀에서 만난 소프라노 요한나 리히터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 가곡집으로 남게 된 것이다. 

  그밖의 작품으로 17살 때 작곡한 [피아노 4중주], 칸타타 [탄식의 노래],가곡 [죽은 고수], [북치는 소년], [뤼케르트 시에 의한 5편의 가곡]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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