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귀가 먼 상태로 6년에 걸쳐 조국을 향한 교향시 연작을 써 내려간 작곡가가 있습니다. 체코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베드르지흐 스메타나(Bedřich Smetana, 1824~1884)입니다. 그의 생애는 화려한 성공담이 아니라, 합스부르크 제국 치하에서 체코어 오페라를 일으켜 세우고 실패와 병고를 딛고 대표작을 완성해 간 분투의 기록에 가깝습니다.
- 생몰년: 1824년 리토미슐 출생, 1884년 5월 12일 프라하에서 사망
- 대표작: 교향시 연작 나의 조국(전 6곡, 그중 몰다우가 가장 유명), 오페라 팔려간 신부
- 전환점: 1874년 완전한 청력 상실 이후에도 나의 조국 대부분을 작곡
- 역사적 배경: 합스부르크 제국 치하 체코 민족음악운동을 대표하는 인물
- 기념: 매년 5월 12일 프라하의 봄 음악제가 나의 조국으로 개막
합스부르크 제국 치하의 체코, 그리고 리토미슐의 소년
스메타나가 태어난 19세기의 체코는 독립국이 아니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는 땅이었습니다. 관공서와 상류 교육의 언어는 독일어였고, 스메타나 세대는 대개 독일어로 교육받고 자라 정작 체코어 문법은 성인이 되어서야 다시 배워야 했습니다. 이런 시대에 체코어로 노래하는 오페라를 무대에 올린다는 것은 단순한 예술 행위가 아니라 정치적 의미를 지닌 일이었습니다.
스메타나는 프라하 동쪽의 소도시 리토미슐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맥주 양조장을 운영하는 여유 있는 집안의 가장이자 아마추어 음악가였고, 스메타나는 그 영향으로 네 살 때부터 음악을 배우기 시작해 여섯 살에는 지역 학생 음악회에서 피아노를 연주할 만큼 재능을 드러냈습니다. 1834년 노이하우스를 시작으로 이글라우, 도이치 브로드를 거쳐 1839년 프라하의 김나지움까지 여러 학교를 옮겨 다녔지만 어디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고, 16세에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그 무렵 일기에 "하나님의 은총과 도움으로 프란츠 리스트의 기법과 모차르트의 작곡 능력을 갖춘 사람이 되겠다"고 적었을 만큼, 그의 목표는 이미 뚜렷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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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메타나의 모습 |
프라하의 청년, 리스트에게 편지를 쓰다
1843년 스메타나는 프라하에서 가장 이름난 음악학교의 원장 요제프 프로크슈(Joseph Proksch)에게 작곡을 배우기 시작했고, 이 시기가 그의 작곡가로서의 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1848년 혁명이 일어나자 스메타나도 시민방위대 스보르노스트에 가담해 프라하 카를교 바리케이드를 지키는 데 힘을 보탰습니다.
같은 해 스메타나는 주정부에 음악학원 설립 인가를 신청했지만 재정이 부족해지자, 젊은 예술가들을 후원하던 프란츠 리스트에게 편지를 보내 400플로린을 빌려줄 것과 악보를 출판할 출판사를 소개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리스트는 대출은 정중히 거절했지만 헌정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출판사를 찾아보겠다고 답했으며, 이 일을 계기로 스메타나는 평생 리스트를 고마운 은인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해 음악학원 설립이 승인되자 스메타나는 카테리나 콜라르조바(Kateřina Kolářová)와 1849년 결혼해 네 딸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딸 가운데 셋이 어려서 세상을 떠났는데, 특히 성홍열로 숨진 둘째 베드르지슈카를 기리며 쓴 곡이 사단조 피아노 삼중주입니다.
예테보리의 시간, 그리고 다시 프라하로
혁명 실패 후 가혹한 억압이 이어지자 스메타나는 1856년 스웨덴 예테보리로 떠나 5년 남짓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1859년 봄, 결핵을 앓고 있던 아내 카테리나와 함께 보헤미아로 돌아오는 길에 올랐지만, 아내는 여정 중 드레스덴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1860년 스메타나는 열여섯 살 연하의 베티나 페르디난디(Bettina Ferdinandiová)와 재혼했지만 결혼 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오스트리아 정부의 탄압이 느슨해지고 체코의 독립운동이 다시 활발해지자, 스메타나는 1861년 프라하로 완전히 돌아왔습니다. 애국심을 고취하는 곡들을 잇달아 내놓으며 그는 빠르게 체코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자리 잡았습니다.
팔려간 신부, 실패에서 성공까지
1862년 체코슬로바키아 국민극장의 전신인 임시극장이 프라하에 세워졌습니다. 스메타나는 1866년 이 극장에서 민족주의 오페라 <팔려간 신부>를 초연했지만,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하필 그해 가장 무더운 날 저녁에, 그것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 발발 직전이라는 뒤숭숭한 시점에 무대에 오른 탓에 관객이 거의 들지 않았습니다. 스메타나는 이후 여러 차례 개정을 거듭했고, 3막 구조로 확장된 최종판이 1870년 무대에 오르고 나서야 이 오페라는 비로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같은 해인 1866년, 스메타나는 임시극장의 수석지휘자로 임명되어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이 자리는 1874년 청력이 무너지기 전까지 약 8년간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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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라하에 있는 스메타나 박물관 |
1874년, 소리가 사라지다
1874년 스메타나의 청력은 오른쪽 귀부터 무너지기 시작해 그해 10월 20일 왼쪽 귀마저 완전히 멎었습니다. 당대 가족들은 이를 매독의 후유증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1884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병원이 공식 문서에 남긴 사인은 매독이 아니라 노인성 치매였고, 후대의 의학사 연구자 이르지 람바는 조직 검사와 증상을 근거로 매독설 자체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세 가지 기록, 즉 당대 가족의 믿음과 병원의 공식 기록, 후대 연구자의 반박이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어, 청력 상실과 죽음의 정확한 원인은 지금도 학계에서 하나로 정리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지휘자 자리에서도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이 시기는 스메타나에게 개인적으로 가장 가혹한 시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창작열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들리지 않는 소리로 그린 나의 조국
여섯 곡의 교향시로 이루어진 <나의 조국>은 비셰흐라드, 몰다우, 샤르카, 체코의 초원과 숲에서, 타보르, 블라니크 순서로 구성됩니다. 첫 곡 비셰흐라드는 1872년부터 구상했고, 실제 작곡은 1874년 9월 말 시작해 완전히 청력을 잃기(그해 10월 20일) 직전 무렵 붙잡고 있던 유일한 곡입니다. 나머지 다섯 곡, 그중 몰다우와 샤르카는 완전히 소리를 잃은 직후인 1874년 말과 이듬해 초에, 체코의 초원과 숲에서는 1875년 가을에, 타보르와 블라니크는 각각 1878년 말과 1879년 초에 완성되었습니다. 여섯 곡은 각각 따로 초연되다가 1882년 11월 5일에야 비로소 전곡이 한자리에서 함께 연주되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제2곡 몰다우는 유독 인기가 높습니다. 남보헤미아의 숲에서 흘러나온 물줄기가 프라하시를 가로질러 흐르다 마침내 엘베강과 만나는 과정을 음악으로 그려낸 곡으로, 강의 흐름에 조국에 대한 마음을 실었습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글 : 스메타나 교향시 몰다우(블타바) 완벽 해설]
말년과 죽음, 그리고 해마다 되풀이되는 기억
청력을 완전히 잃은 뒤에도 스메타나는 <나의 조국>을 완성했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현악 4중주 <나의 생애로부터>를 비롯한 여러 작품을 계속 써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우울증과 정신적 불안이 갈수록 심해졌고, 결국 프라하의 정신병원에 입원한 끝에 1884년 5월 12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1952년부터 체코의 프라하의 봄 음악제는 해마다 스메타나가 세상을 떠난 이 날짜, 5월 12일에 개막합니다. 개막 무대에는 언제나 <나의 조국> 전곡이 오릅니다. 국제적으로는 후배 작곡가 드보르자크가 더 널리 알려졌지만, 체코 안에서는 청력을 잃고도 조국을 향한 노래를 완성한 스메타나가 지금도 음악의 아버지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스메타나는 왜 체코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나요?
당시 체코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 아래 독일어가 공용어로 쓰이던 상황이었고, 스메타나 세대는 독일어 교육을 받고 자라 정작 체코어 문법을 성인이 되어서야 다시 익혀야 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스메타나는 체코어 오페라를 처음으로 흥행시킨 인물이 되었고, 이 성취가 문화적 민족부흥운동의 상징으로 여겨지면서 아버지라는 칭호로 이어졌습니다.
Q. 스메타나의 청력 상실 원인은 매독이 맞나요?
단정할 수 없습니다. 매독설은 당대 가족들이 믿었던 설명일 뿐이고, 정작 병원이 남긴 공식 사망 기록은 노인성 치매였습니다. 이후 조직검사 결과를 토대로 매독설 자체를 반박한 연구도 있어, 세 갈래 기록이 서로 다른 결론을 가리키는 채 학계 논쟁은 아직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Q. 나의 조국은 정말 청력을 잃은 상태에서 작곡되었나요?
첫 곡만 예외입니다. 비셰흐라드는 1874년 9월 말 착수해 완전히 청력을 잃기(그해 10월 20일) 직전 무렵까지 붙잡고 있던 유일한 곡이고, 나머지 다섯 곡인 몰다우부터 블라니크까지는 모두 완전히 소리를 잃은 뒤에 작곡되었습니다.
Q. 팔려간 신부는 처음부터 성공한 오페라였나요?
아닙니다. 1866년 초연은 관객이 들지 않은 사실상의 흥행 실패였습니다. 무더위가 절정이던 날 저녁, 게다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사이 전쟁이 코앞이던 어수선한 시기에 무대에 오른 탓이었습니다. 몇 차례 개정을 거쳐 3막 구조의 최종판이 1870년 공연되고 나서야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Q. 스메타나의 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
네 딸 가운데 셋을 먼저 떠나보냈습니다. 결핵으로 잃은 딸도 있고, 다른 이유로 세상을 떠난 딸도 있습니다. 둘째 베드르지슈카가 성홍열로 숨졌을 때 그 슬픔을 담아 쓴 곡이 사단조 피아노 삼중주로 남아 있습니다.
Q. 리스트는 스메타나를 도와주었나요?
금전적 지원은 없었습니다. 요청한 400플로린 대출은 정중히 거절당했지만, 대신 헌정을 받아들이고 악보를 실어 줄 출판사를 찾아보겠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스메타나는 이 응답 하나만으로도 리스트를 오래도록 은인으로 기억했습니다.
Q. 프라하의 봄 음악제와 스메타나는 무슨 관계인가요?
1952년부터 이 음악제는 해마다 스메타나가 세상을 떠난 5월 12일에 개막하며, 개막 무대에는 언제나 나의 조국 전곡이 오릅니다. 체코가 한 작곡가의 기일을 국가적 음악 축제의 시작점으로 삼고 있는 셈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