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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많은 곡을 작곡하며 왕성한 활동을 했던 텔레만(Georg Philipp Telemann)의 생애와 음악

1722년 라이프치히 시의회가 토마스칸토르 자리를 제안했을 때, 첫 번째로 낙점된 인물은 바흐가 아니었습니다. 그 자리는 원래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Georg Philipp Telemann, 1681~1767)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낯설게 느껴지지만, 그의 생전에는 바흐나 헨델보다도 훨씬 유명한 음악가였습니다.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 한눈에 보기
  • 생몰년: 1681년 3월 마그데부르크 출생, 1767년 6월 25일 함부르크에서 사망(86세)
  • 작품 규모: 현재 정리된 목록 기준 3,600곡 이상, 당대 최다 작곡가로 꼽힘
  • 주요 이력: 라이프치히·아이제나흐·프랑크푸르트를 거쳐 1721년 함부르크 부임
  • 바흐와의 인연: 아들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의 대부, 1722년 토마스칸토르 자리를 먼저 제안받음
  • 별명: 바로크 음악의 백과사전, 뛰어난 자기 홍보와 출판 사업 수완

마그데부르크의 소년, 가족의 반대를 넘어 독학으로

텔레만은 1681년 3월 독일 마그데부르크에서 개신교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음악적 재능을 보였지만, 가족들은 그가 직업 음악가가 되는 것을 완강히 반대했습니다. 정식으로 배울 길이 막힌 그는 스스로 작곡을 익혔고, 바이올린과 리코더, 오보에, 클라비어 같은 여러 악기까지 독학으로 능숙하게 다루게 되었습니다.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의 모습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

라이프치히에서 시작된 인연, 콜레기움 무지쿰

라이프치히 대학에 다니던 시절 텔레만은 학생들을 모아 연주 단체를 결성했습니다. 정확한 결성 시점은 1703년 무렵으로 추정될 뿐 확정된 연도는 아닙니다. 이 단체는 훗날 콜레기움 무지쿰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는데, 수십 년 뒤 바흐가 같은 도시에서 이끈 콜레기움 무지쿰과 완전히 동일한 단체인지는 자료마다 설명이 갈려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1704년에는 라이프치히 노이에 교회의 오르가니스트 겸 음악감독으로 임명되며 본격적인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궁정에서 도시로, 경력을 넓혀 가다

텔레만은 이후 여러 도시를 옮겨 다니며 경력을 쌓았습니다. 1708년에는 아이제나흐 궁정의 악장으로 임명되었고, 1712년에는 프랑크푸르트시의 음악감독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1721년, 마흔 살이 되던 해에 함부르크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이 마지막 이직이 그의 남은 생애 대부분을 함부르크에 붙잡아 두게 됩니다.

함부르크의 다섯 교회를 책임지다

함부르크에서 텔레만이 맡은 자리는 단순한 교회 음악감독 한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1721년 7월 10일, 그는 요하네움 라틴어학교의 칸토르를 맡는 동시에, 도시에서 가장 규모가 큰 다섯 개 교회의 음악을 총괄하는 감독직까지 겸했습니다. 한 사람이 이렇게 넓은 범위의 음악 행정을 책임지는 경우는 당시에도 흔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서양음악사상 가장 많이 작곡한 작곡가라는 통설

텔레만은 오페라와 교회음악, 관현악, 실내악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장르에서 방대한 작품을 남겼습니다. 여러 소편성 악기를 위한 이른바 식탁 음악도 그의 손에서 나왔습니다. 현재까지 정리된 작품목록을 기준으로 하면 그의 작품 수는 3,600곡을 넘습니다. 작품이 많기로 이름난 바흐조차 현존하는 곡이 약 1,100곡 정도로 알려져 있으니, 그 규모의 차이가 짐작될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텔레만은 흔히 역사상 가장 많은 곡을 쓴 작곡가로 소개되고, 기네스 세계기록에 이름을 올렸다는 이야기도 자주 따라붙습니다. 다만 이 등재 이야기는 1998년판 종이책 기네스북에 실린 표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지금 시점에 갱신되는 공식 기록으로 뒷받침되는지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자기 홍보와 출판 사업, 사업가로서의 텔레만

다양한 장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생전에 바로크 음악의 백과사전이라 불렸던 텔레만은, 음악만이 아니라 사업 수완에서도 탁월했습니다. 그는 부유층을 대상으로 자신이 작곡한 악보를 예약 판매하는 방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판매 예약을 받기 시작하면 독일은 물론 영국과 프랑스, 스웨덴, 심지어 러시아에서까지 주문이 쇄도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런 사업을 뒷받침한 것이 1737년부터 1738년까지 파리를 여덟 달간 방문해 얻어 낸 프랑스 왕실의 특권이었습니다. 프랑스 국왕은 그에게 20년 동안 자신의 작품을 독점적으로 출판할 수 있는 권리를 내려 주었습니다.

1728년부터 1729년까지는 격주로 발행되는 음악 잡지 게트로이어 무직마이스터를 직접 펴내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작품이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요한 발렌틴 괴르너를 비롯한 여러 동시대 작곡가의 곡도 함께 실었던 이 잡지는, 지역 음악감독으로서의 바쁜 업무 와중에도 놓지 않았던 또 하나의 사업이었습니다.

바흐와 헨델, 우정과 인연 사이

텔레만은 왕성한 사회활동으로 독일과 유럽 전역에 폭넓은 인맥을 쌓았고, 그가 남긴 많은 편지는 이런 활발한 교유 관계를 잘 보여 줍니다. 특히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의 인연은 각별했습니다. 1714년 바흐의 둘째 아들(생존한 아들 중에는 첫째)이 태어났을 때 텔레만은 아이의 대부가 되었고, 아이의 이름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가운데 필리프는 텔레만 자신의 이름에서 그대로 따온 것이었습니다.

1722년 라이프치히 토마스칸토르 자리가 공석이 되었을 때도 두 사람의 인연이 얽혔습니다. 시의회가 가장 먼저 제안한 인물은 텔레만이었고 그도 수락했지만, 함부르크시가 연봉을 올려 그를 붙잡으면서 이 제안은 없던 일이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유력했던 크리스토프 그라우프너 역시 몸담고 있던 다름슈타트 궁정이 놓아주지 않아 고사했습니다. 바흐가 이 자리에 오른 것은 이렇게 앞선 두 사람이 모두 빠진 뒤였습니다. 훗날 바흐가 세상을 떠나자 텔레만은 정중한 추도사를 보냈습니다.

헨델과도 생전에 편지를 자주 주고받으며 반세기 가까이 우정을 이어 갔습니다. 원예가 취미였던 텔레만을 위해 헨델이 영국에서 귀한 식물을 보내 준 일화도 전해집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흔히 바흐를 떠올리지만, 정작 당대에는 텔레만이 바흐나 헨델보다 훨씬 더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말년과 죽음, 잊혀진 명성

텔레만은 1767년 6월 25일, 오랫동안 몸담았던 함부르크에서 여든여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생전에 누렸던 명성에 비하면, 오늘날 그의 작품이 무대에 오르는 빈도는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바로크 시대의 음악가를 떠올릴 때 사람들이 먼저 기억하는 이름은 대개 바흐나 헨델이며, 정작 그 시대를 가장 왕성하게 살아 낸 텔레만은 상대적으로 조용히 잊혀 갔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텔레만은 정말 역사상 가장 많은 곡을 쓴 작곡가인가요?

현재 정리된 작품목록(TWV) 기준으로 3,600곡이 넘는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기네스 세계기록에 등재됐다는 이야기는 1998년판 종이책에 실린 표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지금도 갱신되는 공식 기록으로 확인하기는 어렵습니다.

Q. 텔레만이 콜레기움 무지쿰을 만든 게 맞나요? 바흐가 이어받았나요?

라이프치히 대학 시절 이런 성격의 연주단체를 조직한 것은 맞지만, 정확한 결성 연도는 1703년 무렵으로 추정될 뿐 확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훗날 바흐가 라이프치히에서 이끈 콜레기움 무지쿰과 완전히 같은 단체라고 단정할 만한 근거까지는 이번 조사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Q. 텔레만은 정말 바흐 아들의 대부였나요?

네, 확실합니다. 1714년 태어난 바흐의 맏아들에게 대부가 되어 준 사람이 텔레만이었고, 그 인연을 기려 아이의 가운데 이름을 자신의 이름과 똑같은 필리프로 지었습니다.

Q. 1722년 라이프치히 자리는 원래 바흐 것이 아니었나요?

맞습니다. 라이프치히가 처음 눈독 들인 인물은 텔레만이었습니다. 일단 수락까지 했지만 함부르크 측이 급히 연봉을 올려 붙잡는 바람에 무산됐습니다. 두 번째 후보 크리스토프 그라우프너도 몸담은 다름슈타트 궁정의 반대로 뜻을 접었고, 바흐 차례가 온 것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Q. 함부르크에서는 정확히 어떤 일을 했나요?

요하네움 라틴어학교의 칸토르 자리와 함께, 도시 안에서 규모가 가장 큰 교회 다섯 곳의 음악 전체를 관리하는 역할까지 한꺼번에 맡았습니다. 이 정도로 폭넓은 권한을 가진 음악 행정직은 그 시절에도 드물었습니다.

Q. 텔레만의 악보 출판 특권은 어느 나라에서 받았나요?

흔히 짐작하는 신성로마제국이 아니라 프랑스였습니다. 프랑스 국왕이 앞으로 20년간 그의 곡을 다른 누구도 함부로 찍어 낼 수 없도록 독점권을 보장해 주었습니다.

Q. 텔레만은 언제 어떻게 세상을 떠났나요?

함부르크에서 눈을 감은 날짜는 1767년 6월 25일입니다. 그때 나이는 여든여섯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