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0년 겨울, 눈보라가 몰아치는 밀라노의 거리는 한 젊은 작곡가의 내면만큼이나 얼어붙어 있었다. 훗날 이탈리아 음악의 찬란한 태양으로 군림하게 될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는 당시 가장 참혹한 절망의 심연을 헤매고 있었다. 사랑하는 두 아이를 연이어 잃은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아내마저 뇌염으로 세상을 떠났고, 개인적인 비극의 무게를 견디며 야심 차게 무대에 올렸던 두 번째 희극 오페라 《하루만의 임금》마저 관객들의 처참한 야유 속에 단 하루 만에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 철저한 실패에 압도된 베르디는 음악의 신에게 버림받았다고 확신하며, 다시는 악보를 쓰지 않겠다고 맹세한 채 고향 부세토로 낙향할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그러나 서양 음악사의 궤도는 한 우연한 만남으로 인해 급격히 꺾이게 된다.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의 지배인 바르톨로메오 메렐리가 대본 처리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중, 작곡을 포기한 베르디의 외투 주머니에 강제로 대본 하나를 쑤셔 넣으며 그를 극장 밖으로 밀어낸 것이다. 냉소로 가득 찬 채 집으로 돌아온 베르디가 두꺼운 대본을 책상 위로 신경질적으로 집어던졌을 때, 펼쳐진 페이지에서 한 줄의 시구가 강렬하게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가라, 내 마음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Va, pensiero, sull'ali dorate)." 구약성서 시편 137편을 모티프로 삼은, 바빌론 강가에서 잃어버린 고향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는 히브리 노예들의 탄식이었다. 모든 것을 잃고 폐허가 된 베르디의 내면과 이방의 땅에서 핍박받는 유대 민족의 처절한 상실감이 시공간을 넘어 공명하는 순간이었다. 베르디 오페라 나부코는 바로 이 철저한 파멸과 깊은 애도로부터 잉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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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의 나부코 초연 홍보 전단지 |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정말 혁명의 노래였을까
위대한 예술 작품이 특정 시대를 대변하는 정치적 아이콘으로 승격될 때, 종종 역사적 사실의 날카로운 모서리는 낭만적 신화의 두꺼운 외투 아래로 은폐된다. 수많은 기존 글들은 오페라 《나부코》가 오스트리아 제국의 압제에 항거하는 이탈리아인들의 독립 의지, 즉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 이탈리아 통일 운동) 정신을 단숨에 일깨운 도화선이었다고 설명한다. 1842년 초연 당시 극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이 히브리 노예들의 애절한 합창을 듣고 압박받는 조국의 처지에 깊이 공감하여 극장 검열관들의 서슬 퍼런 감시 속에서도 혁명적인 앙코르를 부르짖었다는 일화는 오늘날까지도 널리 통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 글은 그러한 통념을 넘어, 검증된 학문적 진실의 이면으로 확장한다.
초연 밤의 진실: 관객이 앙코르를 외친 곡은 달랐다
현대 음악학은 이러한 극적인 내러티브에 날카로운 의문을 제기한다. 베르디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로저 파커(Roger Parker) 등 학자들의 엄밀한 사료 교차 검증에 따르면, 1842년 3월 9일 초연 당일 밀라노 시민들이 열광적으로 앙코르를 요구하며 기립했던 곡은 놀랍게도 3막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Va, pensiero)'이 아니었다. 관객의 폭발적인 함성 속에 당국의 금지를 깨고 다시 연주된 곡은 4막 2장에 등장하는 히브리인들의 장엄한 아 카펠라 풍 감사 기도인 '임멘소 여호와(Immenso Jehova, 위대하신 여호와)'였다.
이는 당시 대중의 반응이 정치적인 해방의 슬로건이라기보다는, 억압을 뚫고 마침내 찾아온 종교적 구원의 장엄한 코랄 사운드 자체에 대한 순수한 음악적 감동에 더 가까웠음을 시사한다. 만약 'Va, pensiero'가 초연 즉시 민중 폭동의 도화선으로 작용했다면, 철권통치를 구가하던 오스트리아 제국의 검열관들이 1842년 한 해에만 무려 75회나 무대에 오르도록 방치했을 리 없다. 나아가 베르디를 혁명의 상징으로 등극시킨 결정적인 암호 'VIVA VERDI'(이탈리아의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만세라는 의미의 언어유희) 역시 초연 당시가 아니라, 통일 운동이 정치적으로 무르익어가던 1850년대 후반에야 거리의 담벼락에 우연히 등장하기 시작했다.
요컨대 베르디의 오페라가 리소르지멘토를 직접 촉발했다기보다는, 후대의 혁명 세력이 이탈리아의 국가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압도적인 보편성을 지닌 베르디의 걸작을 발탁하여 '사후적으로 성역화'한 것에 가깝다. 이러한 역사적 재평가는 결코 작품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술의 강인한 생명력이 후대의 집단 무의식과 결합하여 한 국가의 신화를 어떻게 창조해 내는지를 웅변하는 극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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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가일 역이 어려운 이유: 넓은 음역과 거친 고음
베르디가 이 작품에서 구축한 음향의 건축물은 이전 시대의 전임자들인 벨리니나 도니체티가 구사하던 우아한 벨칸토(Bel Canto) 양식의 관습을 잔인하게 찢어발기는 파격의 연속이었다. 이 작품은 인물들의 핏빛 권력욕과 신성 모독, 그리고 처절한 절망을 성악적 한계를 돌파하는 물리적인 마찰음을 통해 형상화한다.
성대를 찢는 권력욕: 살인적인 테시투라의 해부
오페라 역사상 나부코의 큰딸(후에 노예의 핏줄로 밝혀지는) 아비가일(Abigaille)만큼 연주자에게 맹렬한 신체적 고통을 안겨주는 배역은 드물다. 이 배역은 이른바 '드라마틱 소프라노 다질리타'라는 이질적인 성종을 요구한다. 아비가일의 악보는 묵직하고 어두운 흉성(Chest voice)의 질감과 극단적이고 날카로운 초고음의 콜로라투라 기교를 단 한 명의 가수에게 동시에 요구한다. 분노에 휩싸인 독창에서는 아주 높은 음에서 순식간에 두 옥타브 가까이 아래로 떨어지는 무자비한 도약 구간이 자주 반복된다. 이러한 변칙적인 테시투라는 비정상적인 인물의 찢겨진 심리 상태—왕좌를 향한 광적인 집착, 사랑을 얻지 못한 맹렬한 질투, 출생의 비밀이 주는 열등감—를 소리의 왜곡을 통해 완벽하게 묘사하는 천재적인 장치다.
| 배역 | 성부 (Voice Type) | 성악적 기법 및 심리적 메타포 분석 |
|---|---|---|
| 아비가일 (Abigaille) |
드라마틱 소프라노 다질리타 | 극단적인 2옥타브 도약(C6~C4)과 맹렬한 콜로라투라 장식음. 하행 도약의 강한 흉성 압박은 노예 출신의 열등감과 권력을 향한 잔인성을 대조적으로 메타포화함. |
| 나부코 (Nabucco) |
베르디 바리톤 | 잔인한 폭군에서 벼락을 맞아 이성을 잃는 미치광이로, 다시 회개하는 아버지로 전락과 상승 반복. F단조의 레치타티보로 권력의 허망함을 표현. |
| 자카리아 (Zaccaria) |
바소 프론도 (베이스) | 흔들리지 않는 종교적 신성과 권위. 파이프 오르간을 연상시키는 깊은 저음역을 통해 억압받는 민족의 굳건한 정신적 지주로서의 웅장한 무게감을 부여함. |
이토록 살인적인 아비가일 배역의 난이도는 초기 이탈리아 오페라 역사에 비극적이고도 로맨틱한 일화를 남겼다. 이 무자비한 악보를 1842년 초연 무대에서 완벽하게 소화해 내며 극을 전설적인 대성공으로 이끈 소프라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Giuseppina Strepponi)의 이야기다. 당시 이탈리아 최고의 오페라 스타였던 그녀는, 절망에 빠진 베르디의 악보에서 단번에 천재성을 알아보고 극장 측에 거칠게 항의하며 이 작품을 1842년 시즌 무대에 올리도록 강제한 장본인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발굴한 천재의 위대한 작품은 결국 그녀를 무대에서 끌어내리는 결과를 낳았다. 폭압적인 흉성과 예리한 두성을 쉴 새 없이 오가야 하는 아비가일의 가혹한 악보는 스트레포니의 성대를 돌이킬 수 없이 파괴해 버렸다. 초연 직후 끊임없는 과로와 극단적인 창법의 후유증으로 인해 그녀는 31세의 젊은 나이에 소프라노로서의 화려한 커리어를 접고 쓸쓸히 무대에서 완전히 은퇴해야만 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여 베르디를 서양 음악사의 최정점으로 밀어 올린 스트레포니는 이후 1859년 베르디와 정식으로 결혼하여 평생의 가장 든든한 음악적 동반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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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피나 스트레포니 사진 |
현대 연출은 나부코를 어떻게 난민 문제로 읽는가
음악의 스케일은 거대하고 성서의 스펙터클은 장엄했지만, 1842년 밀라노 라 스칼라에서 올려진 최초의 무대는 철저히 세속적인 극장 자본주의의 제약 아래 제작되었다. 지배인 메렐리는 이미 한 번 실패를 겪은 베르디의 신작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극장 기록에 따르면 초연의 무대 장치와 의상은 완전히 새롭게 창작된 것이 아니라, 6년 전인 1836년 같은 극장에서 안토니오 코르테제가 올렸던 동명의 발레 공연에서 쓰인 무대 소품들을 창고에서 꺼내어 상당 부분 '재활용(Recycling)'하고 기워 붙인 임시방편의 산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낭만주의 무대 미술을 이끌던 거장 산퀴리코 학파의 필리포 페로니(Filippo Peroni)가 남긴 3막 '바빌론 공중 정원' 스케치는 당시 오페라 극장이 대중에게 팔고자 했던 웅장한 오리엔탈리즘의 극치를 엿보게 한다. 예산의 지독한 궁핍 속에서도 어떻게든 거대한 이교도의 시각적 환상을 창조해 내야 했던 미술가들의 고군분투는, 무대 위의 빈틈을 압도적인 합창의 데시벨로 가득 채워버린 베르디의 치밀한 전략과 맞물려 유례없는 극적 몰입감을 관객들에게 선사했다.
동시대의 징후: 침묵하는 난민선과 부조리의 미장센
18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현대 오페라 연출가들은 나부코의 기원전 서사를 철저히 21세기의 동시대적 부조리로 치환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최근 베르디 페스티벌 파르마(Verdi Festival Parma)에서 호평받은 스테파노 리치(Stefano Ricci)의 연출은 기존의 장식적이고 웅장한 신전을 가차 없이 해체해 버린다. 그리고 그 자리에 2046년의 처참하게 파괴된 근미래 디스토피아, 거대 군함의 차가운 쇳덩어리 내부를 묘사한 무대를 세운다. 이는 찬란했던 바빌론 제국이 아니라, 오늘날 지중해를 건너다 폐선박에 갇혀 질식해 가는 현대 난민들의 절망적인 무덤을 섬뜩하게 은유한다.
바빌론 유수라는 역사적 사실은 연출가들의 손끝에서 제국주의적 오만, 국가 폭력에 의한 강제 이주의 고통이라는 가장 보편적이고 쓰라린 현대의 비극 미장센으로 끊임없이 재조립되고 있는 것이다.
왜 나부코는 지금도 울리는가: Va, pensiero와 집단 기억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는 개인의 깊은 상실, 거대한 역사적 서사, 그리고 예술가의 처절한 노동이 융합하여 어떻게 인류의 정신을 지배하는 불멸의 고전이 되는지 증명하는 장엄한 교보재다. 역사학자들은 리소르지멘토의 선동 도구로서의 신화를 낱낱이 해체하고 있지만, 그 철저한 해체 작업은 오히려 베르디가 직조한 음악의 본질적인 강인함을 투명하게 부각시킨다. 극한의 고통과 마주한 한 인간이 절박하게 써 내려간 슬픔의 음표들이 당대 대중의 피를 끓게 하고, 마침내 하나의 거대한 집단적 자아를 잉태하는 강력한 '메타 서사'로 스스로 진화해 나간 것이다.
1901년 2월, 장엄한 눈보라가 밀라노 거리를 하얗게 덮은 어느 날. 세상을 떠난 노거장 베르디의 장례식장 앞거리에는 무려 30만 명의 인파가 운집했다. 전설적인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이끄는 820명의 합창단과 그 뒤를 채운 수십만의 시민들은 어떠한 사전 지시도 없이 일제히 하나의 노래를 입을 맞춰 울부짖듯 부르기 시작했다.
"가라, 내 마음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Va, pensiero, sull'ali dorate)."
그 압도적인 순간의 울림은 혹독한 시련을 견뎌낸 예술가가 빚어낸 진실된 선율이 어떻게 영원한 안식처가 되어 평범한 인간들의 심장을 관통하고 하나로 연결하는지를 증명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순수하고 장엄한 예술의 승리 그 자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