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디를 일으켜 세운 오페라, 나부코(Nabucco):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과 혁명 신화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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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기본 정보

  • 작곡가 : 주세페 베르디 (Giuseppe Verdi, 1813~1901)
  • 작품명 : 나부코(Nabucco), 원제 나부코도노소르(Nabucodonosor), 4막 오페라
  • 대본 : 테미스토클레 솔레라(Temistocle Solera)
  • 세계 초연 : 1842년 3월 9일,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 주요 배역 : 나부코(바리톤), 아비가일(드라마틱 소프라노), 자카리아(베이스)
  • 대표 넘버 : 3막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Va, pensiero), 4막 위대하신 여호와(Immenso Jehova)

1840년 겨울, 눈보라가 몰아치는 밀라노의 거리는 한 젊은 작곡가의 내면만큼이나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훗날 이탈리아 음악의 찬란한 태양으로 군림하게 될 주세페 베르디는 당시 가장 참혹한 절망의 심연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딸 비르지니아를 1838년에, 아들 이칠리오를 이듬해에 연이어 잃은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1840년 6월에는 아내 마르게리타 바레치마저 뇌염으로 스물일곱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개인적인 비극의 무게를 견디며 작업하던 두 번째 오페라 하루만의 임금은 관객들의 야유 속에 초연 뒤 나머지 공연이 취소되었습니다. 철저한 실패에 압도된 베르디는 다시는 악보를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폐허 속에서 태어난 오페라

서양 음악사의 궤도는 한 우연한 만남으로 급격히 꺾이게 됩니다.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의 지배인 바르톨로메오 메렐리가 대본 처리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중, 작곡을 포기한 베르디의 외투 주머니에 대본 하나를 억지로 쑤셔 넣으며 그를 극장 밖으로 밀어낸 것입니다. 베르디 본인이 수십 년 뒤 남긴 회고에 따르면, 냉소로 가득 찬 채 집으로 돌아와 대본을 신경질적으로 책상 위로 집어던졌을 때 저절로 펼쳐진 페이지에서 한 줄의 시구가 그의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가라 내 마음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 Va pensiero sull’ali dorate. 구약성서 시편 137편을 모티프로 삼은, 바빌론 강가에서 잃어버린 고향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는 히브리 노예들의 탄식이었습니다. 다만 이 극적인 일화는 베르디 자신이 훗날 회고록에서 밝힌 이야기라는 점도 함께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며 세부가 더 극적으로 다듬어졌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폐허가 된 베르디의 내면과 이방의 땅에서 핍박받는 유대 민족의 상실감이 시공간을 넘어 공명했고, 오페라 나부코는 이 파멸과 애도로부터 태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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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열린 나부코 초연을 홍보하는 전단지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의 나부코
초연 홍보 전단지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정말 혁명의 노래였을까

위대한 예술 작품이 특정 시대를 대변하는 정치적 아이콘으로 승격될 때, 종종 역사적 사실의 날카로운 모서리는 낭만적 신화 아래 은폐됩니다. 수많은 기존 글들은 오페라 나부코가 오스트리아 제국의 압제에 항거하는 이탈리아인들의 독립 의지, 곧 리소르지멘토 정신을 단숨에 일깨운 도화선이었다고 설명합니다. 1842년 초연 당시 극장을 가득 메운 관중이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듣고 압박받는 조국의 처지에 공감해 혁명적인 앙코르를 외쳤다는 일화는 오늘날까지도 널리 통용됩니다.

초연 밤의 진실, 관객이 앙코르를 외친 곡은 따로 있었다

그러나 현대 음악학은 이 극적인 서사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베르디 연구자 로저 파커는 2000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박물관 소장 베르디 자필 악보 연구 논문집에 실은 글에서, 1842년 3월 9일 초연 당일 밀라노 관객이 열광적으로 앙코르를 요구하며 다시 부르게 한 곡이 3막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곧 Va pensiero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실제로 앙코르를 받은 곡은 4막 2장에 등장하는 히브리인들의 아 카펠라 감사 기도, 위대하신 여호와, Immenso Jehova였습니다.

이는 당시 대중의 반응이 정치적 해방의 슬로건이라기보다는, 억압을 뚫고 찾아온 종교적 구원을 노래한 장엄한 코랄 사운드 자체에 대한 순수한 음악적 감동에 가까웠음을 시사합니다. 실제로 오스트리아 당국의 검열 아래에서는 정치색이 짙은 대목의 앙코르보다 종교적 성격의 합창에 대한 앙코르가 더 쉽게 허용되었다는 점도 이 반응을 설명하는 배경입니다. 만약 Va pensiero가 초연 즉시 민중 봉기의 도화선으로 작용했다면, 오스트리아 제국의 검열관들이 이 오페라를 1842년 한 해에만 무려 75회나 무대에 올리도록 방치했을 가능성은 낮았을 것입니다. 나아가 베르디를 혁명의 상징으로 만든 암호 VIVA VERDI, 곧 이탈리아의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만세라는 뜻의 언어유희 낙서 역시 초연 당시가 아니라 통일 운동이 무르익어 가던 1850년대 후반, 정확히는 1859년 나폴리 거리에서부터 널리 번지기 시작했다고 확인됩니다.

요컨대 베르디의 오페라가 리소르지멘토를 직접 촉발했다기보다는, 후대의 통일 운동 세력이 이탈리아의 국가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보편적 감동을 지닌 베르디의 걸작을 발탁해 사후적으로 상징화한 것에 가깝습니다. 이러한 재평가는 작품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술의 생명력이 후대의 집단 기억과 결합해 한 국가의 신화를 어떻게 빚어내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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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가일 역이 어려운 이유, 넓은 음역과 거친 고음

베르디가 이 작품에서 구축한 음향은 이전 세대인 벨리니나 도니체티가 구사하던 우아한 벨칸토 양식의 관습을 찢어 버리는 파격의 연속이었습니다. 인물들의 권력욕과 신성 모독, 절망을 성악적 한계를 돌파하는 물리적인 마찰음으로 형상화한 것입니다.

살인적인 테시투라의 해부

오페라 역사상 나부코의 큰딸(후에 노예의 핏줄로 밝혀지는) 아비가일만큼 연주자에게 신체적 부담을 안기는 배역은 드뭅니다. 이 배역은 이른바 드라마틱 소프라노 다질리타라는 이질적인 성종을 요구합니다. 아비가일의 악보는 묵직하고 어두운 흉성의 질감과 극단적으로 날카로운 초고음의 콜로라투라 기교를 한 명의 가수에게 동시에 요구합니다. 분노에 휩싸인 독창에서는 아주 높은 음에서 순식간에 두 옥타브 가까이 아래로 떨어지는 도약 구간이 자주 반복됩니다. 이러한 변칙적인 테시투라는 왕좌를 향한 집착과 사랑을 얻지 못한 질투, 출생의 비밀이 주는 열등감이 뒤엉킨 인물의 심리 상태를 소리의 왜곡을 통해 그려 내는 장치입니다.

배역 성부 성악적 기법 및 심리적 메타포
아비가일
(Abigaille)
드라마틱 소프라노 다질리타 극단적인 2옥타브 도약과 맹렬한 콜로라투라 장식음. 하행 도약의 강한 흉성 압박은 노예 출신의 열등감과 권력을 향한 집착을 대조적으로 나타낸다.
나부코
(Nabucco)
베르디 바리톤 잔인한 폭군에서 이성을 잃는 광인으로, 다시 회개하는 아버지로 전락과 회복을 반복한다. 낮은 조성의 레치타티보로 권력의 허망함을 표현한다.
자카리아
(Zaccaria)
바소 프로폰도(베이스) 흔들리지 않는 종교적 권위. 깊은 저음역을 통해 억압받는 민족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무게감을 부여한다.

스트레포니, 나부코의 첫 아비가일

이토록 살인적인 아비가일 배역의 난이도는 초기 이탈리아 오페라사에 한 소프라노의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이 무자비한 악보를 1842년 초연 무대에서 소화해 내며 극을 성공으로 이끈 소프라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입니다. 당시 스물일곱, 이탈리아의 인기 오페라 가수였던 그녀는 절망에 빠진 베르디의 악보에서 천재성을 알아보고 극장 측에 이 작품을 1842년 시즌 무대에 올리도록 강하게 요청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다만 그녀의 목소리가 무너진 원인을 나부코 한 작품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입니다. 실제로는 나부코를 부르던 무렵부터 이미 성대에 과부하의 조짐이 있었고, 이후로도 몇 해 더 무대를 이어가다가 잦은 임신과 과로, 여러 배역을 소화하며 쌓인 피로가 누적되어 1845년 팔레르모에서 혹평받는 무대를 겪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1846년 2월, 서른한 살의 나이로 무대에서 완전히 은퇴했습니다. 나부코의 아비가일은 그 긴 쇠퇴 과정의 결정적인 한 장이었지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은퇴 후 파리로 옮겨 성악 교사로 지내던 스트레포니는 1859년 베르디와 정식으로 결혼해 평생의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오페라 나부코의 아비가일 초연 가수이자 베르디의 아내였던 소프라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의 모습
주세피나 스트레포니 사진

1842년 초연 무대의 이면

음악의 스케일은 거대하고 성서의 스펙터클은 장엄했지만, 1842년 밀라노 라 스칼라의 첫 무대는 철저히 세속적인 극장 경영의 제약 아래 만들어졌습니다. 지배인 메렐리는 이미 한 번 실패를 겪은 베르디의 신작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할 뜻이 없었습니다. 당대의 기록에 따르면 초연의 무대 장치와 의상은 완전히 새로 만든 것이 아니라, 6년 전인 1836년 같은 극장에서 안무가 안토니오 코르테제가 올렸던 같은 소재의 발레 공연에서 쓰인 소품을 상당 부분 재활용해 임시로 꾸민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탈리아 낭만주의 무대 미술을 이끌던 산퀴리코 학파의 필리포 페로니가 남긴 3막 바빌론 공중 정원 스케치는 당시 오페라 극장이 대중에게 팔고자 했던 웅장한 오리엔탈리즘의 분위기를 짐작하게 합니다. 예산이 넉넉지 않은 가운데서도 거대한 이교도의 시각적 환상을 만들어야 했던 무대 미술가들의 분투는, 압도적인 합창의 소리로 무대의 빈틈을 채운 베르디의 전략과 맞물려 관객에게 강한 몰입감을 안겼습니다.

현대 연출은 나부코를 어떻게 난민 문제로 읽는가

18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현대 오페라 연출가들은 나부코의 고대 서사를 21세기의 현실로 옮겨 놓는 작업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2019년 베르디 페스티벌 파르마에서 호평받은 스테파노 리치와 잔니 포르테의 연출은 기존의 장식적인 신전 무대를 걷어내고, 그 자리에 영화 감독 왕가위의 작품에서 착안한 2046년의 근미래 디스토피아, 거대한 군함의 내부를 세웠습니다. 나부코는 이 배를 지배하는 독재자로, 선박에 갇힌 하층민들을 억압하는 인물로 그려지며, 이는 오늘날 지중해를 건너다 좁은 선박 안에 갇히는 현대 난민들의 처지를 은유합니다. 같은 해 함부르크 국립오페라는 실제 난민들을 합창단원으로 참여시킨 연출을 선보였고, 빈 국립오페라는 20세기 나치 정권을 피해 여행 가방을 든 난민들의 모습으로 이 오페라를 무대에 올린 적도 있습니다.

바빌론 유수라는 고대의 사건은 오늘날 연출가들의 손끝에서 국가 폭력에 의한 강제 이주라는 현대의 비극으로 거듭 재조립되고 있는 셈입니다.

왜 나부코는 지금도 울리는가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는 개인의 상실과 역사적 서사, 예술가의 노동이 만나 어떻게 오래 남는 고전이 되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역사학자들은 리소르지멘토 선동 도구라는 신화를 걷어 내고 있지만, 그 재평가는 오히려 베르디가 써 낸 음악 자체의 힘을 더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극한의 고통 속에서 써 내려간 슬픔의 음표들이 당대 대중의 마음을 흔들었고, 마침내 하나의 집단적 기억으로 스스로 자라난 것입니다.

1901년 1월 27일 베르디가 세상을 떠나고 사흘 뒤인 1월 30일, 밀라노 거리를 지나는 운구 행렬에는 서른만 명에 이르는 인파가 모였고, 그 가운데 일부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흥얼거렸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정확히 한 달 뒤인 2월 26일과 27일, 베르디와 아내의 유해를 그가 세운 음악가 요양원으로 옮기는 두 번째 의식에서는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이끄는 대규모 합창단이 이번에는 격식을 갖추어 이 곡을 불렀습니다. 한 달 간격을 두고 벌어진 이 두 장면, 곧 거리의 자발적인 흥얼거림과 뒤이은 공식적인 합창이 오늘날 하나의 장면처럼 겹쳐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가라, 내 마음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 Va pensiero sull’ali dorate.

혹독한 시련을 견뎌 낸 예술가가 빚어낸 선율이 어떻게 세월을 넘어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연결하는지, 이 노래는 지금도 증명하고 있습니다.

마무리

나부코를 둘러싼 신화의 상당 부분은 후대에 덧붙여진 것으로 밝혀졌지만, 그렇다고 이 오페라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개인적 파멸에서 시작해 우연한 만남을 거쳐 하나의 걸작으로 완성되고, 다시 한 세기에 걸쳐 국가의 기억으로 자라난 이 곡의 여정 자체가, 예술이 실제로 어떻게 살아남는지를 보여 주는 정직한 기록에 가깝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나부코는 어떤 배경에서 작곡되었나?

베르디는 1838년부터 1840년 사이 두 자녀와 아내 마르게리타 바레치를 잇달아 잃었고, 그 사이 무대에 올린 오페라 하루만의 임금도 실패해 작곡을 그만두려 했습니다. 라 스칼라 지배인 바르톨로메오 메렐리가 건넨 대본에서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구절을 발견한 것이 나부코 작곡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만 이 일화는 베르디 본인이 수십 년 뒤 회고록에서 밝힌 것이라, 세부는 다소 극적으로 다듬어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Q.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정말 이탈리아 독립운동의 상징이었나?

오랫동안 그렇게 알려져 왔지만, 음악학자 로저 파커 등의 사료 재검증에 따르면 1842년 초연 당일 실제로 앙코르를 받은 곡은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아니라 4막의 위대하신 여호와였습니다. 나부코를 리소르지멘토의 상징으로 보는 통념은 초연 당시가 아니라 이후 수십 년에 걸쳐 형성되었다는 것이 현대 학계의 재평가입니다.

Q. 나부코 초연에서 실제로 앙코르를 받은 곡은 무엇인가?

4막 2장의 아 카펠라 합창 위대하신 여호와였습니다. 당시 오스트리아 당국은 종교적 성격이 강한 곡에 한해 앙코르를 허용했기 때문에, 정치적 저항의 노래가 아니라 종교적 구원을 노래한 합창이 그날 밤의 진짜 앙코르곡이었습니다.

Q. 아비가일 역은 왜 그렇게 부르기 어려운가?

드라마틱 소프라노와 콜로라투라 기교를 동시에 요구하는 역이기 때문입니다. 짧은 구간 안에서 두 옥타브에 가까운 도약을 반복하며 묵직한 흉성과 날카로운 두성을 오가야 해서, 오페라 소프라노 배역 가운데서도 성대에 부담이 큰 배역으로 꼽힙니다.

Q. 나부코 초연의 첫 아비가일은 누구였나?

소프라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였습니다. 그녀는 1842년 초연에서 아비가일을 노래해 극을 성공으로 이끌었지만, 이미 그 무렵부터 성대에 무리가 오고 있었고 이후에도 무대를 이어가다 1846년, 서른한 살에 완전히 은퇴했습니다. 스트레포니는 이후 1859년 베르디와 정식으로 결혼했습니다.

Q. 베르디 장례식에서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불린 것은 사실인가?

사실이지만 두 개의 다른 행사가 하나로 뒤섞여 알려진 경우가 많습니다. 1901년 1월 30일 밀라노 거리의 첫 장례 행렬에는 30만 명이 모여 일부가 자연스럽게 이 노래를 불렀고, 그로부터 한 달 뒤인 2월 26일과 27일 유해를 음악가 요양원으로 옮기는 두 번째 의식에서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대규모 합창단이 정식으로 이 곡을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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