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음악원의 전통과 형식을 중요시하는 교육은 드뷔시와 잘 맞지 않았다. 자신만의 화성과 독특한 음악형식을 추구하는 드뷔시는 음악원 교수들과 마찰을 빚으며, 교수가 휴강하면 자신이 강의를 하는 기행을 펼치기도 했다.
재학 중인 19세 때는 학비를 벌기 위해 차이콥스키의 후원자로 알려진 폰 메크 부인의 여행에 피아니스트로서 동행하기도 했다. 그때의 인연으로 드뷔시는 자신이 작곡한 소품을 차이콥스키에게 보냈지만 혹평을 받았다.
1884년, 드뷔시는 칸타타 <방탕한 아들>로 로마대상을 수상했다. 3년간 로마의 메디치 빌라에 머물며 유학을 하게 되었지만 로마에서의 음악교육도 잘 맞지 않아 2년 만에 귀국하게 된다. 귀국 후 드뷔시는 당시 파리에서 유행하던 '살롱'의 사교모임을 통해서 예술가들과 교류를 나누게 되었는데, 특히 인상주의 미술과 상징주의 시에 매료되었다. 이들의 영향을 받은 드뷔시는 형식과 틀에 갇혀있는 전통에서 벗어나 결국 인상주의 음악이라는 분야를 개척하게 된다.
드뷔시의 인상주의 음악은 몽환적인 분위기, 포착하기 힘든 신비로움, 손에 잡힐 듯 잡하지 않는 멜로디의 미묘한 흐름, 애매모호한 화성, 베일에 싸인 듯 명확하지 않는 박자와 마디, 감지할 수 없는 어렴풋한 빛이 그 특징이다.
![]() |
드뷔스 (출처 : worldhistory.org) |
1888년과 1889년에 바그너에게 심취해 바이로이트 음악제를 방문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자신의 음악적 한계를 느끼고 자신만의 색깔을 찾고자 하였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본능을 파고드는 음악을 추구하고자 한 것이다.
1889년에 열린 파리만국박람회에서 인도 등의 동양 예술을 접하며 강렬한 인상을 받은 것이 큰 계기가 되었다.
1894년 말라르메의 시에 곡을 붙인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을 발표했다. 시는 여름날 오후 해변의 그늘에서 목신이 아련한 꿈을 꾸는 것을 표현했는데, 드뷔시는 이것을 환상적이고 괸능적인 음악으로 표현했다. 이 작품이 큰 호평을 받자 드뷔시는 자신의 미학적 모색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1903년 드뷔시의 유일한 오페라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를 발표하여 큰 논란이 되었으나 공연을 거듭할수록 인기를 얻게 되었다. 마테를링크의 희곡을 원작으로 했으며 음악적으로 바그너의 영향이 엿보인다.
피아노곡 <판화>와 교향시 <바다>로 이전의 몽환적 분위기에서 벗어나 색채와 빛을 분명하게 표현하는 또다른 인상파적 경향으로 옮겨갔다.
그후 피아노곡 <영상> 1, 2집, <어린이 세계>, <이베리아> 등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1914년에 암이 발병된 가운데서도 6개의 소나타를 작곡하고자 결심하였으나 세번째 작품 바이올린 소나타를 완성하고 1918년에 사망했다.
드뷔시의 생애에서 여성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19세 만났던 바니에 부인에게는 25곡의 가곡을 헌정했으나 30대에 접어든 드뷔시는 가브리엘 뒤퐁과 8년 동안 동거를 했다. 그녀와 동거를 하면서도 여가수 테레즈 로제와 약혼을 했지만 취소되었고, 카트린 스티븐슨이란 여성에게 청혼을 한다. 뒤퐁은 권총 자살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한 후 드뷔시의 곁을 떠난다.
그후 37세의 드뷔시는 로잘리 텍시에와 결혼을 하지만 부자 은행가의 아내인 엠마 바르닥과 교제를 시작하자 텍시에도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했다. 이렇게 두 명의 여인이 자살을 시도해서 드뷔시는 도덕적으로 큰 지탄을 받아 많은 친구들을 잃기도 했다. 이렇게 드뷔시는 여성 편력이 심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은 생의 마지막까지 작곡에 전념하는 진지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드뷔시는 환갑도 넘기지 못한 나이에 일찍 생을 마감했네요. 여자도 그렇고 음악도 그렇고 뭔가 빠지면 제대로 하는 분 같아 보입니다.
답글삭제말씀하신 것처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추석연휴 행복하고 안전하게 보내세요^^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