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의 뒤를 이어 이탈리아 오페라의 거장이 된 자코모 푸치니의 생애와 작품을 살펴보고자 한다.
푸치니(Giacomo Puccini, 1858-1924)는 토스카나 지역의 작은 도시 루카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교회 음악을 담당해온 음악가 집안이었는데, 5대에 걸쳐 교회 오르가니스트를 세습했다. 푸치니가 5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그 지위를 이어받았다. 하지만 아무리 음악가 피를 이어받은 신동이라도 5세 나이로 교회 오르간을 연주하기는 무리였기에 잠정적으로 삼촌이 그 자리를 맡았다.
16세인 1874년 루카 음악원에 들어갔다. 그후 18세 때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 Aida〉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은 푸치니는 그 자리에서 오페라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교회 오르가니스트라는 안정적인 길을 버리고 오페라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한 푸치니는 1880년 우수한 성적으로 밀라노 음악원에 입학했다.
밀라노 음악원을 졸업한 푸치니는 산초뇨 청소년 센터가 공모하는 오페라 콩쿠르에 한 〈빌리Le Villi〉라는 작품을 출품했지만 입상에는 실패했다. <빌리>가 1884년 초연되었는데, 리코르디 출판사가 푸치니의 능력을 눈여겨보고 오페라 작곡을 의뢰해 왔다. 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푸치니는 두 번째 오페라 <에드가르 Edgar>를 작곡하여 1889년 밀라노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하였지만 흥행에는 실패했다.
푸치니가 첫 오페라를 발표할 즈음인 1884년, 그는 친구의 아내 엘비라와 사랑에 빠졌다. 푸치니의 아이를 갖게 된 엘비라는 1886년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6살 난 딸 포스카를 데리고 푸치니의 집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당시 가톨릭 국가였던 이탈리아에서 이혼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법적인 아내가 될 수 없었다.
쥘 마스네(Jules Massenet, 1842 - 1912)의 오페라 <마농>이 큰 성공을 거두게 되자 푸치니도 같은 내용의 오페라 <마농 레스코 Manon Lescaut>를 1893년 초연하여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리하여 푸치니는 베르디의 뒤를 잇는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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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thetimes.co.uk |
이후 푸치니는 1896년 <라 보엠>, 1900년 <토스카>, 1904년 <나비부인> 등 오페라 역사에 길이 빛나는 걸작들을 발표하였다. <라 보엠 La Bohème>은 프랑스 시인 앙리 뮈르제의 <보헤미안들의 생활>을 바탕으로 작곡한 것으로 가난한 시인 로돌프와 다락방에서 수를 놓고 살아가는 가난한 처녀 미미를 중심으로 로돌프의 친구인 음악가 쇼나르와 철학자 콜리네, 화가 마르첼로 그리고 그의 애인 뮤제타의 보헤미안적 삶을 그렸다.
<토스카 Tosca>는 프랑스 작가 사르두의 동명 희곡을 바탕으로 작곡한 것으로 오페라 가수 토스카와 그녀의 애인인 화가 카바라도시 그리고 토스카를 좋아하는 로마 총독 스카르피아 남작 사이에 벌어진 사랑의 비극적인 내용이다.
<나비 부인 Madama Butterfly>은 일본의 나가사키 항 근처에 살고 있는 게이샤 소녀 초초 상이 미국 해군 장교 핑커톤과 결혼식을 올리고 아들까지 낳지만, 본국으로 돌아간 핑커톤이 다른 여자와 결혼하자 단도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내용이다. <나비 부인>은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되었는데,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하지만 새로운 버전으로 3개월 후에 무대에 오른 <나비 부인>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나비 부인>을 쓰고 있는 동안 푸치니는 코리나라는 여성과 또다시 사랑에 빠졌다. 상심한 엘비라는 푸치니 곁을 떠나려고 하지만 푸치니가 교통사고로 부상이 너무 심해 옆에서 간호를 해주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다음 날 엘비라의 남편이 사망하자 두 사람의 결혼을 가로막던 장애물이 갑자기 없어져 두 사람은 정식으로 부부가 될 수 있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의 위촉을 받고 개척시대의 미국 서부를 배경으로 한 <서부의 아가씨>가 1910년 초연되었을 때는 호평을 받았으나 현재는 무대에 잘 올려지지 않는다.
말년에 푸치니는 고대 중국을 배경으로 한 <투란도트 Turandot> 작곡에 들어갔다. 중국 고대 리듬이나 음악을 듣기 위하여 대영박물관의 자료실을 자주 찾았다. 하지만 그때 암을 치료하기 위한 수술이 실패하여 66세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미완성작인 <투란도트>는 푸치니와 알고 지냈던 프란코 알파노에 의해 완성되어 명지휘자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밀라노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푸치니는 평생 오페라 이외의 다른 장르의 음악은 거의 작곡하지 않았다. 오페라도 작품도 미완성으로 남은 <투란도트>를 포함하면 오페라도 10편 정도 밖에 안된다. 그 이유는 당시 오페라 작곡의 저작권이 확보된 상황과도 연관이 있다. 작품이 공연될 때마다 수입이 들어오니 이전 세대 오페라 작곡가들처럼 생계를 위해 무리하게 다작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페라 외의 작품으로는 밀라노 음악원 초년 시절 작곡한 <교향곡 전주곡>, 졸업 작품 <교향적 카프리치오>, 베르디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작곡한 <레퀴엠> 등이 있다.
푸치니는 오케스트라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반음계적 선율 진행을 사용했으며,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새롭고 혁신적인 화음을 만들어 냈다. 푸치니의 오페라의 특징은 드라마틱한 전개와 기억하기 쉬운 멜로디이다. 지나치게 대중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었으나 푸치니가 오페라의 거장이 된 것은 아름답고 친숙한 멜로디를 잘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18세 때 아이다를 보고 오페라 작곡자가 되기로 결심하다니... 이래서 다들 유년 시절에 다양한 경험을 하라고 하는 건가 봅니다.
답글삭제맞습니다! 멋진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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