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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좋아했던 드보르자크(Antorin Dvotak)의 생애와 작품

  프라하 근교 넬라호제베스에서 여인숙과 정육점을 경영하는 아버지의 장남으로 태어난 드보르자크(Antorin Dvotak, 1841-1904)1847년 마을 학교에 입학하여 노래와 바이올린을 배우며 일생의 첫 음악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의 바이올린 실력은 크게 향상되었으며, 교회와 마을의 축제에 폴카, 마주르카, 행진곡, 왈츠 등의 곡을 연주하였다.


  가업을 잇게 하려는 부친의 뜻에 따라 독일어를 공부하기 위해 가까운 소도시 즐로니체(Zlonice)로 보내졌던 그는 독일어 교사이며 오르간 연주자이기도 했던 리만에게서 독일어뿐만 아니라 악기 연주법과 작곡을 배우면서 본격적으로 음악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부유한 친척의 도움으로 185716세에 프라하 오르간 학교에 입학함으로써 드보르자크는 정식으로 음악의 길을 걷게 된다.


  드보르자크는 졸업 후 카렐 콤자크 악단에 비올라 연주자로 입단하지만 본격적인 오케스트라가 아닌 까닭에 호텔이나 레스토랑에서 연주하곤 했다. 그러다 1862년 프라하에 스메타나가 창단한 국립극장이 설립되자 이곳의 오케스트라에서 제1 비올라 연주자로 활동하면서 스메타나의 강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드보르자크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사진입니다.
1893년 뉴욕에서 드보르자크 (맨 왼쪽)



  1865년 최초의 교향곡을 썼고, 1870년 최초의 오페라 알프레드>를 완성했지만 무대에서 상연되지는 못했다. 그러다 1872년 혼성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찬가>가 대성공을 거두면 음악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1875년 오스트리아 정부 장학금에 지원하게 되었는데 심사위원이었던 브람스의 주도적인 역할로 드보르자크가 수상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1878년 브람스의 소개로 짐로크 출판사와 계약한 <슬라브 무곡> 1집의 대성공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1882년에는 오페라 <꾀 많은 농부>가 독일의 드레스덴에서 연주되었고, 1883년 종교음악인 <슬픔의 성모 Stabat Mater, Op. 58>의 영국 초연을 계기로 런던 필하모닉 협회의 초청을 받는다. 이후 1890년에는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으로부터, 이듬해에는 프라하의 카테르 대학에서도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고, 1891년에는 프라하 음악원의 작곡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이어 그는 1892년에는 미국의 음악가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된 뉴욕의 미국 국립음악원(National Conservatory of Music of America)의 초대 음악원장 및 작곡 교수로 재직하였다. 드보르자크는 자신의 교향곡 9<신세계로부터>를 카네기홀에서 초연하고 그의 생애 가장 위대한 성공이라 할 만큼 극찬을 받는다.


  이후 드보르자크는 조국에 대한 향수로 프라하로 돌아가게 되며, 현악 4중주와 교향시 작곡에 몰두하게 된다. 1901년 초연된 오페라 <루살카>는 그의 오페라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작품이며, 1903년 만들어진 오페라 <아르미다>는 그의 마지막 오페라로 드보르자크는 1904년 건강이 나빠져 뇌졸중으로 프라하에서 생을 마감한다. 장례식은 국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지금도 체코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기차를 좋아했던 보르자크는 스메타나와 함께 특징 있는 리듬에 대해 고도의 민감한 감정을 가진 음악가로서 체코 국민음악의 길을 완성한 작곡가였다그는 관현악법의 대가라 일컬어지는데 그가 사용하는 악기의 종류에 따라 매우 섬세한 작법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이것은 소규모의 작품으로부터 교향악적 작품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특징으로 최소한의 어법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그의 표작품으로는 교향곡 8번과 9현악4중주곡 <아메리카>첼로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어머니가 가르쳐주신 노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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