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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 연주의 새로운 시대를 연 파가니니(Paganini)의 생애와 작품

연주회장 입구에서 위조표가 나돌 정도로 표를 구하기 힘들었던 바이올리니스트, 무대에 오르면 검은 옷차림과 창백한 얼굴만으로도 객석을 얼어붙게 만들었던 연주자가 있었습니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로 꼽히는 니콜로 파가니니(Niccolò Paganini, 1782~1840)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생애는 초인적인 기교와 상업적 성공, 그리고 그를 둘러싼 신화가 서로를 부풀려 온 과정이기도 합니다.

파가니니 한눈에 보기
  • 생몰년: 1782년 10월 27일 제노바 출생, 1840년 5월 27일 니스에서 사망(57세)
  • 대표 악기: 과르네리 델 제수(1743년 제작), 별명 일 카노네
  • 대표작: 바이올린을 위한 24개의 카프리스 Op.1, 바이올린 협주곡(현재 6곡 확인)
  • 전환점: 1828년부터 1834년까지 이어진 유럽 순회공연
  • 대중적 별명: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제노바의 소년, 혹독한 연습으로 재능을 벼리다

파가니니는 이탈리아 제노바의 부두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마추어 음악가였던 아버지에게 만돌린과 바이올린을 배웠는데, 정식으로 교습을 받기 시작한 지 반 년 만에 아버지의 실력을 뛰어넘을 정도로 재능을 드러냈습니다. 아들의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는 파가니니를 유명한 교회의 바이올리니스트로 키우겠다는 목표로 혹독한 연습을 시켰습니다.

12~13세이던 1795년에는 첫 바이올린 연주회를 열었고,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꼽히던 알레산드로 롤라(Alessandro Rolla)에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롤라는 파가니니의 초인적인 기교와 악보를 읽는 속도에 감탄해 작곡 공부를 권했고, 파가니니는 페르디난도 파에르(Ferdinando Paer)와 가스파로 기레티(Gasparo Ghiretti) 두 사람에게 작곡을 배웠습니다. 15세부터는 하루 열 시간 넘게 바이올린을 연습하며 자기만의 연주 기법을 개발했고, 그 결과 17세이던 1799년에는 북이탈리아 지방에서 가장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라는 평판을 얻었습니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니콜로 파가니니의 초상
Nicolo Paganini

도박과 방황, 그리고 프리랜서로 서다

이른 성공에도 불구하고 파가니니는 도박장의 유혹을 끊지 못해 번 돈을 자주 탕진했습니다. 그의 연주에 매료된 여러 여성과의 염문도 끊이지 않았고, 1801년부터 1804년까지는 토스카나의 한 귀부인과 함께 지내며 연주 활동을 완전히 쉬었다고 전해집니다.

제노바로 돌아온 파가니니는 1805년부터 다시 연주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의 명성을 바탕으로 그는 나폴레옹의 여동생 엘리자 바치오키가 다스리던 루카 궁정의 오페라 극장에서 지휘자로 3년간 일했습니다. 그러나 1809년부터는 어느 궁정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연주자로 독립을 선언하고, 이탈리아 각지를 도는 연주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일 카노네, 평생의 악기가 된 바이올린

파가니니의 도박벽이 만들어 낸 가장 유명한 일화는 그의 대표 악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1802년 무렵 리보르노(Livorno)에서, 그는 아끼던 아마티(Amati) 바이올린을 도박으로 잃었는데, 이 사정을 알게 된 리브롱(Livron)이라는 사업가가 자신이 갖고 있던 과르네리 델 제수(Guarneri del Gesù) 바이올린을 그에게 내주었습니다. 정확히 선물로 준 것인지 연주용으로 빌려준 것이 그대로 굳어진 것인지는 자료마다 표현이 조금씩 다르지만, 이 만남 이후 파가니니는 평생 이 바이올린을 자신의 악기로 삼았습니다.

이 바이올린은 주세페 바르톨로메오 과르네리 델 제수가 1743년에 만든 것으로, 음량이 유난히 크고 강렬하다는 이유로 대포라는 뜻의 일 카노네(Il Cannone)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파가니니는 세상을 떠나며 이 바이올린을 고향 제노바시에 남겼고, 지금도 팔라초 도리아투르시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제노바시는 지금도 정기적으로 큐레이터가 이 악기를 연주해 상태를 관리하며, 파가니니 국제 콩쿠르 우승자가 이 악기로 연주하는 전통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1828년부터 1834년까지, 유럽을 사로잡은 순회공연

파가니니의 이름을 이탈리아 밖으로 퍼뜨린 것은 1828년부터 1834년까지 이어진 대규모 유럽 순회공연이었습니다. 1828년 8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연주회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독일과 폴란드, 보헤미아의 주요 도시를 잇달아 돌았습니다. 1831년 2월에는 스트라스부르를 거쳐 파리로, 다시 영국 런던으로 무대를 옮겼습니다. 그는 1834년 9월에야 연주 여행을 접고 고향 제노바로 돌아왔습니다.

이 순회공연이 가는 도시마다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면서, 상점에는 파가니니의 옷차림을 본뜬 이른바 파가니니 스타일의 양복과 모자, 장갑, 구두까지 등장해 크게 유행했습니다. 표를 구하지 못한 관객들 사이에서 위조표가 나돌 정도로 수요가 몰리자, 파가니니가 직접 공연장 입구에서 위조표를 가려내며 입장을 관리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연주 실력만이 아니라 이미지와 화제성이 상업적 인기로 직접 이어지는 이런 구조는, 오늘날 익숙한 대중스타 마케팅의 원형으로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신화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사람들은 이런 파가니니를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불렀습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초인적인 연주 기술을 얻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습니다. 이런 이미지에는 그의 외모도 한몫했습니다. 항상 검은 옷차림에 장발과 창백한 얼굴, 깡마른 체격을 하고 있었고, 손과 손가락이 유난히 길어 엄지가 손목에 닿을 정도로 유연했다고 전해집니다.

다만 이 신화를 단순한 미신으로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여러 연구자들은 파가니니 자신이 이런 신비로운 이미지의 상업적 가치를 간파하고 스스로 가꾸었을 가능성에 주목합니다. 무대 위에서의 극적인 연출과 좀처럼 악보를 공개하지 않는 신비주의 전략이 결합해 소문을 더 키우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것입니다. 즉 악마와의 계약설은 대중이 자연스럽게 만들어 낸 이야기인 동시에, 파가니니 본인이 굳이 부인하지 않고 활용한 이미지에 가까웠던 셈입니다.

이 소문의 여파는 그의 죽음 이후까지 이어졌습니다. 그가 57세로 세상을 떠나자, 이단이라는 세간의 평판을 이유로 성별된 땅에 매장하는 것이 한동안 거부되었습니다. 시신은 정식으로 안장되지 못한 채 여러 해 동안 옮겨 다녔고,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비로소 정식 매장이 허가되었습니다. 구체적인 이장 경위와 최종 안장 연도는 자료마다 다르게 전해지지만, 수년간 정식 매장이 거부되었다가 결국 허가되었다는 사실만큼은 여러 자료가 공통적으로 확인해 줍니다.

24개의 카프리스, 바이올린의 경전

파가니니의 작품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꼽히는 곡은 대략 1801년에서 1807년 사이에 작곡된 것으로 보는 자료가 많은 〈바이올린을 위한 24개의 카프리스〉(24 Caprices for Solo Violin, Op.1)입니다. 더 넓게 1802년에서 1817년 사이로 잡는 자료도 있어 정확한 작곡 시기는 하나로 확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카프리스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독창적인 악상을 자유롭게 펼치는 곡을 뜻합니다. 이 작품은 1820년 밀라노의 리코르디 출판사에서 출판되었는데, 특정 후원자가 아니라 모든 예술가에게라는 뜻의 헌사와 함께 세상에 나왔다는 점이 이채롭습니다.

피아노 반주 없이 바이올린 혼자 연주하는 이 곡은 출판 당시 연주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고난도 기교로 가득했습니다. 하나의 현, 주로 G선만으로 곡 전체를 끌고 가는 기법, 높은 음역에서 두 음을 동시에 짚는 더블 스토핑, 이중 트릴, 왼손으로 줄을 튕기면서 동시에 오른손으로 활을 켜는 좌수 피치카토까지, 파가니니가 개발한 주법이 총망라되어 있어 지금도 바이올린 연주자들 사이에서 경전처럼 다뤄집니다.

발표되지 않았던 협주곡들

파가니니는 바이올린 협주곡도 여러 곡 작곡했습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협주곡은 모두 6곡이지만, 정작 그가 살아있는 동안 정식으로 출판된 곡은 없다시피 했습니다. 1번 협주곡(D장조, Op.6)조차 그의 사후인 1851년에야 출판되었고, 3번과 6번은 20세기 후반인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필사본이 재발견되어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파가니니가 협주곡을 이렇게 오랫동안 감춘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오케스트라와 협연할 때도 연주 직전이 되어서야 단원들에게 악보를 나눠주었고, 연주가 끝나면 곧바로 회수했습니다. 남이 무단으로 악보를 빼돌려 해적판이 나도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다만 이런 태도가 그의 모든 작품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앞서 살펴본 24개의 카프리스는 오히려 그가 생전에 직접 출판을 허락한 작품이었습니다. 그가 감춘 것은 자신만이 연주할 수 있는 협주곡 레퍼토리였지, 후대 연주자들에게 남기고자 한 기교의 교본까지 감춘 것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파가니니는 언제 태어났나요?

1782년 10월 27일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태어났습니다. 여러 백과사전과 전기 자료를 교차확인한 결과 출생연도는 1782년으로 일관되게 기록되어 있으며, 다른 연도가 함께 거론되는 논쟁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Q. 파가니니가 쓰던 바이올린 일 카노네는 어떤 악기인가요?

주세페 바르톨로메오 과르네리 델 제수가 1743년에 만든 바이올린입니다. 대포처럼 크고 강렬한 음량 때문에 일 카노네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지금은 제노바시가 관리 주체로, 정기적인 연주로 상태를 유지하고 국제 콩쿠르 우승자에게 연주 기회를 주는 방식으로 이 악기를 살아 있게 지키고 있습니다.

Q. 파가니니가 정말 악마와 계약했다는 소문이 있었나요?

정식으로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대중 사이에 떠돌던 소문이었습니다. 다만 여러 연구자들은 파가니니가 이런 신비로운 이미지 자체를 스스로 가꾸고 활용했을 가능성에 주목합니다. 검은 옷차림과 창백한 외모, 무대 위의 극적인 연출이 소문을 부풀리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것입니다.

Q. 유럽 순회공연은 왜 대중스타 개념의 원형으로 평가되나요?

위조표가 나돌 만큼 표를 구하기 어려웠고, 그의 옷차림을 흉내 낸 파가니니 스타일 상품까지 유행했습니다. 실력 하나로 얻은 인기가 아니라 이미지 소비까지 얹힌 인기였다는 점에서, 오늘날 흔히 보는 셀러브리티 마케팅의 초기 형태로 평가됩니다.

Q. 24개의 카프리스는 언제 작곡되고 출판되었나요?

작곡 시기를 하나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1801년에서 1807년 사이로 보는 자료가 많지만, 1802년부터 1817년까지 훨씬 넓게 잡는 자료도 있어 정확한 시점은 확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출판 시점만큼은 1820년 밀라노 리코르디라는 사실이 여러 자료에서 일치합니다.

Q.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몇 곡인가요?

총 6곡으로 정리되어 있지만 대부분 사후에야 세상에 나왔습니다. 1번은 세상을 떠난 지 11년째인 1851년에 처음 출판되었고, 3번과 6번은 그보다 한참 뒤인 1970년대가 되어서야 필사본이 발견되었습니다.

Q. 파가니니의 사인은 무엇이었나요?

기록에는 내출혈로 남아 있습니다. 1822년 무렵부터는 매독과 관련된 증상이, 1834년 무렵부터는 결핵과 관련된 증상이 기록에 남아 있어, 말년으로 갈수록 여러 질환이 겹쳐 건강이 오랫동안 나빠져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말년과 죽음, 그리고 남은 유산

1834년 9월 긴 순회공연을 마치고 제노바로 돌아온 뒤부터 파가니니는 건강이 눈에 띄게 나빠져 연주를 거의 하지 못했습니다. 기록을 보면 1822년 무렵부터 매독과 관련된 증상이, 1834년 무렵부터는 결핵과 관련된 증상이 나타나 오랫동안 여러 질환이 겹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말년에는 만성 인후염으로 목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해 아들이 그의 말을 대신 전해야 했습니다. 그는 1840년 5월 27일 프랑스 니스에서 57세로 세상을 떠났고, 공식 기록은 사인을 내출혈로 남기고 있습니다.

손과 손가락이 유난히 길고 유연했다는 여러 증언을 근거로, 현대 의학자 일부는 마르판 증후군이나 엘러스단로스 증후군 같은 결합조직질환의 가능성을 추정하기도 합니다. 다만 이는 사후에 제시된 가설일 뿐 확진된 사실이 아니며, 그의 신체적 특징이 곧 초인적 재능의 근거였다고 단정할 근거도 아닙니다. 파가니니의 연주가 놀라웠던 것은 몸의 특이성 때문이 아니라, 하루 열 시간이 넘는 연습으로 스스로 개발한 주법을 평생 다듬어 온 결과였습니다.

그가 남긴 일 카노네는 오늘날까지도 그의 이름을 이어 주고 있습니다. 악마와의 계약설이라는 신화는 시간이 지나며 옅어졌지만, 연습으로 쌓아 올린 기교가 청중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는 오늘날의 바이올린 연주자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증명으로 남아 있습니다.

댓글

  1. 귀부인과 토스카나에서 두문불출하던 시기가 더 궁금하네요~ 역시 예술가들은 평범한 삶을 살지 않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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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랑 때문인데 건강 회복도 관련이 좀 있는 것 같아요. 10월 너무 바빠서 포스팅을 많이 못했는데 찾아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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