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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 연주의 새로운 시대를 연 파가니니(Paganini)의 생애와 작품

  니콜로 파가니니(Nicolo Paganini, 1782-1840)는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가난한 부두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마추어 음악가였던 아버지에게 만돌린과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음악을 시작하여 본격적으로 음악 교습을 받기 시작한지 반 년 만에 선생의 실력을 따라잡는 놀라운 재능을 선보였다. 아들의 재능을 간파한 아버지는 파가니니를 유명한 교회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매우 혹독한 연습을 시켰다.

 

  13세 때인 1795년에는 바이올린 연주회를 열었으며, 당대 최고 음악가 알레산드로 롤라의 가르침을 받았다. 파가니니의 초인적인 기교와 악보 읽는 능력에 감탄한 롤라는 그에게 작곡을 공부할 것을 권하자 파가니니는 기레티에게 작곡을 배웠다.

 

  15살 때부터 파가니니는 하루 10시간 이상 바이올린을 연습하며 자기만의 독창적인 연주 기법을 개발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7살 때인 1799년 그는 북이탈리아 지방에서 가장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도박장의 유혹을 끊어 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번 돈을 모두 탕진하기 일쑤였고, 그의 연주에 매료된 수 없는 여자들과의 염문으로 사랑의 모험을 찾아 이리저리 방황하였다. 1801년부터 1804년까지 파가니니는 한 귀부인과 토스카나에 있는 그녀의 성에서 동거를 하며 연주 활동을 하지 않았다.

 

  고향인 제노바로 돌아온 파가니니는 1805년부터 다시 연주 활동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또다시 그의 연주에 열광했다. 이런 명성을 힘입어 파가니니는 누가의 궁정 오페라 극장 지휘자로 임명되어 3년 동안 일했다. 하지만 1809년부터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프리랜서 연주자로 독립을 선언하고 로마나에서부터 돌바르디아 지방까지 아우르는 연주 여행을 하였다.


  1833년 파가니니는 처음으로 해외 연주 여행을 떠났다. 오스트리아 빈이에서의 첫 연주회는 대성공이었다. 상점에서 이른바 '파가니니 스타일'이라고 하는 양복, 모자, 장갑, 구두가 크게 유행할 정도로 큰 인기를 있었다. 1829년 베를린을 비롯한 독일 연주, 폴란드, 프랑스, 영국 등 가는 곳마다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1832년 가을, 파가니니는 긴 연주 여행을 마치고 이탈리아 파르마에 정착했다.


  그 후 파가니니는 건강이 악회되어 거의 연주를 하지 못했다. 파가니니 앓았던 확실한 병명만 해도 패결핵, 매독, 류머티즘, 후두염, 신경장애 등으로 많았다. 33세 이전에 이미 그는 나이에 비해 빨리 늙는 심한 조로(早老)현상을 나타냈으며, 40대로 접어들 무렵부터는 거의 언제나 환자로 생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리한 순회 연주는 결국 그의 건강에 치명타가 되었고, 말년에는 만성 인후염으로 인하여 목소리조차 낼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 아들이 대변인 역할을 해 주어야 했다. 파가니니는 7개월 동안 앓아누웠다가 184052757세로 일생을 마감했다.

 

파가니니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이지미입니다.
Nicolo Paganini


  파가니니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초인적인 기교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그는 당시까지 시도하지 않았던 화려하고 다양한 연주기법을 구사했는데, 웬만한 실력으로는 연주가 불가능한 초인적인 기법들이 대부분이었다. 6선 하나로 연주한다거나 높은 음역에서 더블 스토핑을 구사하고 이중 트릴을 연주하며, 왼손으로 줄을 튕기면서 오른손으로는 활을 켜는 등 흉내 내기 힘든 고난도의 기법들을 능숙하게 해내서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이런 파가니니를 사람들은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불렀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그 대가로 고난도의 연주 기술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파가니니가 57세 나이로 사망하자 교회가 나서서 매장을 거부할 정도였다.

 

  이런 생각의 배경에는 파가니니의 기괴한 풍모도 한몫 했다. 항상 검은 옷차림의 장발 장신에 창백한 얼굴, 깡마른 체격에 피부는 거무스름했으며 손과 손가락이 거미처럼 비정상적으로 길었다고 한다. 파가니니의 손가락은 놀랄 정도로 유연했는데, 심지어 그의 엄지는 팔목에 닿을 정도였다. 그 때문에 파가니니가 마르판 증후군을 앓았다는 주장을 펼치는 사람도 있다.

 

  파가니니의 연주회는 티켓값이 비싸 위조표가 나돌 지경이었다. 그러자 파가니니가 콘서트장 입구에서 위조표를 검사하며 표를 끊어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인기는 파가니니의 놀라운 연주실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가니니는 당시 인기 있는 오페라의 아리아 부분을 바이올린 선율로 연주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을 살펴보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오페라 아리아 선율을 바탕으로 한 변주곡이나 환상곡, 패러프레이즈가 많다.

 

  파가니니는 자신의 기교를 뽐내기 위한 곡만을 작곡했다. 살아생전 자기 작품의 악보 출판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와 협연할 때는 연주 직전이 되어서야 단원들에게 악보를 나눠주었다. 연주가 끝나면 곧바로 회수하여 갔다. 행여 남이 무단으로 빼돌려 해적판 악보가 나돌까 봐 두려웠던 것 같다.


  파가니니의 작품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1810년 경에 작곡한 <바이올린을 위한 24개의 카프리스>(24 Caprice for Solo Violin, Op.1)이다. 카프리스란 형식에 제약받지 않고 독창적이고 발랄한 악상을 표현하는 자유분방한 곡을 말한다. 1820년 로마에서 악보가 출판되었는데, 출판 즉시 연주 불가능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짧은 시간 동안 손가락 근육이 견뎌 내지 못할 정도로 고난도 기교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 곡은 피아노 반주 없이 바이올린 혼자만 연주하는데, 파가니니의 주법이 총망라되어 있는 바이올린의 경전으로 꼽힌다.


  또한 파가니니는 두 개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했다. 그의 협주곡은 멜로디가 아름답고 기교가 화려하지만 음악적인 내용은 그다지 없는 편이다. 따라서 음악적 깊이보다는 바이올리니스트의 화려한 기교를 과시하기 위해 작곡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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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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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귀부인과 토스카나에서 두문불출하던 시기가 더 궁금하네요~ 역시 예술가들은 평범한 삶을 살지 않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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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랑 때문인데 건강 회복도 관련이 좀 있는 것 같아요. 10월 너무 바빠서 포스팅을 많이 못했는데 찾아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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