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사티(Erik Satie, 1866~1925)는 피아노곡 〈짐노페디〉로 가장 널리 알려진 프랑스 작곡가입니다. 그런데 생애를 따라가 보면 조용한 피아노곡의 작곡가보다 훨씬 많은 얼굴이 나옵니다. 몽마르트르 카바레의 반주자, 같은 정장을 여러 벌 맞춰 입은 ‘벨벳 신사’, 악보 곳곳에 엉뚱한 글을 적어 넣은 사람, 연극 막간에 흘려들을 음악을 만든 사람입니다. 프랑스 음향·음악 연구소(IRCAM)의 작곡가 소개는 그를 두고 “흔히 의도하지 않은 채, 다른 이들이 훗날 자기 이름을 붙이게 될 새로운 형식의 선구자가 되었다”고 쓰고, 그 예로 배경 음악과 끊김 없이 이어지는 음악을 듭니다. 이 글은 그 평가가 어떤 작품과 기록에 기대고 있는지를 생애 순서대로 짚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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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쉬잔 발라동, 〈에릭 사티의 초상〉, 1892~1893년, 캔버스에 유채, 41×22cm, 파리 퐁피두센터 국립현대미술관, AM 1974-117. 검은 모자에 코안경을 걸치고 붉은 기가 도는 수염을 기른 스물예닐곱 살 무렵의 사티를 그렸다. |
- 생몰년: 1866년 5월 17일 옹플뢰르 출생, 1925년 7월 1일 파리에서 사망(59세)
- 활동지: 옹플뢰르, 파리 몽마르트르, 파리 근교 아르쾨유
- 분야: 작곡가, 카바레 피아노 반주자
- 대표작: 〈짐노페디〉 세 곡(1888), 〈배 모양의 세 작품〉(1903), 발레 〈파라드〉(1917), 가구 음악(1917~1923, 1920년 첫 공개 연주는 다리우스 밀요와 공동), 〈베사시옹〉
- 별명: 같은 벨벳 정장을 여러 벌 맞춰 입고 다녀 붙은 벨벳 신사
- 음악사적 평가: IRCAM은 배경 음악과 끊김 없는 음악 같은 새 형식의 선구자로 소개하고, 그를 아르쾨유 악파의 창설자로 적습니다
에릭 사티 생애, 옹플뢰르에서 파리로
사티는 1866년 5월 17일 프랑스 항구 도시 옹플뢰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선박 중개인이었고, 어머니는 영국인이었습니다. 1925년 영국 음악 잡지의 부고는 그를 “영국인 어머니의 아들”로 소개했고, 두 사람은 1865년 영국에서 혼인했습니다.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난 뒤 사티는 조부모 손에서 자랐습니다. 첫 음악 스승은 옹플뢰르 생레오나르 성당의 오르가니스트 비노였습니다.
1879년 아버지는 음악가 외제니 바르네슈와 재혼했고, 같은 해 사티의 이름이 파리 음악원 학적부에 올랐습니다. 학교생활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1882년 1월 피아노 시험에서 그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고, 1885년 11월에야 예비 시험을 다시 통과해 마티아스의 피아노반에 들어갔습니다. 필하모니 드 파리의 해설은 사티가 비평계와 음악원을 비롯해 “거의 모든 사람과” 틀어졌다고 요약합니다.
몽마르트르의 카바레 반주자, 드뷔시와 장미십자 교단
1886년 사티는 아라스에 주둔한 제33보병연대에 자원입대했지만, 겨울 감기가 심한 기관지염으로 번져 석 달 동안 요양해야 했습니다. 군 생활을 마친 그는 몽마르트르로 갔습니다. 드뷔시 자료센터의 연보는 사티가 1888년부터 카바레 르 샤 누아르(Le Chat Noir)의 피아노 반주자였다고 적고, 그 뒤 그는 오베르주 뒤 클루로 옮겨 반주를 이어 갔습니다. 필하모니 드 파리의 해설은 그의 반복적인 음악이 이런 카페콩세르의 세계에 많은 것을 빚졌다고 봅니다.
오랜 벗 클로드 드뷔시를 만난 곳도 이 카바레들이었습니다. 드뷔시 자료센터 연보는 1890년 가을 샤 누아르에서 두 사람이 가까워졌다고 쓰고, 다른 연보들은 1891년 오베르주 뒤 클루를 만남의 자리로 기록합니다. 사티 재단 문서를 정리한 IMEC(현대출판기록원)의 목록은 드뷔시가 사티를 “이 세기에 길 잃은, 중세의 온화한 음악가”라고 불렀다고 전합니다. 두 사람의 사이는 1899년 10월 19일 드뷔시가 릴리 텍시에와 결혼할 때 사티가 피에르 루이스와 함께 증인으로 섰을 만큼 가까웠습니다.
같은 시기 사티는 작가 조제팽 펠라당이 이끈 장미십자 교단에 관여했고, 1891~1892년 무렵에는 이 교단의 공식 작곡가가 되었습니다. 〈별들의 아들〉과 〈장미십자 교단의 종소리〉가 이 시절 작품입니다. 1893년 1월부터 6월까지는 화가 쉬잔 발라동과 연인으로 지냈습니다. 사티의 글을 엮은 편자는 이것을 그가 여성과 맺은 유일한 관계로 보았고, 이 글 첫머리의 초상이 그 무렵 발라동이 그린 것입니다.
에릭 사티 짐노페디, 단순함이 던진 질문
사티의 이름을 가장 널리 알린 작품은 1888년에 쓴 피아노곡 〈짐노페디〉 세 곡입니다. 1번 곡 첫머리에는 “느리고 고통스럽게(Lent et douloureux)”라는 지시어가 적혀 있습니다. 음반 해설 등 2차 문헌에 따르면 1번 곡은 1888년 8월 음악 잡지 『가정 음악(La Musique des familles)』에 시인 콩타민 드 라투르의 시구와 함께 처음 실렸습니다. 제목의 착상은 자료마다 갈려, 같은 계열의 문헌은 사티가 플로베르의 소설 〈살람보〉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전하고 라투르의 시구와 잇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 곡이 당시 음악계에서 어디쯤 서 있었는지에 대해 평론가 폴 랑도르미는 1943년 글에서 사티가 〈짐노페디〉로 “바그너와 프랑크에 맞서는 자리”에 섰다고 썼습니다. 드뷔시는 세 곡 가운데 두 곡을 관현악으로 옮겼고, 이 편곡은 1897년 2월 파리 살 에라르에서 귀스타브 도레의 지휘로 처음 연주되었습니다. 1911년 3월 25일 파리 살 가보에서는 드뷔시가 이 편곡을 직접 지휘했습니다.
에릭 사티 가구 음악, 듣지 않기 위한 음악
가구 음악은 이름 그대로 가구처럼 공간에 놓여 있는 음악을 뜻합니다. 사티 생전에 실제로 연주된 가구 음악은 단 한 번, 1920년 3월 8일 파리 바르바장주 갤러리(Galerie Barbazanges)에서였습니다. 막스 자콥의 연극 〈늘 불량배, 결코 사기꾼은 아니다〉의 막간을 채우기 위해 쓴 곡이었고, 피에르 베르탱이 “에릭 사티와 다리우스 밀요의 가구 음악 첫 연주”를 알리는 소개문을 읽었습니다. 혼자 만든 발명이 아니라 밀요와 함께 내놓은 음악이었던 셈입니다.
초연 일주일 전인 1920년 3월 1일, 사티는 장 콕토에게 보낸 편지에서 “가구 음악을 요구하십시오”라고 쓰고 “공증인 사무실, 은행 따위를 위한 가구 음악”이라는 구절과 “가구 음악에는 이름(prénom)이 없습니다”라는 문장을 덧붙였습니다. 공연에서 사티와 함께 피아노를 친 밀요는 훗날 회고록에서, 사티가 청중에게 돌아다니며 먹고 마시라고 권하고 “제발 이야기하세요! 돌아다니세요! 듣지 마세요!”라고 외쳤지만 청중은 조용히 귀를 기울였고 일은 어긋났다고 적었습니다.
벨벳 신사, 아르쾨유의 은둔자
1895년 사티는 같은 정장을 여러 벌 한꺼번에 장만했고, 늘 같은 차림으로 다니는 모습 때문에 벨벳 신사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다만 세부는 연구자마다 다릅니다. 로버트 오들리지의 연보는 파리의 상점 라 벨 자르디니에르에서 산 벨벳 코듀로이 정장 일곱 벌로 적고, 앨런 길모어는 회색 또는 베이지색 벨벳(또는 코듀로이) 정장 열두 벌로 적으면서 의견이 갈린다고 덧붙입니다. 불어 벨루르(velours)가 벨벳과 코듀로이를 함께 가리키는 말이라는 점도 이 갈림에 한몫합니다.
1898년 10월 사티는 파리 근교 아르쾨유의 작은 방으로 옮겨 남은 생을 그곳에서 보냈습니다. 그는 이 방에 누구도 들이지 않았고, 친구들은 1925년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처음 그 방에 들어갔습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BnF)의 1979년 전시 도록은 이때 밀요가 피아노 뒤에서 〈잭 인 더 박스〉 원고를 찾아냈다고 기록합니다. 사티가 버스에서 잃어버린 줄 알았던 악보였습니다.
이 은둔자는 글로 자신을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1913년 음악 잡지에 실은 「음악가의 하루」에서 그는 “나는 흰 음식만 먹는다”, “나는 한쪽 눈으로만 잔다”라고 썼지만, 같은 글에는 머리가 들어갈 구멍이 뚫린 둥근 침대나 자기 정원 깊숙이 말을 타고 산책한다는 대목도 섞여 있습니다. 실제 생활의 기록이라기보다 사티가 스스로를 이렇게 그려 보인 풍자 산문으로 읽어야 하는 글입니다.
스콜라 칸토룸과 라벨, 그리고 뒤늦은 조명
1905년 사티는 만 서른아홉 살에 스콜라 칸토룸에 들어가 뱅상 댕디, 알베르 루셀 등에게 대위법과 작곡을 배웠고, 1908년 6월 대위법 과정을 우등으로 마쳤습니다. 1879년 파리 음악원 학적과 1885년 재입학, 그리고 이 수료 기록을 나란히 놓으면 사티를 독학한 괴짜 아마추어로만 보는 시선은 들어맞지 않습니다. 그는 음악원과 스콜라 칸토룸, 두 곳의 제도권 교육을 거쳤습니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계기는 1911년에 찾아왔습니다. 그해 1월 16일 모리스 라벨이 독립음악협회(SMI) 연주회에서 사티의 초기 작품 세 곡을 소개하고 직접 연주했습니다. 3월에는 음악 잡지에 사티를 다룬 기사가 실렸고, 같은 달 25일에는 앞서 본 드뷔시의 〈짐노페디〉 연주가 이어졌습니다. 한 해 안에 라벨과 드뷔시가 잇따라 그를 무대 앞으로 불러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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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릭 사티 촬영, 드뷔시와 스트라빈스키, 파리 드뷔시의 집, 사진. 왼쪽에 선 사람이 드뷔시, 안락의자에 앉은 사람이 스트라빈스키다. 촬영자가 사티라는 사실은 사진 뒷면의 기재로 확인된다. |
이 무렵 사티는 카메라 뒤에 서기도 했습니다. 드뷔시의 집에서 드뷔시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를 함께 담은 위 사진은 사티가 찍은 것으로, BnF의 1979년 도록은 사진 뒷면의 기재로 촬영자를 밝힙니다. 다만 드뷔시와의 우정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오들리지의 연보는 1917년 무렵 두 사람의 사이가 멀어졌다고 적습니다.
파라드와 베사시옹, 소음과 반복의 실험
발레 〈파라드〉는 콕토의 말에 따르면 1915년 4월, 그가 사티와 피아니스트 리카르도 비녜스가 〈배 모양의 세 작품〉을 연주하는 것을 듣다가 착상했습니다. 1917년 5월 18일 파리 샤틀레 극장에서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가 초연했고, 콕토가 주제를, 레오니드 마신이 안무를, 파블로 피카소가 막과 무대와 의상을 맡았습니다. 프로그램에 글을 쓴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이 무대를 “일종의 초현실주의”라고 불렀고, BnF 도록은 “초연은 스캔들이었다”고 기록합니다. 음악에는 〈여객선의 래그타임〉이라는 대목이 들어 있어 래그타임 리듬이 발레 무대에 올라왔습니다.
〈파라드〉의 소음은 계획과 실제를 나눠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BnF에 남은 사티의 자필 메모에는 높은 사이렌과 낮은 사이렌, 타자기, 증기 소리, 권총 소리, 복권 바퀴, 발전기 소리 같은 소음 목록이 적혀 있습니다. 콕토는 파도 소리, 모스 부호 장치, 급행열차, 비행기까지 넣으려 했지만 상당수가 빠졌고, 초연 때는 “타자기 소리를 겨우 들려줄 수 있었을 뿐”이라고 회고했습니다. 악보 위의 계획이 무대에서 그대로 울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티의 실험은 악보에 적은 글에서도 드러납니다. 1913년 피아노곡 〈바싹 마른 태아〉는 해삼과 갑각류를 소재로 한 세 곡인데, 1번 곡 머리글에는 “나는 생말로 만에서 해삼 한 마리를 관찰했다”는 문장이 있고, 연주 지시어로는 “이가 아픈 나이팅게일처럼”이 적혀 있습니다. 2번 곡에는 “슈베르트의 유명한 마주르카 인용”이라는 표기가 붙어 있습니다. 머리글과 지시어와 인용 표기가 저마다 다른 자리에서 농담을 거는 셈이고, 악보에는 마디줄도 그어져 있지 않습니다.
1893년에 쓴 〈베사시옹〉(괴롭힘)은 짧은 악구 하나로 이루어진 곡입니다. 악보 머리에 사티는 “이 모티프를 840번 연이어 연주하려면, 미리 깊은 침묵 속에서 진지하게 움직이지 않는 상태로 준비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적었습니다. 명령이라기보다 조건을 단 권유에 가깝습니다. 필하모니 드 파리에 따르면 1963년 9월 9일 뉴욕 포켓 시어터에서 존 케이지를 비롯한 피아니스트들이 교대로 이 곡을 840번 연주했고, 공연은 18시간 40분 동안 이어졌습니다.
에릭 사티 대표곡과 말년, 그리고 남은 유산
사티의 작품 목록에는 〈배 모양의 세 작품〉(1903), 〈개를 위한 엉성한 진짜 전주곡〉(1912), 〈바싹 마른 태아〉(1913), 〈관료적인 소나티네〉(1917)처럼 기이한 제목이 유독 많습니다. 〈고딕 춤곡〉처럼 마디줄 없이 쓴 곡이 있고, 악보 곳곳에 유머러스한 지시어와 글을 적어 넣었습니다. 젊은 세대가 그를 따랐다는 점도 분명합니다. 1942년 평론가 에밀 뷔예르모즈는 프랑스 6인조가 사티를 앞장세웠고, 앙리 소게 등이 아르쾨유 악파로 그의 주위에 모였다고 썼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생전에 충분히 평가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IRCAM의 소개는 사람들이 내세운 것이 그의 음악보다 상징적인 인물 사티였고, 그 음악은 생전에 결코 온전한 독자성대로 평가받지 못했다고 씁니다. 같은 글은 〈파라드〉가 미국 반복 음악가들의 객관적 음악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고까지 평가합니다. 옹플뢰르의 사티 박물관은 사티 스스로 자신이 “아주 늙은 시대에 아주 어린 채로 태어났다”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사티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1925년 7월 1일 파리 생조제프 병원에서 간경변에 양쪽 폐렴이 겹쳐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59세였습니다. 그를 시대를 앞서간 음악가로 부르는 평가는 대부분 가구 음악, 〈파라드〉, 〈베사시옹〉 같은 실험에 기대고 있습니다. 반면 그의 이름을 대중에게 알린 〈짐노페디〉는 스물두 살 무렵 카바레 시절의 소품입니다. 두 갈래를 구별해서 들을 때 사티라는 사람이 더 또렷하게 보입니다. 그는 단순한 선율의 작곡가이면서, 음악이 꼭 귀 기울여 들어야 하는 것인지를 진지하게 물은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짐노페디와 가구 음악은 같은 개념인가요?
서로 다른 것입니다. 〈짐노페디〉는 1888년에 쓴 피아노 독주곡이고, 가구 음악은 1920년 3월 8일 바르바장주 갤러리에서 연극 막간에 처음 연주된 음악으로 사티와 밀요가 함께 내놓았습니다. 사티 생전에 실제로 연주된 가구 음악은 이 한 번뿐이었습니다.
Q. 짐노페디라는 제목은 어디서 왔나요?
견해가 갈립니다. 음반 해설 등 2차 문헌은 사티가 플로베르의 소설 〈살람보〉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전하고, 1888년 8월 1번 곡이 잡지에 처음 실릴 때 함께 붙은 시인 콩타민 드 라투르의 시구와 잇는 견해도 있습니다.
Q. 가구 음악 연주 중 청중에게 듣지 말라고 했다는 게 사실인가요?
네, 공연에 직접 참여한 다리우스 밀요의 회고록에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밀요에 따르면 사티는 “제발 이야기하세요! 돌아다니세요! 듣지 마세요!”라고 외쳤지만, 청중은 오히려 조용히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 음악은 연극의 막간을 채우려고 만들어졌습니다.
Q. 벨벳 신사라는 별명은 어떤 옷에서 왔나요?
1895년 한꺼번에 장만한 같은 정장에서 왔습니다. 수량과 색, 재질은 연구자마다 달라서, 오들리지는 벨벳 코듀로이 정장 일곱 벌로, 길모어는 회색 또는 베이지색 정장 열두 벌로 적습니다. 불어 벨루르가 벨벳과 코듀로이를 함께 가리키는 말이라는 점도 기억해 둘 만합니다.
Q. 사티가 죽은 뒤 그의 방에서는 무엇이 나왔나요?
사티는 아르쾨유의 방에 아무도 들이지 않아, 친구들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처음 그 방에 들어갔습니다. BnF의 1979년 도록에 따르면 이때 밀요가 피아노 뒤에서 〈잭 인 더 박스〉 원고를 찾아냈고, 이것은 사티가 버스에서 잃어버린 줄 알았던 악보였습니다.
Q. 사티와 드뷔시는 어떤 사이였나요?
오랜 벗이었습니다. 드뷔시 자료센터 연보는 두 사람이 1890년 가을 샤 누아르에서 가까워졌다고 적고, 1899년 드뷔시의 결혼식에서 사티는 증인으로 섰습니다. 1911년에는 드뷔시가 관현악으로 옮긴 〈짐노페디〉를 직접 지휘했고, 사티는 드뷔시의 집에서 드뷔시와 스트라빈스키를 사진에 담았습니다. 오들리지의 연보는 1917년 무렵 두 사람의 사이가 멀어졌다고 적습니다.
Q. 베사시옹은 정말 840번 반복 연주되었나요?
네. 필하모니 드 파리에 따르면 1963년 9월 9일 뉴욕 포켓 시어터에서 존 케이지를 비롯한 피아니스트들이 교대로 연주했고 공연은 18시간 40분 동안 이어졌습니다. 악보 머리의 사티 메모는 840번을 명령하기보다 “840번 연이어 연주하려면” 미리 준비해 두라고 권하는 조건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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