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작곡가는 청중이 집중해서 들어 주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음악이 가구처럼, 벽지처럼,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공간에 스며들기를 원했습니다. 에릭 사티(Erik Satie, 1866~1925)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단순한 세 곡의 피아노곡으로 훗날의 앰비언트 음악을 예고했고, 똑같은 정장 일곱 벌을 입고 다니며 세상을 놀리듯 살다 간 작곡가였습니다.
- 생몰년: 1866년 5월 17일 옹플뢰르 출생, 1925년 7월 1일 파리에서 사망(59세)
- 대표작: 짐노페디 세 곡(1888년), 가구 음악, 발레 파라드, 베사시옹
- 별명: 똑같은 갈색 정장 일곱 벌 때문에 붙은 벨벳 신사
- 음악사적 위치: 앰비언트·미니멀 음악의 선구, 다다이즘 무대미학에 근접
- 말년: 아르쾨유의 은둔 생활, 사후 방에서 발견된 유실 악보 뭉치
옹플뢰르에서 파리로, 반항아의 성장기
사티는 1866년 프랑스 항구 도시 옹플뢰르에서 해운업에 종사하던 아버지와 스코틀랜드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네 살 무렵 가족과 함께 파리로 옮겨 갔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다시 옹플뢰르로 돌아가 조부모 밑에서 자랐습니다. 열 살이 되던 해에는 옹플뢰르 성 레오나르 성당의 음악 책임자였던 비노에게 처음으로 정식 음악교육을 받았습니다.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사티는 다시 파리로 이주해 피아노 교사였던 계모에게 음악을 배웠고, 1879년 파리 음악원 예비반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연주 실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아 1882년 퇴학당했고, 1885년에야 중급 피아노반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교수들과 자주 갈등을 빚었던 이 시절은 그가 훗날 제도권 음악교육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게 된 배경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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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릭 사티 |
몽마르트르의 카바레 반주자, 그리고 장미십자교단
1886년 사티는 33연대에 입대했지만 급성 기관지염을 앓아 몇 달 만에 의병제대했습니다. 이후 그는 많은 예술가가 모여들던 몽마르트르의 카바레 르 샤 누아르와 오베르주 뒤 클루에서 반주자로 생계를 이어 갔습니다. 이곳에서 접한 뮤직홀 음악의 정서는 훗날 그만의 독특한 작곡 어법이 자리 잡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893년에는 화가 쉬잔 발라동과 다섯 달 남짓 연인 관계를 맺었는데, 사티가 평생 유일하게 가졌던 연애로 알려져 있습니다. 1890년에는 반가톨릭적 신비주의 종교단체인 장미십자교단의 창시자 조제팽 펠라당을 만났고, 이듬해에는 이 교단의 공식 작곡가로 임명되어 관련 작품을 여럿 남겼습니다.
짐노페디, 단순함이 던진 질문
사티의 이름을 가장 널리 알린 작품은 1888년에 쓴 피아노곡 짐노페디 세 곡입니다. 느린 3박자 위에 단순한 반주가 반복되고 그 위로 담백한 선율이 얹히는 구조로, 당시 유럽을 지배하던 바그너풍의 웅장한 화성과는 정반대에 서 있는 곡이었습니다. 제목의 유래는 고대 그리스에서 벌거벗은 청년들이 벌이던 축제 김노파이디아이에서 따왔다는 데는 대체로 의견이 모이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문헌에서 영감을 얻었는지는 자료마다 갈립니다. 사티 자신은 플로베르의 소설 살람보를 언급한 적이 있고, 다른 연구자들은 사티의 친구였던 시인 콩타민 드 라투르의 시 레 앙티크에서 실마리를 찾기도 합니다.
이 곡은 오늘날 앰비언트 음악의 중요한 선구로 평가받습니다. 다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이 있습니다. 짐노페디는 콘서트홀에서 청중이 앉아 감상하도록 쓰인 독주곡이지, 다음 장에서 살펴볼 가구 음악과는 만들어진 시점도 목적도 다릅니다. 훗날 존 케이지가 짐노페디를 가구 음악의 초기 사례처럼 해석하면서 두 개념이 자주 뒤섞이게 되었을 뿐입니다.
가구 음악, 듣지 않기 위한 음악
1917년 무렵부터 사티는 완전히 새로운 발상의 음악을 시도했습니다. 그는 이것을 가구 음악이라고 불렀는데, 벽지나 의자처럼 공간의 일부로 존재하되 결코 주의 깊게 들어서는 안 되는 음악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연주회나 연극의 휴식 시간에 흘러나와 관객들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는 배경음이 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1920년 3월 8일 파리의 바르바장주 갤러리(Galerie Barbazanges)에서 막스 자콥의 연극 막간 음악으로 이 곡이 처음 소개되었습니다. 사티가 연주 도중 객석 사이를 돌아다니며 "계속 이야기하세요, 걸어 다니세요, 듣지 마세요"라고 다그쳤다는 이야기가 여러 지면에 전해지는데, 청중이 오히려 예의 바르게 조용히 귀 기울이는 바람에 실험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정황과 함께 전해집니다.
가구 음악이라는 발상은 반세기 뒤 브라이언 이노가 제시한 앰비언트 뮤직 개념에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적극적으로 감상하는 음악이 아니라 환경의 일부로 스며드는 음악이라는 발상 자체가, 사티가 이미 1920년대에 실험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벨벳 신사, 아르쾨유의 은둔자
사티는 1895년, 똑같이 생긴 갈색 정장 일곱 벌을 한꺼번에 장만했습니다. 이후 몇 년 동안 늘 같은 옷차림으로 파리 시내를 돌아다니는 그의 모습은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고, 이 때문에 그는 벨벳 신사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정작 옷의 재질은 벨벳이 아니라 보풀이 있어 겉보기에 벨벳과 비슷한 갈색 코듀로이(골덴)였다는 점은 이 별명의 유래를 두고 자주 오해되는 대목입니다.
파리 근교 아르쾨유에 살던 사티는 이 집에 누구도 들이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1925년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지인들이 처음으로 방에 들어갔을 때, 방은 오랫동안 정리되지 않은 채였고 유실된 줄로만 알았던 악보 원고 뭉치가 잡동사니 사이에서 무더기로 발견되었습니다. 이 방에서 다수의 우산이 함께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도 널리 퍼져 있지만, 정확한 개수까지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이번 조사에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드뷔시와 라벨, 그리고 뒤늦은 인정
사티는 드뷔시를 만나 깊은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흔히 사티가 드뷔시의 영향을 받기만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두 사람의 영향 관계가 어느 한쪽으로만 흐르지 않았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드뷔시의 인상주의적 화성이 사티의 초기 실험에서 자극받았을 가능성과, 반대로 사티가 드뷔시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함께 거론됩니다.
아마추어 취급을 받는 데 불만을 느끼던 사티는 1905년 스콜라 칸토룸에 들어가 대위법과 관현악법을 배우며 1912년까지 성실하게 공부를 이어 갔습니다. 이 과정을 거치며 그의 피아노곡은 한층 다양하고 독창적인 색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1911년 1월, 모리스 라벨이 국립음악협회 연주회에서 사티의 초기 작품을 직접 연주하며 그를 선구자로 소개한 것을 계기로, 오랫동안 무명에 가까웠던 사티의 이름이 비로소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장 콕토가 그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면서 명성은 더욱 커졌습니다.
파라드와 베사시옹, 다다이즘과 미니멀리즘을 예고하다
1917년 사티는 장 콕토가 대본을 쓰고 파블로 피카소가 무대미술을 맡은 발레 파라드를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와 함께 무대에 올렸습니다. 이 작품에는 재즈 리듬은 물론 타자기 소리, 증기선 고동, 사이렌 같은 일상의 소음이 그대로 악보에 삽입되었습니다. 초연은 큰 물의를 일으킨 스캔들로 기록되었는데,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허물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다다이즘 미학에 성큼 다가선 시도로 평가받습니다.
사티가 남긴 또 다른 실험작 베사시옹은 짧은 악구를 팔백사십 번 반복하라고 지시한 곡입니다. 이 악보를 재발견한 존 케이지는 1963년 9월 9일 뉴욕의 포켓 시어터에서 자신을 포함한 열두 명 남짓의 피아니스트가 교대로 연주하는 공연을 열었고, 이 공연은 열여덟 시간이 넘게 이어졌습니다. 이 사건이 미국 미니멀리즘 음악의 직접적인 기원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하나의 짧은 악구를 극단적으로 반복한다는 발상 자체가 이후 미니멀리즘 음악과 자주 나란히 거론되는 이유는 짐작할 만합니다.
말년과 죽음, 그리고 남은 유산
사티가 남긴 작품에는 바싹 마른 태아, 관료적인 소나티네, 개를 위한 엉성한 진짜 전주곡, 배 모양의 세 작품처럼 기이한 제목이 유독 많습니다. 그의 작품 세계는 활동 시기에 따라 스무 살 무렵에는 피아노 음악과 장미십자교단을 위한 곡, 서른 살 무렵에는 경음악 성격의 작품, 마흔 살 무렵에는 유머러스한 소품, 쉰 살 무렵에는 성악곡과 발레곡·극음악으로 옮겨 갔습니다. 단순한 구조와 반복되는 선율, 전통적 화성에서 벗어난 진행, 형이상학적이고 유머러스한 연주 지시, 마디줄과 박자표를 생략하는 시도까지, 그가 남긴 실험적 어법은 프랑스 6인조와 아르쾨유 악파로 불린 젊은 작곡가들뿐 아니라 전후 현대음악 전반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정작 주류 음악계로부터는 좀처럼 인정받지 못한 채 가난과 고독 속에서 지냈습니다. 그는 너무 늙은 세상에 너무 젊어서 왔다는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집니다. 앞서 살펴본 다섯 달간의 연애를 빼고는 평생 독신으로 지내다가, 1925년 7월 1일 간경화로 파리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향년 59세였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세상과 불화했던 이 작곡가가 남긴 단순함과 반복의 미학은, 오늘날 앰비언트 음악과 미니멀리즘 음악을 듣는 귀에도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짐노페디와 가구 음악은 같은 개념인가요?
서로 다른 개념입니다. 짐노페디는 콘서트홀에서 감상하도록 쓴 1888년의 피아노 독주곡이고, 가구 음악은 배경으로 흘려듣도록 만든 훨씬 나중의 장르입니다. 두 개념이 자주 섞여 쓰이는 것은 존 케이지의 후대 해석 탓이지, 사티가 애초에 같은 것으로 구상한 적은 없습니다.
Q. 짐노페디라는 제목은 어디서 왔나요?
그리스어 김노파이디아이, 즉 벌거벗은 청년들의 고대 축제에 뿌리를 둔 말이라는 점까지는 대체로 인정됩니다. 다만 정확히 어떤 글에서 이 단어를 가져왔는지는 견해가 갈립니다. 사티는 플로베르의 살람보를 지목한 적이 있고, 다른 쪽에서는 친구 시인 콩타민 드 라투르의 작품을 유력하게 봅니다.
Q. 가구 음악 연주 중 청중에게 조용히 듣지 말라고 했다는 게 사실인가요?
여러 지면에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이지만, 1차 문헌으로 명확히 확인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 곡을 만든 취지 자체가 집중해서 들으라는 것이 아니라 가구처럼 공간에 스며들라는 것이었으니, 이런 일화가 그럴듯하게 회자되는 데는 이유가 있는 셈입니다.
Q. 벨벳 신사라는 별명은 실제 벨벳 옷 때문에 붙었나요?
정확히는 벨벳이 아니라 1895년에 장만한 똑같은 갈색 코듀로이 정장 일곱 벌 때문에 붙은 별명입니다. 몇 년 동안 매일 같은 옷을 입고 다니는 그의 모습이 사람들 눈에 인상 깊게 남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Q. 사후 그의 방에서 정말 우산이 많이 발견되었나요?
확인되는 것은 아르쾨유의 방이 오랫동안 정리되지 않았고, 사라진 줄 알았던 여러 악보가 그 안에서 무더기로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우산 이야기 자체는 여러 곳에서 언급되지만, 몇 개였는지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이번 조사로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Q. 사티는 드뷔시의 영향을 받기만 한 쪽인가요?
한쪽 방향으로만 흘렀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두 사람은 가까운 벗이었고, 학자들 사이에서는 누가 먼저 영향을 주었는지를 두고도 의견이 갈립니다. 일방적인 사제 관계보다는 나란히 서로를 자극한 동료 관계로 이해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Q. 베사시옹은 정말 840번 반복 연주되었나요?
1963년 뉴욕에서 실제로 그렇게 연주된 기록이 있습니다. 존 케이지를 포함한 열두 명 남짓의 피아니스트가 교대로 건반 앞에 앉아 열여덟 시간 넘게 이어 친 공연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미국 미니멀리즘 음악과 어떤 관계인지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반복 하나로 이토록 긴 공연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 자체는 분명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