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ype Here to Get Search Results !

시대를 앞서간 음악가 에릭 사티(Erik Satie)의 생애와 음악

  에릭 사티는 19세기 말 - 20세기 초  당시 유럽 음악을 지배했던 바그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다양하고 혁신적인 시도를 하여 큰 영향을 끼쳤던 작곡가이다. 

  에릭 사티(Erik Satie, 1866~1925)는 프랑스 항구 도시 옹플뢰르(Honfleur)에서 해운업에 종사하는 아버지와 스코트랜드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4년 뒤 파리로 이사를 왔지만 어머니의 사망으로 다시 옹플뢰르에서 조부모 밑에서 12세까지 살아가게 된다. 

  10세가 되던 해에 옹플뢰르의 성 레오나르 성당의 음악 총 책임자였던 비노(Vinot)에게 처음으로 음악교육을 받게 된다. 어머니가 사망하자 아버지의 재혼으로 파리로 이주하게 된 사티는 당시 피아노 교사였던 계모에게 음악을 배우다가 1879년 사티는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교수들과 갈등을 일으키며 학업성적이 나빠서 결국 퇴학을 당하게 된다 

  1886년 사티는 군입대를 하지만 지병으로 몇 달 만에 의병제대를 하게 된다. 그후 사티는 당시 많은 예술가들이 모이는 몽마르트르 언덕의 카페의 반주자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이때 Music-Hall을 위한 음악들을 경험하면서 훗날 탄생할 에릭 사티만의 독특한 작곡어법이 자리잡게 된다. 

 1890년 장미십자교단(반 가톨릭적인 신비주의 종교단체)의 창시자를 만나게 된 이듬해인 1891년에는 장미십자교단의 공식적인 작곡가로 임명되어 교단을 위한 곡들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에릭 사티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이미지입니다.
출처 : britannica.com



   그후 사티는 드뷔시를 만나게 되어 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게 된다. 자신을 아마추어 음악가 취급을 받는 것을 불만스럽게 여겼던 사티는 1905년 스콜라 칸토룸(Schola Cantorum)에 입학하여 성실한 자세로 학업에 열중한다. 이곳에서 관현악법과 대위법을 배우게 된다. 사티는 새로운 음악의 가능성을 실험하게 되는데, 특히 피아노곡에서 다양하고 독창적인 레파토리를 만들어 갔다. 

  1911년 국립음악협회 연주회에서 라벨이 그를 선구자로 규정했던 것을 시작으로 그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고, 장 콕토에 의해 그의 작품들이 무대에 올려지게 되었다. 같은 해 갤러리에서 연극을 공연하였는데, 이때 사티는 음악회 및 연극의 휴식 시간을 위한 배경음악 <실내장식 음악>을 처음으로 소개하였다. 그는 자신의 음악을 술집에서 손님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음악이라는 뜻에서 “가구 음악”이라 불렀다. 요컨대 술집이나 카페에 흘러나오는 BGM을 지향했다. 

 그의 작품은 활동시기에 따라 20대에는 피아노 음악과 장미십자교단을 위한 음악, 30대에는 주로 경음악, 40대에는 유머러스한 음악, 50대에는 성악곡과 피아노곡 외의 발레곡과 극음악 등으로 구분된다. 사티는 자신의 작품에 <바싹 마른 태아>, <관료적인 소나티네>, <개를 위한 엉성한 진짜 전주곡>, <배((梨) 모양의 세 작품> 등 기이한 제목을 붙인 것으로 유명하다.

  사티의 음악은 단순한 구조와 함께 반복적인 선율과 전통적 화성에서 벗어난 화음진행, 선법의 사용, 형이상학적인 제목, 유머러스한 연주지시, 마디줄과 박자표의 부재 등을 특징으로 한다. 사티가 창조한 새로운 음악은실험적인 음악은 ‘프랑스 6인조’와 ‘아르쾨유 악파’(Ecole d'Arcueil)라고 불리는 젊은 작곡가들뿐만 전후 현대 음악에도 영향을 끼쳐 사티는 미니멀 음악의 창시자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주류 음악계에서 인정받지 못한 채 가난과 고독 속에 살았다. “나는 너무 늙은 세상에 너무 젊어서 왔다”는 말을 남긴 사티는 27세에 일 년 동안 쉬잔 발라동과 동거한 것을 빼놓고는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간경화에 걸려 59세 나이로 사망하였다. 

댓글 쓰기

0 댓글
* Please Don't Spam Here. All the Comments are Reviewed by Admin.

본문 상단 광고

본문 하단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