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상스는 출생 직후 아버지가 사망하여 어머니와 당대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고모와 함께 살게 된다. 3살 무렵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며 5살이 되던 해부터 작곡을 시작해 6세 때 작곡한 가곡이 현재에 남이 있다. 11살 때에는 피아니스트로 극찬을 받으며 데뷔하였다. 이런 생상스의 뛰어난 음악적 재능은 모차르트의 유년시절과 비교될 정도였다.
13세 때 파리 음악원의 오르간과에 입학하여, 16세에 첫 번째 교향곡을 작곡하였으며, 17세 되던 1852년 파리대상에 도전하였으나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낙선하였다. 18세에 성 마리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22세에는 성 마들렌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취임하였는데, 이 때에 그의 연주를 들은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는 생상스를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오르가니스트”라는 찬사를 보냈다.
26세 때부터 4년간 니데르메이르 음악학교의 피아노 교수로 있으면서 포레, 메사제, 지구와 같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36세가 되던 1871년에는 뷔시느와 함께 “국민음악협회”를 설립하여 포레, 드뷔시, 샤브리에, 라벨 등 프랑스의 작곡가들의 활동을 소개하였지만, 점차 바그너(1813-1883)의 영향을 받는 젊은 작곡가들이 많아지자 1886년 협회를 탈퇴한다.
1874년에 생상스는 20살 연하의 마리 트뤼포(1856-1950)와 결혼해 두 아들을 얻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878년에 첫째는 4층 창문에서 떨어져 사망하고, 6주 후에 둘째도 폐렴으로 세상을 떠난다. 생상스는 두 아들의 죽음을 아내의 부주의로 인한 것이라 질책했고, 1881년 아내와 함께 떠난 오베르뉴(Auvergne)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편지를 남기고 사라져 이후 별거 상태로 지내게 된다.
1888년에는 어머니의 사망에 큰 충격을 받아 알제리, 이집트, 스페인, 포르투갈, 이태리, 그리스, 우루과이, 아메리카 등 여러 나라를 방황하며 지낸다. 이러한 방황이 생상스의 음악에 이국적 정취와 새로운 음악언어를 더하는 계기가 된다.
생상스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을 가지고 독일,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지를 순방하였고, 1906년에는 아메리카를, 1916년에는 프랑스를 대표하여 파나마 태평양 박람회에 참석했으며 남미 등 여러 곳을 방문하여 유명세를 떨쳤다. 하지만 1921년 86세 때 알제리의 호텔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프랑스 정부는 그의 공로를 생각하여 파리에서 국장으로 장래를 거행하였다.
낭만주의 시대의 생상스의 음악은 우아하고 조화를 이루고 있지만 냉정하고 감정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불필요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절제된 감정은 오늘날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생상스는 음악 이외의 천문학, 철학, 음향학, 시, 그림 등 여러 분야에서도 재능이 많았다. 특히 과학을 좋아해서 음악으로 번 돈으로 망원경을 사거나 새를 연구하기도 했으며, 고대 로마 극장의 장식이나 나폴리의 벽화에 그려진 악기에 관한 연구서를 출판하기도 했다. 이처럼 다방면에 아는 것이 많았던 생상스를 사람들은 ‘걸어 다니는 백과 사전’이라고 불렀다.
생상스는 모두 13편의 오페라, 3편의 교향곡 및 교향시, 발레음악, 부수음악, 협주곡, 합창곡, 피아노 독주곡 및 오르간 독주곡 등을 다양한 분야에서 작품을 남겼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 교향시 <죽음의 춤>, 모음곡 <동물 사육제> 등을 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