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열네 곡짜리 모음곡 하나를 평생 세상에 내놓지 않았습니다. 백조를 노래한 아름다운 한 곡만 빼고 말입니다. 카미유 생상스(Camille Saint-Saëns, 1835~1921)는 모차르트에 비견되는 신동이었고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으로 불릴 만큼 박학다식했지만, 두 아들을 연이어 잃은 뒤로는 자신의 가장 유머러스한 작품을 스스로 감춘 채 평생을 살았습니다.
- 생몰년: 1835년 10월 9일 파리 출생, 1921년 12월 16일 알제리에서 사망(86세)
- 대표작: 동물의 사육제, 죽음의 춤,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 교향곡 3번 오르간
- 신동 이력: 3세 피아노, 5세 작곡, 10세 공식 데뷔
- 가정의 비극: 1878년 두 아들을 잇달아 잃고 1881년 아내와 사실상 결별
- 수수께끼: 동물의 사육제를 유언으로 사후 출판 지시, 백조만 생전 예외 출판
모차르트에 비견된 신동
생상스는 태어난 지 두 달도 되지 않아 결핵으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고모의 손에서 자랐습니다. 음악적 재능은 일찌감치 폭발적으로 드러났습니다. 세 살에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 다섯 살에 작곡을 시작했고, 여섯 살 때 쓴 가곡 악보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열 살이던 1846년, 파리의 살 플레옐에서 모차르트 협주곡과 베토벤 협주곡 3번을 연주하며 공식 데뷔 무대를 가졌습니다. 이 무대에서 베토벤 소나타 32곡 가운데 아무거나 골라 주면 악보 없이 치겠다고 청중에게 제안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전해지지만, 이 구체적인 일화까지 뒷받침하는 1차 문헌은 확인되지 않아 신중하게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열세 살에 파리 음악원 오르간과에 입학했고, 열여덟 살에는 생메리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스물두 살이던 1858년에는 프랑스 최고의 자리로 꼽히는 마들렌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취임했습니다. 그의 연주를 들은 프란츠 리스트는 그를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오르가니스트라고 극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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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미유 생상스 |
프랑스 음악의 진흥자
스물여섯 살이던 1861년부터 니데르메이르 음악학교에서 화성학과 작곡을 가르쳤고, 이때의 제자 가운데 가브리엘 포레가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1871년에는 보불전쟁 이후 침체된 프랑스 음악을 되살리기 위해 국민음악협회 창설에 참여했습니다. 이 협회는 로맹 뷔신이 회장을 맡고 생상스가 부회장을 맡았으며, 뒤파르크와 포레, 프랑크, 마스네 등도 함께 창립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다만 실질적으로 협회를 이끈 핵심 인물은 생상스였습니다.
그는 이 협회를 통해 젊은 프랑스 작곡가들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무대에 올렸습니다. 그러나 뱅상 댕디를 중심으로 바그너를 떠받드는 회원들이 점점 늘어나 협회의 방향이 자신의 신념과 멀어지자, 생상스는 1886년 뷔신과 함께 협회를 탈퇴했습니다.
붕괴된 가정, 두 아들의 죽음
1875년, 마흔을 목전에 둔 생상스는 열아홉 살이던 마리로르 트뤼포와 결혼해 두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비극은 예고 없이 찾아왔습니다. 1878년, 두 살이던 첫째 아들 앙드레가 살던 집 창문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불과 여섯 주 뒤, 생후 6개월이던 둘째 아들 장프랑수아마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아들을 모두 잃은 뒤에도 부부는 삼 년을 더 함께 지냈습니다. 그러다 1881년 7월, 여행 중 머물던 호텔에서 생상스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편지 한 장만 남기고 아내를 남겨둔 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두 사람은 정식으로 이혼하지 않았고, 죽을 때까지 다시는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습니다. 마리로르는 남편보다 훨씬 오래 살아 1950년 아흔다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
생상스는 음악 바깥의 세계에도 깊은 관심을 쏟았습니다. 철학과 고고학에 조예가 깊었고, 학창 시절부터 두각을 보였던 수학적 사고는 평생 그의 지적 습관으로 남았습니다. 천문학에도 흥미를 느껴 아마추어 수준에서 꾸준히 관심을 이어 갔다고 전해집니다. 다만 그가 직접 천체망원경을 구입해 관측했다거나 과학 학술지에 논문을 기고했다는 식의 구체적인 일화까지는 이번 조사로 확인할 근거를 찾지 못해, 확정된 사실로 단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모든 사물의 이치를 파고들려 했던 이런 지적 태도는 그의 음악에도 그대로 스며들었습니다. 감정을 앞세우기보다 형식과 절제를 앞세운 그의 작곡 방식은, 낭만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시대에는 차갑다는 평을 듣기도 했지만 오늘날에는 오히려 그 균형 잡힌 완성도로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동물의 사육제, 왜 평생 감추었나
생상스는 열네 곡으로 이루어진 관현악 모음곡 동물의 사육제를 완성하고도 평생 정식 출판과 전곡 연주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가볍고 유머러스한 이 곡이 자신을 진지한 작곡가로 보는 평판에 흠집을 낼까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유언으로 사후 출판을 직접 지시했고, 실제로 1921년 12월 세상을 떠난 지 넉 달 만인 이듬해 4월 뒤랑 출판사에서 정식 악보가 출판되었으며, 같은 해 2월 25일에는 첫 공개 연주도 이루어졌습니다.
다만 열네 곡 가운데 딱 한 곡, 백조만은 예외였습니다. 이 곡은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편곡으로 1887년, 그러니까 생상스가 세상을 떠나기 34년 전에 이미 따로 출판되어 있었습니다.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선율만큼은 세상과 나누고 싶었던 셈입니다.
말년의 방랑과 죽음
가족을 잃은 데 이어 1888년 절대적으로 의지하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생상스는 알제리와 이집트, 남미 등 세계 곳곳을 떠도는 방랑자가 되었습니다. 이 고독한 여정은 그의 음악에 이국적인 색채와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1921년 12월 16일, 여행 중이던 알제리에서 심장마비로 여든여섯 살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장례는 파리 마들렌 성당에서 국장으로 성대하게 치러졌고, 몽파르나스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오랫동안 별거하던 아내 마리로르도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 베일로 얼굴을 가린 채 이 장례식에 참석했다고 전해집니다.
대표작으로 보는 생상스의 음악 세계
생상스는 오페라 13편과 피아노 협주곡 5편을 비롯해 교향시와 발레 음악까지 방대한 유산을 남겼습니다. 다음 작품들이 그의 폭넓은 스펙트럼을 잘 보여 줍니다.
| 장르 | 작품명 | 특징 |
|---|---|---|
| 모음곡 | 동물의 사육제 | 백조·사자·코끼리 등 동물의 특징을 악기로 그린 유머러스한 곡 |
| 교향시 | 죽음의 춤 Op.40 | 자정에 무덤에서 깨어난 해골들의 춤을 실로폰과 바이올린으로 그린 곡 |
| 교향곡 | 교향곡 3번 c단조 오르간 | 파이프 오르간과 피아노 두 대가 더해진 화려하고 장엄한 교향곡 |
| 협주곡 | 피아노 협주곡 2번 g단조 | 경건한 시작과 화려한 기교가 대비를 이루는 명곡 |
| 협주곡 |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 Op.28 | 바이올리니스트 사라사테를 위해 쓴 곡으로 스페인풍 리듬이 두드러짐 |
| 오페라 | 삼손과 데릴라 | 구약성서를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데릴라의 아리아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가 유명 |
자주 묻는 질문
Q. 생상스는 몇 살에 데뷔했나요?
1846년, 만 열 살의 나이로 파리 무대에 처음 올라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협주곡을 연주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베토벤 소나타 서른두 곡을 전부 외워 즉석으로 쳐 보이겠다고 청중에게 호기롭게 제안했다는 이야기가 자주 따라붙는데, 정작 이를 입증할 1차 자료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Q. 국민음악협회는 생상스가 혼자 만들었나요?
아닙니다. 1871년 창설 당시 회장은 로맹 뷔신이었고 생상스는 부회장이었습니다. 뒤파르크, 포레, 프랑크, 마스네 등도 함께 창립에 참여했습니다. 다만 협회 운영을 실질적으로 이끈 핵심 인물이 생상스였다는 점에서 그의 역할이 컸던 것은 분명합니다.
Q. 동물의 사육제는 왜 생전에 출판되지 않았나요?
장난스러운 성격의 이 곡이 진지한 작곡가라는 자신의 평판을 깎아내릴까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죽기 전 유언에 사후 출판을 명시해 두었고, 세상을 떠나고 넉 달이 지난 뒤 정식으로 악보가 인쇄되었습니다. 열네 곡 중 유일하게 백조만 1887년 첼로와 피아노 편곡으로 미리 세상에 나와 있었습니다.
Q. 두 아들은 정확히 어떻게 사망했나요?
화재가 아니라 낙상과 질병이었습니다. 1878년 두 살이던 첫째 앙드레가 살던 집 창문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었고, 여섯 주 뒤에는 생후 6개월이던 둘째 장프랑수아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Q. 아내와는 왜 갈라섰나요?
곧바로 갈라선 것은 아닙니다. 비극을 겪은 뒤로도 삼 년 가까이 부부 생활을 이어 갔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은 여행지 호텔에서 찾아왔는데, 생상스가 편지 한 장만 남기고 훌쩍 떠나 버린 뒤 두 사람은 서류상 부부로만 남았습니다. 아내 마리로르는 이후로도 반세기 가까이 더 살다가 1950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Q. 생상스는 정말 천문학·곤충학에 조예가 깊었나요?
철학과 고고학, 아마추어 수준의 천문학, 그리고 학창 시절부터 두각을 보인 수학에 대한 관심은 확인됩니다. 다만 곤충학에 대한 관심이나 직접 천체망원경을 사서 관측했다는 이야기, 과학 논문을 기고했다는 이야기는 이번 조사로 뒷받침할 근거를 찾지 못해 단정하지 않았습니다.
Q. 생상스는 어디서 어떻게 세상을 떠났나요?
1921년 12월, 여행하던 알제리에서 심장마비로 여든여섯 해의 생을 마쳤습니다. 파리로 옮겨진 유해는 마들렌 성당에서 국장으로 배웅받은 뒤 몽파르나스에 묻혔습니다. 헤어진 지 오래된 아내 마리로르도 조용히 자리를 지키며 이 마지막 길을 지켜본 것으로 전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