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라빈스키의 생애와 음악, 불새와 봄의 제전에서 신고전주의·세리얼리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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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5월 파리에서 휘파람과 야유, 몸싸움까지 오간 〈봄의 제전〉 초연을 직접 본 사람들은 음악과 안무를 함께 소동의 원인으로 지목했습니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1882~1971)는 그 밤 하나로 기억되는 경우가 많지만, 그는 그 뒤로도 반세기 넘게 작풍을 바꾸어 가며 곡을 썼습니다. 이 글은 법학도였던 그가 작곡가가 된 과정, 작풍이 크게 세 번 바뀐 흐름, 그리고 러시아를 떠난 뒤의 긴 여정을 차례로 따라갑니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한눈에 보기

  • 생몰년: 1882년 6월 17일 오라니엔바움 출생, 1971년 4월 6일 뉴욕에서 사망(88세), 베네치아에 묻힘
  • 대표작: 3대 발레 〈불새〉·〈페트루슈카〉·〈봄의 제전〉, 〈풀치넬라〉(1920)
  • 양식 변화: 러시아 시기 → 신고전주의 → 세리얼리즘, 3단계 전환
  • 망명 경로: 러시아 → 스위스(1914~1920) → 프랑스(1920~1939) → 미국(1939~)
  • 별명: 러시아 대백과사전은 작풍이 거듭 바뀐 그를 「음악의 프로테우스」로 보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고 적음

스트라빈스키 생애, 법학에서 음악으로

스트라빈스키는 1882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서쪽의 소도시 오라니엔바움에서 태어났습니다. 지금은 로모노소프라는 이름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시에 속해 있습니다. 아버지 표도르 스트라빈스키는 1876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마린스키 극장의 독창자로 활동한 베이스 가수였고, 1901년에는 황실 극장 공훈 예술가 칭호를 받았습니다. 이고르는 네 아들 가운데 셋째였습니다.

그는 집 안에서 울리는 음악을 아이 방에서 멀찍이 들으며 자랐다고 회고합니다. 처음 본 공연은 일곱이나 여덟 살 무렵 마린스키 극장에서 상연된 오페라 〈황제에게 바친 목숨〉이었습니다. 아홉 살에 부모가 피아노 선생을 붙여 주었지만, 부모는 그의 음악 취향을 아마추어의 취미로 여겼고 법학을 공부하는 편이 낫다고 보았습니다. 형 로만과 동생 구리도 처음에는 법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1901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법학부에 들어가 형법과 법철학을 들었습니다.

진로를 바꾼 인연은 대학에서 생겼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막내아들을 만나 곧 가까워졌습니다. 1902년 여름, 림스키코르사코프가 가족과 함께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휴가를 보낼 때 스트라빈스키는 그 앞에서 초기 습작을 연주했습니다. 반응은 기대와 거리가 멀었습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먼저 자기 제자에게서 화성과 대위법을 더 배우라고 했고, 음악원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권했으며, 기초를 갖추면 그때 직접 맡아 주겠다고 했습니다.

직접 지도는 1903년 여름이 끝날 무렵 스승의 곁에서 2주가량 지내며 시작되었고, 그해 가을부터 정기 수업이 약 3년 이어졌습니다. 스트라빈스키는 일주일에 한 번 작업한 악보를 들고 스승을 찾아갔다고 적었습니다. 스승은 1908년 세상을 떠났고, 그는 스승의 죽음에 부쳐 〈장례의 노래〉를 썼습니다. 하이델베르크의 첫 만남부터 따지면 사제 인연은 6년이었습니다.

둥근 안경을 쓰고 반지 낀 오른손으로 턱을 괸 스트라빈스키의 초상 사진이 인쇄된 책장을 다시 찍은 흑백 사진
해리스 앤드 유잉 촬영,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1937년, 유리 건판 음화, 미국 의회도서관 소장. 책에 실린 초상 사진을 다시 찍은 건판이라 왼쪽에 펼친 책장의 활자가 함께 보인다.

디아길레프와의 만남, 불새·페트루슈카·봄의 제전

스트라빈스키가 1907~1908년에 쓴 관현악곡 〈스케르초 판타스티크(환상적 스케르초)〉는 1909년 2월 6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질로티 연주회에서 초연되었습니다. 이 연주회에서 그의 〈스케르초 판타스티크〉와 〈불꽃놀이〉를 들은 러시아 발레단(발레 뤼스)의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는 그해 봄 파리 공연에 올릴 〈레 실피드〉의 편곡을 그에게 맡겼습니다. 스트라빈스키는 훗날 이 연주회를 자기 음악 경력 전체에 중요한 날짜로 꼽았습니다. 두 사람의 협업은 중간에 끊긴 시기를 끼고 20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디아길레프의 주문으로 쓴 발레 〈불새〉는 1910년 6월 25일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초연되었고, 이 초연으로 스트라빈스키는 유럽에 이름을 알렸습니다. 초연 첫날 드뷔시가 무대로 찾아와 총보를 칭찬했는데, 이것이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고 스트라빈스키는 이 일이 드뷔시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어진 우정의 시작이었다고 회고합니다. 같은 파리 체류에서 라벨도 만났습니다. 에릭 사티는 그 뒤 드뷔시의 집에서 드뷔시의 소개로 알게 되었는데, 처음 만난 해는 기록마다 1911년에서 1913년 사이로 갈립니다.

이듬해 1911년 6월 13일에는 파리 샤틀레 극장에서 피에르 몽퇴의 지휘로 〈페트루슈카〉가 초연되었습니다. 러시아 대백과사전은 이 작품을 러시아 발레 시즌의 가장 완성도 높은 공연 가운데 하나로 꼽습니다.

1912년 6월에는 루이 랄루아의 집에서 드뷔시와 함께 〈봄의 제전〉의 피아노 연탄 편곡, 곧 피아노 한 대를 두 사람이 함께 치는 악보를 처음 맞춰 보았고, 드뷔시가 저음부를 맡았습니다. 드뷔시는 1913년 4월 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페트루슈카〉에 〈파르지팔〉에서만 보았던 관현악의 무결함이 있다고 썼는데, 스트라빈스키는 훗날 드뷔시가 다른 음악가 친구들에게 보낸 몇몇 편지에서는 자기 음악에 대해 사뭇 다른 감정을 드러낸 것을 알고 어리둥절했다고 덧붙였습니다.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 1913년 초연의 소동

1913년 5월 중순 샹젤리제 극장에서 드뷔시의 발레 〈놀이〉가 초연되고 두 주쯤 뒤인 5월 29일, 같은 극장에서 같은 러시아 발레단이 〈봄의 제전〉을 처음 무대에 올렸습니다. 작품은 스트라빈스키가 떠올린 이교도의 엄숙한 제의 장면에서 출발했습니다. 둘러앉은 원로들 앞에서 한 소녀가 봄의 신을 달래는 제물로 바쳐져 죽을 때까지 춤을 추는 장면입니다.

언덕을 그린 배경막 앞에서 수놓은 흰 옷과 머리띠 차림의 여성 무용수 여섯이 손을 뺨에 대고 고개를 기울인 흑백 사진
촬영자 미상, 〈봄의 제전〉 초연 무대의 무용수들, 1913년, 사진, 『더 스케치』 1913년 게재. 수놓은 흰 옷에 머리띠를 두르고 다리에 끈을 감은 여섯 무용수가 손을 뺨에 대고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있다.

초연 날 객석에서는 휘파람과 야유가 쏟아졌고 몸싸움까지 벌어졌으며, 극장 밖의 소란은 경찰이 정리했습니다. 오른쪽 넷째인가 다섯째 줄에 앉아 있던 스트라빈스키는 무대 장면보다 지휘자 몽퇴의 등이 더 또렷하게 기억난다고 했고, 몽퇴가 끝까지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갔다는 것이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날 객석에 있던 작곡가 알프레도 카셀라의 회고를 보면, 공연은 숙연한 침묵 속에 시작되었지만 소동은 막이 오르기도 전인 전주곡 중간에 터졌습니다. 막이 열리자 니진스키의 안무는 소란을 가라앉히기는커녕 더 키웠고, 객석이 잠시 잦아들 때마다 오케스트라에서 무섭고 불협하는 음향이 솟아 소란이 전보다 더 거세졌다고 그는 적었습니다. 6월 3일 신문 『르 탕』의 음악란에 글을 쓴 피에르 랄로는 이 음악을 지금까지 쓰인 가장 불협하고 어긋나는 음악이라 했고, 발끝을 안으로 돌린 안무를 두고는 모든 것이 추하다고 썼습니다. 그날을 직접 본 두 사람의 기록은 음악과 안무를 함께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 소동은 어느 한쪽의 탓이라기보다 낯선 음악과 낯선 안무가 겹친 결과로 읽는 편이 기록에 맞습니다.

이듬해인 1914년, 몽퇴가 안무 없이 연주회로 이 곡을 다시 올렸을 때 음악은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러시아 시기에서 신고전주의로, 풀치넬라 전후

러시아 대백과사전은 스트라빈스키의 작품을 러시아 시기, 신고전주의 시기, 후기의 세 시기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불새〉부터 〈봄의 제전〉까지 1910년대 작품이 러시아 시기에 속한다는 데는 출처가 일치하지만, 그 시기가 언제 끝나고 신고전주의가 언제 시작되는지는 출처마다 갈립니다.

갈림의 중심에는 1920년 5월 15일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에르네스트 앙세르메의 지휘로 초연된 발레 〈풀치넬라〉가 있습니다. 그의 악보 출판사 부지 앤드 호크스는 이 곡이 1920~1940년대를 이끈 신고전주의 시기를 열었다고 설명합니다. 반면 러시아 대백과사전은 〈풀치넬라〉를 〈결혼〉·〈여우〉·〈병사 이야기〉처럼 노래와 춤을 섞은 작품 묶음에 넣고, 신고전주의로의 전환은 1923년 〈관악기를 위한 8중주〉와 1924년 〈피아노와 관악기를 위한 협주곡〉에서 찾습니다. 〈결혼〉은 1914년부터 1922년까지 작곡되어 1923년 6월 13일 파리에서 초연되었습니다.

스트라빈스키 자신은 〈풀치넬라〉 작업이 18세기 고전주의를 새롭게 보게 만든 것은 분명하다고 했고, 당시에는 제멋대로 내디딘 걸음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자신에게는 전적으로 논리적인 단계였다고 회고했습니다. 러시아 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신고전주의 시기는 1951년의 마지막 오페라 〈탕아의 행각〉으로 마무리됩니다.

세리얼리즘으로, 쇤베르크 이후의 전환

스트라빈스키의 마지막 시기는 세리 기법으로 설명됩니다. 정해 둔 음의 순서를 바탕으로 곡을 짜는 방법으로, 쇤베르크가 창안한 십이음기법이 그 대표입니다. 러시아 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스트라빈스키는 처음에는 엄격한 십이음기법에 매이지 않고 이 기법을 자유롭게 다루었습니다. 세리 기법을 처음 쓰기 시작한 것은 〈칸타타〉(1952)였고, 1955년 〈성 마르코 찬가〉부터 더 엄격해졌습니다. 1953년에 완성한 〈셰익스피어의 시에 의한 세 노래〉와 〈7중주〉가 후기의 출발점으로 꼽히며, 1954년 〈딜런 토머스를 추모하며〉도 이 시기의 작품입니다.

이 전환은 쇤베르크가 1951년 세상을 떠난 뒤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스트라빈스키가 남긴 기록은 짧습니다. 1912년에 만나 좋은 사이로 헤어졌지만, 그 뒤로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후기의 작업은 1966년 〈레퀴엠 칸티클〉 무렵까지 이어졌고, 러시아 대백과사전은 이 곡을 그가 종교음악 장르에 손댄 마지막 작품으로 적습니다.

망명의 긴 여정, 러시아에서 미국까지

스트라빈스키는 1910년부터 1914년까지 우스틸루그와 스위스를 오가며 지냈고, 1914년부터는 스위스 클라랑에 자리 잡았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이어지던 1914년부터 1920년까지 그는 클라랑과 제네바 호숫가의 작은 도시 모르주 등 스위스에서 살았으므로,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는 이미 조국 밖에 있었습니다. 러시아와 프랑스 사이에 스위스라는 6년의 중간 기착지가 있었던 셈입니다.

해변과 바다를 배경으로 코안경과 나비넥타이 차림에 지팡이를 짚고 선 스트라빈스키의 전신 초상화
자크에밀 블랑슈, 〈스트라빈스키 초상〉, 1915년. 그가 스위스에 살던 무렵의 그림으로, 해변을 배경으로 외투와 모자를 팔에 걸고 지팡이를 짚은 채 선 전신상이다.

1920년 6월 그는 가족과 함께 모르주를 떠나 프랑스로 옮겼고, 그해 여름은 브르타뉴에서, 겨울은 가르슈에서 보냈습니다. 1934년 6월 10일에는 프랑스 시민이 되었습니다. 1939년 9월에는 하버드 대학교의 노턴 강연을 맡아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갔고, 그 뒤 캘리포니아에 자리 잡아 1945년 미국 시민권을 얻었습니다.

러시아와의 인연이 끊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1962년 9월 21일 그는 파리에서 소련 비행기를 타고 모스크바로 날아갔고, 9월과 10월에 걸쳐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지휘자로서 자작곡 연주회를 열었습니다. 1914년 이후 처음으로 고국을 찾은 길이었습니다. 그는 1971년 4월 6일 뉴욕에서 여든여덟 살로 세상을 떠났고, 베네치아에 묻혔습니다.

스트라빈스키 대표곡과 그가 남긴 것

러시아 발레단을 위해 쓴 〈불새〉·〈페트루슈카〉·〈봄의 제전〉은 스트라빈스키의 3대 발레로 불리며, 세 작품 모두 이 발레단의 무대로 파리에서 초연되었습니다. 그 뒤 그는 〈풀치넬라〉와 〈8중주〉로, 다시 〈칸타타〉와 〈레퀴엠 칸티클〉로 작풍을 바꾸어 갔습니다. 러시아 대백과사전은 이런 변화 때문에 그를 「음악의 프로테우스」로 보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고 적습니다. 프로테우스는 모습을 마음대로 바꾸는 그리스 신화의 바다 신입니다.

기록을 따라가 보면 그의 생애는 1913년의 소동 한 번보다 그 뒤에 이어진 선택들로 더 잘 설명됩니다. 그는 법학도로 출발해 스승의 미지근한 첫 반응을 겪었고, 파리에서 이름을 얻은 뒤에도 출판사와 사전이 시기를 서로 다르게 나눌 만큼 여러 번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1962년 지휘자로 고국을 다시 찾은 일도 그 선택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작곡가로서 그가 생계와 수입을 어떻게 꾸렸는지는 스트라빈스키의 지갑 사정과 저작권 제도를 다룬 글에서 이어집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봄의 제전 초연 소동은 정말 음악 때문이었나요?

음악만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그날 객석에 있던 카셀라와 평론가 랄로는 음악과 안무를 함께 지목했고, 당대 비평의 자세한 내용은 봄의 제전 초연 비평을 다룬 글에 정리했습니다.

Q. 스트라빈스키는 스위스에도 살았나요?

네, 1914년부터 1920년까지 클라랑과 모르주 등 스위스에서 살았습니다. 그 전인 1910년부터 1914년까지도 우스틸루그와 스위스를 오갔고, 1920년 6월에 프랑스로 옮겼습니다.

Q. 신고전주의는 결혼(Les Noces)에서 시작됐나요?

〈결혼〉은 1914년부터 1922년까지 작곡되어 1923년에 초연된 작품이고, 신고전주의의 출발점으로 거론되는 곡은 따로 있습니다. 출판사 부지 앤드 호크스는 1920년의 〈풀치넬라〉를, 러시아 대백과사전은 1923년 〈관악기를 위한 8중주〉와 1924년 〈피아노와 관악기를 위한 협주곡〉을 전환점으로 봅니다.

Q. 스트라빈스키는 어디서 태어났나요?

상트페테르부르크 서쪽의 소도시 오라니엔바움입니다. 지금은 로모노소프라는 이름으로 행정상 상트페테르부르크시에 속해 있습니다.

Q.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얼마나 배웠나요?

1902년 여름 하이델베르크에서 처음 습작을 보였지만,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먼저 화성과 대위법을 더 익히라고 권했습니다. 직접 지도는 1903년 여름에 시작되었고, 그해 가을부터 약 3년 동안 일주일에 한 번 정기 수업을 받았다고 스트라빈스키는 적었습니다. 사제 인연은 스승이 세상을 떠난 1908년까지 이어졌습니다.

Q. 세 번째 시기는 십이음기법인가요 세리얼리즘인가요?

세리 기법이라는 넓은 이름이 더 알맞습니다. 그는 〈칸타타〉(1952)에서 처음에는 엄격한 십이음기법에 매이지 않고 이 기법을 자유롭게 썼고, 1955년 〈성 마르코 찬가〉부터 더 엄격해졌습니다. 이 변화는 쇤베르크가 세상을 떠난 1951년 이후 본격화되었습니다.

Q. 스트라빈스키는 언제 어디서 세상을 떠났나요?

미국으로 건너간 지 30년이 넘은 1971년 4월 6일, 뉴욕에서 여든여덟 살로 세상을 떠났고 베네치아에 묻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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