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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대표 음악가 그리그(Edvard Grieg)의 생애와 음악

  그리그(Edvard Hagerup Grieg, 1843-1907)는 노르웨이의 대표적인 음악가로 독일 낭만음악의 기초 위에 노르웨이의 민속적인 선율과 화성을 사용하여 민족적 색채가 짙은 작품을 작곡하였다. 


  그리그는 노르웨이의 항구도시 베르겐(Bergen)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부유한 상인이었고, 어머니는 베르겐 명문가의 딸로 뛰어난 시인이자 음악가였다. 그리그는 6살 때 어머니로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


  외교관 집안이었던 덕분에 그의 집에서는 음악 모임이 자주 열렸는데 15번째 생일을 며칠 앞둔 1858년 여름,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올레 불(Ole Bull, 1810~1880)이 그리그의 집을 방문했다. ‘북유럽의 파가니니’라 불리던 올레 불은 그리그의 비범한 재능을 알아보고 라이프치히 음악원으로 유학을 권유했다.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4년 동안 공부한 그리그는 독일의 전통 음악과 낭만주의 음악의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보다는 낭만주의 성향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그의 모습이 보이는 이미지입니다.
그리그의 모습 (출처 : britannica.com)


  1862년 라이프치히 음악원을 졸업한 그리그는 당시 문화의 중심지였던 덴마크의 코펜하겐에 정착하였다. 여기서 그리그는 성악가인 니나(Nina Hagerup,1845-1935)를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그리그의 음악적 반려자로서, 남편의 가곡을 널리 알리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한 민족음악에 깊은 애착을 가진 노르드라크(Rikard Nordraak, 1842-1866)를 만나게 된 이후 그리그는 받아 노르웨이의 정신을 음악으로 표현하기로 결심한다. 두 사람은 노르웨이 작곡가들의 작품을 집중 연주하기 위한 오이테르페(Euterpe)라는 음악협회를 설립하였지만 노르드라크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만다.


  1866년 그리그는 노르웨의 음악으로만 구성된 음악회를 열어 대중들에게 점차 알려지게 된다. 1867년에 민족요소가 짙은 <바이올린 소타타 2번>을 구상하였고, 1868년 딸이 출생하면서 그리그는 노르웨이 낭만음악의 정수라고 꼽히는 <피아노 협주곡 a단조>를 작곡하였다. 이 곡은 리스트로부터 극찬을 받아 그리그는 명성을 떨치게 된다.


  그리그는 휴가 중에 루드비그 린데만(1812-1887)가 노르웨이의 민속음악을 엮은 책 <고금의 산중음악>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그는 이 책을 바탕으로 편곡한 첫 모음집을 올레 볼에게 헌정하였다.


  1874년 극작가 입센(Henrik Ibsen, 1828-1906)에게서 연극 <페르 권트 Peer Gynt>의 극음악 작곡을 의뢰받게 된다. 그는 무겁고 어려운 극을 관객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작곡하여 또 한번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 곡은 1876년부터 2개의 관현악 모음곡인 1번 <아침의 기분>, 모음곡 2번 <솔베이지의 노래 Solveig's Song>로 편곡되어 널리 연주되고 있다. 특히 방황하는 남편을 그리워며 부르는 <솔베이지의 노래>는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연주되는 명곡 중 하나이다.


  1874년부터 노르웨이 정부의 종신연금으로 생활이 보장된 그리그는 순회 공연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건강이 악화된 상황에서도 초청 연주를 거절하지 못하였던 그리그는 1907년 영국으로 연주 여행을 떠나기 직전 심장발작으로 베르겐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리그의 음악에는 자연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정신과 함께, 노르웨이 전통 민속 음악에서 등장하는 선율, 화성, 그리고 리듬이 음악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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