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ype Here to Get Search Results !

20세기 영국의 위대한 음악가 벤저민 브리튼(Benjamin Britten)의 생애와 음악

  20세기 영국의 위대한 작곡가 벤저민 브리튼(Benjamin Britten)의 생애와 음악에 대하여 알아보자. 


   20세기 영국 대표하는 최고의 작곡가 벤자민 브리튼(Edward Benjamin Britten, 1913-1976)은 뛰어난 피아니스트이자 저명한 지휘자였다. 그는 당시 영국 작곡가 본 윌리암스(Ralph Vaughan Williams, 1872-1958)와 함께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 헨리 퍼셀(Henry Purcell, 1659-1695)과 헨델(Georg Friedrich Handel, 1682-1759) 이후 침체되어 있던 영국음악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한 합창음악의 천재적인 작곡가였다.

 

  브리튼은 치과의사인 아버지(Robert Victor Britten)와 아마추어 성악가였던 어머니(Edith Rhonda) 사이에서 막내아들로 영국 서포크(Suffolk)주 로우스토프트(Lowestoft)의 작은 항구도시에서 태어났다. 음악가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브리튼은 5살 때부터 피아노와 작곡을 시작하였고, 오드리 알스톤(Audrey Alston)에게 비올라를 배웠으며 11세가 되던 1924년에는 3년마다 열리는 Norwich Festival에 참가하여 프랭크 브릿지(Frank Bridge,1879-1941)의 작품 The Sea를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아 그의 제자가 되어 본격적으로 음악수업을 받기 시작하였다.

 

  브리지는 브리튼을 런던에서 작곡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부모님을 설득하였다. 1930년 브리튼은 영국 왕립음악학교(Royal College of Music)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였고, 존 아일랜드(John Ireland, 1879-1962)에게 4년간 작곡을 배우고, 아더 벤자민(Arthur Benjamin, 1893-1960)에게 피아노를 사사 받았다. 1932년에는 알반 베르크(Alban Berg, 1885-1935)의 오페라 <보체크 Wozzeck>공연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아 베르크에게 작곡을 배우기 위해 오스트리아 빈으로 가려고 하였으나, 당시 음악적으로 보수적이었던 학교의 반대로 가지 못하였다.

 

Benjamin Britten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이미지입니다.
Benjamin Britten의 모습


  졸업 후 1935년 중앙우체국 영화부의 다큐멘터리 음악과 영화음악을 작곡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작은 규모의 악기편성의 효과적 표현력을 발전히시케 되었다. 이 때 브리튼은 브릿지 다음으로 큰 영향을 주었던 시인 위스턴 오든(Wystan Hugh Auden, 1907-1973)을 만나게 된다.

 

  1937년에 브리튼은 평생의 음악 동반자인 테너 피터 피어즈(Peter Pears, 1910-1986)를 만나게 되고, 피어즈를 위해 수많은 가곡과 오페라를 작곡하였다.

 

  전쟁의 후유증과 경제공항으로 혼란스러웠던 1930년대 후반 1938년 미국으로 귀화한 오든이 브리튼을 설득하여 피어스와 함께 1939년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1942년까지 미국에서 머문 2년 반 동안 브리튼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음악의 범위를 넓혀 새로운 시도를 한다.

 

  브리튼은 제2차 세계대전 중 1942년에 피어즈와 조국으로 돌아와 영국 올드버러(Aldeburgh)에 정착하여 작곡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가 영국으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작곡한 작품이 바로 <캐롤의 제전 A Ceremony of Carlos>이다. 귀국 후 브리튼은 <성 체칠리아 찬가 Hymn to St. Cecillia><주 안에서 기뻐하라 Rejoice in the Lamb> 등을 작곡하였는데, 이 합창곡들은 전쟁의 위협 속에 있는 영국 국민에게 마음의 위안을 주었다.

 

  1945년 브리튼은 영국의 작은 어촌 마을을 배경으로 한 오페라 <피터 그라임즈 Peter Grimes>의 성공으로 영국 음악 흐름의 전환점을 삼으며, 작곡가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얻게 되었다. 이 작품의 성공으로 영국 오페라단(Engllish Opera Group)을 조직하며 영국 오페라의 부흥에 공헌을 하였고, 1948년부터 올드버러 음악제(Aldeburgh Festival)를 해마다 개최하여 자신의 새로운 작품들을 발표다. 뿔랑(Francis Poulenc, 18991963), 코플란드(Aaron Copland, 1900-1990), 코다이(Zoltán Kodály, 1882-1967)등 많은 작곡가들도 이 음악제에 참여하였다. 1955년부터 피어즈와 함께 세계 곳곳에서 연주회를 열어 활발한 연주활동을 하였고, 일본과 인도네시아 발리 등지의 여행을 통해 동양 음악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브리튼은 코번트리 대성당의 재건을 위해 1961 라틴어 전례문과 오언(Wilfred Owen, 1893-1918)의 시를 결합시킨 대규모 합창곡 <전쟁 레퀴엠 A War Requiem>을 작곡하였다. 이 레퀴엠은 전쟁의 참혹함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평화를 염원하는 기도를 담은 대작이며, 그의 합창곡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최고의 걸작으로 영국 합창 음악의 전통성을 다시 한번 부각시켜 주었다.

 

  이후 브리튼은 영국 옥스퍼드 대학과 레스터 대학에서 각각 명예박사학위를 받았고, 1965-1968년 사이에는 아스펜상(미국), 시벨리우스 상(헬싱키), 소닝그 상(코펜하겐)등을 수상하는 명예를 안았다.

 

  1967년 올드버러 음악제(Aldeburgh Festival)가 스네이프 몰팅즈 콘서트 홀(Snape Maltings Concert Hall)개관을 통해 확장되었으며 1973년 그의 마지막 오페라 베니스에서의 죽음(Death in Venice, Op.88, 1973)이 이곳에서 연주되었다. 이 무렵 브리튼은 건강이 악화되었고, 1976124일 생을 마감하였다.

 

댓글 쓰기

0 댓글
* Please Don't Spam Here. All the Comments are Reviewed by Admin.

본문 상단 광고

본문 하단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