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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영국의 위대한 음악가 벤저민 브리튼(Benjamin Britten)의 생애와 음악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미국에서 안전하게 지내던 한 작곡가가 굳이 전쟁 중인 조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군대에 들어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총을 들지 않겠다고 정식으로 심사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벤저민 브리튼(Benjamin Britten, 1913~1976)은 이렇게 신념을 굽히지 않으면서도, 퍼셀 이후 침체됐던 영국 오페라를 되살리고 전쟁의 상처를 음악으로 어루만진 작곡가였습니다.

벤저민 브리튼 한눈에 보기
  • 생몰년: 1913년 11월 22일 로우스토프트 출생, 1976년 12월 4일 올드버러에서 사망(63세)
  • 대표작: 오페라 피터 그라임즈(1945), 전쟁 레퀴엠(1962), 캐롤의 제전
  • 평생의 동반자: 테너 피터 피어스, 공개된 커플로 인정받지 못했던 시대
  • 신념: 제2차 세계대전 중 양심적 병역거부로 완전 면제를 얻어냄
  • 업적: 영국 오페라단·올드버러 음악제 창설, 영국 오페라 부흥의 주역

로우스토프트의 소년, 성 세실리아 축일에 태어나다

브리튼은 1913년 11월 22일, 음악의 수호성인을 기리는 성 세실리아 축일에 영국 서포크주의 작은 항구도시 로우스토프트에서 태어났습니다. 치과의사인 아버지와 아마추어 성악가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막내로 태어난 그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와 작곡을 시작했고, 오드리 알스톤에게 비올라를 배웠습니다. 열한 살이던 1924년에는 노리치 음악제에서 프랭크 브리지의 작품 더 시를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아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왕립음악학교, 그리고 좌절된 빈 유학

브리지는 브리튼이 런던에서 정식으로 작곡을 배울 수 있도록 부모를 설득했습니다. 1930년 왕립음악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한 브리튼은 존 아일랜드에게 4년간 작곡을, 아서 벤저민에게 피아노를 사사했습니다. 1932년에는 알반 베르크의 오페라 보체크 공연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아 베르크에게 직접 배우기 위해 빈으로 떠나려 했지만, 음악적으로 보수적이었던 학교 측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벤저민 브리튼의 모습
벤저민 브리튼

영화음악과 오든, 그리고 피어스와의 만남

졸업 후인 1935년 브리튼은 중앙우체국 영화부에서 다큐멘터리 영화음악을 작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소규모 악기 편성으로도 효과적인 표현력을 끌어내는 이 작업을 통해 그는 실용적인 작곡 감각을 키웠고, 이 무렵 브리지 다음으로 큰 영향을 준 시인 위스턴 오든을 만났습니다.

1937년에는 훗날 평생의 반려자가 될 테너 피터 피어스를 만났습니다. 비행기 사고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공통의 지인이 남긴 집을 함께 정리하던 중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1939년 미국 이주를 계기로 연인 사이로 발전했고, 이후 브리튼은 피어스를 위해 수많은 가곡과 오페라를 작곡하게 됩니다.

피터 피어스, 시대가 허락하지 않은 반려자

브리튼과 피어스의 관계는 단순한 음악적 협력을 넘어, 브리튼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어진 실질적인 연인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당대에 공개적으로 인정받기는 어려웠습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남성 간 동성애 자체가 형사처벌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이 처벌 조항이 폐지된 것은 1967년 성범죄법 개정 이후의 일이었고, 스코틀랜드는 1981년, 북아일랜드는 1982년에야 뒤를 이었습니다.

이 시절의 위험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수학자 앨런 튜링이 1952년 유죄판결을 받고 강제로 화학적 거세를 당한 뒤 1954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은 당시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브리튼 자신도 1953년 경찰 조사를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언제나 음악적 동반자라는 완곡한 표현으로만 소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는 두 사람의 관계를 있는 그대로 연인 관계로 서술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 시절에는 침묵이 곧 생존의 조건이었던 셈입니다.

미국 이주와 양심적 병역거부

세계대전의 그림자가 짙어지던 1939년, 앞서 미국으로 건너간 오든의 권유로 브리튼과 피어스도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브리튼은 18세기 시인 조지 크래브의 시를 읽으며 고향 영국에 대한 강한 그리움을 느꼈습니다. 크래브의 장시 더 버러는 훗날 그의 대표 오페라가 될 작품의 소재가 되어 줍니다.

1942년, 브리튼은 피어스와 함께 전쟁 중인 조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군에 입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평화주의자로서 양심적 병역거부 심사를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심사 초기에는 비전투 임무만 허용됐지만, 두 사람은 항소를 거쳐 최종적으로 조건 없는 완전 면제를 얻어 냈습니다. 영국으로 돌아오는 배 위에서 그는 캐롤의 제전을 작곡했습니다. 귀국 후에는 성 체칠리아 찬가와 주 안에서 기뻐하라 같은 합창곡을 잇달아 내놓아, 전쟁의 위협 속에 있던 영국 국민에게 위안을 주었습니다.

피터 그라임즈, 영국 오페라를 되살리다

1945년 6월, 브리튼은 영국의 작은 어촌 마을을 배경으로 한 오페라 피터 그라임즈를 새들러스 웰스 무대에 올렸습니다. 퍼셀 이후 오랫동안 국제적으로 통하는 걸작을 내놓지 못했던 영국 오페라계에 이 작품은 신선한 충격을 안겼습니다. 지극히 영국적인 소재와 현대적인 극적 긴장감을 결합한 이 성공으로 브리튼은 작곡가로서 확고한 위치를 얻었습니다.

그해 12월, 브리튼은 새들러스 웰스와 결별하고 영국 오페라단을 새로 결성했습니다. 성공에 곧바로 이어진 것처럼 알려지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반년가량의 시차가 있었습니다. 1948년부터는 올드버러 음악제를 해마다 열어 자신의 신작을 발표하는 무대로 삼았고, 이 음악제에는 풀랑크와 코플런드, 코다이 같은 작곡가들도 참여했습니다. 1955년부터는 피어스와 함께 세계 각지에서 연주 여행을 다녔으며, 일본과 발리 등지를 여행하며 동양 음악에 대한 관심을 키우기도 했습니다.

전쟁 레퀴엠, 화해를 노래하다

1961년 완성해 이듬해인 1962년 5월 30일 코번트리 대성당 봉헌식에서 초연된 전쟁 레퀴엠은 브리튼의 반전 메시지가 가장 응축된 작품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무너졌던 코번트리 대성당이 새로 봉헌되는 자리를 위해 위촉된 이 곡은, 라틴어 레퀴엠 전례문을 소프라노와 합창, 대편성 오케스트라가 노래하는 동안 시인 윌프레드 오언이 남긴 아홉 편의 반전시를 테너와 바리톤, 실내악 편성이 그 사이사이에 끼워 넣는 독특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브리튼은 이 곡의 독창자를 제2차 세계대전에서 맞붙었던 세 나라, 영국과 독일과 소련 출신으로 의도적으로 구성해 화해의 메시지를 담고자 했습니다. 영국은 피어스가, 독일은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가 맡았고, 소련을 대표할 예정이었던 소프라노는 갈리나 비시넵스카야였습니다. 그러나 소련 당국은 끝내 비시넵스카야의 초연 참석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소프라노 헤더 하퍼가 공연을 불과 열흘 앞두고 이 사실을 통보받아 급히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화해를 노래하려던 무대 뒤에서, 냉전의 그림자가 그대로 드러난 순간이었습니다.

말년과 남은 유산

전쟁 레퀴엠 이후 브리튼은 옥스퍼드 대학과 레스터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고, 1965년부터 1968년 사이에는 미국의 아스펜상, 헬싱키의 시벨리우스 상, 코펜하겐의 소닝 상을 잇달아 받았습니다. 1967년에는 올드버러 음악제의 새 거점인 스네이프 몰팅스 콘서트홀이 문을 열었고, 1973년에는 이곳에서 그의 마지막 오페라 베니스에서의 죽음이 초연되었습니다.

이 무렵 건강이 눈에 띄게 나빠진 브리튼은 1976년 12월 4일, 오랫동안 활동의 근거지였던 올드버러에서 울혈성 심부전으로 예순세 살에 눈을 감았습니다. 침묵해야 했던 사랑과 굽히지 않은 신념, 그리고 영국 음악을 되살린 작품들은 오늘날까지 그의 이름과 함께 남아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브리튼과 피어스는 왜 공개적인 커플로 알려지지 않았나요?

남성 동성애를 범죄로 규정하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잉글랜드와 웨일스 기준으로 이 조항이 사라진 것은 1967년이었고, 그전까지는 앨런 튜링의 유죄판결과 강제거세 사례가 보여주듯 발각되면 실제로 인생이 무너질 수 있는 위험이었습니다. 브리튼도 1953년 경찰 조사를 받은 적이 있어, 두 사람의 관계는 늘 완곡하게만 표현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Q. 브리튼은 정말 양심적 병역거부자였나요?

그렇습니다. 1942년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피어스와 함께 평화주의자로 등록해 병역거부 심사를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비전투 임무만 허용됐지만, 항소를 거쳐 최종적으로는 조건 없는 완전 면제를 받아 냈습니다.

Q. 피터 그라임즈는 왜 영국 오페라를 부활시켰다고 평가받나요?

퍼셀 이후 오랫동안 이렇다 할 자국산 걸작을 내놓지 못했던 영국 오페라계에, 국제 무대에서도 통하는 대형 작품이 처음으로 나왔기 때문입니다. 어촌 마을이라는 지극히 영국적인 배경과 현대적인 극적 긴장감을 결합한 이 작품은 영국 오페라가 다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Q. 영국 오페라단은 언제 만들어졌나요?

곧바로 이어진 게 아니라 반년가량의 틈이 있습니다. 초연이 성공한 뒤로도 시간이 흘러, 브리튼이 새들러스 웰스와 갈라선 같은 해 12월에야 별도 단체로 출범했습니다.

Q. 전쟁 레퀴엠 초연에서 정말 극적인 사건이 있었나요?

있었습니다. 소련 출신 소프라노로 예정되어 있던 갈리나 비시넵스카야가 소련 당국의 불허로 끝내 무대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대신 소프라노 헤더 하퍼가 공연을 열흘 앞두고 갑작스레 통보받아 그 자리를 대신 채웠습니다.

Q. 전쟁 레퀴엠의 세 독창자는 왜 그렇게 구성되었나요?

전쟁에서 서로 총부리를 겨눴던 세 나라 출신 가수를 한 무대에 세워 화해를 형상화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영국 대표는 피어스, 독일 대표는 피셔디스카우였고, 소련 쪽 자리는 원래 비시넵스카야에게 돌아갈 예정이었습니다.

Q. 브리튼은 언제 어떻게 세상을 떠났나요?

세상을 떠난 날짜는 1976년 12월 4일입니다. 장소는 그가 오래 머물렀던 올드버러였고, 심장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는 울혈성 심부전이 사인이었습니다. 그때 나이는 예순셋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