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독일 후기 낭만파의 대미를 장식하는 인물이다. 생전에 지휘자로도 유명했는데, 그가 지휘한 음악의 녹음 자료가 지금도 남아 있다. 그는 종교음악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작품을 남겼는데, 특히 오페라와 교향시에서 탁월했다.
슈트라우스(Richard Georg Strauss, 1864-1949)는 바이에른 왕국이던 뮌헨에서 궁정악단의 수석 호른 연주자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맥주 회사 경영자의 딸이었다. 이렇듯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며 그는 일찌감치 아버지에게 음악을 배웠다. 4세 때부터 피아노를, 8세 때에는 바이올린을 배웠으며, 11세에는 궁정악단 지휘자인 마이어(Friedrich Wilhelm Meyer)를 만나 음악이론, 작곡, 기악편성법 등을 배웠다.
1882년 슈트라우스는 뮌헨대학교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세계적인 지휘자 한스 폰 뷜러(Hans von Bülow, 1839-1894)를 만났다. 재능을 인정받은 슈트라우스는 1885년에는 뷜로가 지휘하고 있던 마이닝엔 극장의 부지휘자가 되었으며, 뷜로가 은퇴한 후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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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mahlerfoundation.org |
마이닝엔 오케스트라의 악장이자 시인인 알렉산더 리터(Alexander Ritter, 1833-1896)의 영향으로 슈트라우스는 신독일 악파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그의 음악에서 나타나는 반음계와 불협화음의 성향, 교향시 작곡에 전념한 것을 볼 때 바그너의 영향을 받았다.
1886년 슈트라우스는 브람스의 권유로 이탈리아 여행을 하는데 그곳의 인상을 교향시 <이탈리아에서 Aus Italien>를 작곡하였다. 이탈리아에서 귀국한 뒤 슈트라우스는 빈 오케스트라의 제3지휘자로 있는 동안 교향시 <돈 후안 Don Juan>과 <맥베스 Macbeth>를 작곡하였다. 이후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의 교향시를 잇달아 작곡했다. 1898년 그는 <영웅의 생애>를 끝으로 교향시와는 인연을 끊고 오페라로 관심을 돌렸다.
1894년 슈트라우스는 자신의 첫 번째 오페라 <군트람 Guntram>을 초연하게 되고, 이 오페라에 출현한 소프라노 가수 파울리네드 안나(Pauline de Ahna, 1862-1950)와 결혼하였다.
1898년 뮌헨을 떠나 바이마르 궁정극장의 제2지휘자 자리를 맡게 된 슈트라우스는 모차르트, 바그너 등의 작품을 연구하며 오페라 공연에 적극적인 의욕을 보였다. 시인 후고 폰 호프만스탈이 대본을 쓴 <엘렉트라>와 <장미의 기사>도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다. <장미의 기사>는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을 패러디한 작품으로, 이후에도 슈트라우스는 여러 편의 오페라를 쓰지만 이 초기 작품을 능가하지는 못했다.
20세기에 들어서 1905년 오스카 와일드 원작에 기초해 완성한 <살로메 Salome>가 드레스덴에서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지나치게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뉴욕에서는 상연 금지를 당하기도 했고, 지금도 연출가에 따라 선정성 논란을 일으키는 작품이다.
1930년대에 슈트라우스는 독일 음악계를 접수한 살아 있는 전설이 되었다. 작곡가로서 승승장구하는 한편 지휘자로서도 뮌헨, 베를린, 빈의 오페라극장을 종횡무진 활약하며 그야말로 눈부신 커리어를 쌓았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이야기할 때 나치와의 관계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1933년 나치 정권의 괴벨스는 문화와 예술을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제국 음악원’을 만들고 슈트라우스를 초대 총재로 임명했다. 이런 직책을 맡아 <일본 축전곡>을 작곡하였는데, 애국가의 작곡가인 안익태가 일본 대표로 지휘하여 '안익태 친일 논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후 슈트라우스는 나치에 동조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다시 활동을 재개했지만, 건강이 나빠지게 되고 1949년 결국 심장 장애를 일으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