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작곡가가 오케스트라 하나로 철학책 한 권을 그려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독일 후기 낭만파의 대미를 장식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1949)는 교향시라는 장르를 정점까지 밀어붙였고, 오페라에서도 굵직한 성취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애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나치 독일 시기의 복잡한 처신까지 함께 살펴봐야 합니다.
- 생몰년: 1864년 6월 11일 뮌헨 출생, 1949년 9월 8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에서 사망(85세)
- 대표작: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틸 오일렌슈피겔, 오페라 장미의 기사·살로메
- 지휘 이력: 마이닝엔·뮌헨·바이마르·베를린 궁정극장을 두루 거친 명지휘자
- 나치 시기: 1933년 제국음악원 총재 취임, 1935년 츠바이크 사건으로 사임
- 전후: 1948년 탈나치화 재판에서 무죄 판정
뮌헨의 유복한 소년, 음악가로 자라다
슈트라우스는 1864년 바이에른 왕국의 수도 뮌헨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궁정악단의 수석 호른 연주자이자 왕립음악학교 교수였고, 어머니는 맥주 회사 경영자의 딸이었습니다. 이런 유복한 환경에서 그는 일찌감치 음악에 둘러싸여 자랐습니다. 네 살에 피아노를, 여덟 살에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고, 열한 살부터는 궁정악단 지휘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마이어에게 음악이론과 작곡, 관현악법을 익혔습니다.
마이닝엔에서 베를린까지, 지휘자로서의 성장
1882년 뮌헨 대학교에 입학한 슈트라우스는 그곳에서 세계적인 지휘자 한스 폰 뷜로를 만났습니다. 재능을 인정받은 그는 1883년 뷜로의 조수로 마이닝엔 궁정악단에 들어갔고, 1885년 12월 뷜로가 사임하자 넉 달간 임시로 수석지휘자를 맡았습니다. 이듬해인 1886년에는 뮌헨의 바이에른 국립극장 제3지휘자로 자리를 옮겼고, 1889년 가을에는 바이마르 궁정극장의 카펠마이스터로 임명되었습니다. 1894년에는 다시 뮌헨으로 돌아와 이번엔 수석지휘자로 몇 해를 보냈고, 1898년 가을에야 베를린 궁정극장의 수석지휘자로 자리를 옮겨 1908년까지 십 년간 이 자리를 지켰습니다.
![]() |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
리터와 신독일악파, 교향시로의 전향
마이닝엔 오케스트라의 악장이자 시인이었던 알렉산더 리터의 영향으로, 슈트라우스는 1885년 무렵부터 음악적 방향을 크게 틀었습니다. 그때까지 몸담고 있던 브람스적 절대음악의 노선에서 벗어나, 표제를 지닌 음악을 추구한 리스트와 바그너의 신독일악파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것입니다. 반음계와 불협화음을 적극적으로 쓰고 교향시 작곡에 몰두하게 된 것도 이 전환의 결과였습니다.
1886년 이탈리아를 여행한 그는 그곳에서 받은 인상을 교향시 이탈리아에서로 담아냈습니다. 뮌헨에서 제3지휘자로 일하는 동안에는 돈 후안과 맥베스를, 이어서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같은 교향시를 잇달아 내놓았습니다. 1898년 영웅의 생애를 끝으로 그는 교향시와 작별하고 오페라 쪽으로 관심을 돌렸습니다.
오페라로의 전환, 장미의 기사의 성공
슈트라우스는 1894년 첫 오페라 군트람을 초연했고, 이 작품에 출연한 소프라노 파울리네 데 아나와 결혼했습니다. 베를린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는 모차르트와 바그너의 작품을 깊이 연구하며 오페라 창작에 더욱 힘을 쏟았습니다. 시인 후고 폰 호프만스탈이 대본을 쓴 엘렉트라와 장미의 기사는 대중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을 패러디한 장미의 기사는 이후 그가 내놓은 어떤 오페라도 넘어서지 못한 정점으로 남았습니다.
1905년에는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살로메가 드레스덴에서 초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지나치게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뉴욕에서는 상연이 금지되기도 했고, 지금도 연출에 따라 논란을 부르는 작품입니다.
나치 독일과 제국음악원, 수락의 배경
1933년 11월, 요제프 괴벨스는 문화와 예술을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제국음악원을 만들고 슈트라우스를 초대 총재로 임명했습니다. 슈트라우스 본인은 훗날 이 임명이 자신의 사전 동의 없이 발표됐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가 남긴 말에 따르면, 그는 이 자리를 맡음으로써 얼마간 선한 일을 할 수 있고 더 나쁜 불행을 막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이 설명을 어디까지 그대로 받아들일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평가가 갈립니다.
츠바이크 사건과 사임, 그리고 며느리 보호
슈트라우스는 이 시기에도 유대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와 협업을 이어 갔습니다. 츠바이크가 대본을 쓴 오페라 말없는 여인이 1935년 드레스덴에서 초연될 때, 나치 당국은 프로그램에서 츠바이크의 이름을 빼라고 요구했지만 슈트라우스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같은 해 6월 17일 그가 츠바이크에게 보낸 개인 편지가 게슈타포에 가로채이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편지에는 나치의 인종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고, 이 일이 발각되자 그는 곧바로 제국음악원 총재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사임 이후에도 슈트라우스는 나치 정권과 완전히 등을 돌리지는 못했습니다. 여기에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들 프란츠의 아내 알리스는 유대계였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손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필요성이 이후에도 그가 정권과 타협적인 관계를 이어 간 동기 가운데 하나였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일본 축전곡, 시기가 어긋난 인과관계
슈트라우스는 1940년 일본 건국 2600주년을 기념하는 일본 축전곡을 작곡했습니다. 이 곡을 제국음악원 총재직 수행의 연장선으로 소개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시기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1935년에 총재 자리에서 물러난 상태였고, 두 사건 사이에는 5년의 간격이 있습니다. 이 곡은 훗날 애국가의 작곡가인 안익태가 일본 대표로 지휘하면서 별도의 논란을 낳기도 했습니다.
전후 탈나치화 재판과 말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슈트라우스는 나치에 협력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1948년 6월 뮌헨의 탈나치화 재판소는 그에게 제기된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다만 이 판정에 이르기까지 거친 구체적인 절차 단계까지는 자료마다 상세히 확인되지는 않습니다.
무죄 판정 이후 슈트라우스는 다시 활동을 재개했지만 건강은 이미 눈에 띄게 나빠져 있었습니다. 그해 8월 15일에는 심장 발작을 겪기도 했지만, 실제 사망 원인은 신부전으로 전해집니다. 그는 1949년 9월 8일,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에서 여든다섯 살의 나이로 눈을 감았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슈트라우스는 왜 나치 제국음악원 총재직을 수락했나요?
본인은 훗날 사전 동의 없이 임명이 발표됐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얼마간 선한 일을 할 수 있고 더 나쁜 불행을 막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 발언을 어디까지 그대로 받아들일지는 평가가 갈리지만, 본인이 내놓은 설명은 이것입니다.
Q. 슈트라우스는 나치와 뜻이 같았나요?
그렇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유대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와 계속 협업했고, 나치의 요구에도 그의 이름을 공연 프로그램에서 지우지 않았습니다. 인종정책을 비판한 개인 편지가 발각되면서 결국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던 것도 그가 정권과 온전히 한몸이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Q. 슈트라우스는 왜 제국음악원 총재직에서 물러났나요?
1935년 츠바이크에게 보낸 편지가 게슈타포에 가로채이면서였습니다. 편지에는 인종정책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고, 이 일이 알려지자 그는 곧바로 총재 자리에서 밀려났습니다.
Q. 며느리를 보호하려 한 것도 사실인가요?
여러 연구자가 그렇게 평가합니다. 며느리 알리스와 그녀가 낳은 손자들 모두 유대계 혈통이었기 때문입니다. 총재직에서 물러난 뒤로도 정권과 아주 등을 지지는 못했던 배경에, 이 가족을 지키려는 현실적 판단이 있었다고 보는 시각입니다.
Q. 일본 축전곡은 제국음악원 총재 시절 작곡한 곡인가요?
아닙니다. 곡이 완성된 해는 1940년으로, 총재직에서 내려온 1935년보다 5년이나 뒤입니다. 시간 순서만 놓고 봐도 총재 재임 중의 결과물이라 보기는 무리가 있습니다.
Q. 전후 재판에서는 어떤 판정을 받았나요?
무죄였습니다. 1948년 6월 뮌헨에서 열린 탈나치화 재판소가 씌워진 혐의를 모두 걷어냈습니다. 다만 그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재판이 거친 세부 절차는 자료마다 자세히 나와 있지 않습니다.
Q. 슈트라우스는 언제 어떻게 세상을 떠났나요?
1949년 9월 8일,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에서 여든다섯 해의 삶을 마쳤습니다. 한 달 전인 8월에 심장 발작을 겪었지만, 실제 사망 원인은 신부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