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후기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작곡가이자 유명한 피아니스트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ff, 1873-1943)는 러시아 노브고로드 주스타로루스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수준급 피아노 실력을 자랑하는 할아버지와 어머니 덕분에 그 역시 어릴 적부터 자연스레 피아노를 접했다. 9세에 상트페테르부르그 음악원에서 입학하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이 몰락하게 되고, 여동생이 병에 걸려 죽고, 이로 인해 부모가 이혼하게 되면서 그는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는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기본 과정을 마칠 때 쯤 라흐마니노프는 즈베레프의 집에서 살게 되었다. 이 집에 살면서 일요일 오후마다 선생님 집에 모였던 음악가들인 안톤 루빈슈타인, 안톤 아렌스키, 차이코프스키 등을 만났다.
음악외 성적이 형편없었던 라흐마니노프는 퇴학 직전까지 몰렸다. 어머니의 노력으로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알렉산드로 스크랴빈과는 음악원 동기였다. 두 사람의 음악적 성향은 정반대에 가까웠지만 매우 친했다고 한다. 음악원을 졸업작품인 단막 오페라 <알레코>는 최고의 금상을 받으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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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큰 라흐마니노프의 모습(출처 : www.rferl.org) |
하지만 1895년 그의 야심작이었던 <교향곡 제1번>이 초연되었으나, 만취한 지휘자의 연주로 인해 비평가들로부터 혹독한 비평만을 받고 실패작으로 남게 되었다. 라흐마니노프는 커다란 충격을 받고 깊은 우울증에 빠졌는데,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사촌과 결혼한 이유로 비난을 받아 우울증은 더욱 심해졌다. 3년간 작곡을 하지 못할 정도로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졌던 라흐마니노프는 아마추어 음악가였던 심리학자 달(Nicolas Dahl, 1860-1939) 박사의 최면치료로 인해 자신감을 회복하여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완성하여 대성공을 거두웠다. <피아노 협주곡 2번>은 달 박사에게 헌정되었다.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1902년 사촌 나탈리아와 결혼하고, 1903년 딸 이리나(Irina)가 태어났다. 피아니스트와 지휘자로서도 활약하는 등 탄탄대로 인생길을 달렸다. 1906년 러시아가 정치적으로 불안해지자 그는 가족과 함께 드레스덴으로 이주하였으며, 그곳에서 <교향곡 제2번>을 작곡했다. 생계유지를 위해 1909년에는 미국으로 첫 연주 여행을 떠나서 <피아노 협주곡 제3번>을 선보이기도 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인해 사회주의 정권에 거부감을 느꼈던 라흐마니노프는 러시아를 떠나 스위스로 이주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자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후 약 15년 동안 라흐마니노프는 미국뿐만 아니라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 전지역에서 연주자로 활동하였다. 그가 작곡가가 아닌 연주자로 활동한 이유는 창작활동만으로 사랑하는 가족의 생활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 결과, 라흐마니노프는 전 세계의 피아니스트들이 뽑은 레코딩 시대의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남게 된다.
연주자로서 부와 명성을 얻게 된 라흐마니노프는 멈춰 두었던 작곡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작곡한 곡으로는 <코렐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 <교향곡 제3번>, 그의 마지막 작품인 <교향적 춤곡> 등이 있다. 1942년부터는 비리힐스(Beverly Hils)에 살며 영화에 관심을 가졌고, 그의 많은 음악이 영화음악으로 사용되었다. 1943년 2월 마지막 연주회를 가진 후, 그해 3월에 암으로 인해 생을 마감했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쇼팽, 차이코프스키, 리스트의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서정적인 긴 프레이즈의 선율과 풍부 한화성의 울림을 중시하였다. 또한 서유럽의 전통적 음악뿐만 아니라 러시아 음악적 색채와 러시아 정교회 음악의 영향도 받았다. 피아니스트였던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노의 비중이 크게 드러나며 화려한 테크닉과 장식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웅장하며 감미로운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 지나치게 통속적이라며 비판받던 시기도 있었지만, 오늘날 재평가되어 연주회는 물론 영화나 피겨곡에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