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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브루크너의 생애와 작품 - 거절 뒤에도 다시 고쳐 쓴 교향곡의 거인

안톤 브루크너(Anton Bruckner, 1824~1896)는 오르간 즉흥연주자와 교회음악 작곡가로 이미 명성을 얻었지만, 교향곡 작곡가로 인정받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빈 필하모닉은 그의 신작을 연주회에 채택하지 않았고, 자신이 신뢰했던 지휘자조차 새 교향곡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브루크너는 포기하지 않고 같은 곡을 몇 년씩 다시 고쳐 썼습니다.

1872년 빈 필하모닉 신작 리허설의 외면, 1887년 지휘자 헤르만 레비의 거절과 1889~1890년의 대대적인 개정, 그리고 죽기 두 해 전 〈교향곡 9번〉과 〈테 데움〉의 관계를 언급한 빈 대학 마지막 강의 기록까지, 브루크너의 생애를 검증된 사실 위에서 따라가 보겠습니다.

오스트리아 작곡가 안톤 브루크너의 초상화
안톤 브루크너의 초상

인물 한눈에 보기
· 한 줄 정의: 오르간 즉흥연주자로 이름을 알렸고, 교향곡 작곡가로는 뒤늦게 국제적 명성을 얻은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
· 생몰: 1824년 9월 4일(안스펠덴) ~ 1896년 10월 11일(빈), 향년 72세
· 국적·활동지: 오스트리아, 주 활동지 린츠·빈
· 활동 분야: 후기 낭만주의 교향곡 작곡가, 오르가니스트
· 대표작 3개: 〈교향곡 4번 ‘낭만적’〉, 〈교향곡 7번〉, 〈테 데움〉

오늘의 진입점
· 처음 접한다면: 〈교향곡 4번 ‘낭만적’〉. 정식 번호가 붙은 아홉 교향곡 가운데 유일하게 브루크너 자신이 부제를 붙였고, 비교적 선율적이라 그의 거대한 음향 세계에 부담 없이 들어갈 수 있는 입문곡입니다.

형성기: 오르가니스트에서 작곡가로

브루크너는 1824년 9월 4일, 오스트리아 북부의 작은 마을 안스펠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마을 학교의 교사이자 오르가니스트였고, 브루크너는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건반과 함께 자랐습니다. 그러나 1837년, 브루크너가 열세 살이었을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일로 브루크너는 장크트 플로리안 수도원의 합창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이 수도원은 훗날 그가 자신의 무덤으로 직접 선택한 곳이기도 합니다.

1840년부터 1841년까지 린츠 인근에서 예비교사 양성 과정을 마친 뒤, 빈트하크(1841~43)와 크론슈토르프(1843~45)에서 보조교사로 일했습니다. 이 시절 브루크너는 정식 음악 교육과는 거리가 먼 시골 생활을 했지만, 틈틈이 오르간 연습을 계속했습니다. 학교 교사로 일하며 음악을 놓지 않았던 이 10년이 없었다면, 훗날 제히터와 키츨러에게 본격적으로 사사할 기초 체력 자체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1845년 장크트 플로리안으로 돌아온 브루크너는 교사 겸 임시 오르가니스트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1855년, 린츠 대성당 오르가니스트 자리에 도전합니다. 이 임용 과정은 단순한 채용이 아니라 꼼꼼한 절차를 거쳤습니다. 1855년 11월 13일 임시 임명이 확정되었고, 1856년 1월 25일에는 다른 세 명의 경쟁자(게오르크 뮐러·루트비히 파우피에·라이문트 하인)와 공개 경연을 치렀습니다. 이어 4월 25일 정식 계약서가 발송되었고, 5월 14일에야 비로소 취임 선서를 하며 정식 오르가니스트가 되었습니다. 거의 반년에 걸친 이 단계적 절차는, 브루크너가 평생 무언가를 단숨에 손에 넣은 적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미리 보여주는 듯합니다.

린츠 시절 브루크너는 두 명의 스승을 차례로 만납니다. 1855년부터 1861년까지 빈의 이론가 지몬 제히터에게 화성과 대위법을 사사했는데, 이 시기 브루크너는 제히터의 방침에 따라 자유 작곡을 거의 중단하고 기초 이론 훈련에 집중했습니다. 사사를 마친 직후인 1861년 5월 12일, 그는 7성부 무반주 〈아베마리아〉(WAB 6)를 린츠 대성당에서 초연했습니다. 자신이 이끌던 합창협회 ‘프로신’의 창립을 기념하는 자리였고, 이 곡은 이미 후기 작품에서 보일 풍성한 화성적 효과를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곧이어 1861년부터 1863년까지는 린츠 시립극장의 첼리스트이자 지휘자였던 오토 키츨러에게 관현악법과 형식을 배웠습니다. 이 시기 작성한 친필 연습장인 ‘키츨러 연습장’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 1861년 성탄절부터 1863년 7월 10일까지의 학습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863년 2월, 키츨러가 지휘한 바그너 〈탄호이저〉의 린츠 지역 초연에서 브루크너는 그 악보를 함께 연구하며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만남은 바그너의 반음계적 화성과 관현악법을 본격적으로 흡수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 영향은 이후 미사와 초기 교향곡에서 점차 드러났습니다. 다만 브루크너의 어법은 바그너 한 사람에게서 곧바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오르간 연주 경험과 제히터의 대위법 훈련, 키츨러에게 배운 형식 감각이 함께 쌓여 만들어졌습니다.

장크트 플로리안 수도원 교회의 브루크너 오르간
장크트 플로리안 수도원의 브루크너 오르간. 프란츠 크사버 크리스만이 1770~1774년에 제작했다. 사진: C.Stadler/Bwag,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생애의 전환점들

1867년 스승 제히터가 세상을 떠나자, 브루크너는 1868년 빈으로 이주해 빈 음악원의 화성·대위법·오르간 교수로 임용되었습니다. 동시에 빈 궁정성당 오르가니스트로도 활동을 시작하며, 비로소 오스트리아 음악계의 중심부에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빈에서의 출발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1871~72년에 작곡한 〈교향곡 2번〉은 1872년 가을 빈 필하모닉의 신작 리허설에서 지휘자 오토 데소프의 냉담한 판단을 받았고, 정기 연주회 채택도 무산되었습니다. 그러자 브루크너는 물러서지 않고 직접 연주 기회를 마련해, 1873년 10월 26일 빈 필하모닉을 지휘하며 초연했습니다. 이 사건이 결정적이었던 이유는, 악단이 외면한 곡을 작곡가 본인이 끝내 무대에 올려놓았다는 데 있습니다. 이는 이후 거듭될 거절과 자력 돌파의 패턴을 예고하는 첫 사례였습니다.

같은 1873년, 브루크너는 바그너를 처음 찾아가 〈교향곡 3번〉을 헌정하겠다고 제안했고 바그너는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이 만남 직후 술자리에서 브루크너가 어느 교향곡을 헌정하기로 했는지 잊어버려 나중에 따로 물어봐야 했다는 이야기가 여러 대중 전기에 자주 등장하지만, 이를 직접 증언하는 1차 기록은 추적되지 않습니다. 사실이라기보다는 구전을 통해 굳어진 일화로 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1877년 12월 16일 빈에서 열린 〈교향곡 3번〉 초연이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는 점입니다. 청중 대부분이 연주 중간에 자리를 떠났고, 당시 10대 후반이었던 구스타프 말러를 비롯한 소수만 끝까지 남았습니다. 말러와 루돌프 크르지자노프스키는 이후 이 곡을 피아노 네 손용으로 편곡했습니다. 구스타프 말러의 생애와 작품을 함께 읽으면 브루크너에서 말러로 이어지는 후기 낭만주의 교향곡의 흐름을 더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1881년 2월 한스 리히터가 지휘한 〈교향곡 4번 ‘낭만적’〉의 빈 초연은 브루크너가 교향곡 작곡가로 인정받는 과정에서 중요한 성공이었습니다. 이어 1881~83년에 작곡한 〈교향곡 7번〉은 1884년 12월 30일 라이프치히에서 아르투어 니키슈의 지휘로 초연되어, 그 성공을 독일권 전역으로 확장했습니다. 60세 무렵에 찾아온 국제적 돌파구였습니다.

그러나 자신감을 얻고 완성한 〈교향곡 8번〉에서 또 한 번의 좌절이 찾아옵니다. 7번을 호평했던 지휘자 헤르만 레비에게 1887년판을 보냈지만, 레비는 현재 형태로는 무대에 올리기 어렵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큰 충격을 받은 브루크너는 1889년부터 1890년까지 곡을 대대적으로 다시 썼습니다. 1890년 개정판은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에게 헌정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한 악보가 1892년에 출판되었습니다. 같은 해 12월 18일 빈 무지크페라인에서 한스 리히터의 지휘로 초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887년판은 당시 무대에 오르지 못했고, 오늘날에는 1887년판과 1890년 개정판이 서로 다른 두 판본으로 연구되고 연주됩니다. 흔히 ‘1887년에 초연되어 냉담한 반응을 얻었다’고 알려진 통설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평론가 에두아르트 한슬릭은 1892년 초연에서 세부의 흥미는 인정하면서도 작품 전체를 낯설고 거북하게 받아들였고, 피날레 전에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의 반응은 바그너의 음악을 지지하는 진영과 브람스·한슬릭을 중심으로 한 진영이 대립하던 당시 빈 음악계의 분위기와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죽음을 두 해 앞둔 1894년 11월 12일, 브루크너가 빈 대학의 마지막 강의에서 자신이 종악장을 완성하지 못할 경우 〈테 데움〉을 대신 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다만 이 말이 미완성 종악장을 포기했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브루크너는 이후에도 실제 4악장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테 데움〉은 1881년 5월 작곡에 착수해 〈교향곡 7번〉을 끝낸 뒤 1883년 9월 작업을 재개했고, 1884년 3월에 완성되어 1885년과 1886년에 차례로 초연된 곡입니다. 이 시점은 바그너가 1883년 2월 이미 사망한 뒤이므로, ‘바그너의 임종 소식을 듣고 테 데움을 작곡했다’는 식의 이야기는 시기상 성립하지 않습니다. 테 데움과 죽음을 잇는 실제 연결점은 바그너의 임종이 아니라 브루크너 자신의 마지막 교향곡과 관련해 남은 1894년의 기록입니다. 결국 1896년 10월 11일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교향곡 9번〉은 1~3악장까지 완성되었고, 4악장은 방대한 스케치 상태로 남았습니다.

양식의 진화: 초기·중기·후기

브루크너의 양식 변화는 새로운 사조를 찾아간 결과가 아니라, 오르간 앞에서 다진 화성 감각을 교향곡이라는 거대한 틀에 어떻게 옮겨놓을 것인가를 거듭 고쳐 쓰며 답해간 과정입니다.

초기: 교회음악과 형식 훈련의 시기

1850년대부터 1860년대 초까지, 제히터와 키츨러에게 사사하며 화성과 형식을 철저히 다진 시기입니다. 1861년의 〈아베마리아〉(WAB 6)가 이 시기를 이해하는 좋은 입구입니다. 1863년 작곡한 습작 교향곡 f단조는 본격적인 교향곡 작곡 이전의 마지막 훈련에 가깝습니다.

중기: 거대한 교향곡 어법의 확립과 거듭된 거부

1865년부터 1880년대 초까지, 브루크너는 자신만의 거대한 교향곡 어법을 완성해 갑니다. 그러나 이 시기는 동시에 가장 많이 거부당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교향곡 2번〉은 1872년 빈 필하모닉 신작 리허설에서 외면받았고, 〈교향곡 3번〉은 1877년 초연에서 청중이 자리를 뜨는 참패를 겪었습니다. 같은 시기 작곡한 〈미사 3번 f단조〉(1867~68년 린츠에서 작곡) 역시 첫 리허설의 반응이 좋지 않았고, 정식 초연은 1872년에야 브루크너 자신의 지휘로 이루어졌습니다. 거부와 수정이 반복되는 패턴이 이 시기에 이미 굳어졌습니다.

후기: 국제적 명성과 미완성으로 남은 마지막 교향곡

1881년 〈교향곡 4번〉의 빈 초연은 브루크너에게 중요한 성공을 안겼고, 1884년 〈교향곡 7번〉의 라이프치히 초연은 국제적 명성을 가져온 돌파구가 되었습니다. 이어 〈교향곡 8번〉은 1887년판이 헤르만 레비에게 거절된 뒤 1889~90년 대대적인 개정을 거쳐 1892년에 성공적으로 초연되었습니다. 마지막 작품인 〈교향곡 9번〉은 1~3악장만 완성된 채 1896년 그의 죽음으로 멈추었고, 〈테 데움〉은 대안적 종악장으로 거론되었지만 실제 4악장 스케치도 함께 남아 있습니다.

시기특징·대표작
초기(1850년대~1863)제히터·키츨러 사사, 형식 훈련, 〈아베마리아〉(1861)
중기(1865~1880년대 초)거대한 교향곡 어법 확립, 거듭된 거부: 〈교향곡 2·3번〉, 〈미사 3번〉
후기(1881~1896)국제적 명성과 미완성으로 남은 마지막 작품: 〈교향곡 4·7·8번〉, 〈교향곡 9번〉

동시대인과의 관계망

바그너는 브루크너에게 가장 결정적인 음악적 발견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1863년 〈탄호이저〉 악보를 키츨러와 함께 연구하며 받은 충격은 바그너의 반음계적 화성과 관현악법을 본격적으로 흡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873년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브루크너는 〈교향곡 3번〉을 헌정하겠다고 제안했고 바그너는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이 만남을 둘러싼 술자리 일화는 출처가 불분명하지만, 헌정 자체와 바그너에 대한 브루크너의 깊은 존경심은 분명합니다. 바그너의 음악극과 생애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생애와 작품에서 이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한편 빈 음악계는 이 무렵 바그너 진영과, 평론가 에두아르트 한슬릭이 지지한 브람스 진영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바그너에게 공개적으로 헌정한 순간부터 브루크너는 한슬릭에게 비판적 시선을 받는 처지가 되었고, 1877년 〈교향곡 3번〉 초연 실패와 1892년 〈교향곡 8번〉 초연을 둘러싼 비평도 이 구도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다만 이는 두 진영 사이의 대립이었을 뿐, 브람스 본인과 브루크너가 개인적으로 격렬하게 충돌했다는 구체적이고 검증된 일화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을 둘러싼 적대 관계는 진영의 이야기와 개인의 이야기를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브람스가 교향곡 전통을 어떻게 이어갔는지는 요하네스 브람스의 생애와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휘자들과의 관계는 브루크너의 성공과 실패를 가른 핵심 변수였습니다. 한스 리히터는 1881년 〈교향곡 4번〉 초연을 맡았고, 1886년 〈테 데움〉의 관현악 초연과 1892년 〈교향곡 8번〉 초연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아르투어 니키슈는 1884년 〈교향곡 7번〉을 초연해 브루크너가 국제적 명성을 얻는 길을 열었습니다. 반면 헤르만 레비는 7번을 호평했던 같은 인물이면서도 8번의 1887년판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거절은 1889~90년 개정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대 평가와 후대 재평가

브루크너를 평생 인정받지 못한 작곡가로만 기억하면 그의 생애가 지나치게 단순해집니다. 그는 오르간 즉흥연주자로 일찍부터 국내외에서 명성을 얻었고, 교회음악 작곡가로도 알려져 있었습니다. 다만 교향곡 작곡가로서는 1870년대의 거듭된 거절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1881년 〈교향곡 4번〉의 성공은 중요한 단계였고, 1884년 〈교향곡 7번〉의 초연은 국제적 돌파구가 되었습니다. 1892년 〈교향곡 8번〉 초연의 성공은 그 명성을 빈 음악계의 중심까지 끌어올렸습니다.

이 평가의 반전은 역설적입니다. 그의 신작을 외면했던 빈 음악계가,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아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후기 낭만주의 교향곡의 정점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였습니다. 오늘날에는 정식 번호가 붙은 아홉 교향곡뿐 아니라 습작 f단조 교향곡과 이른바 0번 교향곡, 그리고 각 작품의 여러 판본까지 함께 연구되고 연주됩니다.

후대에 더 분명하게 교정된 지점도 있습니다. 〈교향곡 8번〉은 한동안 ‘1887년에 완성되어 초연에서 냉담한 반응을 얻었다’는 식으로 단순화되어 전해졌지만, 실제로는 1887년판이 당시 무대에 오르지 못했고 1889~90년 개정판을 바탕으로 한 악보가 1892년에 출판되고 초연되었습니다. 〈테 데움〉의 작곡 동기 역시 바그너의 죽음과 연결할 수 없으며, 〈교향곡 9번〉과의 관계는 브루크너가 1894년 마지막 강의에서 남겼다고 전해지는 발언과 실제 종악장 스케치를 함께 놓고 보아야 합니다.

주요 작품

주요 작품

교향곡

  • 교향곡 4번 ‘낭만적’: 브루크너 자신이 부제를 붙인 교향곡이며, 1881년 빈 초연에서 중요한 성공을 거둔 입문곡
  • 교향곡 7번: 1884년 라이프치히 초연으로 국제적 돌파구가 된 작품
  • 교향곡 8번: 1887년판이 거절된 뒤 1889~90년 대대적인 개정을 거쳐 1892년에 초연된 작품
  • 교향곡 9번: 3개 악장을 완성하고 종악장 스케치를 남긴 마지막 교향곡
  • 교향곡 2번: 1872년 신작 리허설에서 외면받았지만 1873년 브루크너가 직접 지휘해 초연한 작품
  • 교향곡 3번: 바그너에게 헌정되었고, 1877년 초연에서 청중 다수가 자리를 떠난 작품

종교음악

  • 미사 3번 f단조: 세 편의 대규모 번호 미사 가운데 가장 널리 연주되는 작품
  • 테 데움: 〈교향곡 9번〉의 대안적 종악장으로 언급되었다는 기록이 남은 합창곡
  • 아베마리아(7성, WAB 6): 제히터 사사를 마친 직후 초연한 무반주 합창곡

오늘의 진입점

브루크너를 처음 만난다면 〈교향곡 4번 ‘낭만적’〉을 먼저 들어보길 권합니다. 브루크너 자신이 부제를 붙였고, 비교적 선율적인 흐름이 있어 그의 거대한 음향 세계에 부담 없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후 국제적 돌파구가 된 〈교향곡 7번〉으로 넘어가고, 거절과 개정의 드라마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교향곡 8번〉으로 이어가면 좋습니다. 시간이 된다면 〈테 데움〉과 미완성 〈교향곡 9번〉을 함께 들어보십시오. 완성된 합창곡과 끝내 닫히지 않은 교향곡 사이에서 브루크너 말년의 신앙과 작곡 의지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들립니다.

장크트 플로리안 수도원 교회 바닥에 놓인 안톤 브루크너 묘석
장크트 플로리안 수도원 교회의 안톤 브루크너 묘석. 그의 석관은 자신이 연주했던 대형 오르간 아래 지하묘소에 있다. 사진: WOKRIE,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FAQ

교향곡 8번이 1887년에 초연되어 냉담한 반응을 얻었다는 말은 사실인가요?

정확하지 않습니다. 1887년판은 헤르만 레비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아 당시 무대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브루크너는 1889~90년 곡을 대대적으로 개정했고, 이 개정판을 바탕으로 한 악보가 1892년에 출판되고 초연되었습니다.

교향곡 9번과 테 데움은 어떤 관계인가요?

브루크너가 1894년 빈 대학의 마지막 강의에서 종악장을 완성하지 못할 경우 〈테 데움〉을 대신 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후에도 실제 4악장 작업을 계속했고, 사망 당시 상당한 분량의 스케치를 남겼습니다.

브루크너의 생애를 한 문장으로 줄이면 ‘평생 인정받지 못한 작곡가’가 아니라, 한 분야에서 이미 명성을 얻은 음악가가 교향곡이라는 더 큰 세계에서 다시 거절과 개정을 견딘 이야기입니다. 1881년 〈교향곡 4번〉에서 열린 문은 1884년 〈교향곡 7번〉으로 넓어졌고, 1892년 〈교향곡 8번〉에서 마침내 빈 음악계의 중심까지 이어졌습니다. 그가 같은 곡을 거듭 고쳐 쓴 것은 단순한 우유부단함이 아니라, 자신이 상상한 거대한 울림을 실제 무대에 세우기 위한 오래된 노동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