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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5인조(Mighty Five) — 19세기 러시아 민족주의 음악을 일으킨 다섯 아마추어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한 비평가는 다섯 명의 젊은 작곡가들을 두고 "강력한 한 줌의 음악가들"이라 불렀습니다. 화학자, 공병 장교, 해군 사관, 근위 연대 장교, 그리고 피아니스트. 다섯 사람의 본업은 모두 달랐고, 음악원 중심의 정규 독일식 교육 바깥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만들어낸 음악은 러시아 음악의 정체성 그 자체가 됐습니다.

러시아 5인조(The Mighty Five). 발라키레프, 보로딘, 큐이, 무소르그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이들이 시작한 흐름이 없었다면 〈보리스 고두노프〉도 〈전람회의 그림〉도 〈셰헤라자데〉도 우리 곁에 오지 못했을 것이고, 차이콥스키와 스트라빈스키와 쇼스타코비치로 이어지는 러시아 음악의 큰 강줄기도 다른 모습으로 흘렀을 것입니다. 이 글은 이들이 어떻게 만났고, 무엇을 만들었으며, 왜 결국 흩어졌는지를 따라갑니다.

주제 한눈에 보기
집단명: 러시아 5인조 (러시아어 Могучая кучка / 영어 The Mighty Five 또는 The Mighty Handful)
사조: 러시아 국민악파(Russian Nationalist School) 초기 작곡가 집단
시기: 1856-1870년대 (정점은 1860년대)
멤버: 밀리 발라키레프, 알렉산드르 보로딘, 체자르 큐이,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
이념적 지도자: 비평가 블라디미르 스타소프(Vladimir Stasov)
선구: 미하일 글린카(Mikhail Glinka, 1804-1857), 알렉산드르 다르고미시스키(Alexander Dargomyzhsky)
대척점: 안톤 루빈스타인이 1862년 설립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러시아 5인조의 5명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이미지입니다.
러시아 5인조 (출처 : slideserve.com)

1. 러시아 민족주의 음악의 탄생 — 글린카에서 5인조까지

19세기 후반 서양 음악사에서는 새로운 흐름이 나타났습니다. 작곡가들이 자기 민족 고유의 민요, 춤, 리듬을 음악 언어에 끌어들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른바 민족주의 음악입니다. 이 흐름이 가장 격렬하게 분출된 곳이 러시아였고, 그 출발점에는 한 명의 선구자가 있었습니다.

글린카 — 러시아 음악의 첫 번째 자국 색채

자신의 작품에 러시아적 색채를 본격적으로 사용해 국제적 주목을 받은 첫 번째 작곡가는 미하일 글린카(Mikhail Glinka, 1804-1857)였습니다. 1836년 초연된 오페라 〈황제에게 바친 목숨(A Life for the Tsar)〉은 농부 이반 수자닌이 폴란드군을 속여 괴멸시키고 러시아를 위기에서 구한다는 내용으로, 러시아 역사와 민족 정서를 음악 안에 정면으로 끌어들인 작품이었습니다. 이 오페라가 후대 러시아 작곡가들에게 끼친 영향은 막대했고, 이후 등장할 모든 러시아 민족주의 음악의 출발점이 됐습니다.

발라키레프, 그리고 다섯 명이 모이기까지

글린카의 첫 제자였던 밀리 발라키레프(Mily Alekseyevich Balakirev, 1837-1910)는 글린카의 유산을 받아 안고 새로운 음악 운동을 일으키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는 한 명씩 동료를 모았습니다.

1856년 체자르 큐이(César Antonovich Cui)를 만났고, 이듬해 1857년에는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Modest Petrovich Mussorgsky)가 합류했습니다. 같은 해 글린카가 베를린에서 급사한 것은 이 젊은 작곡가들에게 충격이자 동시에 사명감을 더해주는 사건이었습니다. 1861년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Nikolai Andreyevich Rimsky-Korsakov), 1862년 알렉산드르 보로딘(Alexander Porfiryevich Borodin)이 차례로 그룹에 들어오면서 다섯 사람의 집단이 비로소 완성됐습니다. 다섯 명이 모두 모인 1862년을 기준으로 보로딘은 28세, 큐이는 27세, 발라키레프는 25세, 무소르그스키는 23세, 그리고 막내 림스키-코르사코프는 18세에 불과한 청년이었습니다.

스타소프와 "강력한 한 줌"의 탄생

이 그룹에는 작곡가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이 한 명 더 있었습니다. 비평가이자 미술사가였던 블라디미르 스타소프(Vladimir Stasov)입니다. 스타소프는 5인조의 이념적 지도자 역할을 했고, 그들에게 작품의 방향을 제시하는 한편 비평을 통해 그들의 음악을 대중에게 알렸습니다.

1867년 5월, 스타소프는 발라키레프가 지휘한 한 슬라브 음악회를 평하면서 이 다섯 작곡가들을 가리켜 "강력한 한 줌의 음악가들(могучая кучка)"이라 불렀습니다. 이 표현이 영어권으로 옮겨지면서 The Mighty Handful, 또는 The Mighty Five라는 별칭이 굳어졌습니다. 한국에서 통용되는 "러시아 5인조"라는 이름의 원천이 바로 이 1867년 5월 비평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5인조 본인들은 자신들을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자신의 회고록 〈나의 음악 인생(Летопись моей музыкальной жизни)〉에서 이 모임을 일관되게 "발라키레프 서클(Balakirev Circle)"이라 기록했습니다. 즉 "5인조"라는 명칭은 비평가의 기사로부터 출발해 외부에서 굳어진 이름인 셈입니다.

2. 다섯 명의 아마추어 — 본업과 음악의 이중 인생

러시아 5인조의 가장 흥미로운 특징은 이들 대부분이 음악을 본업으로 삼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발라키레프 정도가 전업 음악인에 가까웠을 뿐, 나머지 네 사람의 직업은 의외였습니다.

보로딘은 의화학자(medical chemist)였고, 큐이는 군 공병 장교, 무소르그스키는 처음에는 근위 연대 장교였다가 나중에는 하급 공무원이었으며, 림스키-코르사코프는 해군 장교 출신이었습니다. 다섯 명 모두 음악원(Conservatory) 출신의 정식 작곡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스타소프는 이들을 "강력한 한 줌"이라 부르면서 그 비전문성과 폭발력을 동시에 강조했던 것입니다.

음악원과의 대립 — 안톤 루빈스타인의 그림자

5인조의 정체성을 이해하려면 그들이 맞서 싸우던 대상을 알아야 합니다. 1862년,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던 안톤 루빈스타인(Anton Rubinstein)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러시아 최초의 음악원을 설립했습니다. 같은 해 발라키레프는 이에 맞서 무료음악학교(Free Music School)를 세웠습니다. 두 기관의 노선은 정반대였습니다.

루빈스타인의 음악원은 독일식 학구적 작곡 교육을 표준으로 삼았습니다. 멘델스존, 슈만, 라이프치히 음악원의 전통이었습니다. 반면 5인조는 외국 형식을 그대로 이식하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 민요·동방적 음계·선법적 화성을 바탕으로 한 독자적 음악 언어를 추구했습니다. 차이콥스키가 음악원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5인조와 평생 미묘한 거리를 유지한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다만 두 진영의 관계가 끝까지 적대적이지만은 않았는데, 특히 림스키-코르사코프와 차이콥스키는 만년에 서로의 작품을 지휘하고 추천할 정도로 가까워졌습니다.

중요한 점은 이들이 추구한 러시아성이 단순히 민요를 인용하는 수준에 머무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정교회 성가의 무거운 울림, 코카서스·중앙아시아 음계에서 빌려온 동방주의적 음향, 기능 화성을 약화시키는 비관습적 진행까지 포함하는, 말 그대로 새로운 음악 언어의 구축에 가까웠습니다. 청중이 "러시아적이다"라고 느낀 사운드의 상당 부분은 실제로는 5인조가 발명한 음향이었습니다.

음악원 출신의 전문가가 아니라는 점이 5인조에게는 약점이 아니라 무기였습니다. 학구적 규칙에 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자국 민요의 거친 표면, 동방적 음계, 비기능적 화성을 거리낌 없이 끌어들일 수 있었습니다. 이 아마추어성이 곧 그들의 혁신성이었습니다.

3. 5인조 각자의 생애와 대표작

밀리 발라키레프(Mily Alekseyevich Balakirev, 1837-1910)

러시아 5인조를 결성한 사실상의 리더입니다. 가난한 귀족 가문의 아들로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태어났습니다. 10세 때부터 모스크바에서 음악을 공부했고, 1855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글린카를 만나면서 음악 인생의 방향이 정해졌습니다. 피아니스트, 작곡가, 지휘자, 교육자로 동시에 활동하며 동료 작곡가들의 음악을 다듬어 주는 멘토 역할까지 자처했습니다.

1871년경 발라키레프는 깊은 정신적 위기를 겪고 음악계에서 일시 은퇴합니다. 약 10년의 침묵 끝에 1880년대에 복귀했지만, 1860년대의 폭발적 영향력은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대표작은 1860년대에 집중되어 있는데, 동양적 환상곡 〈이슬라메이(Islamey)〉, 교향시 〈타마라(Tamara)〉, 〈교향곡 1번·2번〉, 그리고 두 권의 러시아 민요집이 손꼽힙니다.

알렉산드르 보로딘(Alexander Porfiryevich Borodin, 1833-1887)

5인조에서 가장 독특한 인생을 산 작곡가입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그루지야(현재의 조지아) 귀족 게디아노프 공작의 사생아로 태어났고, 9세 때 작곡을 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정식 진로로는 의학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평생 의화학자로 살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의학외과 아카데미의 화학 교수였습니다. 유기화학 연구에서도 의미 있는 업적을 남겼으며, 후대 화학사에서는 일부 반응 메커니즘에 그의 이름이 함께 언급되기도 합니다.

음악은 그의 일생을 통틀어 부업이었지만, 그 부업이 남긴 작품은 결코 부업의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1862년 발라키레프에게 작곡을 사사하여 1867년 〈교향곡 1번〉을 완성했고, 이후 오페라 〈이고리 공(Prince Igor)〉 작곡에 평생 매달렸으나 끝내 완성하지 못한 채 1887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림스키-코르사코프와 글라주노프가 이 미완성 오페라를 정리해 완성했고, 이 작품 속의 '폴로베츠인의 춤(Polovtsian Dances)'은 오늘날 가장 유명한 러시아 오페라 음악 가운데 하나가 됐습니다. 교향시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In the Steppes of Central Asia)〉도 보로딘의 대표작입니다.

체자르 큐이(César Antonovich Cui, 1835-1918)

리투아니아 빌뉴스 출생으로, 프랑스계 아버지와 리투아니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본업은 군 공병 장교였고, 황실 군사공학 아카데미의 교수로서 차르 알렉산드르 3세에게 군사학을 강의하기도 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작곡을 배웠고 발라키레프, 다르고미시스키 등과 교제하면서 러시아 민족주의 음악에 본격적으로 빠져들었습니다.

큐이의 진짜 영향력은 작곡보다 비평에서 나왔습니다. 1864년부터 1877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 〈베도모스티(Vedomosti)〉의 음악비평가로 활동하면서 5인조의 입장을 대변하고 적대 진영을 공격하는 글을 끊임없이 발표했습니다. 그는 10편의 오페라를 썼는데, 〈흑사병 시대의 축제〉, 〈대위의 딸〉 등이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오늘날에는 작곡가로서의 명성보다 5인조의 이론가·비평가 역할로 더 많이 기억됩니다.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Modest Petrovich Mussorgsky, 1839-1881)

5인조 중 가장 혁신적이었지만 가장 비극적이기도 했던 작곡가입니다. 러시아 카레보의 부유한 지주 가문에서 태어났고, 어머니로부터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사관학교를 거쳐 근위 연대 장교로 임관했으나, 다르고미시스키와의 교제를 통해 음악에 빠져들면서 22세에 군 생활을 접고 작곡가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1861년 농노 해방으로 가세가 기울자 그는 하급 공무원이 되어 생계를 꾸렸고, 점차 알코올 의존이 깊어졌습니다. 42세에 비교적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그가 남긴 음악은 그러나 19세기 후반 음악의 가장 대담한 실험에 속했습니다. 기능 화성을 거의 무시한 그의 화성 진행, 러시아어 억양을 그대로 옮긴 듯한 언어 친화적 성악 선율은 후대 드뷔시와 라벨에게도 중요한 자극을 주었다고 평가됩니다. 대표작은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Boris Godunov)〉, 교향시 〈민둥산의 하룻밤〉, 피아노 모음곡 〈전람회의 그림〉, 가곡 〈벼룩의 노래〉 등이 있습니다.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Nikolai Andreyevich Rimsky-Korsakov, 1844-1908)

5인조 중 가장 오래 살고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작곡가입니다. 러시아 티흐빈에서 태어나 해군 장교로 근무했고, 작곡과 교육을 병행했습니다. 18세 무렵 5인조에 합류한 그는 해군 사관후보생으로 1862년부터 약 3년 동안 세계 일주 항해를 떠났습니다. 그는 항해 중에도 작곡을 멈추지 않았고, 함상에서 손을 댄 교향곡 1번을 1865년 귀국 후 완성합니다. 스타소프는 이 작품을 두고 "진정한 의미에서 첫 러시아 교향곡"이라고 평했는데, 정규 음악원 교육 바깥에서 출발한 5인조의 자긍심을 담은 평이기도 했습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1871년부터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작곡 교수로 임용됐는데, 임용된 뒤에야 본인이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내용을 스스로 다시 공부했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그의 음악은 색채적인 관현악법과 세련된 멜로디, 러시아 민속 선율에 근거한 화려한 화성이 특징입니다. 그가 저술한 〈관현악법 원리(Principles of Orchestration)〉는 사후 1913년 출판됐고, 베를리오즈의 관현악법과 함께 오케스트레이션의 표준 교과서가 됐습니다. 대표작은 교향모음곡 〈셰헤라자데(Scheherazade)〉, 〈스페인 기상곡(Capriccio Espagnol)〉, 오페라 〈사드코〉, 〈금계(The Golden Cockerel)〉 등이 있습니다. 그가 가르친 학생 가운데는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 그리고 훗날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가 있었다는 점도 기억해 둘 만합니다.

4. 해체와 유산 — 무소르그스키 편집 논란까지

결속의 약화 — 1870년대의 해체

5인조 다섯 명은 모두 강한 개성의 소유자들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하나의 작품을 함께 만들거나 같은 노선으로 행동하지는 않았습니다. 1870년대로 들어서면서 이들의 결속력은 눈에 띄게 느슨해졌고, 실질적으로는 해체 수순을 밟았습니다. 발라키레프가 정신적 위기로 음악계를 떠나면서 구심점이 사라진 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다섯 사람의 음악 세계는 점점 달라졌습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1871년 음악원 교수로 들어가며 점차 학구적 방향으로 이동했고, 무소르그스키는 오히려 더 급진적인 화성으로 나아갔습니다. 보로딘은 화학 연구와 강의에 시간을 빼앗겨 작곡에 절대적 시간이 부족했고, 큐이는 비평 활동에 더 무게를 두었습니다. 발라키레프의 지도력 역시 위기 이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결국 5인조는 엄격한 조직이라기보다 한때 같은 이상을 공유했던 느슨한 연대에 가까웠다는 평가가 오늘날 학계에서 더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5인조가 시작한 흐름은 곧바로 새로운 형태로 계승됐습니다. 1880년대에는 출판업자 미트로판 벨랴예프(Mitrofan Belyayev)를 중심으로 림스키-코르사코프, 글라주노프 등이 모인 벨랴예프 서클이 형성됐고, 이 그룹은 5인조의 민족주의 정신을 보다 학구적인 형태로 다듬어 후대에 전했습니다.

무소르그스키 편집 논란 — "복원인가 왜곡인가"

5인조의 유산에는 한 가지 흥미로운 논쟁이 따라붙습니다. 1881년 무소르그스키가 알코올 의존으로 사망한 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친구의 미완성 작품과 정리되지 않은 작품 다수를 직접 편집하고 재오케스트레이션했습니다. 〈보리스 고두노프〉, 〈민둥산의 하룻밤〉, 〈호반시치나(Khovanshchina)〉가 모두 그의 손을 거쳤습니다.

당시에는 이 편집이 무소르그스키의 작품을 "거친 상태에서 살려낸" 행위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들어 학계의 평가는 갈리기 시작했습니다. 한쪽은 림스키-코르사코프가 무소르그스키의 거친 화성과 비관습적 진행을 자신의 학구적 감각으로 다듬어버려, 정작 무소르그스키 음악의 가장 혁신적인 부분을 깎아냈다고 봅니다. 다른 한쪽은 림스키-코르사코프의 편집이 없었다면 이 작품들이 무대에 오르지조차 못했을 것이라고 평가합니다. 오늘날 무소르그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는 원본과 림스키-코르사코프 편집본이 모두 연주되며, 어느 쪽이 정본인지에 대한 논의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후대에 남긴 흔적

러시아 5인조의 영향은 러시아 안에서 끊이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차이콥스키와 미하일 이폴리토프-이바노프,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 그리고 20세기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음악사의 거의 모든 큰 이름이 어떤 형태로든 5인조의 유산과 대화했습니다. 그러므로 5인조의 자리를 빼고 러시아 음악사를 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국경 밖으로도 그 영향은 뻗었습니다. 무소르그스키는 드뷔시와 라벨에게,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색채적 오케스트레이션은 스트라빈스키를 거쳐 20세기 모든 관현악 작곡가에게 흔적을 남겼습니다. 후대에 등장한 "미국 5인조(American Five)"나 "프랑스 6인조(Les Six)"라는 명칭이 모두 러시아 5인조에서 차용된 것이라는 사실도 이 그룹이 음악사에 남긴 무게를 보여줍니다.

러시아 낭만주의 음악의 다른 거장이 궁금하시다면 차이콥스키의 생애와 작품도 함께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5. 5인조 한눈에 비교

다섯 명을 한눈에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본업의 다양성과 음악 세계의 차이가 5인조의 진짜 매력입니다.

작곡가 본업 대표작
발라키레프 (1837-1910) 작곡가·지휘자·교육자 (5인조 리더) 〈이슬라메이〉, 〈타마라〉
보로딘 (1833-1887) 의화학자 (대학 교수) 〈이고리 공〉,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
큐이 (1835-1918) 군 공병 장교·교수·음악비평가 〈대위의 딸〉 외 오페라 10편
무소르그스키 (1839-1881) 근위 연대 장교 → 하급 공무원 〈보리스 고두노프〉, 〈전람회의 그림〉
림스키-코르사코프 (1844-1908) 해군 장교 → 음악원 교수 〈셰헤라자데〉, 〈스페인 기상곡〉

6. 5인조 입문 추천곡

러시아 5인조의 음악을 처음 접하는 분께 권하는 5곡입니다. 짧고 임팩트 있는 곡에서 시작해 점차 대형 작품으로 옮겨가는 순서입니다.

러시아 5인조 대표곡·명곡·추천곡 5선무소르그스키 〈민둥산의 하룻밤〉 — 마녀들이 모이는 발푸르기스의 밤. 강렬한 인트로로 5인조의 매력을 단번에 체감.
림스키-코르사코프 〈셰헤라자데〉 1악장 '바다와 신밧드의 배' — 5인조 오케스트레이션의 정점.
보로딘 〈이고리 공〉 중 '폴로베츠인의 춤' — 동방적 색채와 격렬한 리듬의 결합.
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 중 '키예프의 대문' — 라벨의 관현악 편곡으로 더 유명한 피아노 모음곡의 마지막 곡.
보로딘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 — 길고 평화로운 선율 위로 동방의 카라반이 지나는 풍경.

자주 묻는 질문

Q. 러시아 5인조는 누구이며 어떻게 결성됐나요?
러시아 5인조는 발라키레프, 보로딘, 큐이, 무소르그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다섯 작곡가의 집단입니다. 1856년 발라키레프가 큐이를 만나면서 시작됐고, 1857년 무소르그스키, 1861년 림스키-코르사코프, 1862년 보로딘이 차례로 합류하면서 완성됐습니다. 글린카가 시작한 러시아 음악의 정체성을 자국 민요와 동방적 음계로 확장한 것이 이들의 핵심 작업입니다.
Q. "강력한 한 줌(Mighty Handful)"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나요?
1867년 비평가 블라디미르 스타소프(Vladimir Stasov)가 발라키레프가 지휘한 슬라브 음악회를 평하면서 "강력한 한 줌의 음악가들(могучая кучка)"이라는 표현을 처음 썼습니다. 이 표현이 영어권으로 옮겨지면서 Mighty Handful 또는 The Mighty Five로 굳어졌습니다.
Q. 보로딘이 화학자였다는 게 사실인가요?
사실입니다. 보로딘은 평생을 의화학자로 살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의학외과 아카데미의 화학 교수였습니다. 유기화학 연구에서도 의미 있는 업적을 남겼으며, 후대 화학사에서는 일부 반응 메커니즘에 그의 이름이 함께 언급되기도 합니다. 음악은 그에게 본업이 아니라 평생의 부업이었습니다.
Q. 5인조와 차이콥스키는 어떤 관계였나요?
5인조는 안톤 루빈스타인이 1862년 설립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서구화·학구적 노선에 맞서는 입장이었고, 음악원 출신인 차이콥스키와는 음악관에서 자주 충돌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 교류는 있었고, 만년에는 림스키-코르사코프와 차이콥스키가 서로의 음악을 존중하는 관계로 발전했습니다.
Q. 5인조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무엇인가요?
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과 〈민둥산의 하룻밤〉, 〈보리스 고두노프〉, 보로딘 〈이고리 공〉의 '폴로베츠인의 춤'과 교향시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 림스키-코르사코프 교향모음곡 〈셰헤라자데〉와 〈스페인 기상곡〉이 가장 널리 연주됩니다.
Q. 림스키-코르사코프가 무소르그스키 작품을 고친 게 사실인가요?
사실입니다. 무소르그스키가 1881년 사망한 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보리스 고두노프〉, 〈민둥산의 하룻밤〉, 〈호반시치나〉 등 다수의 작품을 편집·재오케스트레이션했습니다. 당시에는 이 편집이 작품을 살린 행위로 받아들여졌으나, 20세기 후반 이후 학계는 무소르그스키 원본의 거친 혁신성을 더 높이 평가하는 방향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두 판본이 모두 연주되며 어느 쪽이 정본인지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러시아 5인조는 19세기 후반의 짧은 한순간을 함께한 다섯 명의 아마추어였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음악은 러시아 음악 그 자체가 됐습니다. 글린카가 처음 던진 "러시아적인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들은 자국 민요와 동방적 음계, 그리고 학구적 규범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화성으로 답했습니다. 그 답이 후대의 차이콥스키, 스트라빈스키, 쇼스타코비치, 더 멀리는 드뷔시와 라벨까지 닿았다는 사실이 5인조 음악의 가장 큰 증명입니다.

러시아 5인조의 음악을 처음 만나신다면 무소르그스키 〈민둥산의 하룻밤〉의 폭발적 도입부와 림스키-코르사코프 〈셰헤라자데〉의 바이올린 독주를 차례로 들어보시기를 권합니다. 한쪽은 거친 민중의 음악을, 다른 한쪽은 화려한 동방의 색채를 들려줍니다. 그 두 극단 사이의 폭이 곧 5인조의 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