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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음악의 창시자 쇤베르크(Arnold Schonberg)의 생애와 음악

  혁신을 주도하며 20세기 현대 음악을 탄생시킨 아르놀트 쇤베르크(Arnold Schonberg, 1874-1951)는 조성 없는 12음 기법의 창시자로 불린다. 쇤베르크는 유대인이 모여 사는 빈의 레오폴슈타트(Leopoldstadt)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대인으로 구둣가게를 운영했고, 어머니는 성가대원으로 활동하였으나 음악적 소질은 크게 없었다. 음악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했음에도 쇤베르크는 8세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고 기존의 작품을 모방하고 편곡하기 시작했다. 11세가 되던 1885년 직업학교에 들어가 아들러를 만나면서 그의 음악이론 공부가 시작되었다.

 

  15세 때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은행에 취직하지만, 음악가에 대한 꿈을 놓지 않았다. 1893년 그는 알렉산더 쳄린스키(1872-1942)와의 만남을 통해 처음으로 대위법을 배우게 되었다.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쳄린스키의 직·간접적인 음악교육을 통해 쇤베르크는 그의 작곡 기법을 확립하고 발전시킬 수 있었다. 아마추어 첼리스트로 활동하던 쇤베르크는 쳄린스키의 권유로 1895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정식으로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당시 빈의 음악계는 브람스의 절대 음악과 바그너의 표제 음악이 첨예하게 대립 중이었는데, 이런 상황은 역설적으로 쇤베르크를 새로운 음악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유대인들에게 불리한 환경을 만들어져 많은 유대인들이 가톨릭으로 개종을 했으나 쇤베르크는 1898년 루터교로 개종했다.


쇤베르크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이미지입니다
쇤베르크의 모습

 
  쇤베르크는 낭만주의에서 벗어나 새로운 음악으로 나아가고자 시도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현악6중주 <정화된 밤>이다. 독일 서정시인 데멜의 시를 바탕으로 달빛 아래서 남녀가 주고받는 사랑의 대화를 음악으로 만든 곡이다. 아직 12음기법을 확립하기 전에 만든 작품이므로 난해하지는 않지만, 음의 윤곽이 애매모호해서 19세기 음악과는 다른 신선함이 느껴진다.

 

  쇤베르크는 1901년 쳄린스키의 동생 마틸데와 결혼하면서 생계를 위하여 베를린의 카바레 분테스(Buntes) 극장에서 일하게 된다. 이곳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1949)를 만나 작곡가로의 잠재성을 인정받아 리스트 기금과 슈테른 음악원(Stern Conservatory)의 교수직을 추천해주어 작곡 활동에 전념할 수 있게 된다.

  1903년 빈에서 쇤베르크는 안톤 베베른(Anton Webern, 1883-1945)과 알반 베르크(Alban Berg, 1885-1935)를 만나 그들에게 화성법과 대위법을 가르치게 되는데, 두 제자와 쇤베르크는 2빈악파’(1빈악파는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를 구성하여 후기 낭만주의 작곡 어법에서 12음 기법의 무조음악에 이르는 작곡 기법의 발전과 변화를 함께 하게 된다.

 

  하지만 결혼 생활의 큰 아픔과 상처도 있었다. 쇤베르크는 오스트리아의 젊은 화가인 리하르트 게르스틀에게 그림을 배웠는데, 1908년 아내 마틸데가 그와 사랑에 빠져 집을 나갔다. 몇 개월 뒤 아내는 돌아왔지만, 게르스틀은 모든 그림을 불태운 뒤 목을 매고 자살해 쇤베르크의 가슴에 커다란 상처을 남겼다. 이 사건 이후 그의 음악에는 불안정한 내면 세계를 반영하는 어두운 그늘이 더욱 짙어지게 된다.

 

  1911년 완성한 초대형 칸타타 <구레의 노래>의 후반부에서는 조성이 흔들리는 특징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그가 후에 작곡할 무조음악으로의 방향을 암시한다. 1911<6개의 작은 피아노곡>은 완전히 조성을 버린 작품이다. 지금은 그를 놀라운 혁명가로 평가하지만, 당시엔 반응이 좋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름다운 선율을 기대한 일반 대중이 듣기에 그의 음악은 너무나 어렵고 전위적이었던 까닭이다.

 

  무조 음악이 거칠고 무질서한 음악이라는 비판을 받자, 쇤베르크는 이를 체계적으로 이론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음악의 구조를 단순하고 간결하게 하려고 12개의 음정을 동등하게 사용하여 서로 연결하는 ‘12음 기법이라는 작곡 기법을 확립하게 된다. 하나의 음정을 으뜸음으로 하는 조성음악과 대조적으로 모든 음정이 동등하게 등장하고 나열하는 ‘12음 기법의 음렬음악은 그의 작품에서 적극적으로 사용된다.

 

  쇤베르크는 1923년에 아내 마틸데가 사망한 후, 1924년에 그의 제자이자 바이올리니스트 루돌프 콜리슈(1896-1978)의 여동생인 게르트루트(Gertrud Kolisch, 1898-1967)와 재혼을 하였다. 이 무렵부터 쇤베르크는 작곡가뿐 아니라 음악 이론가로서도 명성을 쌓았고, 1925년 베를린 프러시아 예술학교의 교수로 임명되면서 안정적인 생활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순조롭던 그의 인생에도 고비가 찾아왔다. 나치가 정권을 잡으면서 유대인 탄압이 강화되면서 1933년 미국 망명하였다. 전후에도 그는 미국에 머물면서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와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표면적으로 평온한 생활이 지속되는 듯했으나 청중은 그의 음악을 여전히 외면했다.

 

  미국에서의 쇤베르크는 12음 기법과 조성의 결합을 시도했다. 1942<나폴레옹에게 바치는 노래>12음 기법을 사용했으나 조성감이 느껴지며, 나폴레옹을 찬양하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 히틀러와 나치 정권을 강하게 비난하고 있다. 사회 고발적인 내용은 1947<바르샤바의 생존자>에서도 나타나는데,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고발하고 무고한 영혼을 위로하는 작품이다.

 

  1940년대 중반부터 쇤베르크는 천식과 당뇨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로시니처럼 13이라는 숫자를 두려워했던 그는 오페라 <모세와 아론 Moses und Aaron>을 발표할 때 철자의 합이 13이 되는 것을 싫어해 ‘Aaron’‘Aron’로 표기했으며, 마디 숫자를 적을 때도 ll-12-12a-14로 적었다. 13의 배수가 되는 나이를 두려워해 일부러 나이를 세지 않았는데, 결국 로시니처럼 13이란 숫자가 들어간 1951713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망하였다.

 

  쇤베르크는 피아노곡, 표제음악, 대규모의 합창곡, 협주곡, 피아노 반주의 성악곡, 오케스트라 반주의 성악곡, 현악기를 위한 실내악곡, 관악기를 위한 실내악곡 등 대부분의 영역에서 작곡하였다. 그의 대표작은 <구레의 노래>, <멜레아스와 멜리장드>, <오케스트라를 위한 다섯 개의 소곡>, <달에 홀린 피에로>, <기대>, <모세와 아론> 등이 있다. 또한 그는 뛰어난 아마추어 화가로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개인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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