쇤베르크의 생애와 작품, 조성을 해체하고 12음 기법을 세운 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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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한눈에 보기
· 한 줄 정의: 후기 낭만주의에서 출발해 12음 작곡법을 체계로 다듬은, 20세기 현대음악의 출발점
· 생몰: 1874년 9월 13일 ~ 1951년 7월 13일
· 활동지: 빈·베를린(세 차례)·로스앤젤레스
· 음악사적 위치: 후기 낭만주의에서 자유무조와 12음 기법으로 넘어간 제2빈악파의 중심 인물
· 대표작 3개: 〈정화된 밤〉, 〈구레의 노래〉, 〈달에 홀린 피에로〉

처음 듣는다면
· 추천 진입점: 현악6중주 〈정화된 밤〉. 12음 기법 이전의 작품이라 비교적 듣기 쉽고, 쇤베르크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살구색 바탕 위에 푸른 회색으로 칠한 쇤베르크의 얼굴, 검은 옆머리와 흰 깃이 보이는 자화상
아르놀트 쇤베르크, 〈파란 자화상〉, 1910년. 쇤베르크는 1907년 무렵부터 그림에 깊이 몰두했고, 얼굴 전체를 푸른 회색으로 칠한 이 자화상도 그 시기에 그렸다.

아르놀트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 1874~1951)는 후기 낭만주의 어법에서 출발해 조성의 중심이 약해지는 작품들을 거쳤고, 1923년 가까운 친구들과 제자들에게 12개의 음을 서로에게만 관계시키는 작곡법을 설명한 작곡가입니다. 그는 20세기 음악이 낭만주의의 끝에서 다른 길로 갈라지는 지점에 서 있었습니다.

그의 음악은 처음부터 난해한 현대음악이 아니었습니다. 쇤베르크와 그의 제자들이 공통의 전통으로 삼은 것은 브람스와 말러였고, 〈정화된 밤〉과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같은 초기작은 이미 후기 낭만주의를 넘어서려 했습니다. 반음계는 점점 더 조성을 흔들었고, 감정은 더 이상 안정된 중심음 안에 갇히지 않았습니다. 이 글에서는 쇤베르크가 어떻게 조성의 중심에서 멀어졌는지, 그 변화를 그 자신은 어떻게 설명했는지, 그리고 1920년대의 12음 작곡법에 이르기까지를 살펴봅니다.

쇤베르크 생애, 은행원에서 작곡가로

쇤베르크는 1874년 9월 13일 빈의 레오폴트슈타트(빈 2구)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다른 지역에서 빈으로 옮겨 온 유대인이었고(어머니는 프라하 태생입니다), 그는 이 구역의 소시민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정규 음악 교육을 충분히 받은 작곡가는 아니었습니다. 1882년 바이올린 레슨을 받기 시작했고, 그 밖의 음악은 대부분 혼자 익혔습니다. 본인의 말로는 아홉 살 무렵부터 이미 작곡을 했습니다.

1889년 아버지가 폐 인플루엔자로 세상을 떠났고, 열여섯 살 무렵 그는 개인 은행 베르너 상회(Werner & Co.)의 견습생이 되었습니다. 은행에 다니는 동안에도 그는 작곡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895년 무렵 그는 아마추어 관현악단 폴리힘니아(Polyhymnia)에서 활동하다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Alexander von Zemlinsky, 1871~1942)를 만났습니다. 쇤베르크가 이 무렵 받은 전문적인 음악 지도는 쳄린스키에게서 짧게 대위법 지도를 받은 것이 거의 전부였습니다. 1895년 그는 은행을 그만두고 합창단을 지휘하며 음악가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1901년에는 쳄린스키의 여동생 마틸데와 결혼하면서 멘토였던 쳄린스키와 처남 매부 사이가 됩니다.

쇤베르크 생애의 전환점들

쇤베르크의 음악과 삶은 1908년에 함께 크게 흔들렸습니다. 먼저 음악입니다. 1907년 3월에 착수해 1908년 여름 그문덴에서 마친 현악4중주 2번 Op.10에서는 3악장과 4악장에 소프라노가 들어와 슈테판 게오르게의 시를 노래합니다. 쇤베르크 센터의 연대기는 이 곡을 조성이 풀리고 표현주의 시기로 넘어가는 자리로 적고 있습니다. 1907~1909년에 쓴 Op.15와 1909~1910년에 쓴 Op.11도 이미 하나의 중심음에 기대지 않는 작품들입니다.

같은 해 여름에는 사생활의 위기가 겹쳤습니다. 쇤베르크 부부에게 그림을 가르치며 가까이 지내던 젊은 화가 리하르트 게르스틀(Richard Gerstl, 1883~1908)과 아내 마틸데의 관계가 그문덴 휴가 중에 드러났고, 마틸데는 게르스틀에게 갔다가 결국 쇤베르크에게 돌아왔습니다. 게르스틀은 그해 11월 빈의 작업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두 일은 같은 여름에 겹쳤지만, 현악4중주 2번의 작곡은 이 일이 드러나기 전인 1907년 3월에 시작되었고 3악장에는 1908년 7월 11일 날짜가 붙어 있습니다.

녹색 무늬 벽 앞, 붉은 양탄자를 덮은 소파에 갈색 정장 차림으로 앉아 정면을 바라보는 쇤베르크를 그린 유화
리하르트 게르스틀, 〈아르놀트 쇤베르크〉, 1906~1907년경, 캔버스에 유채, 182×130cm, 빈 박물관 소장. 붉은 양탄자를 덮은 소파에 앉은 쇤베르크가 왼손에 담배를 쥐고 화가를 마주 본다.

쇤베르크 음악 스타일의 진화, 초기·중기·후기

쇤베르크의 음악은 보통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눕니다. 이 구분은 후대의 정리이지만, 쇤베르크 자신도 1906년에 완성한 〈실내교향곡〉 Op.9를 「첫 시기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불렀습니다. 다만 그는 「무조성」이라는 말은 잘못된 이름이라며 피했습니다. 조성을 어느 날 갑자기 버린 것이 아니라 조금씩 넘어갔다는 것이 그 자신의 설명이었습니다.

초기의 쇤베르크는 브람스와 말러를 공통의 전통으로 삼은 후기 낭만주의 어법 안에서 작곡했습니다. 이 시기의 대표작이 1899년의 현악6중주 〈정화된 밤〉 Op.4입니다.

〈정화된 밤〉은 리하르트 데멜의 시집 『여자와 세계(Weib und Welt)』에 실린 시를 바탕으로 한 작품입니다. 쇤베르크는 1899년 9월 파이어바흐에서 쳄린스키 남매와 휴가를 보내며 3주 만에 이 곡을 썼고, 최종본에는 12월 1일 날짜가 붙어 있습니다. 달빛 아래를 걷는 남녀, 여인의 고백, 남자의 용서와 사랑이 하나의 긴 음악적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초연은 1902년 3월 18일 빈 무지크페라인의 소강당에서 로제 사중주단이 맡았고, 쇤베르크 자신의 기록에 따르면 이날 객석에서는 야유와 소란이 일었습니다. 아직 조성 안에 있지만, 그 조성은 안정된 집이라기보다 한계까지 밀려난 경계선처럼 들립니다.

중기에 접어들며 쇤베르크는 조성의 중심에서 점점 더 멀어졌습니다. 그사이 오래 붙들고 있던 작품이 독창·합창·관현악을 위한 대작 〈구레의 노래〉입니다. 덴마크 시인 옌스 페테르 야콥센의 연작시에 곡을 붙인 이 작품은, 본인이 남긴 편지에 따르면 1900년 봄부터 1901년 3월까지 곡을 쓰고, 1901년 8월 관현악 편곡을 시작했다가 1903년 손을 놓은 뒤 1910년 7월 다시 잡아 1911년에 마쳤습니다. 초연은 1913년 2월 23일 빈 무지크페라인의 대강당에서 프란츠 슈레커의 지휘로 열렸고, 쇤베르크 센터의 연대기는 이 초연을 큰 성공으로 적습니다. 이 후기 낭만주의의 대작이 처음 무대에 오른 것은, 쇤베르크가 이미 그 어법을 떠난 지 몇 해가 지난 뒤였습니다.

1909년 무렵의 작품들과 1911년의 〈여섯 개의 작은 피아노곡〉 Op.19는 더 이상 하나의 중심음에 기대지 않습니다. Op.19의 다섯 곡은 1911년 2월에 쓰였고, 마지막 여섯째 곡은 5월 22일 말러의 장례식에서 약 4주 뒤인 6월 17일에 쓰였습니다. 이 시기의 음악을 흔히 자유무조라고 부르지만, 앞서 본 대로 쇤베르크 자신은 이 이름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1921년 무렵 쇤베르크는 한 옥타브 안의 12개 음을 정해진 순서로 늘어놓고, 그 배열을 바탕으로 곡 전체를 짜는 방법을 다듬기 시작했습니다. 그해 7월 트라운키르헨에서 쓴 곡이 뒤에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 Op.25의 전주곡이 됩니다. 1923년 2월 그는 가까운 친구들과 제자들을 불러 모아 이것을 「서로에게만 관계된 12음으로 작곡하는 방법」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했습니다. Op.25는 1923년에 완성되어 1924년 초연되고 1925년 출판되었습니다. 이 방법이 처음 실제 작품으로 나타난 것은 Op.23부터 Op.25 무렵이지만, 어느 곡을 처음으로 꼽는지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같은 1921년에는 작곡가 요제프 마티아스 하우어(1883~1959)도 쇤베르크와는 다른 12음 구성 원리를 내세웠습니다.

시기 특징
초기
(1899~1906년경)
브람스와 말러를 배경으로 한 후기 낭만주의 어법 안에서 반음계를 끝까지 밀어붙였습니다. 쇤베르크는 1906년의 〈실내교향곡〉 Op.9를 이 시기의 마지막 작품으로 꼽았습니다.
중기
(1907~1920년경)
1907년 착수한 현악4중주 2번 Op.10부터 조성의 중심에 기대지 않는 작품으로 옮겨 갔습니다. 중심음 없이 강렬한 표현주의적 불협화를 사용했습니다.
후기
(1921년 이후)
12개의 음을 서로에게만 관계시키는 12음 작곡법으로 곡을 짰습니다.

쇤베르크와 동시대인의 관계망

쇤베르크는 혼자 고립된 혁신가가 아니었습니다. 1903~1904년 무렵 그는 구스타프 말러를 만나 가깝게 지냈고, 1911년 펴낸 『화성학』을 말러에게 바쳤습니다. 말러가 세상을 떠난 뒤인 1913년에는 말러 재단의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베를린과의 인연은 1901년 12월 카바레 위버브레틀(Überbrettl)의 지휘 일을 맡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듬해인 1902년에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추천으로 베를린 슈테른 음악원에서 화성학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도 그는 빈과 베를린을 오가며 베를린에서 세 차례 살았습니다.

그러나 쇤베르크의 음악사적 영향력은 제자들을 통해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1904년 가을부터 안톤 베베른(Anton Webern, 1883~1945)과 알반 베르크(Alban Berg, 1885~1935)가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쇤베르크, 베베른, 베르크는 훗날 제2빈악파로 불립니다.

제2빈악파라는 이름은 우연히 붙은 표현이 아닙니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으로 대표되는 고전주의 빈악파가 조성 음악의 균형과 형식을 세웠다면, 쇤베르크와 그의 제자들은 그 조성 이후의 음악 언어를 열었습니다. 이 점에서 쇤베르크는 한 개인의 작곡가를 넘어, 하나의 음악 언어를 바꾼 중심 인물입니다.

쇤베르크는 1907년 무렵부터 그림에도 깊이 몰두했고,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와도 가까운 친구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911년으로, 쇤베르크가 조성의 중심을 벗어난 작품들을 쓴 1908~1909년보다 뒤의 일입니다.

1933년 나치가 집권하자 쇤베르크의 삶은 다시 크게 흔들렸습니다. 유대인 출신이었던 그는 독일에서 더 이상 안전하게 활동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베를린을 떠나 파리로 갔고, 그해 7월 그곳에서 1898년에 개종했던 루터교를 떠나 다시 유대교로 돌아왔습니다. 그해 10월 미국에 건너간 그는 이듬해 로스앤젤레스로 옮겼고, 1936년부터 브렌트우드에 집을 마련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습니다.

쇤베르크 당대 평가와 후대 재평가

쇤베르크가 살아 있을 때 그의 음악은 자주 공격받았습니다. 1913년 빈의 한 음악회는 소동으로 끝났고, 1918년에는 새 음악을 충분히 연습해 정확하게 들려주려고 사적 음악연주협회를 세웠습니다. 일반 관객과 비평가의 출입을 막고 박수와 야유를 모두 금지한 모임이었고, 초기에는 쇤베르크 자신의 작품을 프로그램에 넣지 않았습니다. 청중이 익숙한 선율과 화성을 기대했다면, 쇤베르크의 음악은 그 기대를 정면으로 비켜 갔습니다.

후대의 평가는 두 갈래로 남아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음악사전은 그를 20세기 음악을 다른 어느 작곡가 못지않게 형성한 사람으로 꼽으면서도, 그의 작품이 연주 레퍼토리에는 더디게 들어갔다고 함께 적습니다. 영향력은 컸지만 연주회장에서 자주 들리는 음악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이 간극이 쇤베르크를 이해하는 실마리입니다. 그의 음악은 처음 들을 때 쉽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낯섦은 아무렇게나 흩어진 소리가 아닙니다. 12음 작곡법은 조성의 중심이 약해진 뒤 음들 사이의 관계를 다시 짜려는 작업이었고, 그 점에서 그를 조성의 파괴자보다 새 질서를 조직한 사람으로 읽는 편이 그의 실제 작업에 더 가깝습니다.

독일어 활자로 인쇄된 풍자 지면, 표제는 아르놀트 쇤베르크 댁에서, 부제는 지난 음악회 소동 뒤
빈 풍자지 『빈 캐리커처(Wiener Caricaturen)』 1913년 4월 부록의 「아르놀트 쇤베르크 댁에서(지난 음악회 소동 뒤)」. 쇤베르크가 악보에 따귀 소리를 넣으라고 말하는 우스개 등 소동을 비꼬는 짧은 글이 실렸고, 알반 베르크와 베베른의 이름도 나온다.

쇤베르크 대표곡과 주요 작품

주요 작품

초기, 조성 안에서

  • 〈정화된 밤〉 Op.4: 1899년의 현악6중주. 후기 낭만주의 어법 안에서 조성의 경계를 밀어붙인 초기 대표작입니다.
  • 〈구레의 노래〉: 독창·합창·관현악을 위한 대작. 1900년에 쓰기 시작해 1911년에 마쳤고 1913년 초연되었습니다.

중기, 자유무조

  • 〈여섯 개의 작은 피아노곡〉 Op.19: 중심음 없이 극도로 응축된 표현을 보여주는 1911년의 소품입니다.
  • 〈달에 홀린 피에로〉 Op.21: 1912년 작. 노래와 말 사이에 있는 슈프레히슈티메 창법으로 유명한 작품입니다.

후기, 12음 기법

  •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 Op.25: 12음 작곡법이 처음 실제 작품으로 나타난 시기의 곡입니다. 1921년부터 1923년에 걸쳐 쓰였습니다.
  • 〈모세와 아론〉: 종교적 주제를 다룬 미완성 오페라입니다. 3막은 대본과 몇몇 음악 스케치로만 남았습니다.

쇤베르크 음악을 처음 듣는다면

쇤베르크가 낯설게 느껴진다면 〈정화된 밤〉부터 듣는 것이 좋습니다. 이 곡은 아직 조성 안에 있습니다. 선율의 흐름도 비교적 분명하고, 후기 낭만주의 특유의 긴장과 해소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12음 기법 작품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그다음에는 〈달에 홀린 피에로〉를 들어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쇤베르크가 더 이상 낭만주의의 언어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들립니다. 목소리는 노래와 말 사이를 오가고, 악기들은 낯선 빛과 그림자처럼 움직입니다.

마지막으로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 Op.25나 후기 12음 기법 작품으로 넘어가면 좋습니다. 이 순서로 들으면 쇤베르크가 어느 날 갑자기 난해한 음악을 만든 사람이 아니라, 몇 해에 걸쳐 조금씩 다른 길로 옮겨 간 작곡가라는 점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이란 무엇인가요?

12음 기법은 한 옥타브 안의 12개 음을 정해진 순서(음렬)로 늘어놓고, 그 음렬을 바탕으로 곡을 짜는 작곡 방식입니다. 쇤베르크는 이것을 「서로에게만 관계된 12음으로 작곡하는 방법」이라고 불렀습니다. 특정 음을 중심으로 삼는 조성 음악과 달리, 12개의 음이 동등하게 하나의 음렬 안에서 관계를 이룹니다.

Q. 쇤베르크 곡을 처음 듣는다면 무엇부터 들어야 하나요?

〈정화된 밤〉부터 듣는 것이 좋습니다. 아직 조성 안에서 쓰인 후기 낭만주의 작품이라 접근이 쉽고, 이후 쇤베르크가 어떻게 조성에서 멀어졌는지 이해하는 출발점이 됩니다.

Q. 쇤베르크는 살아 있을 때 어떤 평가를 받았나요?

생전에는 연주회에서 소동이 날 만큼 반발을 자주 샀습니다. 1918년에는 현대음악을 충분히 연습해 청중에게 소개하려고 사적 음악연주협회를 세웠습니다. 대중은 익숙한 선율과 화성을 기대했지만, 쇤베르크의 음악은 그 기대를 흔드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Q. 게르스틀 사건은 쇤베르크의 음악과 실제로 관련이 있나요?

1908년 아내 마틸데와 화가 리하르트 게르스틀의 관계, 그리고 그해 11월 게르스틀의 자살은 실제 있었던 사건입니다. 다만 같은 해 완성된 현악4중주 2번은 그 일이 드러나기 전인 1907년 3월에 착수되었습니다. 두 일은 같은 여름에 겹쳤지만, 사건이 작품의 방향을 정했다고 말할 근거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쇤베르크의 음악은 여전히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음악을 「무질서한 소리」로 밀어낼 수는 없습니다. 그는 조성이라는 오래된 집이 더 이상 예전처럼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찍 알아들은 작곡가였습니다.

처음에는 〈정화된 밤〉으로 시작해도 좋습니다. 그다음 〈달에 홀린 피에로〉를 지나 12음 기법의 작품으로 넘어가면, 쇤베르크가 낭만주의의 언어에서 어떻게 한 걸음씩 멀어졌는지 조금씩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의 음악은 편안한 음악은 아니지만, 20세기 음악이 어디에서 갈라졌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입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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