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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스테후데(Dietrich Buxtehude)의 생애와 음악

  북스테후데(Dietrich Buxtehude, ca. 1637-1707)가 태어난 날과 장소 등 그의 유년 시절에 관한 기록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여러 문헌과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그는 대략 1637년경에 지금의 덴마크 헬싱보리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오르가니스트였던 아버지 요하네스 북스테후데(Johannes Buxtehude, 1601-1674)의 영향과 헬싱외르의 성 마리아 교회(Marienkirche)에 있는 라틴 학교에서 이루어졌던 음악교육이 북스테후데의 음악적 바탕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방대한 분량의 악보와 기록이 보관되어 있는 성 마리아 음악 도서관이 그에게 균형잡힌 음악적 토대를 제공하였을 것이다.

 

  165721세의 북스테후데는 헬싱보리의 성 마리아 교회(Marienkirche)의 오르가니스트로 임용되었다. 이후 1660년에 헬싱외르로 돌아가 자신이 어린 시절 공부하고 활동하던 성 마리아 교회(St. Mary)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이곳에서 당시 유럽의 대표적인 음악 지식인 중 한 사람인 메이보미우스(Marcus Meibomius, 1630-1710)를 만나 그에게 음악이론을 배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북스테후데가 비올을 연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미지
북스테후데가 비올을 연주하는 모습 (출처 : baroquemusic.org)


  166831세의 북스테후데는 툰더의 후임으로 당시 최고의 자리인 뤼베크의 성 마리아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임용하였는데, 당시의 관례에 따라 툰더의 장녀 안나 마르가레타(Anna Margaretha Tunder)와 결혼하게 되었다. 뤼베크의 마리아 교회 오르간은 당시 독일에서 가장 훌륭했던 오르간 중 하나였으며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교회였으므로 이곳의 오르가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북부 독일 오르가니스트들 중에서도 최고의 명예로 꼽히는 일이었다.

 

  당시 뤼베크는 북부 유럽의 무역 중심지로서 상업과 이에 따른 증권 시장 등 여러 사업이 발달했다. 종교적으로는 루터교의 중심지였으며 이곳에서 경건주의가 나타나기도 했다. 북스테후데 역시 경건주의자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작품에서도 경건주의적 요소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북스테후데는 마리아교회의 오르간 연주자이자 음악감독이면서 동시에 뤼베크에서 열리는 연례 음악회인 <저녁 음악회 Abendmusik>의 감독으로서 음악을 작곡하고 자금을 조달했으며 가수와 악기 연주자를 선발하여 공연 전체를 지휘했다. <저녁 음악회>는 성 마틴 축일(1111)부터 성탄절 사이 다섯 번의 주일에 저녁 설교에 이어 오후 4시에서 5시 사이에 행해졌다. 이 음악회는 북스테후데의 선임자인 프란츠 툰더가 시작했고 북스테후데에 이르러 규모가 확장되고 화려해졌다.

 

  <저녁 음악회>에서 연주되었던 음악작품의 내용은 주로 성경을 기본으로 시적인 규칙에 따라 구성되었으며 때로는 연극적인 요소가 첨가되기도 했다. 이를 위해 다른 지방에서 성악가나 연주자들을 섭외하여 함께 연주하기도 하기도 하고 다른 지방의 음악가들이 찾아와서 참관하고 함께 연주하기도 하였다. J. B. 바흐가 <저녁 음악회>를 보기 위해 아른슈타트로부터 200마일(320km)을 걸어 얻어서 방문한 일화는 유명하다. <저녁 음악회>는 뤼베크의 자랑거리이자 자부심이 되었고 북스테후데는 음악감독으로서 시민들의 지지와 인정을 받았다.

 

  이처럼 뤼베크을 찾아오는 독일의 음악가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많은 음악가들과 교류한 북스테후데는 중부 독일 악파를 대표하는 요한 파헬벨(Johann Pachelbel, 1563-1706)에게도 존경을 받았는데 그의 마지막 오르간 작품집 <아폴로의 여섯 개의 현 Hexachordum Apollinis>을 북스테후데에게 헌정하며 존경을 표하였다.

 

  북독일 악파의 거장 북스테후데는 16687월에 정식으로 뤼베크 시민 자격을 취득하였고 40년간 뤼베크에서 살았으며 그의 음악은 특별히 그의 제자였던 브룬스(Nicolaus Bruhns, 1665-1697)를 통해 계승 발전되었다.

 

  북스테후데과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그는 바로크 음악의 거장이 될 바흐와 헨델을 만났는데, 그는 바흐와 헨델에게 자신의 자리를 제안했다. 그러면 관례에 따라 뤼베크의 오르가니스트가 그의 장녀 안나 마가레타와 결혼해야 했다. 하지만 바흐와 헨델은 모두 그 제안을 거절했다. 바흐와 헨델은 모두 1685년에 태어났는데 안나 마가레타는 두 사람보다 열 살 연상이었다.

 

  북스테후데는 17075월 세상을 떠나 마리아교회(Marien Kirche)묘지에 안장되었다. 북스테후데는 오르간 연주자이자 교회음악가로, 그리고 연주 감독으로 오래 재직하며 다양한 구성의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는 100곡이 넘는 칸타타와 80여 곡의 오르간 작품, 40곡이 넘는 코랄 전주곡과 마그니피카트(Magnificat), 20여 곡의 현악 합주용 소나타 등을 다작하였다, 북스테후데의 작품들은 바흐를 비롯한 독일의 작곡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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