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 these first

Latest on the blog

북스테후데 생애와 음악, 바흐가 뤼베크까지 찾아간 북독일 오르간의 거장

인물 한눈에 보기
• 인물: 디트리히 북스테후데 (Dieterich Buxtehude, 약 1637~1707)
• 출생: 약 1637년. 정확한 날짜와 장소는 확정되지 않았으며, 당시 덴마크령이던 헬싱보리(현재 스웨덴)가 유력합니다
• 활동: 오르가니스트이자 작곡가. 북독일 오르간 악파의 대표
• 주 무대: 뤼베크 성 마리아교회, 대림절의 저녁 음악회(Abendmusik)
• 대표작: 파사칼리아 D단조 BuxWV 161, 《Membra Jesu nostri》 BuxWV 75, 여러 프렐루디움과 코랄 판타지, 기악 소나타
• 별세: 1707년 5월 9일, 뤼베크 성 마리아교회 안에 안장
처음 들을 작품
• 처음 듣기 좋은 곡은 파사칼리아 D단조 BuxWV 161입니다. 네 마디, 일곱 음의 짧은 저음이 곡 전체에서 되풀이되고 그 위에서 짜임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반복되는 저음을 붙잡고 들으면 북스테후데가 작은 틀 하나로 큰 건축을 세우는 방식을 한 곡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1705년 가을, 스무 살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아른슈타트에서 뤼베크까지 먼 길을 걸어갔습니다. 널리 전하는 이야기로는 약 400킬로미터에 이르는 여정이었습니다. 젊은 바흐가 그렇게까지 해서 만나려 한 음악가는 누구였을까요. 그가 찾아간 사람은 뤼베크 성 마리아교회의 오르가니스트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였습니다. 북스테후데는 오늘날 흔히 바흐가 찾아간 선배로 기억되지만, 그는 그 자체로 북독일 오르간 음악과 도시의 음악 문화를 대표하는 거장이었습니다.

형성기, 불확실한 출발

북스테후데의 출생일과 출생지는 확실하게 전해지지 않습니다. 대체로 1637년경으로 보며, 당시 덴마크령이었고 지금은 스웨덴에 속한 헬싱보리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지만, 홀슈타인의 올데슬로에서 태어났다는 견해도 있어 한 곳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확인되는 사실은 아버지 요하네스 북스테후데가 오르가니스트였다는 점입니다.

북스테후데는 아버지의 뒤를 잇듯 헬싱보리와 헬싱외르에서 첫 오르가니스트 직책을 맡으며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어린 시절의 학교 교육이나 특정 스승에 관한 이야기는 직접적인 기록이 부족하므로, 확인된 사실과 후대의 추론을 구분해서 읽는 편이 정확합니다.

북스테후데가 비올을 연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미지
북스테후데가 비올을 연주하는 모습 (출처 : baroquemusic.org)

뤼베크의 전환점

북스테후데의 생애에서 결정적인 전환은 1668년에 찾아왔습니다. 그는 뤼베크의 성 마리아교회 오르가니스트로 부임했고, 당시 관례에 따라 선임 오르가니스트였던 프란츠 툰더의 딸 안나 마르가레타 툰더와 결혼했습니다. 같은 해 뤼베크 시민권도 얻었습니다.

그의 직무는 연주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오르가니스트인 동시에 교회의 재정과 사무를 관리하는 베르크마이스터(Werkmeister)로서 행정 업무까지 맡았습니다. 뤼베크는 한자동맹의 부유한 상업 도시였고 성 마리아교회는 그 도시의 중심이었습니다. 북스테후데는 이 자리를 약 40년 동안 지키며 생애의 대부분을 뤼베크에서 보냈습니다.

스타일의 진화

북스테후데의 음악은 크게 오르간을 위한 기악곡과 예배를 위한 성악곡으로 나뉩니다. 오르간곡에서는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프렐루디움, 코랄 선율을 화려하게 펼치는 코랄 판타지, 그리고 짧은 저음을 반복하며 그 위에 변주를 쌓는 오스티나토 기법이 두드러집니다. 성악에서는 독창과 합주를 결합한 성악 협주곡과 칸타타를 남겼습니다.

그의 오스티나토 기법을 소리로 확인하기 좋은 작품이 파사칼리아 D단조 BuxWV 161입니다. 네 마디 길이의 일곱 음짜리 저음이 각 조성 구간에서 일곱 번씩 되풀이되고, 곡 전체는 D단조, F장조, A단조, 다시 D단조의 네 구간으로 옮겨 갑니다. 저음의 반복 틀은 그대로 유지되지만 그 위에 얹히는 상성부의 리듬과 짜임은 변주마다 달라집니다. 앞부분에서 비교적 성글게 움직이던 상성부가 뒤로 갈수록 음표가 촘촘해지는 지점을 따라 들으면, 같은 저음 위에서 음악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생애의 어떤 사건이 이런 양식을 만들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작은 반복 단위를 큰 구조로 키우는 그의 방식은 여러 작품에서 일관되게 나타납니다.

뤼베크의 벽돌 고딕 교회 오르간과 펼쳐진 악보를 재구성한 이미지
뤼베크 교회 오르간과 파사칼리아의 반복 구조를 모티프로 한 역사적 재구성 이미지입니다.

관계망

북스테후데의 음악 세계는 여러 인물과 이어져 있습니다. 그의 자리는 선임자 프란츠 툰더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고, 툰더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개인적으로도 연결되었습니다. 젊은 작곡가 니콜라우스 브룬스는 뤼베크에서 그에게 배운 제자로 전해집니다.

1703년에는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과 요한 마테존이 함께 뤼베크를 찾아왔습니다. 두 사람은 북스테후데의 후임 자리 가능성을 살펴보았지만, 후임자가 그의 장녀 안나 마르가레타와 결혼해야 한다는 조건을 알고는 물러났습니다. 안나 마르가레타는 1669년생으로 알려져 있어, 1685년에 태어난 두 사람보다 약 열여섯 살 위였습니다. 2년 뒤인 1705년 가을에는 젊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아른슈타트에서 뤼베크로 찾아와 북스테후데의 음악을 배우려 했고 예정보다 오래 머물렀습니다. 다만 바흐가 헨델·마테존과 같은 후임 제안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근거가 약하므로 여기서는 다루지 않습니다.

당대의 명성과 후대의 수용

북스테후데가 살아 있을 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저녁 음악회, 곧 아벤트무지크(Abendmusik)였습니다. 성 마리아교회에서 대림절 무렵 열린 이 공개 음악회는 예배와 별도로 진행된 대규모 음악 행사였습니다. 이 전통을 처음 시작한 사람은 선임자 프란츠 툰더였고, 북스테후데는 그 규모와 명성을 크게 키웠습니다. 특히 1678년부터는 성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극적인 음악을 무대에 올려 도시 전체가 주목하는 행사로 만들었습니다.

당대에 그의 명성은 남독일에도 알려져, 요한 파헬벨은 1699년의 건반 작품집 《Hexachordum Apollinis》를 북스테후데와 페르디난트 토비아스 리히터 두 사람에게 헌정했습니다. 오늘날 북스테후데는 주로 오르간 작품을 통해 기억되고, 그의 이름은 바흐에게 미친 영향과 함께 언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생전의 그는 오르간 연주자이자 도시의 음악 행사를 이끈 기획자로서 폭넓게 알려진 인물이었습니다.

꼭 들어야 할 북스테후데의 작품들

• 파사칼리아 D단조 BuxWV 161: 네 마디 저음을 반복하며 그 위에 변주를 쌓아 올린 오르간곡으로, 북스테후데의 오스티나토 기법을 대표합니다.
• 《Membra Jesu nostri》 BuxWV 75: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몸을 부위별로 묵상하는 일곱 부분의 성악 연작으로, 그의 성악 협주곡 양식을 보여 줍니다.
• 여러 프렐루디움과 토카타: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형식에 북독일 오르간 양식의 화려함을 담았습니다.
• 코랄 판타지와 코랄 전주곡: 예배용 찬송 선율을 오르간으로 펼친 작품들입니다.
• 기악 소나타: 바이올린과 비올라 다 감바, 통주저음을 위한 실내악으로, 오르간 밖에서의 그의 면모를 들려줍니다.

북스테후데 시작하기

북스테후데로 들어가는 문은 파사칼리아 D단조 BuxWV 161입니다. 먼저 곡 첫머리에 나오는 네 마디의 저음 패턴을 귀에 새겨 두십시오. 그다음 그 저음이 일곱 번씩 되풀이되는 동안 위쪽 성부의 짜임이 어떻게 바뀌는지, 그리고 짧은 전조를 거쳐 F장조 구간에 이르는 흐름을 따라 들으면, 하나의 저음이 곡 전체를 어떻게 지탱하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은 《Membra Jesu nostri》입니다. 오르간 밖에서 북스테후데가 목소리와 악기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일곱 부분으로 이어지는 이 성악 연작에서 그의 또 다른 얼굴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흐 이전의 작곡가라는 꼬리표를 잠시 내려놓고 들으면, 북스테후데는 뤼베크라는 도시의 음악을 이끈 당대의 거장으로 새롭게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