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안드레예비치 림스키-코르사코프(Nikolay Andreyevich Rimsky-Korsakov, 1844-1908)는 러시아의 노브고르트(Novgorod)지방에 속해 있는 티흐빈(Tikhvin)에서 대대로 해군사관을 배출한 군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그가 피아노를 공부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선원이 되고 싶었다. 6세 때 피아노를 배웠고 9세 때에는 작곡도 하였지만 정식 음악교육은 받지 않았다.
1856년 12세 때 그는 페테르스부르크(St.Petersburg)의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오페라를 듣고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하였다. 1861년 발라키레프(1837-1910)와 만남으로 ‘러시아 5인조’의 한 멤버(멤버중 최연소)가 되었다. 발라키레프로부터 작곡 지도를 받았으며, 러시아 민족음악 확립의 새로운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발라키레프의 지도와 권유로 <교향곡 1번>을 작곡을 시작했지만, 1862년 사관학교를 졸업후 해군 장교로서 출항을 함으로서 중단 되었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당시는 완전한 해군장교가 되어 있었고 음악에 대한 꿈이 사라져버린 것에 대해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1865년 가을 페테르스부르크로 돌아왔을 때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자신의 음악적 재능에 다시 눈을 뜨게 되었다. 미완성으로 남아 있던 <교향곡 1번>을 다시 작곡하여 오케스트레이션은 처음부터 전부 바꾸었다. 이렇게 완성한 <교향곡 1번>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3개의 러시아의 주제를 위한 서곡은, 발라키레프가 창립한 음악학교에서 1865년 12월 초연되어 호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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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dallassymphony.org |
1874년 해군군악대 감독으로 임명된 그는 군악대의 지휘를 통해 기악법과 지휘법을 풍부하게 하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다. 1883년에는 궁정 예배당의 부지휘자가 되어 여러 악기에 대해 접할 수 있었던 기회는 그의 오케스트레이션의 완성에 도움이 되었다. 1875년에는 발라키레프의 무료음악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1885년부터 림스키-코르사코프는 그의 뛰어난 관현악적 능력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발표한다. 1887년 작곡된 <스페인 기상곡>, 1888년 교향모음곡 <세헤라자데>, 축제용 서곡 <러시아의 부활제> 등이 있다.
1890년에서 1893년에까지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자식들의 죽음과 함께 본인의 건강에도 이상이 나타나면서 음악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던 중 1893년 차이코프스키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러시아 교향곡 연주회에서 지휘를 맡은 이후 우울증에서 벗어나게 된다.
1905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이른바 '피의 일요일' 사건에서 학생들 편에 섰다가 교수직에서 해임되었을 뿐만 아니라 작품의 연주도 금지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교수직을 박탈당한 후에는 작곡에만 전념하며 많은 곡을 썼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1908년 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하였고, 티흐빈 공동 묘지에 묻혔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러시아 민속 음악과 동양적인 요소를 결합한 독특한 음악 스타일로 유명한데, 민요에 대한 관심은 발라키레프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관현악법의 대가였던 그의 작품은 화려하고 풍부한 오케스트레이션이 특징이다. 러시아의 민족 정서에 기반을 둔 그의 작품은 색채감이 뛰어나며, 묘사적이고 명쾌해서 이해하기 쉽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의 음악은 러시아의 오페라, 가곡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주요 작품으로는 <세헤라자데 Scheherazade>, <스페인 기상곡 Capriccio Espagnol>, <왕벌의 비행 Flight of the Bumblebee>, <러시아 부활절 축전 서곡 Russian Easter Festival Overture> 등이 유명하다,
또한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무소륵스키(Modest Mussorgsky)의 작품을 편곡하여 출판하였는데, 그의 편곡은 원작보다 더 널리 연주되기도 하였다. 그는 러시아 음악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교육과 작품을 통해 많은 후배 작곡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