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 활동한 세자르 프랑크(César Franck, 1822-1890)는 프랑스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 교육자이다. 그는 벨기에 리에주(Liege)에서 태어나고 프랑스에서 활동했지만, 혈통적으로는 독일계에 더 가깝다. 벨기에 리에주에서 태어난 그의 어머니는 독일계 혈통이었고 아버지도 독일 국경 출신이었다.
어려서부터 피아노에 상당한 재능을 보였던 프랑크의 음악가로서의 경력은 피아노 연주자로서 각국에 연주 여행을 하게 되면서 시작된다. 아들을 신동으로 키워 많은 돈을 벌려는 야심을 가졌던 아버지로 인해 프랑크는 1830년 리에주 음악원에 입학하게 된다. 1835년 파리로 이주하여 음악을 공부하던 프랑크는 국적 문제로 입학을 거절당하기도 하였으나 1837년에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파리 음악원 재학 당시 1838년과 1840년에는 각각 피아노와 대위법 부문 수석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프랑크는 오르간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평생 피아니스트보다 오르가니스트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또한 신앙심이 깊은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1858년부터 마차 사고의 합병증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파리의 성 끌로틸드 성당(Basilique Sainte-Clotilde de Paris)의 오르가니스트로 사망하기 전까지 봉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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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르 프랑크의 모습 |
1872년부터는 파리음악원의 교수가 되어 뱅상 댕디, 에르네스트 쇼송, 폴 뒤카, 가브리엘 포레 같은 많은 훌륭한 인재들을 배출하여 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오르간 작품을 12곡밖에 남기지 않았지만 오르간 즉흥 연주에 뛰어났는데, 이 점 때문에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이래 가장 뛰어난 오르간 작곡가로 여겨지고 있다.
프랑크는 다른 천재들과는 달리 50세까지는 거의 걸작을 작곡하지 못하였다. 프랑크의 걸작들은 장르를 불문하고 그의 말년에 집중적으로 작곡되었다. 이 시기에 프랑크는 성숙된 음악적 재능으로 피아노와 오르간을 위한 곡, 실내악곡, 오라토리오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작품들을 남겼다.
그의 가장 대표적인 곡은 <바이올린 소나타 A장조>인데, 이 곡은 '순환주제'를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1악장 개시부에 바이올린으로 제시된 선율이 4개 악장 전체를 관통하면서 반복하거나 조금씩 모양을 바꾸어 나타나는 것이다.
1890년 프랑크는 길을 가다가 마차에 치이는 중상을 입으면서 늑막염에 걸리고 끝내 회생하지 못하고 파리의 몽파르나스 묘지에 안치되었다.
프랑크는 오랜 종교 음악 생활에서 비롯되는 특유의 고전적 오르간적인 중후한 울림이 묵직한 감동과 잊혀지지 않는 여운을 남기는 교향 음악의 대가이다. 그의 음악적 특징은 대위법적인 진행 안에서 다양하게 변하는 선율, 새로운 리듬의 확대와 축소, 반음계적인 화성들과 순환기법 등을 들 수 있다.
프랑크의 중요성은 그가 근대 프랑스 실내악이 나아갈 길을 닦아 놓은 것, 기악음악을 재건하고 그것에 명백히 프랑스적인 특색을 준 것, 낭만주의적 어법과 사상을 고전주의적인 틀 속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인 점 등이다. 그가 죽은 후 그 정신을 기리기 위해 1894년 ‘스콜라 칸토룸’이, 1935년에는 ‘에콜 세자르 프랑크’가 설립되었다. 그의 음악은 프랑스와 독일의 전통음악을 조화시킨 것이라는 평을 받고 있으며, 낭만주의 속에서 순수 음악을 지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