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조반니 피레르루이지이지만 당시 그를 칭하는 이름들이 워낙 많아 혼돈을 피하기 위해서 그가 태어난 마을 이름인 팔레스트리나로 불리게 되었다. 팔레스트리나(G. P. da. Palestrina, 1525/6 –1594)는 종교개혁으로 가톨릭교회가 흔들리던 시기 가톨릭 음악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팔레스트리나는 어린 시절에 로마의 산타 마리오 마지오레(St. Maria Maggiore) 성당의 성가대원으로 봉사했다. 이후 1544년 고향인 로마 근교의 팔레스트리나 마을의 산타 아가피토(St. Agapito) 대성당 오르간 연주자와 성가대 지휘자를 역임하였다. 7년 후인 1551년에는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의 부속교회인 줄리아 성당의 성가대 감독이 되었고, 약 2년 후에는 마침내 음악감독에까지 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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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트리나의 모습 (출처 : 브리태니커) |
1555년 1월, 교황 율리우스 3세(팔리스트리나 마을의 주교로 재직했던 추기경)가 선출되면서 기혼자였던 팔레스트리나는 교황의 공식 교회인 시스티나 성당의 성가대원(미혼자만이 가능)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얼마후 교황 파울루스 4세가 부임하게 되면서 교황청 교회의 독신 규율 엄수를 강조하면서 그는 시스티나 성당을 떠나게 된다.
팔레스티나는 1565년부터 1571년까지 로마에 설립된 예수회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571년 해고당했던 성 베드로 대성당의 부름을 받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서 카펠라 줄리아 성가대의 지휘자로 활동하였다. 1572년 로마에 유행한 흑사병으로 아내와 두 아들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 슬픔을 겪게 된다.
1577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트렌트 공의회에서 권고한 사항에 따라 미사에 사용되는 음악을 모은 책인 공식전례서(Graduale)의 개정 작업을 감독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생전에 완성되지 못하고 1614년에 다른 사람들의 작업을 거쳐 그라두알레 메디치 판이 출판되었다.
가족을 잃은 비극을 겪은 팔레스트리나는 성직자가 되려고 했으나, 결국 1581년에 돈 많은 미망인 비르지니아 도몰리와 재혼하여 많은 작품을 출판할 수 있었다. 1586년 교황의 전속 작곡가 칭호를 받은 팔레스트리나는 대음악가로 존경받다가 별세하였으며, 산 피에트로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팔레스트리나는 약 700곡 정도의 작품을 썼는데 94곡의 세속적 마드리갈을 제외하고는 종교적인 곡이 대부분이었다. 그는 104곡의 미사곡을 작곡하였으며 숫자적으로 당대 비교할 만한 작곡가가 없었다. 팔레스트리나는 미사곡 외에 약 205곡의 모테트와 그 밖의 많은 전례곡 및 50여 곡의 이탈리아어에 의한 종교적 마드리갈을 작곡하였다.
그의 작품은 거의 무반주의 성악곡이며 4~5성의 작품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는 플랑드르 악파의 다성수법 2개 이상의 성부로 구성된 곡)을 충분히 몸에 익히고 있으면서도 서정적인 표정을 잃지 않았고, 호모리풍(긴밀한 구성으로 된 맑고 깨끗한 음악풍)의 양식도 채택하여 긴밀한 구성으로 맑고 깨끗한 음악을 만들었다.
팔레스트리나의 음악은 16세기의 종교개혁에 반하는 반종교개혁에서 비롯된 가톨릭 음악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반종교개혁의 선구자는 교황 파울루스 3세(1534-1549 재위)였는데, 그는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해 구체적인 쇄신 방안을 내놓게 된다. 그는 반종교개혁의 정신에 공감하면서 공의 회의 요구에 부합되는 교회 음악들을 작곡했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반음계주의를 철저하게 회피하여 무지카 픽타(Musica Ficta) 이외에는 반음계를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음악은 다른 작곡가들의 음악보다 부드럽고 투명한 음향을 가지고 있다. 팔레스트리나의 음악 양식들은 후대의 종교 음악 작곡가들에게 모방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가톨릭 교회 음악의 한 규범으로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