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슈트라우스 2세(1825~1899)는 빈 왈츠를 무도회의 반주에서 독립적인 관현악 작품으로 확장하고, 오페레타 〈박쥐〉로 빈 극장의 전성기를 연 작곡가입니다.
그는 밤에는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악단을 지휘하고, 낮에는 다음 무도회를 위한 곡을 썼습니다. 한 도시가 춤추는 속도를 누구보다 잘 알았던 음악가였습니다. 그러나 ‘왈츠의 왕’이라는 화려한 이름 뒤에는 아버지와의 경쟁, 과로로 인한 붕괴, 어머니와 두 동생의 협력이 함께 놓여 있었습니다.
- 이름: 요한 슈트라우스 2세(Johann Strauss II)입니다.
- 생몰: 1825년 10월 25일부터 1899년 6월 3일까지 살았습니다.
- 출생·활동지: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주로 빈을 중심으로 활동했습니다.
- 활동 분야: 작곡가·바이올린 연주자·지휘자로 활동했습니다.
- 한 줄 정의: 빈 왈츠를 세계적인 관현악 음악과 오페레타로 확장한 ‘왈츠의 왕’입니다.
- 대표작: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황제 왈츠〉, 오페레타 〈박쥐〉입니다.
- 처음 듣는다면: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와 〈박쥐〉 서곡부터 들어보는 것이 좋습니다.
- 이어서 들을 곡: 〈황제 왈츠〉와 〈천둥과 번개 폴카〉를 추천합니다.
슈트라우스 일가 — 빈을 춤추게 한 가족
슈트라우스 일가는 19세기 빈의 무도회와 대중 음악 문화를 이끈 대표적인 음악 가문입니다.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1804~1849)는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작곡가, 지휘자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요제프 라너의 악단에서 경험을 쌓은 뒤 1825년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조직했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직접 악단을 이끄는 방식으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같은 해 첫아들이 태어나자 그는 자신과 똑같은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 아이가 훗날 ‘왈츠의 왕’이 된 요한 슈트라우스 2세입니다.
요한 1세와 아내 마리아 안나 슈트라임(Maria Anna Streim) 사이에는 여섯 명의 자녀가 태어났습니다. 그중 요한 2세와 요제프, 에두아르트 세 형제가 모두 작곡가와 지휘자로 활동하며 방대한 춤곡과 행진곡을 남겼습니다.
그중에서도 장남 요한 2세가 아버지의 명성을 넘어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성공을 한 사람의 재능만으로 설명하면 슈트라우스 가문의 진짜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머니 안나와 두 동생은 작곡과 지휘, 악단 운영을 나누며 가문의 음악 사업을 함께 키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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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츠 루크하르트가 촬영한 요한 슈트라우스 2세 |
아버지의 반대와 어머니의 선택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아들이 음악가가 되는 것을 반대했지만, 어머니 안나는 아들의 음악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습니다.
요한 2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들이 불안정하고 고된 음악가의 삶을 되풀이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음악가 대신 은행원이 되기 위한 상업 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상황이 바뀐 것은 1843년이었습니다. 빈 왈츠의 또 다른 선구자였던 요제프 라너가 세상을 떠나자, 빈의 무도회 음악계에는 커다란 공백이 생겼습니다. 어머니 안나는 그 자리를 아들이 채울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요한 2세는 안톤 콜만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고, 요제프 드레흐슬러에게 통주저음과 작곡의 기초를 익혔습니다. 아버지가 다른 가정을 꾸리며 집을 떠난 뒤에는 상업 공부를 중단하고 전문 음악가가 되기 위한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1844년 7월 31일, 요한은 빈 시 당국에 음악가로 활동하겠다는 뜻을 공식적으로 알렸습니다. 같은 날 어머니 안나는 남편과의 이혼을 청구했습니다. 아들의 데뷔는 단순한 직업 선택이 아니라, 어머니와 자녀들이 아버지에게서 경제적으로 독립하려는 가족의 결단이기도 했습니다.
1844년 돔마이어 카지노 데뷔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1844년 10월 15일 빈 교외의 돔마이어 카지노에서 24명의 악단원과 함께 공식 데뷔했습니다.
아버지는 행정 당국에 이의를 제기하며 아들의 공연을 막으려 했지만 허가는 취소되지 않았습니다. 열아홉 살이 되기 직전의 요한은 자신을 포함해 25명이 무대에 서는 악단을 준비했습니다.
그날 프로그램에는 자신의 첫 작품인 왈츠 〈시의 경구〉 Op. 1, 〈데뷔 카드리유〉 Op. 2, 〈마음의 기쁨 폴카〉 Op. 3, 〈호의를 구하는 사람들〉 Op. 4가 포함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라너의 왈츠, 오페라 서곡도 함께 연주하며 기존 악단과 정면으로 경쟁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당시 신문들은 아버지의 이름이 아들에게 훌륭하게 이어지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아버지의 시대가 하루아침에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슈트라우스라는 이름이 다음 세대로 넘어갔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졌습니다.
부자의 갈등은 가정 안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도시의 무도회와 연주 계약, 청중을 놓고 경쟁했습니다. 요한 2세는 아버지의 음악을 계승해야 했지만, 동시에 그 음악보다 더 새로운 것을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1849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요한은 두 악단을 통합했습니다. 경쟁자의 아들이었던 그는 이제 슈트라우스 가문 전체를 책임지는 음악가가 되었습니다.
세 형제가 운영한 슈트라우스 악단
슈트라우스 악단의 전성기는 요한 2세 혼자서 만든 것이 아니라 요제프와 에두아르트가 작곡과 지휘를 나누면서 가능했습니다.
요한은 밤에는 무도회와 연주회를 지휘하고, 낮에는 새로운 왈츠와 폴카를 작곡했습니다. 연주 일정이 늘어날수록 그의 생활은 쉴 틈 없이 돌아갔습니다. 결국 1852년 가을, 그는 과로로 완전히 쓰러졌습니다.
이때 건축가로 일하던 동생 요제프 슈트라우스(Josef Strauss)가 어머니의 부탁을 받고 형의 악단을 대신 지휘했습니다. 처음에는 잠시 공백을 메우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요제프 역시 뛰어난 작곡가와 지휘자로 성장했습니다.
요제프가 빈의 악단을 맡아준 덕분에 요한은 1856년부터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의 파블롭스크 여름 공연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1865년까지 매년 파블롭스크를 찾았고 1869년에도 다시 방문했습니다.
막내 에두아르트 슈트라우스(Eduard Strauss)도 악단 지휘에 참여했습니다. 1870년 어머니 안나와 요제프가 잇달아 세상을 떠난 뒤에는 에두아르트가 악단 운영을 전담했습니다.
1863년 요한은 오랫동안 바라던 궁정무도회 음악감독에 임명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예술가의 생애〉, 〈빈 숲 속의 이야기〉처럼 오늘날에도 연주되는 대표 왈츠가 탄생한 슈트라우스 가문의 전성기였습니다.
슈트라우스 악단은 한 명의 천재를 보조하는 조직이라기보다, 어머니와 세 형제가 역할을 나눈 가족 음악 사업체에 가까웠습니다. 요한의 국제적 명성 뒤에는 가족의 지휘와 행정, 작곡 노동이 함께 있었습니다.
빈 왈츠를 관현악 작품으로 바꾸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업적은 왈츠를 처음 발명한 데 있지 않고, 이미 존재하던 춤곡을 독립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관현악 작품으로 확장한 데 있습니다.
초기의 빈 왈츠는 무도회장에서 실제로 춤추기 위한 음악이었습니다. 라너와 아버지 요한 1세는 여러 짧은 왈츠를 이어 연주하는 형식을 발전시켰고, 요한 2세는 이 유산을 더 넓은 관현악의 공간으로 옮겼습니다.
그의 왈츠에는 분위기를 준비하는 긴 서주, 서로 다른 표정을 지닌 여러 왈츠 묶음, 앞서 들었던 선율을 다시 불러오며 끝맺는 코다(coda — 음악을 정리하며 마치는 부분)가 들어갑니다. 무도회 음악이 하나의 긴 여정을 갖게 된 것입니다.
빈 왈츠의 리듬도 단순한 ‘쿵짝짝’이 아닙니다. 세 박을 기계적으로 똑같이 나누지 않고 둘째 박을 조금 앞당기는 듯 연주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살짝 뒤로 기대는 특유의 흔들림을 만듭니다. 다만 이 연주 전통을 요한 2세 혼자 만들었다기보다는 슈트라우스 악단이 빈의 춤 문화를 세련되게 다듬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는 그 변화가 가장 분명하게 들리는 작품입니다. 현악기의 희미한 트레몰로에서 시작해 다섯 개의 왈츠 묶음과 코다로 나아가며, 실제로 춤출 수 있는 음악과 앉아서 감상하는 관현악 작품의 성격을 함께 갖습니다.
이 곡의 1867년 합창판 초연이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졌지만, 빈 슈트라우스 연구소가 확인한 당시 기록에 따르면 첫 공연부터 큰 성공을 거두었고 신문도 이미 ‘히트작’으로 평가했습니다. 관현악판도 파리가 아니라 1867년 3월 10일 빈 폴크스가르텐에서 먼저 연주되었습니다.
| 시기 | 음악적 변화 | 대표작 |
|---|---|---|
| 1844~1855년 | 부친과 경쟁하며 무도회용 왈츠·폴카·카드리유를 빠르게 작곡 | 〈시의 경구〉, 〈안나 폴카〉 |
| 1856~1870년 | 러시아와 유럽 활동을 거치며 서주와 코다가 발달한 관현악 왈츠 확립 |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예술가의 생애〉, 〈빈 숲 속의 이야기〉 |
| 1871~1899년 | 오페레타와 극음악으로 영역을 넓히면서 후기 왈츠의 관현악 색채도 심화 | 〈박쥐〉, 〈집시 남작〉, 〈황제 왈츠〉 |
오페레타로의 전환과 박쥐의 탄생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1871년부터 17편의 무대 작품을 썼으며, 그중 15편이 오페레타입니다.
1870년에는 어머니 안나와 동생 요제프가 잇달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듬해부터 요한은 악단의 일상적인 지휘를 에두아르트에게 맡기고 극장 음악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았습니다.
오페레타 전환을 요제프의 죽음 하나로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빈의 극장 관계자들은 프랑스의 자크 오펜바흐가 주도하던 오페레타에 맞설 새로운 작곡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첫 아내 헨리에테 트레프츠도 남편이 무대 음악에 도전하도록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1874년 4월 5일 초연된 〈박쥐〉(Die Fledermaus)는 요한의 무대 작품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아남은 대표작입니다. 경쾌한 왈츠와 폴카, 오페라에 가까운 앙상블, 술과 가면이 만들어내는 희극이 하나의 빠른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박쥐〉를 요한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완성된 작품으로만 보면 중요한 협업자가 사라집니다. 대본가이자 극장 지휘자였던 리하르트 주네(Richard Genée)는 대본뿐 아니라 음악적 아이디어를 정리하고 악보를 다듬는 작업에도 깊이 참여했습니다.
주네는 대본료와 별도로 ‘음악적 지원’에 대한 보수를 받았습니다. 자필 총보에도 그의 필체가 상당 부분 남아 있습니다. 슈트라우스의 선율 감각과 주네의 극장 경험이 결합했기 때문에 〈박쥐〉의 음악은 무대 위에서 빠르고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이후 〈베네치아의 하룻밤〉과 〈집시 남작〉에서도 그는 왈츠와 폴카를 극적 상황 속에 배치했습니다. 특히 〈집시 남작〉은 가벼운 희극을 넘어 오페라에 가까운 규모와 진지한 정서를 보여줍니다.
세 번의 결혼과 춤을 못 췄다는 통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세 번 결혼했지만 친자녀는 없었고, 세 아내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의 음악 활동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1862년 결혼한 첫 아내 헨리에테 트레프츠(Henriette Treffz)는 요한보다 일곱 살 많은 오페라 가수였습니다. 흔히 ‘예티’라고 불린 그녀는 연주 계약과 여행을 관리하고, 남편이 오페레타에 도전하도록 도운 실질적인 매니저였습니다.
예티가 1878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뒤 요한은 자신보다 스물다섯 살 어린 배우 안젤리카 디트리히(Angelika Dittrich)와 재혼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결혼은 약 4년 만에 사실상 끝났습니다.
이후 그는 자신보다 서른 살 어린 미망인 아델레 도이치(Adele Deutsch)와 가까워졌습니다. 가톨릭 교회법 아래에서는 안젤리카와의 결혼을 해소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두 사람은 루터교로 개종하고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의 시민권을 얻었습니다. 요한과 아델레는 1887년 8월 코부르크에서 결혼했습니다.
‘왈츠의 왕이 정작 춤을 추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요한 자신이 아델레에게 보낸 편지에서 평생 춤추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취지로 쓴 것이 이 통설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1847년 발칸 연주 여행 당시 그를 초대한 집안의 딸이 남긴 회고에는 다른 장면이 등장합니다. 젊은 요한이 세믈린의 사교 모임에서 친구들과 춤을 추었고,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며 상대에게 춤을 청했다는 내용입니다.
그는 능숙한 무도가는 아니었을 수 있지만, 평생 한 번도 춤을 추지 못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말을 후대가 지나치게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셈입니다.
당대의 스타에서 음악사의 작곡가로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생전에 유럽과 러시아, 미국에서 큰 인기를 누린 국제적인 공연 음악가였습니다.
그의 음악은 황실과 귀족의 무도회뿐 아니라 중산층의 사교 공간, 야외 연주회와 극장에서 연주되었습니다. 그는 고급 예술과 대중 오락을 나누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춤추고 웃는 순간에도 관현악의 색채와 형식적 완성도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1894년에는 데뷔 50주년을 맞아 빈에서 며칠에 걸친 축하 행사가 열렸습니다. 아버지가 공연을 막으려 했던 열아홉 살 청년이 반세기 뒤에는 도시 전체의 축하를 받는 음악가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후대의 음악사는 교향곡과 실내악을 ‘진지한 음악’의 중심에 두면서 춤곡과 오페레타를 가볍게 취급하기도 했습니다. 슈트라우스의 선율이 너무 쉽게 기억된다는 점이 오히려 그의 작곡 기술을 가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의 왈츠를 자세히 들으면 긴 서주, 성격이 다른 여러 왈츠, 조성의 이동, 앞선 선율을 회수하는 코다가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쉬워 보이는 것은 구조가 단순해서가 아니라, 복잡한 구조가 자연스럽게 들리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1899년 6월 3일 빈에서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유해는 빈 중앙묘지의 명예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빈 시립공원에는 1921년 6월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그의 황금 기념상이 공개되었습니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는 오늘날 오스트리아의 비공식 국가로 불리고, 빈 필하모닉 신년 음악회의 전통적인 앙코르로 연주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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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년 6월 빈 시립공원에 공개된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황금 기념상 (출처: Pixabay) |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주요 작품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생애 동안 약 500편의 작품을 남겼으며, 관현악 왈츠와 폴카, 오페레타가 그의 핵심 레퍼토리를 이룹니다.
-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Op. 314: 트레몰로 서주와 다섯 왈츠, 코다로 이루어진 오스트리아의 상징입니다.
- 〈예술가의 생애〉, Op. 316: 1867년 빈 예술가협회의 무도회를 위해 쓴 우아하고 서정적인 왈츠입니다.
- 〈빈 숲 속의 이야기〉, Op. 325: 치터 독주와 관현악이 빈 외곽의 전원적 분위기를 만듭니다.
- 〈남국의 장미〉, Op. 388: 오페레타의 선율을 화려한 관현악 왈츠로 다시 엮은 작품입니다.
- 〈봄의 소리〉, Op. 410: 소프라노의 화려한 기교와 왈츠를 결합한 성악 왈츠입니다.
- 〈황제 왈츠〉, Op. 437: 장중한 행진곡풍 서주와 우아한 왈츠가 만나는 후기 대표작입니다.
- 〈트리치 트라치 폴카〉, Op. 214: 끊임없이 오가는 소문과 수다를 빠른 리듬으로 표현한 곡입니다.
- 〈천둥과 번개 폴카〉, Op. 324: 큰북과 심벌즈가 폭풍 같은 에너지를 만드는 작품입니다.
- 〈피치카토 폴카〉: 동생 요제프와 함께 쓴 작품으로 현을 뜯는 소리가 중심이 됩니다.
- 〈박쥐〉(1874): 가면무도회와 복수극을 왈츠와 앙상블로 풀어낸 빈 오페레타의 대표작입니다.
- 〈베네치아의 하룻밤〉(1883): 수상도시의 밤과 신분 착각을 경쾌한 음악으로 그린 작품입니다.
- 〈집시 남작〉(1885): 희극과 진지한 정서를 결합해 오페라에 가까이 다가간 후기 작품입니다.
- 〈기사 파스만〉(1892):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남긴 유일한 정식 오페라입니다.
장르 분류에 따라 세부 수치는 달라질 수 있지만, 오페레타는 15편이며 오페라와 발레를 포함한 무대 작품은 모두 17편입니다.
어떤 작품부터 들으면 좋을까요
요한 슈트라우스 2세를 처음 접한다면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박쥐〉 서곡, 〈황제 왈츠〉 순서로 듣는 것이 좋습니다.
먼저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에서는 유명한 첫 선율만 기다리지 말고, 현악기의 떨림에서 호른과 첫 왈츠가 나타나는 과정을 들어보십시오. 코다에서 앞서 들었던 선율이 돌아오는 순간까지 따라가면 그의 왈츠가 단순한 춤곡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집니다.
다음으로 〈박쥐〉 서곡을 들으면 왈츠와 폴카가 극장 안에서 얼마나 빠르게 장면을 바꾸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인물들이 아직 등장하지 않았는데도 축제와 소동, 술기운이 이미 음악 속에 들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황제 왈츠〉를 들으면 후기 슈트라우스의 관현악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행진곡처럼 장중하게 출발한 음악이 부드러운 왈츠로 바뀌는 과정은 그의 형식 감각을 가장 쉽게 보여줍니다.
-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 약 10분입니다.
- 〈박쥐〉 서곡 — 약 8분입니다.
- 〈황제 왈츠〉 — 약 11분입니다.
세 곡만 이어 들어도 관현악 왈츠, 오페레타, 후기 왈츠로 이어지는 작품 세계를 한 번에 만날 수 있습니다.
신년 음악회에서 슈트라우스의 작품이 어떤 순서로 연주되는지는 빈 필하모닉 신년 음악회에서 이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요한 슈트라우스 1세와 2세는 어떻게 다른가요?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빈 왈츠 악단의 기반을 세운 아버지이고,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이를 대규모 관현악 왈츠와 오페레타로 확장한 아들입니다. 〈라데츠키 행진곡〉은 아버지,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와 〈박쥐〉는 아들의 작품입니다.
Q.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왜 왈츠의 왕이라고 불리나요?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빈 왈츠를 국제적인 관현악 음악으로 발전시켰기 때문에 ‘왈츠의 왕’이라고 불립니다. 서주와 여러 왈츠 묶음, 코다를 결합해 춤곡을 독립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작품으로 확장했습니다.
Q.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초연은 정말 실패했나요?
아닙니다. 빈 슈트라우스 연구소가 확인한 자료에 따르면 1867년 2월 15일 열린 합창판 초연은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당시 신문도 이 작품을 ‘히트작’으로 평가했습니다. 관현악판은 같은 해 3월 10일 빈에서 처음 연주되었습니다.
Q.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정말 춤을 추지 못했나요?
평생 춤을 전혀 추지 못했다는 통설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1847년 젊은 슈트라우스가 세믈린의 사교 모임에서 친구들과 춤췄다는 동시대인의 회고 편지가 남아 있습니다.
Q.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오페레타를 몇 편 남겼나요?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1871년 이후 17편의 무대 작품을 썼으며, 그중 15편이 오페레타입니다. 나머지는 오페라와 발레 작품입니다.
Q.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어떤 작품부터 들으면 좋을까요?
처음에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듣고, 이어 〈박쥐〉 서곡과 〈황제 왈츠〉를 들으면 좋습니다. 세 작품은 관현악 왈츠와 오페레타, 후기 양식의 차이를 가장 쉽게 보여줍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역사적 의미는 왈츠를 새로 발명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미 빈에서 춤추고 있던 음악을 더 넓은 관현악의 공간으로 옮기고, 극장과 국제 연주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형식으로 완성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의 음악은 듣는 순간 쉽고 밝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서주가 본곡을 준비하는 방식, 여러 왈츠가 이어지는 순서, 코다에서 기억을 되돌리는 구조를 따라가면 그 밝음이 치밀한 설계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오늘은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의 첫 선율이 아니라, 그 선율이 나타나기 전의 조용한 떨림부터 들어보십시오. 그 짧은 기다림 속에 무도회 음악을 예술 작품으로 바꾼 슈트라우스의 방식이 담겨 있습니다.
음반과 영상의 제공 여부는 음악 서비스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와 〈박쥐〉를 비롯한 개별 작품 해설은 이후 내부링크로 연결할 예정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