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트라우스 일가는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빈 사회의 대중적 인기를 누렸던 음악 가문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Johann Strauss Sir.,1804-1849)와 그의 아내 안나(Anna Streim, 1801-1870) 사이에는 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태어난 해에 사망한 아들을 제외한 세 아들은 모두 음악가로 활동하였는데, 2대에 걸쳐 슈트라우스 일가 4명이 남긴 춤곡은 무려 1000여 곡에 달한다. 그중 장남인 요한 슈트라우스 2세(Johann Strauss Jr., 1825-1899)가 아버지를 뛰어넘어 음악가로 세계적인 명성을 누렸다.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작곡가, 지휘자로도 활동하였다. 그는 빈 왈츠와 시골풍의 독일 춤곡을 연주하던 라너 사중주단의 멤버로 활동하다가 1825년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창단하였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직접 지휘도 하는 그의 악단은 인기를 얻었고, 같은 해 첫아이가 태어나자 그는 아들에게 자신과 똑같은 이름을 지어주어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되었다. 아이는 여섯 살부터 오선지에 악보를 그려가며 범상치 않은 작곡 솜씨를 드러냈다. 하지만 아버지 요한은 장남 뿐만 아니라 모든 아들들이 자신처럼 음악가가 되는 것을 반대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음악에 소질이 있는 아들을 위해 아버지 모르게 음악 공부를 지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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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슈트라우스 2세 (출처 : 브리태니커) |
요한 2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은행원이 되었지만 외도로 아버지가 출가해 버린 후 직장을 그만두고 정식으로 음악공부를 시작한다. 그는 1844년 10월 15일에 돔마이어 카지노(Dommayer’s Casino)에서 아버지 몰래 소규모 오케스트라를 구성하여 데뷔 연주회를 갖게 되었는데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지방 신문에는 아버지 슈트라우스의 시대가 저물고 아들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밤에는 악단을 지휘하고, 낮에는 새 곡을 작곡하느라 여념이 없는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는 아들의 악단이 활동하지 못하도록 지방 관청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관청은 아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1849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악단까지 흡수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신처럼 아버지 몰래 음악을 배워 왔던 동생 요제프 슈트라우스와 에두아르트 슈트라우스까지 끌어들여 빈의 사교계를 석권했다.
1860년대에는 황족과 귀족들도 슈트라우스의 재능을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거물급 인사가 되었고, 1863년에 오랫동안 노려왔던 궁정무도회 감독에 임명되었다. 이후 11년간 궁정에서 공연하며 유럽과 러시아에서 다수의 연주 여행을 다니며 200곡이 넘는 곡을 작곡하였다.
1870년 동생 요제프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뒤에는 무도회 출연 횟수를 줄이고, 빈의 극장주들과 대본 작가들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에게 오페레타 작곡을 권유하기 시작했다. 그는 프랑스의 자크 오펜바흐가 석권하던 장르인 오페레타 작곡에 뛰어들어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오페레타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특히 <박쥐>는 전례 없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며 오페레타의 동의어가 되다시피 했다. 기존의 오페레타를 훨씬 뛰어넘는 놀라운 구성력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대규모 교향곡에 알맞은 관현악법으로 진행되는 활기찬 춤곡과 이해하기 쉬운 선율, 본질적인 오페라 장르의 화려함 등을 갖추고 있다.
슈트라우스는 세 번 결혼했는데, 자녀는 하나도 없었다. 1862년에 맞이한 첫 아내인 헨리에타 트레프츠는 10살이나 나이가 많은 오페라 가수였다. 그녀가 1878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자 그는 같은 해 서른 살 가량 어린 여배우 안젤리카 디트리히와 재혼했는데, 그녀는 빈 극장 감독과 사랑에 빠져 결혼생활이 파탄에 이른다. 그후 슈트라우스는 아델레 도이치와 재혼했는데, 그녀와 결혼을 위해 독일 국적을 취득하고 종교도 루터교로 바꾸었다. 그녀는 그의 음악 활동에 대한 좋은 조언자이자 일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왈츠 음악을 연주하고 작곡하였기 때문에 춤 실력이 탁월하고 바람둥이로 상상하기 쉽다. 실제로 그는 가정적이고 금욕적인 성격이었으며, 왈츠의 왕이 정작 왈츠를 추지 못했다는 일화가 진해진다. 성격적으로도 그는 비만 오면 우울해지고 주변에서 안 좋은 소리만 들어도 창작력이 떨어지는 소심한 편이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폐렴으로 사망할 때까지 18편의 오페레타와 500여 곡의 춤곡·행진곡 등을 작곡하였다. 그의 장례는 오스트리아 전체가 국상 분위기였을 정도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그의 유해는 빈 중앙묘지에 안장되었고, 비엔나 시립공원에는 그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황금 기념상이 설치되었다. 슈트라우스의 데뷔 40주년인 1884년에는 그의 예술적 업적과 공헌에 대한 포상으로 빈 시장으로부터 ‘세금 면제권’을 수여 받기도 하였다.
그는 '왈츠의 아버지'로 불렸던 아버지를 뛰어넘어 사람들로부터 '왈츠의 왕'이라는 애칭을 얻게 되었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는 대중적이면서도 예술적인 완성도가 높다. 단순한 '쿵짝짝'이 아닌 살짝 저는 듯한 4분의 3박자 리듬의 스타일을 만들어냈는데 이를 두고 특별히 '빈 왈츠'라 칭할 정도로 특별한 업적을 남겼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왈츠 170여 곡 외에도 폴카 141곡, 폴카마주르카 31곡, 콰드리유 69곡, 행진곡 47곡 등 800여 개의 다양한 춤곡을 작곡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