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작곡가, 바이올린 연주자, 오르간 연주자 페르골레시(Giovanni Battista Pergolesi, 1710–1736)의 짧은 생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그는 이탈리아 중부 마르케 (Marche) 지역의 작은 마을 예시(Jesi)에서 농업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가대 지휘자였던 프란체스코 산티니에게 초보적인 음악교육을 받았다. 그의 뛰어난 재능에 대한 소문을 듣고 피아네티(Pianetti) 후작의 후원으로 그는 나폴리의 ‘데이 포베리 디 제수 크리스토 음악원에 들어가 프란체스코 듀란테(Francesco Durante)와 가에타노 그레코(Gaetano Greco)의 지도 아래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나폴리에서 페르골레시는 바이올린 연주자로 큰 명성을 얻었고, 초기의 작곡은 주로 종교음악이었다. 1732년 나폴리 스틸리아노(Stilliano) 공작의 악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오페라 부파 <연애하는 수도사 Lo frate nnammorato>를 발표하여 큰 성공을 거두워게 된다. 그해 12월에는 나폴리를 엄습한 대지진 이후 시 당국의 의뢰로 작곡한 <미사곡 F장조>를 통해 그의 명성은 확고하게 굳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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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골레시의 모습 |
1733년 성 바르톨로메오 극장에서 오페라 세리아 <자부심이 강한 죄수 (Il Prigioniero Superbo>를 발표하였으나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오페라의 막과 막 사이에 삽입된 <마님이 된 하녀 a Serva Padrona>를 통해 그의 이름은 전 유럽에 알려지게 된다. 특히 이 작품은 페르골레시 사후 1752년 파리의 이탈리아 극장에서의 공연을 계기로 이른바 ‘부퐁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부퐁 논쟁이란 프랑스 궁정 오페라가 우월하냐,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가 더 낫냐는 논쟁이었는데, 2년에 걸쳐 진행된 논쟁은 이탈리아 측의 패배로 끝났다. 부퐁 논쟁은 역설적으로 프랑스 희가극인 오페라 코미크의 탄생에 결정적인 자극이 되었고, 이 사건 이후 소개된 페르골레시의 최후의 유작인 <스타바르 마테르 (Slabat Mater>는 프랑스에서 거의 신격화되었다.
<자랑스러운 죄수>이란 작품 이후 페르골레시가 발표한 작품은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지 못했다. 1734년 그는 24세의 젊은 나이로 나폴리시의 예배당 악장 대리가 되었다. 하지만 1735년경부터 지병인 폐병이 악화 되어 의사의 권유로 1736년 나폴리 근처 포추올리(Pozzuoli)의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으로 요양을 갔다.
그곳에서 폐를 웅크려 잡고 피를 토하듯 써내려간 <스타바트 마테르 Stabat Mater(슬픔의 성모)>를 완성했다. 십자가 앞에서의 성모 마리아의 슬픔을 표현한 수많은 <스타바트 마테르>곡들 가운데 페르골레시의 곡이 가장 비극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한 곡으로 평가받고 있다.
26세에 생을 마감하자 그의 유해는 대성당 옆의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가 사망한 지 한 세기 지난 뒤에 포추올리 대성당에 그의 묘비가 세워졌다.
페르골레시의 작품은 당대 바로크 양식의 장대하고 무거운 음조와는 구별되는 단순하고 우아하고 매우 자연스러운 음악양식을 채택하고 있다. 그는 장중한 바로크 음악 양식으로부터 명쾌한 고전파 양식으로 전환하는 시기에 활약한 단명한 천재적 작곡가로 오페라 부파의 초기 역사에 있어 중요한 작곡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