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최첨단을 달리는 전위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 존 케이지(John Cage, 1912-1992)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발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존 케이지 생활은 불안정한 시기를 겪었다. 아버지가 직장을 자주 옮겨야 했고 또한 자주 이사를 했다. 그의 생활은 고독했고 친구가 많이 없었다. 게다가 부모가 자주 다툰 탓에 어린 시절의 케이지는 내성적이었고 남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반항적으로 변화하였다.
그의 음악가 인생은 이모에게 피아노를 배우면서 시작되었다. 고등학교를 수석졸업한 케이지는 클레어몬트의 포모나 칼리지에 입학했지만 2년간 다니다가 중퇴를 하고 1931년 작곡가가 되기 위해 파리로 건너갔다. 정작 파리에서는 건축가 밑에서 건축을 공부한 후 음악으로 진로를 변경한 뒤 미국으로 돌아왔다.
나치 독일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쇤베르크(Arnold Schoenberg, 1874-1951)에게 1936-1937년 대위법과 화성 등을 배웠다. 쇤베르크는 케이지는 작곡가가 아니라 발명가라고 언급할 정도로 평가가 좋지 않았다. 화성학에 대한 의견 차이로 두 사람의 관계를 끝이 났다.
1938년에 케이지는 코니쉬 스쿨(Cornish School)에서 댄스 부서의 반주 및 타악기 강사로 고용되었다. 이때의 경험은 그에게 타악기의 창조를 탐구할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를 제공했고, 첫 번째 피아노 작품 <Bacchanale>을 실험할 수 있도록 했다. 그 후 10년 동안 케이지는 몇 개의 prepared 피아노 작품을 창작했고 "음악 예술의 범위 확장"이라는 국제 예술 아카데미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52년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투도르(David Tudor)의 연주로 미국에서 처음으로 작품 <4분 33초>를 공연했다. 이 곡이 발표되자 불쾌하다며 화를 내는 사람도, 획기적이라고 극찬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케이지의 음악은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같은 해 미국 최초의 테이프음악 제작 단체인 마그네틱 테이프를 위한 음악사업(Project of Music for Magnetic Tape)을 조직하였고 또한 커닝엄 무용단과 함께 그의 작품 <극장소품 Theatre Piece>을 공연하였다. 이 작품은 미국 최초의 해프닝인 동시에 혼합미디어 이벤트로 손꼽힌다.
1956-1969년까지 다양한 실험을 통한 아방가르드적 작품을 집중적으로 발표하였고, 1984년에는 백남준의 비디오 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에 출연하면서 백남준의 작품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1969년을 계기로 다시 전통적 작곡 영역으로 돌아오게 되나 1992년 뉴욕에서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케이지는 실험음악을 통해 예술의 영역에서 많은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의 연구에서도 독창적인 정신을 지닌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우연성에 기초한 작곡법, 조작된 피아노 기법, 도안 악보 등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작품을 잇달아 발표하며 20세기 음악사에 혁신가로 이름을 남겼다.
1978년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정된 케이지는 1981년과 1982년 뉴욕 시장으로 부터 "예술 및 문화 명예상"을 수상했으며, 1982년 프랑스 정부는 그에게 최고상인 문학예술명예훈장을 수여했다.
케이지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1952년에 발표된 <4분 33초>가 꼽힌다. 무대에 있는 연주자가 4분 33초 동안 전혀 악기를 연주하지 않고 침묵한다. 하지만 연주가 없어도 콘서트홀에는 청중이 움직일 때 옷 스치는 소리, 숨소리 등 여러 소리가 존재한다. 케이지는 의도적인 음을 미리 디자인하지 않았고 전체 작품이 우연성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고 했다.
오르간곡 <최대한 느리게>는 제목에서 보듯 가능한 한 천천히 연주하는 곡이다. 독일 할슈타트에 있는 교회에서 2001년에 연주가 시작되었고 2604년에 끝날 예정이다. 사람이 계속 연주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하루 24시간 내내 기계가 자동으로 연주하며 1년에 한두 번 소리가 바뀐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