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당신의 친구가 엄청난 재능을 가졌지만 너무 가난해서 꿈을 포기할 위기라면 어떻게 하시겠는가? 여기, 한 천재 음악가를 위해 기꺼이 '덕질'과 후원을 자처한 19세기 비엔나의 친구들이 있다.
임시 교사로 일하다 음악에 전념하기로 한 프란츠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1797–1828)는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며 작곡에 몰두했습니다. 그의 벗들은 슈베르트가 온전히 창작에 집중할 수 있도록 사교 살롱 형태의 모임 ‘슈베르티아데(Schubertiade)’를 조직했고, 여기서 신작 가곡과 실내악이 빈의 지성인들 앞에 처음 소개되곤 했습니다.
1. 누가, 어디서, 어떻게?
- 기간 : 대략 1821–1823년을 중심으로 1820년대 전반에 가장 활발
- 장소 : 슈베르트의 후원자·친구들의 살롱(개인 저택, 서재, 음악실)
- 형식 : 시·문학 토론 → 슈베르트 신작 발표 → 가곡·실내악 연주
2. 핵심 인물들
슈베르트의 음악을 세상과 연결해 준 핵심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 미하엘 포글(바리톤) : 공개 연주에서 슈베르트 가곡을 널리 알린 주역
- 프란츠 폰 쇼버(시인) : 슈베르트에게 창작의 안식처를 제공한 가장 친한 친구이자, 그의 삶에 치명적인 그림자를 드리운 인물 ---> 자세한 내용 링크
- 요한 마일호퍼(시인) : 가사·사상 측면에서 철학적 자극을 제공
- 에두아르트 바우에른펠트, 프란츠 그릴파르처(극작가) : 당대 문학계의 든든한 우군
- 모리츠 폰 슈빈트(화가) : 슈베르트와 모임의 분위기를 시각적으로 기록
- 라흐너, 휘텐브렌너 등 음악가·지인들: 연주 및 편곡·연습을 지원


3. 음악사적 중요성
- 살롱 네트워크의 힘 : 궁정·오페라 중심 공연장에서 벗어나 사적 살롱이 신작 유통의 허브로 기능
- 장르의 확장 : 가곡(Lied)과 실내악이 소수 청중 앞에서 정밀하게 시험·세공되며 레퍼토리로 정착
- 창작의 안전망 : 생활·연습·연주를 공동체가 분담, 슈베르트의 폭발적 창작을 실질적으로 뒷받침
4. 당시의 슈베르트와 그의 친구들
슈베르트는 피아노를 직접 구입하기 어려워 지인들의 살롱 피아노를 빌려 쓰곤 했다. 큰 공개 연주회 경험은 드물었고 출판 계약에서도 계산적이지 못해 늘 빠듯했지만, 친구들은 원고를 돌보고 연주회를 주선하며 그의 삶을 지탱했다.
5. 오늘의 슈베르티아데
슈베르티아데는 단순한 음악회가 아니었다. 최초의 '하우스 콘서트'이자, 재능 있는 예술가를 지키려는 자발적인 '팬덤 문화'의 시작이었으며, 팍팍한 삶 속에서도 예술을 통해 위로받고자 했던 19세기 비엔나 낭만주의 시대의 살롱 문화 그 자체였다.
‘슈베르티아데’라는 이름은 이제 전 세계의 슈베르트 동호회·협회 모임이나 축제를 가리키는 보통명사처럼 쓰인다. 특히 오스트리아 포어아를베르크 지역의 현대 슈베르티아데 축제는 가곡·실내악 중심의 프로그램으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슈베르트의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작은 ‘슈베르티아데’를 이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