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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베르티아데(Schubertiade)

  임시 교사로 일하다가 음악에 전념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둔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1797-1828)는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며 작곡을 하였다. 그의 친구들은 슈베르트가 작곡에 몰두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서 슈베르티아데라는 사교 모임을 가졌다. 슈베르티아데는 슈베르트의 밤이라는 뜻으로 1821~1823년경 결성되었다. 모임은 주로 슈베르트의 부유한 친구들이나 음악 후원자들의 집에서 열렸다. 시와 문학, 미술에 대한 토론을 하고 슈베르트의 신곡을 발표하기도 했고 오로지 슈베르트의 곡만 연주했다.

 

  슈베르트의 친구인 법률가 슈파운은 천재 예술가를 위해 빈에서 자주 어울리는 예술인 친구들과 이 모임을 만들었다. 이 그룹에는 슈파운, 시인 쇼버(F. v. Schober), 마일호퍼(J. Mayrhofer), 바우에른펠트(E. Bauernfeld), 그릴파르처(F. Grillparzer), 존 라이트너(J. v. Sonnleitner), 화가 슈빈트(M. v. Schwind) 및 음악가 휘텐브렌너(J. Huttenbrenner), 라흐너(F. Lachner), 성악가 미하엘 포글 등 다양한 인사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이들 대부분이 빈 문화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인물이었고, 슈베르트의 음악을 세상에 알리고 그가 작곡에 전념할 수 있도록 생활을 뒷받침해 주었다.

 

슈베르티아데 모임을 보여주는 흑백 이미지
 슈베르티아데(Schubertiade)

슈베르티아데 모임을 보여주는 칼라 이미지
 슈베르티아데(Schubertiade)


  무엇보다도 슈베르트의 천재성을 세상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친구는 당대 빈 최고의 바리톤 가수 포글이었다. 그는 공개 연주회에서 당시 무명이던 슈베르트의 작품을 노래함으로써 슈베르트의 가곡을 널리 알렸다. 슈베르트를 처음 만났을 때 이미 50세였던 포글은 21세의 젊은 슈베르트에게 인격적으로나 교양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시인 마일호퍼와의 교제는 슈베르트의 작품에 한층 철학적인 영향을 미쳤다. 슈베르트는 자신의 가곡에 붙일 시를 찾고 있었는데 친구들은 그의 요구에 따라 항상 최근에 간행된 시집이나 번역시들을 소개해 주곤 했다.

 

  마일호퍼 이후 슈파운이 슈베르트에게 소개한 새 친구는 쇼버였다. 쇼버와 알게 된 슈베르트는 교사직을 그만두고 쇼버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는데 친절한 쇼버 가족의 보살핌 속에서 많은 작품을 썼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방탕한 생활을 즐겼던 쇼버와의 친분은 훗날 슈베르트가 매독에 걸리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슈베르트는 피아노를 구입할 수 없어서 필요할 때면 친구 집의 피아노나 salon piano를 빌려야 했으며, 평생 큰 연주회 한 번 제대로 열지 못했고, 출판사와 계약할 때도 계산적이지 못하였다. 그의 음악적 가치는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인정을 받았기에 항상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사랑에도 실패하여 가정을 이루지 못했다. 그럼에도 자기를 사랑하는 친구들이 있었기에 외롭지만은 않았다. 슈베르트의 많은 가곡과 실내악은 슈베르티아데와 같은 모임을 염두에 두고 작곡되었고, 슈베르트는 이를 통해 계속적으로 후원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현대 슈베르티아데가 여러 곳에서 열리는데, 가장 유명한 곳은 오스트리아의 포어아를베르크(Vorarlberg)에서 매년 열리는 슈베르티아데 축제이다. 슈베르티아데는 그 의미가 보다 확대되어 전 세계 슈베르트 음악동호회 또는 슈베르트 협회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나 또한 슈베르트의 음악을 좋아하기에 슈베르티아데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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