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1월 3일 밤, 스물다섯 살의 브로드웨이 노래 작곡가가 당구를 치고 있었습니다. 형 아이라가 다음 날 자 뉴욕 트리뷴을 들고 와 기사 하나를 읽어 주었습니다. 조지 거슈윈이 폴 화이트먼의 공연을 위해 재즈 협주곡을 쓰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거슈윈은 그런 곡을 쓰기로 한 적이 없었습니다. 앞서 제안을 받았지만 물러섰던 참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다섯 주가 조금 넘은 1924년 2월 12일, 뉴욕 에올리언 홀에서 클라리넷 하나가 낮은 음에서 미끄러지듯 솟구치며 《랩소디 인 블루》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글은 한 가지 질문을 따라갑니다. 거슈윈은 정말 양쪽 모두에게 거부당한 작곡가였는가. 클래식도 재즈도 그를 자기 쪽 사람으로 세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떠받치는 대표적인 장면 두 개를 실제 기록으로 되짚어 보면, 알려진 것과 다른 모습이 나옵니다.
• 인물: 조지 거슈윈 (George Gershwin, 1898~1937). 본명은 제이컵 거슈윈(Jacob Gershwine)입니다
• 한 줄 정의: 브로드웨이의 노래 작곡가에서 콘서트홀과 오페라 무대까지 건너간 미국 작곡가
• 출생: 1898년 9월 26일, 뉴욕 브루클린
• 활동: 작곡(관현악·오페라·뮤지컬·대중가요)과 피아노 연주. 뉴욕, 파리, 로스앤젤레스
• 대표작: 《랩소디 인 블루》, 《피아노 협주곡 F장조》, 《파리의 아메리카인》, 《포기와 베스》
• 별세: 1937년 7월 11일, 로스앤젤레스
처음 들을 작품
• 처음 듣기 좋은 곡은 《랩소디 인 블루》입니다. 클라리넷이 낮은 음에서 미끄러져 올라오는 도입에서 시작해 빠른 당김음 구간과 폭넓은 서정 주제가 번갈아 나오는 이 곡에서, 거슈윈이 대중음악의 리듬과 콘서트 음악의 규모를 한 작품 안에서 어떻게 엮었는지 들을 수 있습니다.
• 음반을 고른다면 레너드 번스타인이 피아노와 지휘를 함께 맡아 1959년에 녹음한 컬럼비아반이 오래 사랑받는 입문 선택지입니다.
형성기, 두 개의 학교를 동시에 다닌 소년
조지 거슈윈은 1898년 9월 26일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제이컵 거슈윈이었습니다. 부모는 러시아 제국에서 건너온 유대계 이민자였고, 아버지 모리스는 사업을 바꿀 때마다 살 곳을 옮겼습니다. 가정을 단순히 극빈층으로 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거슈윈이 음악에 끌린 계기로는 열 살 무렵 친구 맥시 로젠츠바이크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은 일이 널리 전합니다.
1910년경 형 아이라를 위해 집에 들인 피아노 앞에 정작 앉은 사람은 동생이었습니다. 여기서부터 그는 서로 다른 두 학교를 동시에 다니게 됩니다.
첫 번째 학교는 거리였습니다. 열다섯 살 무렵 학교를 떠난 그는 1914년 5월 음악 출판사 제롬 H. 레믹에서 송 플러거(song plugger)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막연한 거리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출판사의 새 노래를 손님 앞에서 하루 종일 연주해 악보 판매를 돕는 직업이었습니다. 래그타임의 당김음과 블루스의 굴절된 음정이 그의 손에 새겨진 시기가 이때입니다.
두 번째 학교는 방향이 달랐습니다. 같은 시기 그는 1913년경부터 찰스 햄비처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에드워드 킬레니와 루빈 골드마크에게 이론과 작곡을 배웠습니다.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거슈윈은 정식 음악 교육을 받지 못한 작곡가가 아닙니다. 학교를 일찍 떠난 것과 음악을 배우지 않은 것은 다른 이야기이며, 이 구분은 뒤에 나올 논쟁을 이해하는 데 그대로 쓰입니다. 거리의 리듬과 유럽식 화성이 한 사람 안에서 나란히 자랐다는 사실이야말로, 훗날 양쪽 진영이 그를 어떻게 볼지 결정한 조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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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 거슈윈 |
거리의 학교가 먼저 결실을 냈습니다. 1919년에 쓴 《Swanee》는 어빙 시저가 가사를 붙인 노래로, 그해 10월 24일 캐피털 극장에서 막을 올린 레뷔 《Demi-Tasse》에서 처음 불렸습니다. 반응은 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거슈윈이 어느 파티에서 이 곡을 치는 것을 가수 알 졸슨이 들었고, 졸슨이 자신이 출연 중이던 흥행작 《Sinbad》에 이 노래를 넣은 뒤 1920년 1월 컬럼비아에 녹음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악보는 100만 부가 팔렸고 음반은 약 200만 장으로 추산됩니다. 스물한 살의 작곡가에게 브로드웨이에 안주할 이유가 생긴 셈입니다. 그는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신문 기사에서 초연까지 다섯 주, 1924년의 전환점
거슈윈의 이름을 콘서트홀로 옮겨 놓은 것은 1924년의 《랩소디 인 블루》입니다. 시작은 본인의 결심이 아니라 신문이었습니다. 1924년 1월 4일 자 뉴욕 트리뷴에 실린 무기명 기사 What Is American Music?이 거슈윈이 화이트먼의 공연을 위해 재즈 협주곡을 쓰는 중이라고 알렸고, 아이라가 전날 밤 당구장에서 그 기사를 동생에게 읽어 주었습니다. 기사는 사실이 아니었지만, 기사가 나온 이상 곡은 존재해야 했습니다.
남은 시간은 다섯 주 남짓이었습니다. 화이트먼 악단에는 이미 페르디 그로페를 중심으로 한 편곡 체계가 있었으므로, 거슈윈은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축약 총보에 집중하고 관현악은 그로페에게 맡기는 분업을 택했습니다. 그로페는 열흘 만에 관현악보를 완성했고, 그날이 초연 여드레 전인 2월 4일이었습니다.
이때 거슈윈이 쓴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자필 총보는 지금 미국 의회도서관에 있습니다. 연필로 쓰고 붉은 연필과 푸른 연필로 덧쓴 62쪽짜리 악보이며, 기보는 56쪽에서 끝나고 나머지는 비어 있습니다. 파란 가죽으로 장정된 이 악보의 첫머리에 적힌 날짜가 1924년 1월 7일입니다. 신문 기사가 나온 지 사흘 뒤입니다. 다만 도서관은 목록에 한 가지 단서를 달아 두었습니다. 첫머리에 적힌 날짜 가운데 날짜의 일(日)은 나중에 덧붙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1953년 10월 16일 어머니 로즈 거슈윈의 유산에서 기증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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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 중반 피아노 앞의 조지 거슈윈 |
1924년 2월 12일 에올리언 홀에서 열린 공연의 제목은 《현대 음악의 실험(An Experiment in Modern Music)》이었습니다. 스물여섯 곡이 이어지는 긴 프로그램이었고, 《랩소디 인 블루》는 끝에서 두 번째였습니다. 바로 뒤는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 1번이었습니다. 객석에는 작가 카를 반 벡텐, 성악가 마르게리트 달바레스, 작곡가 빅터 허버트, 지휘자 월터 댐로시, 그리고 스트라이드 피아노의 대가 윌리 더 라이언 스미스가 앉아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아는 그 도입부는 초연 준비 과정에서 생겼습니다. 악보에는 클라리넷이 열일곱 개의 음을 하나씩 밟고 올라가도록 적혀 있었는데, 리허설에서 클라리넷 주자 로스 고먼이 그 대목을 장난처럼 한 번 미끄러뜨려 올라갔습니다. 거슈윈은 그것을 그대로 채택했고, 오히려 더 울부짖듯 연주해 달라고 주문했습니다. 악보에 적힌 음과 오늘날 익숙한 글리산도의 역사는 이렇게 나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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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랩소디 인 블루》 악보 표지 |
이 공연이 만든 가장 중요한 결과는 평이 아니라 한 통의 제안이었습니다. 객석에 있던 월터 댐로시가 이튿날 거슈윈에게 연락해 뉴욕 심포니를 위한 본격 피아노 협주곡을 위촉한 것입니다.
거슈윈의 어법은 언제, 왜 바뀌었는가
거슈윈의 음악은 대략 세 번 성격을 바꿉니다. 연대를 기계적으로 삼등분한 것이 아니라, 그가 자기 음악의 어느 부분까지 자기 손으로 만들었는가를 기준으로 나눈 구분입니다.
남의 형식 안에서 (1914~1923)
틴 팬 앨리의 표준 형식이 출발점이었습니다. 서른두 마디 안에서 같은 악구가 두 번 나오고 다른 악구가 끼어든 뒤 처음으로 돌아오는 구조, 한 번 듣고 따라 부를 수 있는 선율이 요구되는 세계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노래에도 장조와 단조 사이를 미끄러지는 블루스 특유의 음정과, 정박을 비껴 들어가는 당김음이 이미 들어 있습니다. 어법은 있었고 형식이 남의 것이었습니다.
남의 손을 빌린 뒤 자기 손으로 (1924~1928)
《랩소디 인 블루》는 거슈윈의 악상이되 관현악의 옷은 그로페가 입힌 작품입니다. 이 사실이 이후 평생 그를 따라다니는 물음의 근거가 됩니다. 그런데 그다음이 중요합니다.
1925년 12월 3일, 카네기홀에서 월터 댐로시가 지휘하는 뉴욕 심포니와 함께 거슈윈이 피아노를 맡아 《피아노 협주곡 F장조》가 초연되었습니다. 이번에는 관현악까지 그가 직접 썼습니다. 에올리언 홀에서 카네기홀까지 스물두 달이 걸렸고, 그 사이에 그는 남에게 맡겼던 영역을 자기 것으로 가져왔습니다.
1928년에는 파리를 방문했고, 그해 12월 13일 역시 카네기홀에서 댐로시가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닉이 《파리의 아메리카인》을 초연했습니다. 관현악은 초연 4주가 채 안 남은 11월 18일에 완성되었습니다. 거슈윈은 이 곡의 의도를 직접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파리를 걸어 다니는 한 미국인이 거리의 온갖 소리를 듣고 그 도시의 공기를 흡수하는 인상을 그리는 것이 목적이라는 취지였습니다.
《파리의 아메리카인》에 나오는 자동차 경적 소리는 효과음을 녹음해 넣은 것이 아니라, 거슈윈이 파리에서 택시 경적 네 개를 실제로 가져와 편성에 넣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경적들이 어떤 음을 내야 하는지를 두고 오래된 혼선이 있습니다. 총보에는 A, B, C, D라고 적혀 있지만 이는 악기에 붙은 이름표에 가깝고, 거슈윈이 의도한 음높이는 A♭4, B♭4, D5, A3였던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오늘날 들리는 연주 상당수는 작곡가가 생각한 것과 다른 음의 경적을 울리고 있습니다. 여러 연주를 비교해 들을 때 이 네 음만 따로 좇아 보면 같은 곡이 꽤 다르게 들립니다.
오페라라는 다른 그릇으로 (1934~1935)
마지막 변화는 규모가 아니라 장르였습니다. 1934년 여름 거슈윈은 소설가 듀보스 헤이워드의 안내로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폴리 해안 지역에 머물며 그곳 흑인 공동체의 영가와 일상의 음악을 들었습니다. 그 결과가 1935년의 《포기와 베스》입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앞선 실험을 오페라 전막으로 확장합니다. 영가와 블루스, 가스펠의 어법을 장면과 인물의 음악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통합했습니다. 거슈윈은 이 작품을 스스로 민속 오페라(folk opera)라고 불렀고, 1935년 뉴욕 타임스에 쓴 글에서 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포기와 베스》는 민중의 이야기이며 그 안의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민속 음악을 노래할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여는 노래 《서머타임(Summertime)》이 이 접근을 가장 잘 보여 줍니다. 블루스처럼 들리지만 선율이 놓이는 방식은 오페라 아리아에 가깝고, 자장가처럼 단순하게 시작하지만 화성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노래가 오늘날까지 재즈, 팝, 오페라 무대에서 제각각 불리면서도 어느 쪽에서도 이물감이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거슈윈을 만든 사람들
거슈윈의 작업은 거의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였습니다. 그중 몇 사람은 그의 음악 자체를 바꿔 놓았습니다.
아이라 거슈윈은 두 살 위의 형이자 평생의 작사가였습니다. 1924년부터 동생이 세상을 떠난 1937년까지 사실상 모든 노래의 가사가 그의 손에서 나왔습니다. 작업 순서는 대개 선율이 먼저였고, 형은 그 굴곡과 미국식 영어의 강세가 어긋나지 않도록 말을 붙였습니다. 동생이 떠난 뒤에도 그는 남아 있던 선율에 새 가사를 붙이는 일을 오래 이어 갔습니다.
폴 화이트먼은 스스로를 재즈의 왕이라 부른 밴드 리더였고, 《랩소디 인 블루》가 세상에 나온 무대를 기획한 사람입니다. 페르디 그로페는 그 곡에 관현악의 옷을 입혔습니다.
월터 댐로시는 이 글에서 세 번 등장합니다. 1924년 에올리언 홀 객석에 앉아 있었고, 이튿날 《피아노 협주곡 F장조》를 위촉했으며, 1928년 《파리의 아메리카인》 초연을 지휘했습니다. 거슈윈이 콘서트 음악 쪽으로 건너가는 다리를 실제로 놓아 준 사람입니다.
듀보스 헤이워드는 《포기와 베스》의 원작 소설과 대본을 썼고 아이라와 함께 가사를 맡았습니다. 초연에서 베스 역은 소프라노 앤 브라운이 노래했습니다.
모리스 라벨과의 만남은 흔히 파리 이야기로 전하지만,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자리는 뉴욕이었습니다. 1928년 3월 7일, 라벨의 쉰세 번째 생일을 맞아 메조소프라노 에바 고티에가 연 파티였습니다. 라벨이 내건 요청은 거슈윈을 만나 《랩소디 인 블루》를 직접 듣는 것이었고, 거슈윈은 그 자리에서 이 곡과 《The Man I Love》를 연주했습니다. 거슈윈은 라벨에게 배우기를 청했고 라벨은 정중히 물러섰습니다. 고티에의 회고에 따르면 라벨은 자신이 가르치면 거슈윈이 나쁜 라벨을 쓰게 되고 선율과 즉흥의 재능을 잃게 되리라고 판단했습니다. 고티에는 라벨이 놀란 지점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거슈윈이 지독히 어려운 기교를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솜씨, 복잡한 리듬을 엮어 내는 재간, 그리고 선율의 재능이었다는 것입니다. 흔히 인용되는 일류 거슈윈과 이류 라벨이라는 문구는 전하는 판본마다 표현이 달라 따옴표로 못 박기는 어렵습니다. 라벨의 생애와 음악을 함께 보면 두 사람이 서로에게서 무엇을 보았는지 더 선명해집니다.
아르놀트 쇤베르크와는 1930년대 후반 할리우드에서 이웃으로 지내며 테니스를 쳤습니다. 거슈윈은 그에게도 작곡을 배우고 싶다고 청했고, 쇤베르크의 대답은 라벨과 결이 같았습니다. 자신이 가르치면 나쁜 쇤베르크를 만들 뿐이며 당신은 이미 충분히 좋은 거슈윈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거절은 뒤에서 다시 이야기할 대목의 복선이기도 합니다.
당대의 평가와 후대의 재평가
《랩소디 인 블루》는 성공했지만 비평이 일제히 환영한 것은 아닙니다. 초연 다음 날인 1924년 2월 13일 아침 뉴욕 트리뷴에 실린 로런스 길먼의 글은 특히 신랄했습니다. 선율이 얼마나 진부하고 힘없고 상투적인지, 화성 처리가 부산스럽고 무익한 대위법의 외피를 쓴 채 얼마나 감상적이고 공허한지를 따져 물으며, 그 선율과 화성의 생기 없음을 두고 파생적이고 낡았으며 무표정하다고 적었습니다. 비판의 핵심은 재즈를 썼다는 사실이 아니라 작법 자체가 얄팍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반대편에서는 미국 음악이 드디어 자기 언어를 찾았다는 찬사가 나왔습니다. 두 반응은 방향이 정반대였지만 전제는 같았습니다. 이 음악은 지금까지의 분류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장 자주 인용되는 두 개의 거부, 그리고 기록
거슈윈이 양쪽에서 밀려났다는 이야기를 할 때 거의 언제나 두 장면이 함께 인용됩니다. 하나는 라벨의 거절이고, 다른 하나는 듀크 엘링턴이 《포기와 베스》를 혹평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두 장면 모두 실제 기록을 열어 보면 통설과 다릅니다.
라벨의 거절은 앞에서 본 대로 배척이 아니라 상찬에 가까웠습니다. 문제는 두 번째입니다.
엘링턴의 혹평으로 널리 인용되는 문구는 거슈윈의 램프블랙 흑인성을 이제는 걷어낼 때가 되었다는 표현입니다. 이 문구가 실린 곳은 1935년 12월에 나온 잡지 《뉴 시어터》 2권 12호에 실린 에드워드 모로의 기사입니다. 그런데 원문을 보면 이 문장은 엘링턴의 발언 부분이 아니라 기자 모로가 자기 목소리로 쓴 마무리 단락에 들어 있습니다. 엘링턴은 기사가 나온 직후 그 기사와 거리를 두었습니다. 다시 말해 지난 90년 동안 거슈윈 비판의 대표 증거로 인용되어 온 문장은 엘링턴이 한 말이 아닙니다.
이 정정은 《포기와 베스》를 둘러싼 논쟁을 없애지 않습니다. 논쟁은 그대로 남습니다. 다만 논쟁의 근거 하나가 잘못된 인용 위에 서 있었다는 사실은 남은 근거들을 더 정확하게 보게 해 줍니다.
• 비판하는 쪽: 백인 작곡가가 가난과 폭력이 등장하는 흑인 인물들을 그리면서 정형화된 이미지를 강화했다고 봅니다. 외부인이 짧게 관찰한 결과를 진정성으로 포장했다는 지적도 여기에 속합니다.
• 옹호하는 쪽: 거슈윈 형제가 미국 공연에서 주역을 흑인 성악가에게만 맡기도록 요구했고, 1934년 여름 폴리 해안 지역에 머물며 그곳 음악을 직접 익혔다는 점을 듭니다.
• 같은 사실을 두 시각이 다르게 읽는다는 점이 이 논쟁의 성격입니다. 오늘날까지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흥행 성적도 자주 오해됩니다. 《포기와 베스》는 1935년 9월 30일 보스턴 콜로니얼 극장에서 시연을 거친 뒤 10월 10일 뉴욕 알빈 극장에서 막을 올려 124회 공연을 이어 갔습니다. 오페라로서는 이례적인 기록이지만 제작비를 회수하지는 못했습니다. 이 상업적 결과와 작품에 대한 예술적 평가는 구분해서 보아야 합니다. 거슈윈이 1936년 형과 함께 할리우드로 간 것도 이 작품의 실패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매체와의 계약과 형제의 작업 기회라는 확인 가능한 사정 때문이었습니다.
가장 뜻밖의 자리에서 온 옹호
거슈윈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938년, 그를 기리는 책에 짧은 글 하나가 실렸습니다. 쓴 사람은 아르놀트 쇤베르크였습니다. 무조음악의 총수이자 20세기 전위의 상징 같은 인물이 대중가요 작곡가 출신을 두고 이렇게 적었습니다. 거슈윈이 혁신가였다는 점은 자신이 보기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리듬과 화성과 선율로 해낸 일은 단순한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라고도 했습니다.
같은 글에서 쇤베르크는 음표를 더할 줄 알게 된 것으로 스스로 진지하다고 믿는 작곡가들을 겨냥해, 그들이 진지한 이유는 유머와 영혼이 완벽하게 결여되었기 때문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거슈윈에 대해 자신이 아는 것은 그가 예술가이자 작곡가라는 사실이며, 그는 음악적 착상을 표현했고 그 착상도 표현 방식도 새로운 것이었다고 맺었습니다.
여기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거슈윈을 의심한 것은 클래식 진영 전체가 아니었습니다. 당대 최고 수준의 클래식 음악가 두 사람은 그를 가르치기를 거절했는데, 두 거절 모두 이유가 같았습니다. 가르치면 그가 가진 것이 손상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가지는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거슈윈의 음악을 재즈가 비로소 진지한 예술로 인정받게 만든 사건처럼 설명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재즈는 본래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음악 전통에 뿌리를 둔 음악이며, 그 예술적 자격은 거슈윈의 승인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거슈윈이 한 일은 뉴욕의 상업 노래 제작, 재즈와 블루스의 어법, 유럽식 관현악과 협주 형식을 한 작품 안에서 연결한 것이며, 그 결합에는 성취와 함께 문화적 차용을 둘러싼 논쟁도 따랐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장르의 경계를 넘나든 20세기 작곡가로, 탱고를 클래식·재즈와 결합한 아스토르 피아졸라와 나란히 놓고 들을 수 있습니다.
1937년, 마지막 여섯 달
1937년 초부터 거슈윈은 눈앞이 흐려질 만큼 심한 두통을 겪었습니다. 함께 나타난 증상은 더 특이했습니다. 실제로는 나지 않는 냄새를 맡았고, 그가 말한 냄새는 고무 타는 냄새였습니다. 처음에는 과로로 설명되었습니다.
7월 9일 그는 작사가 이프 하버그의 집에서 의식을 잃었습니다. 7월 11일 일요일 새벽 로스앤젤레스의 시더스 오브 레바논 병원에서 응급 수술이 이루어졌습니다. 종양은 교모세포종으로 여겨지며, 수술로 해결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같은 날 세상을 떠났습니다. 서른여덟 살이었습니다.
《포기와 베스》 초연으로부터 채 두 해가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오페라라는 그릇을 막 손에 넣은 작곡가가 그 그릇으로 무엇을 더 했을지는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꼭 들어야 할 거슈윈의 작품들
- 랩소디 인 블루(Rhapsody in Blue, 1924) — 그로페가 관현악화한 미국 음악의 분기점
- 피아노 협주곡 F장조(Concerto in F, 1925) — 거슈윈이 처음으로 관현악까지 직접 쓴 대작
- 파리의 아메리카인(An American in Paris, 1928) — 파리에서 가져온 택시 경적 네 개가 편성에 들어간 작품
- 제2 랩소디(Second Rhapsody, 1931), 쿠바 서곡(Cuban Overture, 1932)
오페라
- 포기와 베스(Porgy and Bess, 1935) — 거슈윈이 스스로 민속 오페라라 부른 작품. 초연 124회, 제작비는 회수하지 못했고 평가는 나중에 왔습니다
노래·뮤지컬
- 《Swanee》(1919) — 어빙 시저 작사, 알 졸슨의 노래로 크게 성공한 초기 대표곡
- 《Girl Crazy》(1930) — 《I Got Rhythm》이 실린 뮤지컬
- 《Of Thee I Sing》(1931) — 미국 뮤지컬로는 처음 퓰리처상을 받은 작품
- 재즈 스탠더드로 남은 노래들 — 《서머타임》, 《Embraceable You》, 《Someone to Watch Over Me》
- 아이라와 함께 쓴 브로드웨이 무대의 노래들 전반
거슈윈 시작하기
거슈윈으로 들어가는 문은 《랩소디 인 블루》입니다. 첫머리의 클라리넷 도입을 듣고, 이어지는 앙상블의 짧은 응답과 피아노 독주의 진입, 넓게 노래하는 서정 주제, 그리고 다시 합주로 돌아오는 흐름을 따라가 보십시오. 대중음악의 리듬과 콘서트 음악의 규모가 한 곡 안에서 어떻게 만나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음반으로는 레너드 번스타인이 피아노와 지휘를 함께 맡아 1959년 컬럼비아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연주가 오래도록 표준 같은 자리를 지켜 왔습니다.
두 번째는 《파리의 아메리카인》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택시 경적 네 음을 기억하고 들으면, 익숙한 관현악곡 하나가 갑자기 구체적인 도시의 소리로 바뀝니다.
세 번째는 《포기와 베스》의 한 장면입니다. 여는 노래 《서머타임》을 들으면 거슈윈이 대중가요와 오페라, 그리고 미국 남부의 음악적 색채를 한 장면 안에 어떻게 엮었는지 만날 수 있습니다. 이 세 곡을 순서대로 들으면 브로드웨이, 콘서트홀, 오페라 극장이라는 세 개의 무대가 한 사람 안에서 이어지는 것이 들립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조지 거슈윈은 정규 음악 교육을 받지 않은 작곡가인가요?
아닙니다. 학교를 일찍 떠난 것은 사실이지만 음악 수업은 그 뒤로도 이어졌습니다. 피아노는 찰스 햄비처에게 배웠고, 화성과 작곡 이론은 에드워드 킬레니와 루빈 골드마크 두 사람에게 따로 배웠습니다. 정규 학교를 그만둔 이력이 독학 작곡가라는 말로 번지면서 생긴 오해입니다.
Q. 랩소디 인 블루 초연은 카네기홀에서 열렸나요?
아닙니다. 1924년 2월 12일 초연 장소는 뉴욕의 에올리언 홀이었습니다. 거슈윈이 카네기홀 무대에 오른 것은 그로부터 약 스물두 달 뒤인 1925년 12월 3일 피아노 협주곡 F장조 초연 때였습니다.
Q. 포기와 베스는 인종주의적인 작품인가요?
한쪽으로 정리되지 않은 문제입니다. 백인이 쓴 흑인 인물이 정형화된 이미지를 굳혔다는 비판이 있고, 반대편에서는 초연 당시 주역 배역을 흑인 성악가로 제한한 조건과 작곡가가 사우스캐롤라이나 해안 마을에서 보낸 1934년 여름을 근거로 듭니다. 어느 하나를 정답으로 고르기보다 두 근거를 같이 알고 듣는 편이 정확합니다.
Q. 조지 거슈윈의 사망 원인은 무엇인가요?
뇌종양이며 교모세포종으로 봅니다. 1937년 초에 심한 두통과 실재하지 않는 냄새를 맡는 증상이 먼저 나타났고 처음에는 과로로 설명되었습니다. 그해 7월 9일 쓰러진 뒤 이틀 만에 로스앤젤레스의 한 병원에서 응급 수술을 받았지만 종양은 이미 손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수술 당일 서른여덟의 나이로 눈을 감았습니다.
마무리
거슈윈이 양쪽에서 거부당했다는 이야기는 절반만 맞습니다. 비평의 반발은 실제로 있었고 길먼의 글처럼 혹독한 것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반발의 대표 증거로 인용되어 온 두 장면을 열어 보면, 하나는 재능을 지켜 주려는 거절이었고 다른 하나는 애초에 그 사람이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정작 가장 먼 자리에 있어야 할 쇤베르크가 그를 혁신가라고 불렀습니다.
거슈윈의 자리는 장르의 경계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브로드웨이와 콘서트홀, 오페라 극장과 영화라는 서로 다른 음악 산업과 청중을 실제로 연결했고, 그 일을 남의 손을 빌려 시작해 자기 손으로 끝냈습니다. 열세 해 사이에 그는 두 대의 피아노 스케치를 남에게 넘기던 작곡가에서 전막 오페라의 총보를 직접 쓰는 작곡가가 되었습니다.
오늘 《랩소디 인 블루》의 첫 클라리넷을 다시 들어 보십시오. 그 미끄러짐은 악보에 적힌 음이 아니라 리허설에서 생긴 장난이었고, 작곡가는 그것을 지우는 대신 더 밀어붙이라고 했습니다. 자기 것이 아닌 아이디어를 알아보고 자기 음악으로 만드는 능력, 거슈윈에게 가장 부족했다고 의심받은 바로 그 자리에 실은 그것이 있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