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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휘자 시리즈] 정명훈, 라 스칼라 첫 아시아인 음악감독이 걸어온 길

    ` 형식의 주석을 추가해 렌더되지 않는 메타정보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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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오케스트라의 공식 연혁 페이지에 이런 두 줄이 나란히 남아 있습니다. “1.1. 제5대 상임지휘자 정명훈 취임”, 그리고 넉 달 뒤 “4.23. 상임지휘자 정명훈 사임”. 1998년 KBS교향악단의 기록입니다. 취임 넉 달 만에 지휘봉을 놓은 이 일은 당시 한국 클래식계에서 가장 크게 회자된 사건 중 하나였고, 악단은 그 넉 달을 지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같은 페이지 맨 위, 2026년 항목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1.1. 제10대 음악감독 정명훈 취임”. 28년이 지나 같은 악단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 사이 그는 파리의 새 오페라극장을 열었고, 서울시립교향악단을 10년간 이끌었으며, 이제 2027년 이탈리아 라 스칼라 극장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할 예정입니다. 1778년에 문을 연 그 극장입니다.

      이 글은 그 긴 궤적을 하나의 질문으로 꿰어 보려 합니다. 정명훈은 왜 늘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악단으로 돌아가는가. 답을 먼저 적어 두겠습니다. 그가 반복해서 맡은 자리는 완성된 명성이 아니라 아직 자기 소리를 갖지 못한 쪽이었고, 자신이 하는 일을 그는 30년 넘게 거의 같은 말로 설명해 왔습니다. 지휘자가 할 일은 음악가들이 자기 일을 해내도록 돕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글은 그 말이 그의 이력에서 실제로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따라갑니다.

    인물 한눈에 보기
    • 한 줄 정의: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와 서울시립교향악단을 거쳐 2027년 라 스칼라 극장 음악감독 취임을 앞둔 한국의 지휘자
    • 출생: 1953년 1월 22일, 피란지 부산 (7남매 중 여섯째, 생존 인물)
    • 국적·활동 거점: 대한민국 / 프랑스·이탈리아·한국
    • 활동 분야: 지휘자, 그리고 지금도 무대에 서는 피아니스트
    • 가족: 첼리스트 정명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동생
    • 대표 자리: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 음악감독(1989~1994) ·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음악감독(2000~2015) · 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2006~2015) · KBS교향악단 제10대 음악감독(2026~) · 라 스칼라 극장 음악감독(2027~)

    처음 들을 음반
    • 처음 접한다면: 서울시립교향악단과 녹음한 말러 교향곡 2번 〈부활〉(도이치 그라모폰). 곡 자체가 압도적이고, 그가 한국 악단과 어디까지 갔는지가 한 장에 담겨 있습니다.
    • 그다음: 바스티유 오페라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메시앙 〈투랑갈릴라 교향곡〉(도이치 그라모폰). 20세기 관현악의 물량과 색채를 좋아한다면 여기서 그의 정밀함을 만나게 됩니다.

    2022년 6월 1일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에서 세르조 마타렐라 이탈리아 대통령과 악수하는 지휘자 정명훈
    이탈리아 공화국 건국 76주년 기념 음악회를 마친 뒤 마타렐라 대통령과 인사하는 정명훈.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 2022년 6월 1일 (출처 : Wikimedia Commons · Quirinale · Attribution 라이선스)

    정명훈은 어떤 지휘자인가

      정명훈은 유럽의 주요 오페라극장과 교향악단을 이끌어 온 한국의 지휘자이며, 2027년부터 이탈리아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 음악감독을 맡을 예정입니다. 음악감독은 무대에서 지휘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극장의 음악적 방향을 이끄는 핵심 자리입니다.

      이 극장은 1778년 8월 3일 살리에리의 오페라 〈인정받은 에우로파〉로 문을 열었습니다. 아시아 출신 지휘자가 이 극장의 음악감독이 되는 것은 처음이라고 AP 통신과 이탈리아 매체들이 전했습니다. 다만 극장이 낸 발표문 자체는 그 표현을 쓰지 않았습니다. 극장이 임명 이유로 든 것은 출신이 아니라 기록이었습니다. 1989년 이후 그가 이 극장에서 쌓은 공연 횟수입니다.

      이력만 늘어놓으면 화려한 국제 경력의 목록이 됩니다. 하지만 그 목록을 시간순으로 놓고 보면 한 가지 특징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가 맡은 자리 상당수가 이미 완성된 명문 악단이 아니라, 새로 만들거나 다시 세워야 하는 자리였다는 점입니다. 1989년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는 문을 여는 극장이었고 그 오케스트라도 새로 꾸려지는 중이었습니다. 2006년의 서울시립교향악단은 재단법인으로 막 새 출발을 한 참이었습니다. 2023년 부산은 콘서트홀과 오페라하우스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2026년 KBS교향악단은 28년 전 그가 넉 달 만에 떠났던 악단입니다.

      지휘자에도 여러 유형이 있습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이미 세계 최고 소리를 가진 악단을 더 완벽하게 다듬는 쪽이었다면, 정명훈은 소리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곳으로 반복해서 들어갔습니다. 그것이 우연인지 선택인지는 그의 말과 궤적을 함께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지휘자라는 직업 자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궁금하다면 이 시리즈의 프롤로그 글을 먼저 읽어 보셔도 좋습니다.

    피아노를 치던 아이가 지휘대에 서기까지

      그는 1953년 1월, 전쟁을 피해 사람들이 몰려 있던 부산에서 태어났습니다. 7남매 중 여섯째였습니다. 이 집안은 이미 음악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첼로를 든 누나 정명화와 바이올린을 든 누나 정경화가 있었고, 막내 쪽에 피아노를 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일곱 살이던 1960년, 그는 서울시립교향악단과 피아노 협연 무대에 섰습니다. 서울시향은 훗날 그가 열 해 동안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이끌게 되는 바로 그 악단입니다. 이듬해 가족은 미국 시애틀로 건너갔고, 그는 그곳에서 음악 공부를 이어갔습니다. 뉴욕의 매네스 음대와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배웠습니다.

      그의 이름이 한국에 크게 알려진 계기는 지휘가 아니라 피아노였습니다. 1974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2위에 올랐습니다. 이 결과는 당시 한국에서 국가적인 사건처럼 다뤄졌습니다.

      그런데 그는 피아니스트로 남지 않았습니다. 왜 지휘로 옮겨 갔는지에 대해 그는 두 차례 다른 자리에서 말한 적이 있습니다.

      2010년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그는 스스로 지휘자가 되길 원한 적이 없고 그냥 주어진 현실을 따라갔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은 누군가를 뒤따라가는 걸 좋아하는 편인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2014년 음악 잡지 객석과의 인터뷰에서는 다르게 말했습니다. 최선을 다 쏟아부으려면 하나만 선택해야 했고, 처음에는 선택하기 어려웠지만 결국 지휘를 택했다는 것입니다. 이유도 함께 밝혔습니다. “말러의 교향곡은 피아노로 대체될 수 없다. 이렇게 거대한 교향곡은 온전히 오케스트라만을 위해 존재한다. 그 점이 나를 매료시켰고 지휘로 이끌었다.” 같은 인터뷰에서 그는 자기 손으로 직접 소리를 자아내지 않아서인지 늘 피아노가 미련으로 남아 있다고도 했습니다.

      1979년 그는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에서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Carlo Maria Giulini)의 보조지휘자로 일을 시작했고, 2년 뒤 이 악단의 부지휘자가 되었습니다. 줄리니는 훗날 라 스칼라 극장이 정명훈의 임명을 발표하면서 그의 스승으로 언급한 인물입니다.

      첫 상임 자리는 유럽에서 왔습니다. 1984년부터 1990년까지 독일 자르브뤼켄 방송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를 맡았습니다. 이탈리아에서도 자리를 얻어 1992년까지 피렌체 테아트로 코무날레(Teatro Comunale di Firenze)의 수석객원지휘자로 일했습니다. 이 무렵 그는 이미 이탈리아 음악평론가협회의 아비아티상을 1988년에 받은 상태였습니다.

    파리 바스티유, 새 극장의 첫 오케스트라

      1989년, 파리에 새 오페라극장이 문을 열었습니다. 바스티유 광장에 세워진 이 극장은 프랑스 혁명 200주년에 맞춰 개관한 국가적 사업이었고, 처음부터 논쟁의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정명훈은 이곳의 음악감독으로 1989년부터 1994년까지 일했습니다. 서른여섯 살이었습니다.

      그가 이 극장에서 한 일의 성격은 지휘자보다 창설자에 가까웠습니다. 오케스트라가 자리를 잡아 가는 과정 전체가 그의 임기였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의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유네스코가 펴내는 잡지 쿠리에와의 인터뷰에 남아 있습니다. 그는 바스티유 오페라 오케스트라를 “프랑스 최고”라고 부르면서, 오페라극장이 존재하는 목적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극장 전체와 거기 몸담은 모든 사람의 목적은 음악가들이 자기 일을 더 쉽게 할 수 있게 하고 스스로를 실현하도록 돕는 데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인터뷰에서 그는 지휘자의 직업윤리에 대해서도 말했습니다. 지휘자는 직업적 태도와 윤리적인 삶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며, 직업성이 인간적 고려를 앞질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음악과 삶은 서로 분리된 두 칸이 아닙니다.”

      프랑스에서의 평가도 뒤따랐습니다. 1991년 프랑스 극장 및 비평가 협회는 그를 올해의 음악가로 선정했습니다. 1990년에는 도이치 그라모폰과 전속 계약을 맺었고, 그 첫 결실이 바스티유 오페라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메시앙의 〈투랑갈릴라 교향곡〉이었습니다. 이 녹음에는 작곡가의 아내이자 이 작품의 피아노 파트를 대표해 온 이본 로리오(Yvonne Loriod)와, 옹드 마르트노(ondes Martenot: 1920년대에 만들어진 전자 건반 악기) 연주자 잔 로리오(Jeanne Loriod)가 함께했습니다.

      새 경영 체제와 권한·계약 조건을 둘러싼 갈등이 법적 분쟁으로 번졌고, 그의 바스티유 시절은 1994년에 끝났습니다. 새 극장을 함께 열었던 사람이 그 극장의 다음 단계에서 자리를 잃은 것입니다.

      파리를 떠난 뒤에도 그의 무대는 이탈리아로 이어졌습니다. 1997년부터 2005년까지 로마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의 수석지휘자를 맡았습니다. 앞서 피렌체에서 일했고 1989년부터는 라 스칼라 무대에도 서던 터라, 이 시기 그의 활동 중심에는 이탈리아가 있었습니다.

    유리 외벽이 보이는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극장의 측면 외관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극장 외관 (2022년) (출처 : Wikimedia Commons · DiscoA340 · CC BY-SA 4.0)

    그는 오케스트라를 어떻게 만드는가

      정명훈이 오케스트라를 다루는 방식의 핵심은 통제가 아니라 관계에 있습니다. 이것은 인상이 아니라 그가 30년 간격을 두고 두 번, 거의 같은 문장으로 직접 말한 내용입니다.

      앞서 본 바스티유 시절의 인터뷰에서 그는 극장의 목적이 음악가들이 자기 일을 더 쉽게 하도록 돕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약 30년 뒤인 2025년 12월 26일, KBS교향악단 음악감독 선임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KBS교향악단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음악가들을 사랑해주고 키워주고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자리에서 그는 오케스트라 단원이라는 직업의 고충을 짚었습니다. “오케스트라는 음악가들이 자기 감정을 표현할 수 없어서 굉장히 힘든 일입니다.” 지휘자가 단원을 도구로 보지 않겠다는 선언인 동시에, 그가 악단을 만드는 방식이 어디서 출발하는지를 보여 주는 말입니다. 그는 이어서 “오케스트라와 지휘자가 서로 사랑하고 음악을 같이 만들어간다는 마음을 갖도록 도와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같은 자리에서 자기 방식이 바뀌었음을 인정했다는 점입니다. “20년 전 서울시향을 맡았을 때는 몇 년 안에 세계적인 수준에 올려놓겠다는 목표가 확실했고, 올림픽에 나가는 것처럼 했어요. 하지만 이제 그런 시기는 지나갔습니다.” 목표를 세우고 밀어붙이던 사람이 스스로 그 방식의 시효를 말한 것입니다. 이 발언은 그의 경력을 두 시기로 나눠 읽을 근거가 됩니다. 만들어 올리는 시기와, 만들어진 것을 지키고 키우는 시기입니다.

    그의 소리는 어떻게 들리는가

      정작 본인은 지휘자를 소리 내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2021년 피아노 음반을 내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휘자는 완벽한 음악가는 아니에요. 소리를 안 내기 때문이죠. 소리를 내는 것이 음악가죠.” 그렇다면 그가 만든 소리는 실제로 어떻게 들렸을까요. 최근 국내에서 나온 두 차례 공연 평이 좁게나마 구체적인 답을 줍니다. 두 번의 무대에서 나온 관찰이므로 그의 연주 전체에 대한 설명은 아닙니다.

      2025년 2월, 서울시립교향악단과 KBS교향악단이 같은 주에 나란히 말러를 올린 적이 있습니다. 서울시향은 얍 판 츠베덴(Jaap van Zweden)의 지휘로 교향곡 7번을, KBS교향악단은 정명훈의 지휘로 2번 〈부활〉을 연주했습니다. 두 공연을 모두 본 한 음악칼럼니스트는 그 무대에 한해, 정명훈의 접근이 츠베덴과 사뭇 달랐다고 적었습니다. 신중한 시선과 노련한 손길이 연주의 외적 완성도보다 악곡의 깊은 내면으로 향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악장에 대해서는 정명훈 특유의 영적인 해석이 절정에 달했다고 쓰면서, 앙상블의 완성도가 아주 높지는 않았고 실수도 나왔지만 오히려 그래서 부활을 향한 열망이 더 절박한 감동으로 다가왔다고 덧붙였습니다.

      손동작에 대한 관찰도 있습니다. 2026년 7월 부산콘서트홀에서 그가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지휘했을 때, 현장을 지켜본 기자는 2악장을 가장 인상적인 대목으로 꼽으며 담백한 손끝을 따라 팀파니가 단호한 울림을 터뜨리는 호흡이 압권이었다고 적었습니다. 4악장에서는 지휘봉을 쥐지 않은 왼손으로 작은 불꽃을 그려냈다고 했습니다.

      이 두 공연 평이 가리키는 방향은 같습니다. 정밀한 마감보다 밀도 쪽, 앙상블의 완결보다 곡이 말하려는 것 쪽입니다. 여기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완성도를 먼저 보는 귀에는 느슨하게 들릴 수 있고, 실제로 두 평 모두 그 점을 짚습니다. 두 무대만으로 그의 연주를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 두 번에 한해서라면, 그것이 실패가 아니라 선택으로 읽히는 이유는 앞에서 본 그의 통솔 방식과 정확히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단원을 밀어붙여 오차를 지우는 대신 함께 만들도록 두는 사람의 소리는 매끈함이 아니라 무언가를 향해 가는 힘에서 승부가 납니다.

      전체를 먼저 보는 이 태도를 그 자신이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한 음악 잡지에 실린 글에 따르면 그는 독주자와 지휘자가 음악에 접근하는 과정이 아예 다르다고 말했습니다. 독주자는 개개의 음표를 익힌 다음에야 전체 그림을 생각하지만, 지휘자는 전체의 걸개를 먼저 파악한 뒤 부분을 섬세히 다듬는다는 것입니다. 같은 글의 필자는 2001년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그가 메시앙의 〈세상의 종말을 위한 4중주〉를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을 듣고, 앞줄의 젊은 연주자들을 아우르고 지지하다가 배경으로 물러나며 음악의 큰 걸개를 만들어 갔다고 적었습니다.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도 지휘자의 시선이 남아 있었다는 관찰입니다.

      레퍼토리 쪽에서 그를 규정하는 이름은 베르디입니다. 라 스칼라 극장은 그를 소개하면서 베르디를 대표하는 해석자로 규정했습니다. 실제로 그가 라 스칼라에서 지휘한 오페라 아홉 편 가운데 세 편이 베르디입니다. 2016년과 2018년의 〈시몬 보카네그라〉, 2017년의 〈돈 카를로〉, 2019년의 〈라 트라비아타〉입니다. 2016년에는 이 〈시몬 보카네그라〉를 들고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 무대까지 갔습니다.

      그렇다고 그를 이탈리아 오페라 전문가로만 두면 실제 이력과 어긋납니다. 라 스칼라에서만 봐도 그의 목록은 쇼스타코비치의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1992),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살로메〉(1995), 푸치니의 〈나비 부인〉(2007), 모차르트의 〈이도메네오〉(2009), 베버의 〈마탄의 사수〉(2017), 베토벤의 〈피델리오〉(2018)까지 걸쳐 있습니다. 극장 자신이 이 폭을 “레퍼토리의 넓이”라고 따로 언급할 정도입니다.

      여기서 직함을 잠깐 정리하고 가겠습니다. 상임지휘자와 음악감독은 한 악단을 실제로 책임지고 이끄는 자리입니다. 수석객원지휘자는 상임은 아니지만 매 시즌 정해진 몫을 맡기로 약속된, 손님 가운데 가장 안쪽에 있는 자리입니다. 계관지휘자와 명예지휘자, 명예음악감독은 오랜 관계를 예우해 붙이는 이름으로, 정기적인 지휘 의무보다 유대를 확인하는 성격이 강합니다.

      한 악단과 오래 가는 것도 그의 특징입니다.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과는 2000년부터 2015년까지 15년을 함께했고 지금은 명예음악감독입니다. 도쿄 필하모닉과도 2001년부터 2010년까지 특별예술고문을 지낸 뒤 명예음악감독이 되었습니다.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에서는 그가 이 악단 역사상 처음으로 수석객원지휘자를 맡은 사람이고, 밀라노의 필라르모니카 델라 스칼라 역시 2023년 그를 악단 역사상 첫 명예지휘자로 임명했습니다. 두 악단 모두 자기 역사에서 처음이라는 사실을 공식 소개문에 명시하고 있습니다.

    서울시향의 10년, 그리고 그 뒤의 10년

      2005년 그는 재단법인으로 새로 출범한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예술고문을 맡았고, 이듬해인 2006년부터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악단을 이끌었습니다. 일곱 살에 협연자로 섰던 그 악단이었습니다.

      이 10년 동안 서울시향은 국제 음반 시장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2011년 악단은 도이치 그라모폰과 5년 전속 음반계약을 맺었는데, 서울시향은 이것을 아시아 교향악단 역사상 최초의 사례로 공식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계약 아래 나온 음반들이 말러 교향곡 2번 〈부활〉과 5번,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 베토벤 교향곡 9번입니다. 말러 2번 〈부활〉은 지금도 한국 오케스트라의 국제 음반 가운데 가장 널리 언급되는 축에 듭니다.

      그가 남긴 것은 음반만이 아니었습니다. 2011년 그는 평양을 방문했고, 이듬해 파리에서 자신이 이끌던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과 북한 은하수관현악단의 합동 공연을 성사시켰습니다. 앞서 2008년에는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임명되었는데, 유니세프가 지휘자를 친선대사로 지명한 것은 그가 처음이었습니다.

      서울시향과의 관계는 2015년을 끝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약 10년 동안 그는 한국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자리를 맡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10년이 한국과의 단절은 아니었습니다. 2022년 1월 KBS교향악단은 그를 계관지휘자로 추대했고, 2023년 7월에는 부산이 그를 불렀습니다.

    2026년의 정명훈, 부산과 KBS와 라 스칼라

      2026년 현재 정명훈은 부산과 KBS에서 두 자리를 맡고 있으며, 라 스칼라 음악감독 취임도 앞두고 있습니다.

      부산은 그의 출생지입니다. 2023년 7월 1일 그는 부산콘서트홀과 부산오페라하우스를 함께 총괄하는 클래식부산의 초대 예술감독으로 취임했습니다. 3년 임기에 2년 연장 옵션이 붙은 계약이었고, 2026년 6월 말 초임이 끝난 뒤 그 연장 옵션이 실행되어 임기가 2028년 6월까지 이어집니다. 2025년 6월 부산콘서트홀이 문을 열었고, 부산오페라하우스는 2027년 9월 개관을 앞두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그는 아직 열리지 않은 극장의 첫 자리에 있습니다.

      부산에서의 그의 전략은 콘서트오페라입니다. 무대 장치 없이 연주회 형식으로 오페라를 올려 관객을 먼저 만들고, 오페라하우스가 열리면 전막 공연으로 넘어간다는 구상입니다. 2025년 12월 부산콘서트홀에서 콘서트 형식으로 올렸던 비제의 〈카르멘〉을 2026년 7월 11일과 12일 북항 특설무대에서 야외 오페라로 다시 선보였고, 10월에는 베르디의 〈오텔로〉를 콘서트오페라로 올릴 예정입니다. 비제의 이 작품이 야외 무대까지 나간 것은 관객층을 넓히려는 시도로 읽힙니다.

      2026년 1월 1일에는 KBS교향악단 제10대 음악감독으로 취임했습니다. 임기는 3년입니다. 1998년 넉 달 만에 떠났던 그 악단으로 28년 만에 돌아온 것이고, 서울시향 이후로는 약 10년 만의 국내 악단 지휘봉입니다. 2026년은 이 악단의 창단 70주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밀라노가 있습니다. 2025년 5월 라 스칼라 극장은 그를 차기 음악감독으로 발표했습니다. 극장이 밝힌 이유는 인맥이나 화제성이 아니라 숫자였습니다. 1989년 이후 그는 라 스칼라에서 오페라 아홉 편을 84회 무대에 올렸고 콘서트 141회를 지휘했는데, 이는 역대 음악감독들을 제외하면 최다 출연 기록입니다. 극장은 그를 두고 음악감독이 아닌 지휘자 가운데 라 스칼라의 국제적 위상에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이라고 적었습니다.

      임기의 시작점은 조금 헷갈리게 되어 있습니다. 극장은 전임 리카르도 샤이의 계약이 끝나는 2026년 말부터 그의 임기가 시작된다고 밝히면서, 공식 안내는 “2027년 음악감독”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026/27 시즌이 이미 그의 첫 시즌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2026년 12월 7일, 성 암브로시오 축일에 맞춰 열리는 라 스칼라의 시즌 개막 공연을 그가 지휘할 예정입니다. 작품은 1887년 바로 이 극장을 위해 쓰인 베르디의 〈오텔로〉이고, 연출은 다미아노 미키엘레토가 맡습니다. 개막이 먼저 오고 취임이 그 직후에 오는 셈입니다.

    밀라노 스칼라 광장에서 바라본 라 스칼라 극장의 신고전주의 외관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외관, 스칼라 광장에서 (2011년) (출처 : Wikimedia Commons · Jakub Hałun · CC BY-SA 4.0)

    대표 무대와 음반

      그는 1990년 도이치 그라모폰과 전속 계약을 맺은 이후 지금까지 여러 레이블을 통해 40여 종의 음반을 냈습니다. 아래는 그 가운데 그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것들입니다.

    대표 음반

    바스티유 오페라 오케스트라

    • 메시앙 〈투랑갈릴라 교향곡〉: 도이치 그라모폰 전속 계약 이후 첫 결실. 이본 로리오와 잔 로리오가 참여했습니다.

    서울시립교향악단

    • 말러 교향곡 2번 〈부활〉: 한국 오케스트라의 국제 음반 가운데 가장 널리 언급되는 한 장
    • 말러 교향곡 5번: 같은 전속 계약 아래 이어진 말러 시리즈
    •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 그가 콩쿠르에서 이름을 얻은 작곡가로 돌아온 녹음
    • 베토벤 교향곡 9번: 한국인 성악가들이 독창을 맡은 〈합창〉

    피아노

    • 하이든·베토벤·브람스 후기 피아노 작품집: 2021년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낸 음반으로, 지휘봉을 내려놓은 그를 들을 수 있습니다.

      무대 쪽에서 그의 기록이 가장 두텁게 쌓인 곳은 라 스칼라입니다. 1989년 이후 그가 이 극장에서 지휘한 오페라는 아홉 편이고, 극장이 공식으로 밝힌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베르디가 셋으로 가장 많지만 20세기 러시아와 독일 작품, 모차르트까지 걸쳐 있다는 점이 함께 보입니다.

    작곡가와 작품 정명훈 지휘 연도
    쇼스타코비치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1992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살로메〉 1995
    푸치니 〈나비 부인〉 2007
    모차르트 〈이도메네오〉 2009
    베르디 〈시몬 보카네그라〉 2016, 2018
    베르디 〈돈 카를로〉 2017
    베버 〈마탄의 사수〉 2017
    베토벤 〈피델리오〉 2018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 2019

      수상과 훈장은 이탈리아와 프랑스에 몰려 있습니다. 그가 경력의 중심을 둔 두 나라이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받은 것은 1995년의 금관문화훈장인데, 역대 최연소 수훈이었습니다.

    주요 수상과 훈장

    • 1988년, 2015년 이탈리아 음악평론가협회 프랑코 아비아티상
    • 1991년 프랑스 극장 및 비평가 협회 올해의 음악가
    • 1995년 금관문화훈장 (역대 최연소 수훈)
    • 2008년 유니세프 친선대사 (지휘자로는 최초)
    • 2011년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코망되르
    • 2013년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 재단 평생음악상
    • 2022년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훈장 2등장 (한국인 최초)
    • 2024년 피렌체 명예 열쇠

    자주 묻는 질문

    정명훈은 라 스칼라 음악감독으로 정확히 언제부터 일하나요?

    극장이 밝힌 임기 시작 시점은 전임 리카르도 샤이의 계약이 끝나는 2026년 말이고, 극장은 이를 ‘2027년 음악감독’으로 안내하고 있습니다. 다만 2026/27 시즌 자체가 이미 그의 첫 시즌으로 소개되고 있어서, 2026년 12월 7일 개막 공연인 베르디 〈오텔로〉를 그가 지휘할 예정입니다. 개막이 먼저 오고 임기 시작이 그 직후에 오는 구조라 연도가 헷갈리기 쉽습니다.

    정명훈과 정명화, 정경화는 어떤 관계인가요?

    친남매입니다. 첼리스트 정명화와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가 누나이고 정명훈이 동생으로, 세 사람은 7남매 가운데 함께 연주 활동을 이어 온 남매입니다. 세 남매가 피아노와 바이올린, 첼로로 이룬 앙상블이 정트리오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정명훈은 지금도 피아노를 연주하나요?

    연주합니다. 2026년 7월 8일 부산콘서트홀 개관 1주년 페스티벌에서 그는 지휘봉을 놓고 피아니스트로 무대에 올라 브람스의 피아노 4중주 3번 등을 연주했습니다. 그의 출발점이 지휘가 아니라 피아노였다는 사실이 지금도 무대에서 그대로 확인되는 셈입니다.

    마무리

      다시 그 연혁 페이지로 돌아가 봅니다. 1998년 1월 1일 취임, 같은 해 4월 23일 사임. 두 줄 사이의 넉 달은 지워지지 않았고, 그 위로 2022년 계관지휘자와 2026년 제10대 음악감독이 차례로 쌓였습니다. 스물여덟 해가 걸린 이 두 줄의 간격이 그의 방식에 대해 말해 주는 것이 있습니다.

      밀어붙여 몇 해 만에 수준을 끌어올리는 방식이었다면 1998년의 넉 달은 그냥 실패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음악가들이 자기 일을 해내도록 돕는 것이 목적이라면 결과는 임기 안에 다 나오지 않습니다. 시간이 필요한 방식입니다. 본인은 2010년 인터뷰에서 스스로 고른 적이 없고 주어진 현실을 따라갔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따라간 자리들이 하나같이 시간이 드는 자리였다는 사실은 남습니다. 바스티유에서는 새 오케스트라가 자리 잡는 과정 전체를 임기로 썼고, 서울에서는 10년을 썼으며, 부산에서는 공연장이 지어지는 동안을 쓰고 있습니다. 앞서 본 두 편의 공연 평이 그의 연주에서 매끈한 마감보다 곡의 내면을 먼저 읽어낸 것도 같은 자리에서 나옵니다. 오차를 지우는 일과 사람을 키우는 일은 같은 시간에 둘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는 오래 후자를 택해 왔습니다.

      그런 점에서 라 스칼라는 그가 걸어온 길 가운데 성격이 다른 자리입니다. 만들거나 다시 세울 것이 아니라, 이미 세계에서 가장 완성된 축에 드는 극장을 그대로 이어받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만들 것이 없는 곳에서 만드는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가 2027년부터 확인될 것이고, 그것이 이 임명의 진짜 시험일 것입니다. 2026년 12월 7일, 그는 밀라노에서 〈오텔로〉의 첫 화음을 낼 예정입니다. 1778년에 문을 연 극장의 음악감독 자리에서입니다.

      그의 음악이 궁금해졌다면 서울시향과의 말러 2번 〈부활〉부터 들어 보시길 권합니다. 만들어지는 중이던 악단이 어디까지 갈 수 있었는지가 그 한 장에 남아 있습니다. 이 글의 일정과 직함은 2026년 8월 초 기준이며, 라 스칼라와 부산의 계획은 앞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 [지휘자 시리즈] 클라우디오 아바도, 침묵으로 이끈 지휘자

    루체른 페스티벌의 리허설장. 위암 투병 이후 눈에 띄게 야윈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가 지휘봉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눈빛과 손짓만으로 오케스트라를 이끌었습니다.

    아바도의 리허설을 지켜본 이들의 증언에는 한 가지 특징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그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카네기홀 전 총감독 클라이브 길린슨은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그는 리허설에서 사실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너무 수줍어서 아주 조용히 말한다. 하지만 효과가 있다. 모두가 그의 연주가 얼마나 훌륭한지 알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권위 대신 침묵과 신뢰로 오케스트라를 이끈 지휘자의 이야기를 추적해 보려 합니다.

    인물 한눈에 보기
    • 한 줄 정의: 권위 대신 침묵과 신뢰로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청년음악가 육성에 헌신한 지휘자
    • 생몰: 1933년 6월 26일 ~ 2014년 1월 20일
    • 국적·주 활동지: 이탈리아(밀라노) 출생, 밀라노·런던·빈·베를린·루체른 중심 활동
    • 오페라·오케스트라 경력: 라 스칼라 1969~1986(상임지휘자→음악감독→공동예술감독), 런던 심포니 상임지휘자 1979~1988, 빈 국립오페라 음악감독 1986~1991
    • 베를린 필하모닉 상임지휘자: 1990~2002
    • 대표 창단: 구스타프말러청년오케스트라 창단(1986), 루체른페스티벌오케스트라 창단(2003)

    아바도 시작하기 좋은
    • 처음이라면: 루체른페스티벌오케스트라와 남긴 말러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

    2013년 볼로냐에서 미소 짓는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근접 초상
    2013년 3월 이탈리아 볼로냐에서의 클라우디오 아바도 (출처 : Wikimedia Commons · Sideralis · CC BY-SA 4.0)

    라 스칼라, 개혁의 시작

    밀라노에서 태어난 아바도는 밀라노 음악원과 빈 국립음악원에서 지휘를 공부했습니다. 그의 경력은 1960년대 후반, 밀라노의 명문 오페라극장 라 스칼라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그는 1969년 이 극장의 상임지휘자로 임명됐습니다. 1972년에는 음악감독이 됐습니다. 1976년부터는 연출가 조르조 스트렐러 등과 공동예술감독을 맡았고, 1986년까지 재직했습니다(이후 후임은 리카르도 무티였습니다).

    이 시기 그가 시행한 개혁은 오페라계의 관습을 크게 흔들었습니다. 오페라 시즌을 4개월로 늘렸습니다. 노동자와 학생을 위한 저렴한 공연도 마련해, 그때까지 상류층의 전유물이던 오페라를 더 많은 시민에게 열어 주었습니다.

    루이지 달라피콜라나 루이지 노노 같은 현대 작곡가의 작품도 적극적으로 무대에 올렸습니다. 1976년에는 미국 독립 200주년을 맞아 라 스칼라 오페라단을 이끌고 워싱턴 D.C.에서 공연했습니다.

    런던과 빈을 거쳐 베를린으로

    라 스칼라에서 물러날 무렵, 아바도의 활동 무대는 이미 오페라하우스 밖으로 넓어져 있었습니다. 1979년부터 1988년까지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를 맡았습니다. 1986년에는 빈 국립오페라의 음악감독으로도 취임해 1991년까지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세 도시의 경력이 겹치는 이 시기는 그가 오페라와 교향악단을 오가며 다음 자리를 준비한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 다음 자리가 베를린 필하모닉이었습니다.

    카라얀의 후임, 베를린필하모닉

    1989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상임지휘자직에서 물러나고 몇 달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베를린필하모닉 단원들은 그해 말 투표를 통해 아바도를 후임으로 선출했습니다. 아바도는 이듬해인 1990년 정식으로 취임해 2002년까지 이 자리를 지켰습니다. 이후 사이먼 래틀이 뒤를 이었습니다.

    카라얀 시대와 비교하면 오케스트라의 소리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베를린필 공식 회고는 아바도 시기의 음향이 점점 더 투명해졌다고 설명합니다.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대편성의 실내악’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재임 기간 동안 그는 구스타프 말러와 현대음악 레퍼토리도 오케스트라의 중심 목록으로 끌어올렸습니다.

    2008년 베를린 발트뷔네 야외무대에서 연미복 차림으로 서 있는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뒤편의 오케스트라
    2008년 5월 베를린 발트뷔네 무대에 선 클라우디오 아바도 (출처 : Wikimedia Commons · Leonach · CC BY-SA 3.0 DE)

    젊은 음악가를 키우다

    아바도는 평생 젊은 연주자를 발굴하고 키우는 일에 각별한 애정을 쏟았습니다. 1976년, 조이와 라이오넬 브라이어 부부가 유럽의회의 결의에 따라 유럽연합청년오케스트라(당시 명칭은 유럽공동체청년오케스트라)를 창설했습니다. 아바도는 이 오케스트라의 초대 음악감독을 맡았습니다.

    1986년에는 직접 구스타프말러청년오케스트라를 창단했습니다. 유럽 전역의 젊은 연주자들이 오디션을 거쳐 모이는 오케스트라입니다. 여기서 성장한 연주자들의 네트워크는 이후 아바도가 만든 여러 악단으로 이어졌습니다.

    투병과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2000년, 아바도는 위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이후 한동안 무대를 떠나 치료와 회복에 전념했습니다. 2001년 2월, 그는 베를린필과 함께 빈 무지크페라인 무대에 다시 섰습니다. 몰라보게 야윈 모습이었지만, 그는 지휘봉을 다시 들었습니다.

    이 복귀 공연 몇 주 뒤, 그는 루체른 페스티벌 예술감독 미하엘 해플리거와 함께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창단을 발표했습니다. 2003년 출범한 이 악단은 1938년 토스카니니가 모았던 전설적인 ‘엘리트 오케스트라’의 정신을 되살린 것으로 소개됩니다. 단원은 아바도가 직접 골랐습니다. 저명한 솔리스트와 실내악 연주자, 음악 교수, 그리고 말러 체임버 오케스트라·라 스칼라 필하모니카의 단원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이 오케스트라는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매년 여름 그의 음악적 유산이 집약되는 무대가 되었습니다.

    침묵의 리더십, 권위 대신 신뢰

    아바도의 리허설은 결이 달랐습니다. 그는 리허설에서 거의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대신 짧은 요청과 눈빛, 손짓만으로 오케스트라를 이끌었습니다.

    이런 방식은 그의 수줍은 성격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지휘자가 리허설에서 말을 너무 많이 하는 것을 단원들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여겼습니다. 카라얀이 정교하게 통제된 음향을, 첼리비다케가 극단적으로 긴 리허설을 택했다면, 아바도는 침묵과 신뢰로 같은 목표에 다가갔습니다.

    오늘 어디서부터 들을까

    처음이라면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남긴 말러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를 들어 보세요. 현이 거의 속삭이듯 들어오고, 하프가 그 위를 조용히 받칩니다. 말을 아낀 지휘자가 소리로 무엇을 만들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한 발 더 들어간다면 베를린필하모닉 시절 녹음한 브람스 교향곡 전곡을 들어 보세요. 카라얀 이후 이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어느 방향으로 투명해졌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무리

    아바도는 카라얀과 첼리비다케 다음 세대가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또 다른 방식을 보여 준 지휘자였습니다. 통제도, 고집도 아닌 침묵과 신뢰였습니다.

    그는 이 방식을 병마 앞에서도 놓지 않았습니다. 치료로 한동안 무대를 떠났지만, 회복한 뒤에는 다시 야윈 몸으로 지휘봉을 들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젊은 연주자들을 무대 위로 이끌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가 키운 오케스트라와 연주자들은 계속 연주하고 있습니다.

  • [지휘자 시리즈] 게오르크 솔티, 오페라하우스와 오케스트라, 녹음실을 잇다

    게오르크 솔티(Georg Solti)는 어떻게 오페라극장, 교향악단, 녹음실을 한 경력 안에서 이었을까요? 연도만 보면 재직과 녹음이 겹쳤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깊이 보면 다릅니다. 극장의 무대 감각, 오케스트라의 리허설, 녹음실의 책임감은 솔티에게 분리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1969년의 솔티는 코벤트가든(1961~1971)을 맡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시카고 심포니(1969~1991)도 이끌고 있었습니다. Decca 〈니벨룽의 반지〉 녹음(1958~1965)도 프랑크푸르트·코벤트가든 재임기에 걸쳐 있습니다. 시카고 재임 중에는 파리 관현악단 음악감독(1972~1975)까지 함께 맡았습니다.

    인물 한눈에 보기
    • 한 줄 정의: 오페라하우스, 오케스트라, 녹음실을 오가며 20세기 지휘자의 활동 범위를 넓힌 헝가리 태생의 영국 지휘자
    • 생몰: 1912년 10월 21일 ~ 1997년 9월 5일
    • 국적 이력: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생, 1953년 독일 시민권 취득, 1972년 영국 시민권 취득
    • 핵심 자리: 프랑크푸르트 오페라 음악총감독 1952~1961, 코벤트가든 음악감독 1961~1971, 시카고 심포니 음악감독 1969~1991
    • 대표 녹음: Decca의 〈니벨룽의 반지〉 전곡, 최초의 스테레오 스튜디오 전곡 제작

    솔티 시작하기
    • 처음 접한다면: 솔티와 빈 필하모닉의 Decca 〈니벨룽의 반지〉 전곡에서 한 장면을 골라, 그 녹음이 왜 ‘스튜디오 전곡’이라는 말과 함께 기억되는지 들어 보세요.

    1975년 런던에서 촬영한 지휘자 게오르크 솔티의 초상 사진
    1975년 런던에서 촬영한 게오르크 솔티

    오페라하우스에서 시작된 경력의 축

    솔티는 부다페스트 리스트 음악원에서 배웠습니다. 스승은 버르토크·도흐나니·코다이·바이너였습니다. 1937년에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토스카니니의 조수로 발탁됐습니다. 전쟁이 다가오자 스위스로 피신해 피아니스트로 생계를 이었습니다. 1942년에는 제네바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했습니다. 이 시기의 경험은 이후 그가 극장의 문법을 빠르게 흡수하는 밑거름이 됐습니다.

    전후인 1946년, 솔티는 바이에른 국립오페라의 음악감독으로 임명됐습니다. 이어 프랑크푸르트 오페라의 음악총감독을 맡았습니다(1952~1961). 1961년부터 1971년까지는 코벤트가든의 음악감독으로 일했습니다.

    이 흐름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극장을 거쳐 갔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프랑크푸르트와 코벤트가든에서 쌓은 두 직함은 이후 시카고와 Decca를 만날 때도 이어집니다. 덕분에 솔티는 오페라와 교향악단, 녹음 중 한 영역에만 머문 지휘자로 좁혀 읽히지 않습니다. 오페라의 토스카니니, 교향악단의 푸르트벵글러, 음반의 카라얀과 나란히 놓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세 영역을 한 경력 안에서 동시에 오간 지휘자는 드뭅니다.

    로열 오페라의 공식 역사는 솔티 시기에 레퍼토리와 연주 양식에 변화가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그가 직접 지휘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새 프로덕션은 넷입니다. 〈장미의 기사〉·〈그림자 없는 여인〉·〈아라벨라〉·〈살로메〉입니다.

    시카고 심포니 22년, 그리고 겹쳐 있던 자리들

    솔티가 시카고 심포니를 음악감독으로 이끈 기간은 1969년부터 1991년까지 22년입니다. 이 시작은 코벤트가든 음악감독 재임의 마지막 세 해(1969~1971)와 겹칩니다. 1991년부터 1997년까지 그는 Music Director Laureate(음악감독 명예직)를 맡았습니다. 이는 음악감독 재임 뒤에 부여된 별도 직함입니다.

    CSO의 공식 말러 자료에 따르면 상황이 바뀐 것은 1969년 솔티 부임 이후였습니다. 그제야 말러의 모든 교향곡이 이 악단의 정기 레퍼토리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교향곡 제5번〉을 되살리고, 제7번을 37년 만에, 제8번을 54년 만에 이끌었습니다. 이어 10년 넘게 아홉 교향곡 전곡을 연주하고 녹음했습니다.

    시카고의 22년은 다른 자리들과도 겹칩니다. 솔티는 시카고 재임 중이던 1972~1975년, Orchestre de Paris의 음악감독을 맡았습니다. 이어 1979~1983년에는 London Philharmonic Orchestra의 수석지휘자를 겸했습니다. 한 지휘자의 활동을 한 도시와 한 악단으로만 좁혀 읽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솔티의 경력은 한 자리를 떠나 다음 자리로 옮기는 단선적인 연표로 읽기 어렵습니다. 서로 다른 조직에 동시다발적으로 닿아 있던 지도로 읽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솔티는 소리를 어떻게 만들었는가

    솔티에게 그 답은 리허설의 정직한 노동에서 시작됩니다. 1988년 인터뷰에서 그는 “먼저 힘든 노동이 있고, 그다음에야 무언가가 더해진다. 노동 없이는 그 ‘더해지는 것’도 있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무대 위 영감은 리허설이 끝난 뒤에야 허락되는 몫이었습니다.

    오페라하우스에서 시작된 경력은 이 노동관을 특히 또렷하게 보여줍니다. 솔티는 “거리에서 곧장 걸어 들어와 오페라를 지휘할 수는 없다. 오페라극장 안에서 자라야 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무대와 조명, 동작까지도 지휘자가 알아야 할 몫이라고 봤습니다. 프랑크푸르트와 코벤트가든에서 보낸 세월은 이 앎을 몸에 새기는 시간이었습니다. 시카고 심포니를 이끌 때도 이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녹음실에서는 같은 노동관에 다른 무게가 더해졌습니다. 솔티는 “콘서트는 연주하고 나면 사라지지만, 녹음은 20년이든 30년이든 40년이든 남는다. 그 책임감이 연주에 특별한 무언가를 더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오페라하우스의 무대 감각, 오케스트라의 리허설, 녹음실의 반복 청취는 서로 다른 일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노동관이 세 곳에서 다르게 나타났을 뿐입니다.

    〈니벨룽의 반지〉가 남긴 스튜디오의 시간

    솔티의 Decca 〈니벨룽의 반지〉 전곡은 1958년부터 1965년까지 빈에서 녹음됐습니다. 이 기간은 프랑크푸르트 재임(1952~1961)과 코벤트가든 재임(1961~1971)에 걸쳐 있습니다. 빈 필하모닉과 함께한 이 프로젝트는 Decca의 프로듀서 존 컬쇼가 제작을 총괄했습니다.

    Decca는 이를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의 최초의 스테레오 스튜디오 전곡 제작으로 규정합니다. 컬쇼는 이 작업을 ‘마음의 극장(theatre of the mind)’이라 불렀습니다. 무대 없이도 청자의 머릿속에 오페라의 극적 공간을 그려내는 것이 스튜디오 녹음의 목표라는 뜻이었습니다.

    1974년 암스테르담에서 데카 음반을 들고 앉아 있는 게오르크 솔티
    1974년 9월 25일 암스테르담 암스텔호텔에서 새 음반을 들고 있는 솔티.

    31회 GRAMMY 기록

    솔티의 경력 총 GRAMMY 수상은 31회이며, 후보는 74회입니다. 마지막 수상은 40th Annual GRAMMY Awards였습니다. 부문은 Best Opera Recording, 작품은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입니다. 이 31회에는 사후 수상도 포함됩니다.

    솔티의 31회는 클래식 분야 최다 수상 기록입니다. Beyoncé는 2023년 32회로 솔티를 넘었고, 2026 GRAMMYs 기준 35회입니다.

    어디서부터 들을까

    처음 접한다면 〈라인의 황금〉 3장, 니벨하임으로 내려가는 장면을 들어 보세요. 악보는 18개의 조율된 모루를 요구하는데, 실제 무대에서는 거의 지켜지지 않는 지시입니다. 컬쇼는 실제로 모루 18개와 연주자 18명을 구해 이 장면을 녹음했습니다. 대장간의 쇳소리가 스튜디오 안에서 입체적으로 울립니다. 그 순간 ‘마음의 극장’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감이 잡힙니다.

    한 발 더 들어간다면 이 한 장면에서 시작해 전곡으로 넓혀 가 보세요. 오페라하우스의 무대 감각과 오케스트라의 리허설, 녹음실의 책임감이 어디서 만나는지 따라가면 됩니다.

    마무리

    솔티의 생애에는 프랑크푸르트, 코벤트가든, 시카고, 파리, 런던이 차례로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이름들은 단순한 이력의 정거장이 아닙니다. 오페라하우스와 교향악단, 녹음실을 서로 떨어진 영역으로 보지 않게 하는 연결점입니다.

    그의 〈니벨룽의 반지〉 전곡을 들을 때도 같은 질문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시카고 심포니의 22년을 떠올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지휘자는 어느 한 자리에서만 완성되는가. 솔티의 경력은 그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서로 다른 자리의 시간이 겹쳐 한 사람의 이름을 만든다고 말입니다.

  • [지휘자 시리즈] 세르지우 첼리비다케 — 같은 연주는 두 번 없다고 믿은 지휘자

    인물 한눈에 보기
    • 한 줄 정의: 녹음을 거부하고 오직 실황의 순간만을 믿은 지휘자
    • 생몰: 1912년 6월 28일 ~ 1996년 8월 14일
    • 국적·주 활동지: 루마니아 출생, 독일(베를린·뮌헨) 중심 활동
    • 핵심 자리: 전후 베를린필하모닉 지휘 1945~1952, 뮌헨필하모닉 음악총감독 1979~1996
    • 대표 실황: 브루크너 교향곡 7번(베를린필, 1992년 복귀 공연), 브람스 교향곡 전곡(뮌헨필)

    첼리비다케 시작하기 좋은 
    • 처음이라면: 뮌헨필하모닉과 남긴 브루크너 교향곡 7번 실황

    도입: 1992년 3월, 약 38년 만의 재회

    1992년 3월 31일, 베를린 샤우슈필하우스(현재의 콘체르트하우스). 무대에 오른 것은 80세의 세르지우 첼리비다케(Sergiu Celibidache)였습니다. 약 38년 만에 다시 선 자리였습니다.

    그는 브루크너 교향곡 7번을 지휘했습니다. 독일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의 초청으로 열린, 루마니아 아동시설 지원 자선 공연이었습니다. 냉전의 대부분을 가로지른 한 지휘자와 한 오케스트라의 오랜 단절을 끝내는 순간이 그 자리에 겹쳐졌습니다.

    약 38년 전인 1954년 11월, 첼리비다케는 베를린필과 마지막 공연을 했습니다. 이듬해 푸르트벵글러의 후임으로 선택된 사람은 그가 아니라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었습니다. 그 뒤 첼리비다케는 1992년까지 이 오케스트라의 무대에 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평생 스튜디오에서 음반을 남기는 일도 극도로 거부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왜 한 지휘자가 기록을 남기는 일 자체를 거부하며 살았는가를 추적해 보려합니다.

    1969년 정장 차림으로 앉아 있는 지휘자 세르지우 첼리비다케
    세르지우 첼리비다케, 1969년. 스웨덴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이스라엘 방문 당시 촬영

    1945년, 무명의 지휘자가 등판하다

    루마니아에서 태어난 첼리비다케는 베를린으로 건너와 철학과 음악학을 공부했습니다. 그가 세상에 알려진 계기는 뜻밖의 비극에서 비롯됐습니다.

    2차대전 종전 직후 베를린필을 이끌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나치 협력 혐의로 연합군의 탈나치화 심사를 받으며 지휘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 공백을 메운 것은 반나치 이력 덕분에 소련 점령당국의 신임을 얻은 지휘자 레오 보르하르트였습니다. 그런데 1945년 8월 23일, 보르하르트는 연합군 검문소를 지나던 중 오인사격으로 갑작스레 목숨을 잃었습니다.

    마침 첼리비다케는 베를린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주최한 지휘 콩쿠르에서 이미 우승을 거둔 상태였습니다. 이 급작스러운 공백은 무명이었던 그에게 뜻밖의 기회가 되었고, 그는 이렇게 발탁되어 전후 베를린필의 주요 지휘를 맡게 됐습니다. 푸르트벵글러가 탈나치화 심사를 마치고 1947년 복귀한 뒤에도 첼리비다케는 1952년까지 베를린필을 꾸준히 지휘했습니다.

    베를린필의 선택, 그리고 약 38년의 단절

    1954년 11월 푸르트벵글러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후임 자리를 두고 첼리비다케가 유력한 후보로 거론됐습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55년, 베를린필이 최종적으로 선택한 지휘자는 카라얀이었습니다.

    이 선택으로 이미 멀어진 관계는 장기적인 단절로 굳어졌습니다. 첼리비다케는 1954년 11월 마지막 공연 이후 1992년까지 베를린필 무대에 서지 않았습니다. 첼리비다케와 베를린필의 단절은 카라얀이 세상을 떠난 뒤에야 끝났습니다. 1992년 3월 31일, 독일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의 초청으로 첼리비다케는 다시 베를린필의 지휘봉을 잡았습니다. 루마니아 아동시설 지원 자선 공연이었습니다.

    녹음을 거부한 철학, 선(禪)과 현상학

    첼리비다케는 평생 스튜디오 녹음을 극도로 꺼렸습니다. 그가 생전에 공식적으로 승인한 녹음은 극히 드물었고, 오늘날 전해지는 그의 음반 대부분은 사후에 유족의 허락을 얻어 공개된 실황 녹음입니다.

    이 신념은 두 갈래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는 베를린 유학 시절 스승 마르틴 슈타인케를 통해 접한 선불교였습니다. 그는 1986년 한 인터뷰에서 슈타인케를 통해 선의 길을 찾았고, 선 없이는 이 낯선 원리를 알 수 없었을 것이라고 직접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일본어로 일기일회, 곧 지금 이 만남은 생애 단 한 번뿐이라는 말과도 통합니다.

    다른 하나는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이었습니다. 그는 후설의 개념을 끌어와 음악의 현상학이라 부를 만한 독자적인 이론을 세웠고, 이를 1960년대 이탈리아 치지아나 음악원 강의와 1978년부터 1992년까지 이어진 독일 마인츠 대학 강의에서 직접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이 두 갈래가 합쳐져, 그에게 연주란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와 청중이 그 순간에만 함께 완성하는 일회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녹음은 이 생생한 순간을 죽은 물건으로 박제하는 행위였습니다.

    뮌헨필하모닉과 후기 활동

    1979년부터 199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첼리비다케는 뮌헨필하모닉의 음악총감독으로 재직했습니다. 베를린필을 떠난 뒤 여러 악단을 거친 그가 가장 오랫동안 머문 자리였습니다.

    극단적으로 느린 템포, 옹호와 비판

    첼리비다케의 후기 연주를 이야기할 때 가장 자주 언급되는 특징은 유난히 느린 템포입니다. 브루크너나 브람스 같은 후기 낭만주의 교향곡에서 특히 두드러졌습니다.

    이를 둘러싼 평가는 크게 둘로 나뉩니다.

    시각 핵심 주장
    옹호하는 시각 느린 템포는 작품 속 화성과 울림이 완전히 펼쳐지고 사라질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려는 선택이다. 서두르지 않는 이 호흡에서 다른 지휘자들이 놓치는 깊이가 드러난다는 시각이다.
    비판하는 시각 지나치게 느려진 템포는 긴장을 지속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집중을 흐트러뜨린다. 음악적 설득력보다 지휘자 개인의 고집이 앞선다는 비판이다.

    첼리비다케의 음악관에서는 녹음을 근거로 연주를 평가하는 일 자체가 중요한 기준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음악은 녹음된 결과보다 그 순간의 연주 경험에 더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이례적으로 긴 리허설, 완벽주의

    첼리비다케는 다른 지휘자들보다 훨씬 긴 리허설 시간을 요구하는 것으로도 유명했습니다. 1992년 베를린필 복귀 공연 때에는 평소의 두 배에 해당하는 리허설을 요구했습니다. 이 완벽주의적 태도는 녹음을 거부한 신념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단 한 번의 실황을 위해 오케스트라가 그 순간에 완전히 도달할 때까지 시간을 아끼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어디서부터 들을까

    처음이라면 뮌헨필하모닉과 남긴 브루크너 교향곡 7번 실황입니다. 그가 평생 지켜 온 느린 호흡과 깊은 울림을 가장 직관적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한 발 더 들어간다면 1992년 3월 31일 베를린필 복귀 공연의 브루크너 교향곡 7번입니다. 같은 곡을 서로 다른 두 오케스트라에서 첼리비다케가 어떻게 빚어냈는지 비교할 수 있습니다.

    비교 청취를 해본다면 같은 브루크너 교향곡을 카라얀의 베를린필 녹음과 이어 들어보세요. 한 시대, 두 라이벌이 같은 작곡가에게 내놓은 서로 다른 답을 직접 판단할 수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첼리비다케는 어떻게 무명에서 베를린필 지휘자가 됐나요?
    1945년 8월 23일, 종전 직후 베를린필을 이끌던 지휘자가 검문소에서 벌어진 오인사격으로 갑작스레 목숨을 잃었습니다. 마침 베를린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주최한 지휘 콩쿠르에서 이미 우승해 있던 무명의 그에게 이 빈자리는 뜻밖의 기회가 되었고, 그는 전후 베를린필의 주요 지휘를 맡게 됐습니다.

    Q. 첼리비다케가 왜 카라얀에게 밀려났나요?
    전임 지휘자의 사망 이후 후임 자리를 두고 물망에 올랐지만, 최종 선택을 받은 것은 카라얀이었습니다. 자신이 오랫동안 실질적으로 이끌어 온 악단에서 후임으로 선택되지 못한 이 경험은 깊은 앙금으로 남았고, 그는 1992년까지 베를린필 무대에 서지 않았습니다.

    Q. 첼리비다케는 왜 음반 녹음을 거부했나요?
    스승을 통해 접한 선불교의 영향과, 철학자 후설의 현상학을 스스로 음악에 접목한 이론이 함께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그에게 연주는 그 순간 오케스트라와 청중이 함께 완성하는 일회적 사건이었고, 녹음은 이 살아 있는 순간을 죽은 기록으로 남기는 행위라고 여겼습니다.

    Q. 첼리비다케가 베를린필과 화해한 적이 있나요?
    있습니다. 카라얀이 세상을 떠난 뒤인 1992년 3월 31일, 독일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의 초청으로 그는 약 38년 만에 베를린필 무대에 다시 서서 브루크너 교향곡 7번을 지휘했습니다. 루마니아 아동시설 지원 자선 공연이었습니다.

    Q. 첼리비다케는 어느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오래 활동했나요?
    뮌헨필하모닉입니다. 1979년부터 세상을 떠난 해인 1996년까지, 그는 이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여러 악단을 거친 경력 가운데 가장 긴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습니다.

    Q. 첼리비다케의 느린 템포는 왜 논쟁거리가 됐나요?
    브루크너나 브람스 같은 곡에서 유독 느려지는 그의 템포를 두고, 화성이 충분히 펼쳐질 시간을 확보한 깊이 있는 해석이라는 평가와, 긴장을 지속시키지 못하고 늘어질 뿐이라는 비판이 함께 존재했습니다.

    Q. 첼리비다케의 리허설이 유난히 길었다는 게 사실인가요?
    유별날 정도로 리허설에 공을 들였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1992년 베를린필 복귀 공연 때에는 평소의 두 배에 해당하는 리허설을 요구했습니다.

    마무리

    녹음에 대한 태도만 놓고 보면, 첼리비다케는 카라얀과 거의 정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카라얀이 스튜디오에서 소리를 다듬고 이를 세계 곳곳에 실어 날랐다면, 첼리비다케는 단 한 번의 실황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믿으며 기록을 거부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오래지만, 오늘날 우리가 듣는 그의 음반은 대부분 그 신념을 거스르며 사후에 세상에 나온 것들입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을 향한 한 지휘자의 고집이 남긴 가장 역설적인 유산일지도 모릅니다.

  • [지휘자 시리즈] 펠릭스 멘델스존: 지휘봉을 든 최초의 현대 지휘자

    지휘자 시리즈

    위대한 지휘자들을 탐구하는 시리즈, 두 번째 주인공은 ‘현대 지휘의 아버지’라 불리는 펠릭스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 1809~1847)입니다. 우리는 그를 주로 달콤하고 우아한 낭만주의 음악을 만든 작곡가로만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는 1829년부터 본격적으로 ‘지휘봉(Baton)’을 사용하여 오케스트라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방식을 대중화시킨 혁명적인 인물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콘서트홀에서 보는 ‘지휘자의 모습’은 사실상 멘델스존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핵심 요약: 지휘자 멘델스존의 업적

    • 목재 지휘봉 사용을 대중화하며 ‘현대 지휘’의 시각적, 기능적 출발점을 제시
    • 1829년, 바흐의 〈마태수난곡〉 부활 공연을 강력한 리더십으로 성공시킴
    • 1835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유럽 최정상급 악단으로 견인
    • 엄정한 리허설을 통한 정확성·투명성·절제의 해석으로 오케스트라의 전문성 확립
    • 1843년 라이프치히 음악원 설립으로 후대 지휘 및 작곡 교육에 지대한 영향

    1. 지휘봉의 등장: ‘소리 내지 않는 리더’가 필요해진 이유

    독일 함부르크의 부유한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난 멘델스존은 어린 시절부터 집안에서 열리는 살롱 음악회를 통해 자연스럽게 앙상블을 이끄는 실질적 기량을 습득했습니다.

    저명한 음악 평론가 해롤드 숀베르그는 저서 『위대한 지휘자들』에서 멘델스존을 “현대 지휘자의 출발점”으로 규정합니다. 그렇다면 왜 멘델스존 시대에 이르러서야 지휘봉을 든 지휘자가 필요해졌을까요?

    그 이전 고전주의 시대까지만 해도 오케스트라의 규모는 크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제1바이올린 연주자(악장)가 활을 휘저으며 박자를 맞추거나, 하프시코드 연주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연주를 이끄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19세기에 접어들며 악기가 개량되고 오케스트라 규모가 거대해졌습니다. 음악 또한 템포가 수시로 변하고 다이내믹(음량) 대비가 극심해졌죠. 이제 연주를 하면서 동시에 박자를 맞추는 것은 불가능해졌습니다. 오직 전체 사운드의 밸런스를 밖에서 듣고 통제할 ‘소리를 내지 않는 독립된 지휘자’가 구조적으로 필연적이 된 것입니다. 멘델스존은 그 흰색 목재 지휘봉을 가장 효과적으로 휘두른 최초의 마에스트로였습니다.

    현대 지휘의 선구자 멘델스존과 지휘봉
    현대 지휘의 선구자 멘델스존과 지휘봉
    💡 [알아두면 좋은 사실] 지휘봉을 맨 처음 든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지휘봉을 독일어권 오케스트라의 일상적인 관행으로 ‘대중화’한 인물이 멘델스존이라면, 그보다 앞서 지휘봉을 손에 든 인물도 있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 루이 슈포어(Louis Spohr)는 1820년 런던 필하모닉 소사이어티 공연에서 독일식 지휘봉을 사용했고, 그 모습은 런던 청중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멘델스존이 남다른 지점은 1829년부터 1835년 게반트하우스 부임을 거쳐, 지휘봉을 독일어권 오케스트라 전반의 표준 관행으로 뿌리내리게 했다는 데 있습니다. ‘먼저 든 사람’과 ‘표준으로 만든 사람’은 서로 다른 인물이었던 셈입니다.

    2. 음악의 독재자, 그러나 오케스트라를 가족으로 품다

    지휘자로서 멘델스존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는 1829년 베를린에서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초연(1727년) 이후 약 100년 만에 부활시킨 사건입니다. 이 잊혀졌던 거대한 종교 음악은 복잡한 이중 합창과 치밀한 대위법으로 얽혀 있었습니다. 이 곡을 수백 명의 아마추어/프로 혼성 단원들이 박자에 맞춰 연주해 내려면, 강력한 통찰력과 카리스마를 가진 지휘자의 ‘중앙 통제’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멘델스존은 이 거대한 앙상블을 암보(악보를 다 외움)로 완벽하게 장악하며 음악사를 뒤바꿔 놓았습니다.

    💡 [사실 확인] 1829년 그날, 무대 뒤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스무 살의 멘델스존을 무대로 이끈 것은 친구이자 바리톤 가수였던 에두아르트 데브리엔트였습니다. 그는 “이 곡을 지휘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사람은 당신뿐입니다”라며 멘델스존을 설득했습니다. 두 사람은 멘델스존의 스승이자 베를린 징아카데미 합창단을 이끌던 카를 프리드리히 첼터를 찾아갔습니다. 첼터는 처음엔 “너희 같은 애송이들이 그걸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며 회의적이었지만, 결국 합창단과 공연장을 내주었습니다. 1829년 3월 11일, 158명의 합창단과 함께 베를린 징아카데미에서 열린 이 공연은 〈마태수난곡〉이 1727년 라이프치히 토마스 교회에서 초연된 지 정확히 102년 만의 부활이었습니다. 멘델스존은 원곡의 아리아 10곡과 코랄 6곡을 덜어내 상연 시간을 절반으로 줄이는 대담한 편집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1835년, 그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부임합니다.

    💡 [알아두면 좋은 사실] 게반트하우스 데뷔 무대, 그날의 날짜

    멘델스존이 게반트하우스카펠마이스터로 처음 지휘봉을 든 것은 1835년 10월 4일, 그의 나이 스물여섯 살 때였습니다. 그는 낯선 도시의 오케스트라 앞에서 자신이 작곡한 서곡 〈고요한 바다와 즐거운 항해(Meeresstille und glückliche Fahrt)〉를 첫 곡으로, 이어 베토벤 교향곡을 프로그램에 올렸습니다. 자신의 작품으로 무대를 열었다는 것 자체가, 이 자리가 누구의 무대인지를 보여 주는 선언이었던 셈입니다. 그는 이렇게 12년에 걸친 게반트하우스 시대를 열었습니다.

    부임 당시 그는 계약 조건으로 “음악가들을 완전히 통제할 권한”을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동시대인들이 “독재(dictatorship)”라고 부를 만큼 그의 리허설은 엄격했습니다. 완벽한 사운드와 투명한 균형이 잡힐 때까지 수차례의 리허설을 고집했죠.

    하지만 그의 독재는 권위주의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원들의 연봉 인상과 처우 개선을 위해 이사회와 싸웠고, 오케스트라를 가족처럼 대우했습니다. 그의 세심한 지휘 아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는 로베르트 슈만 등 동시대 작곡가들의 신작을 초연하는 유럽 교향악의 최고 중심지로 우뚝 섰습니다.

    3. 바그너와의 템포 논란: 투명성을 향한 의도적 해석

    멘델스존의 지휘 스타일은 정확성, 투명성, 절제된 표현으로 요약됩니다. 동시대인들은 지휘대 위에서의 그를 “전기와 같은 힘, 자석 같은 매혹”이라 묘사하며 오케스트라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악기처럼 다루었다고 극찬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빠른 템포’는 당시 음악계에 큰 논란을 낳았습니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멘델스존의 템포가 지나치게 빨라 음악의 디테일과 감정을 해친다고 맹렬히 비판했습니다.

    💡 [심화 분석] 멘델스존은 왜 그렇게 지휘를 빨리 했을까요?

    단순히 성미가 급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낭만주의 시대의 연주 관행은 감정을 쥐어짜 내기 위해 템포를 질척거리게 늘이고 과도한 루바토(밀고 당기기)를 남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멘델스존은 이러한 ‘감정 과잉(센티멘털리즘)’을 혐오했습니다. 그는 곡의 구조적 뼈대와 각 악기 파트 간의 대위법적 밸런스를 투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템포를 팽팽하게 당겼습니다. 즉, 그의 빠른 템포는 고전주의적 명료함을 지키기 위한 고도의 구조적 해석이었습니다.

    4. 최초의 현대 지휘자, 그 영원한 유산

    초기 교향악에 대해 로베르트 슈만은 “교향곡은 공화국처럼 지휘자 없는 자율적 앙상블이어야 한다”며 지휘자의 존재 자체에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멘델스존의 압도적인 지휘 효과를 목격한 후 슈만 역시 그 필요성을 철저히 인정하게 됩니다.

    멘델스존은 박자만 맞추는 메트로놈이 아니라, 곡을 해석하고 프로그램 기획과 역사적 맥락까지 지배하는 ‘예술 감독형 지휘자’의 원형을 제시했습니다. 동시대 평론가들은 같은 프로그램이라도 멘델스존이 지휘봉을 들면 오케스트라가 마법에 걸린 듯 전혀 다른 차원의 소리를 낸다고 기록했습니다.

    작곡가, 연주자, 청중 사이의 완벽한 매개자로서 멘델스존이 19세기에 닦아놓은 리더십은, 오늘날 전 세계 모든 마에스트로들이 걷고 있는 굳건한 길이 되었습니다.

    5. 못다 이룬 유산: 라이프치히 음악원과 다음 세대

    멘델스존의 지휘가 남긴 유산은 콘서트홀 안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1842년, 그는 라이프치히 시민 하인리히 블뤼머가 남긴 2만 탈러의 유산을 음악 교육 기관 설립에 쓸 수 있도록 작센 국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의 승인을 얻어냈고, 이듬해인 1843년 4월 2일 오늘날의 독일 영토를 기준으로 최초로 꼽히는 고등 음악교육 기관인 라이프치히 음악원을 열었습니다.

    멘델스존은 자신이 신뢰하던 음악가들을 교수진으로 불러 모았습니다. 게반트하우스의 콘서트마스터 페르디난트 다비트가 바이올린을, 이그나츠 모셸레스가 피아노를, 모리츠 하웁트만이 음악 이론을 맡았고, 로베르트 슈만도 교수진에 이름을 올렸습니다(다만 슈만의 재직 기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이 음악원은 훗날 유럽 각지의 음악 교육 기관들이 참고하는 표본이 되었고, 개원 이후 수십 년간 미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의 유학생들을 끌어들였습니다. 지휘봉으로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통제했던 사람이, 이번에는 제도를 통해 다음 세대의 귀와 손까지 길러내려 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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