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한눈에 보기
• 인물: 요제프 하이든 (Joseph Haydn, 1732–1809)
• 집중 분석 시기: 1761–1790년 궁정 근무 / 1791–1795년 런던 활동
• 경제적 3단계: 400굴덴 연봉 계약(1761) → 출판권 확보(1779) → 런던 티켓 시장 진출(1791)
• 대표작: 교향곡 제45번 〈고별〉, 런던 교향곡 제94번 〈놀람〉, 오라토리오 《천지창조》
• 핵심 통찰: 궁정 후원과 출판 시장, 공개 공연 시장을 결합한 초기의 대표적 직업 작곡가였다.
하이든의 일생을 흔히 ‘가난을 이겨낸 평온한 천재’로 묘사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 묘사는 서양음악사에서 가장 극적이고 성공적이었던 비즈니스 스토리를 절반만 보여줄 뿐입니다. 변성기를 맞아 빈 소년합창단을 떠난 뒤, 레슨과 반주, 편곡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청년이, 훗날 런던의 콘서트홀에서 하룻밤 수천 굴덴의 박수갈채를 받는 스타로 변신한 이야기. 하이든의 음악을 극적으로 바꾼 것은 돈의 절대적인 액수라기보다, ‘돈을 지급하는 주체’가 한 명의 후작에서 출판업자와 수백 명의 대중으로 확장된 사건이었습니다.
1795년의 하룻밤과 1761년의 계약서
1795년 5월 4일, 런던 킹스 시어터(King’s Theatre)의 새 연주회장. 63세의 하이든은 자신의 수혜 연주회(Benefit Concert)를 마치고 정산된 금액을 보며 스스로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당시 그가 손에 쥔 순수입은 약 400파운드. 하이든은 “영국에서만 하룻밤에 4,000굴덴을 벌 수 있다”는 취지로 기록하며 경이로워했습니다.
1809년에 출판된 런던 킹스 시어터의 내부 판화(출처: regrom.com)
물가와 구매력이 다르기에 직접적인 가치 비교에는 한계가 있지만, 4,000굴덴은 1761년 하이든의 초임 연봉 400굴덴과 비교하면 명목금액으로 열 배에 해당했습니다. 1761년 5월 1일, 합스부르크 제국의 유력 귀족 가문인 에스테르하지(Esterházy)의 부악장으로 처음 서명한 계약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연봉 400굴덴(Gulden, 영어권 자료에서는 플로린 florin으로 표기)을 분기별로 지급한다. 식사는 하급 관리 식탁에서 해결한다.” 그 서명과 함께 하이든은 제복을 입은 ‘상급 하인’이자 합스부르크 제국의 유력 귀족 가문의 음악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궁정이 제공한 오케스트라 연구실
에스테르하지 궁정은 30년에 걸쳐 하이든에게 고립과 안정을 동시에 제공했습니다. 그의 연봉은 파울 안톤 후작 시절 400굴덴에서 시작해, 뒤를 이은 니콜라우스 1세 치하에서 600굴덴, 782굴덴으로 꾸준히 인상되었습니다. 초기 400굴덴도 당시 상급 관리에 해당하는 안정적인 소득이었으며, 1790년 궁정악단이 해산된 뒤에는 연 1,400굴덴의 연금과 명목상 지위가 보장되었습니다.
그러나 창작의 자유는 제한적이었습니다. 작곡한 모든 음악은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소유였고, 니콜라우스 1세가 바리톤(Baryton — 첼로와 비슷하지만 뒷면에 튕길 수 있는 공명현이 달린 18세기 찰현악기)을 연주하기 좋아했기 때문에 하이든은 175곡에 이르는 바리톤 작품을 써야 했습니다. 또한 연주자와 가수들의 규율을 관리하고 잦은 오페라 공연을 올리는 것도 그의 몫이었습니다.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악기를 재현한 바리톤
그럼에도 이 시기는 단순한 억압이 아니었습니다. 전속 악단을 가까이 둔 하이든은 자신이 쓴 음악의 효과를 실제 연주로 즉시 확인하고, 연주자들의 장단점과 청중의 반응에 맞게 수정할 수 있었습니다. 안정된 월급은 완전한 자유를 주지는 않았지만, 실패와 수정을 반복하며 교향곡의 뼈대를 다듬을 수 있는 완벽한 ‘오케스트라 연구실’을 제공했습니다.
💡 감상 포인트: 교향곡 제45번 〈고별〉 (1772)
에스테르하저 궁전의 장기 체류로 가족을 만나지 못하는 악단 단원들의 불만을 대변하기 위해, 하이든은 4악장 후반부에 단원들이 한 명씩 연주를 멈추고 무대를 퇴장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곡은 월급을 주는 고용주에게 노동 조건을 대놓고 말할 수 없었던 시대에, 음악이 대신 작성한 우아하고 은유적인 ‘집단 청원서’였습니다.
1779년의 진짜 전환점 — 출판 시장으로의 진출
하이든의 경제 구조에서 가장 결정적인 변곡점은 흔히 알려진 1791년 런던 진출이 아니라, 1779년의 계약 갱신이었습니다. 이 해에 체결된 새로운 계약서에서는, 하이든이 작곡한 작품을 후작이 독점한다는 조항이 마침내 삭제되었습니다.
이제 하이든은 아르타리아(Artaria)를 비롯한 주요 출판사에 자신의 악보를 팔 권리를 얻었고, 유럽 각지의 음악 애호가나 기관으로부터 외부 의뢰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1781년에 작곡되어 이듬해 출판된 현악 사중주 작품 33(Op. 33)은 이 변화를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이 작품들은 궁정 내부의 일회성 행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악보를 구매해 연주할 유럽 전역의 애호가들을 겨냥했습니다.
월급을 받던 음악가가 자신의 작품이 지닌 거대한 시장 가치를 확인한 순간이었습니다. 하이든의 이름은 런던으로 향하는 배를 타기 훨씬 전부터, 인쇄된 악보를 타고 국경을 넘어 유럽의 음악 시장에 널리 유통되고 있었습니다.
런던이 바꾼 음악 어법
1790년 니콜라우스 1세가 세상을 떠난 뒤, 영국의 흥행사 요한 페터 잘로몬(Johann Peter Salomon)이 빈으로 찾아와 하이든을 런던으로 이끌었습니다. 잘로몬이 제시한 첫 런던 계약은 교향곡과 소품의 작곡료, 출판권 대금, 수혜 연주회 수입 등을 합쳐 약 1,200파운드에 이르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 수입은 연주회 흥행과 개인 레슨, 별도의 악보 판매에 따라 유동적이었지만, 런던 시민들은 기꺼이 입장권을 사며 그의 수입을 배가시켰습니다.
한 사람의 후작이 아니라, 수백 명의 유료 청중이 돈을 지불하는 시장에 서게 되면서 런던 교향곡(제93번~제104번)의 음악 어법도 진화했습니다.
기대감을 높이는 느린 서주: 여러 런던 교향곡에서 1악장 도입부의 느린 서주는 연주회장 특유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뒤이어 등장하는 빠른 본악장을 더욱 극적으로 만듭니다.
음향의 확장: 런던의 넓은 연주 환경과 뛰어난 기량의 연주자들은 하이든이 트럼펫, 팀파니 등 관악기와 타악기의 음향을 한층 폭넓고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게 했습니다.
정교함과 직접성의 결합: 런던 교향곡은 처음 작품을 접하는 유료 청중에게 즉각적이고 명쾌한 효과를 전달하면서도, 작곡가가 평생 다듬어온 정교한 형식과 전개를 절대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교향곡 제94번 〈놀람〉입니다. 흔히 이 곡의 갑작스러운 타격음이 저녁 식사 후 졸고 있는 관객을 깨우기 위해서였다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지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하이든 본인은 후일 이 통설을 분명히 부정했습니다. 그는 대중에게 새롭고 충격적인 효과를 보여주어, 당시 경쟁 연주회 시리즈를 이끌며 위협이 되었던 이그나츠 플레옐(Ignaz Pleyel)에게 뒤지지 않으려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공개 연주 시장의 경쟁을 의식해 설계한 음악적 장치였던 것입니다.
구분
에스테르하지 궁정 (1761–1790)
런던 공개 연주 시장 (1791–1795)
돈을 지급하는 주체
후작 한 사람 (안정적인 분기별 연봉)
수백 명의 유료 청중과 출판업자
수입의 원천
고용 계약에 따른 급여 및 식비 보장
공연 수입·작곡료·출판권 판매 대금
작곡가의 위치
제복을 입은 상급 하인 및 음악 책임자
국제 공연 시장에서 명성을 수입으로 전환한 직업 작곡가
대표 작품
교향곡 제45번 〈고별〉
교향곡 제94번 〈놀람〉, 제104번 〈런던〉
자주 묻는 질문 (FAQ)
Q. 하이든은 에스테르하지 궁정에서 하인 신분이었나요?
엄밀히 말해 그렇습니다. 1761년 초기 계약서상 그는 ‘상급 하인(고급 관리)’ 신분이었고, 제복을 입어야 했으며, 작곡한 모든 음악은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소유였습니다. 그러나 예술적 대우와 악단 통솔권은 강력하게 보장받았습니다.
Q. 하이든이 궁정에서 받은 연봉은 얼마였나요?
처음 부악장으로 고용된 1761년에는 연봉 400굴덴(분기별 지급)이었습니다. 이후 600굴덴, 782굴덴으로 꾸준히 인상되었고, 1790년 궁정악단이 해산된 뒤에는 연 1,400굴덴의 연금이 보장되었습니다.
Q. 런던에서 하이든은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나요?
흥행사 잘로몬과의 첫 계약 조건은 작곡료, 출판권, 수혜 연주회 등을 합쳐 약 1,200파운드에 달했습니다. 두 차례 방문을 통해 거액의 부를 축적했으며, 1795년 한 번의 수혜 연주회에서는 하룻밤에 약 4,000굴덴(400파운드)의 명목 수익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Q. 런던 교향곡은 이전 교향곡들과 무엇이 다른가요?
소수의 귀족 살롱이 아닌 수백 명의 공개 연주회장을 위한 음악이었습니다. 기대감을 높이는 느린 서주, 트럼펫과 팀파니를 동원한 극적인 음향, 대중이 기억하기 쉬운 선율을 갖추면서도 교향곡 고유의 정교한 형식을 잃지 않았습니다.
Q. 교향곡 ‘놀람’의 타격음은 졸고 있는 청중을 깨우기 위한 것인가요?
흔히 졸고 있는 청중을 깨우기 위함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하이든 본인은 이를 직접 부정했습니다. 실제로는 대중에게 새롭고 충격적인 음향 효과를 보여주어, 당시 경쟁 연주회를 이끌던 플레옐(Ignaz Pleyel)에게 뒤지지 않기 위한 공개 연주 시장의 경쟁을 의식한 장치였습니다.
런던에서의 찬란한 성공을 뒤로하고 빈으로 돌아온 하이든은 헨델의 작품에 깊은 인상을 받아 생애 최대의 대작인 오라토리오 《천지창조》를 작곡합니다. 하이든은 단순히 답답한 궁정을 버리고 시장으로 뛰쳐나간 음악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궁정 악단이라는 든든한 실험실을 발판으로 삼아, 출판 시장을 통해 유럽의 독자를 확보하고, 런던 연주회 시장에서 대중의 박수를 획득해 나간 국제 음악시장을 성공적으로 활용한 대표적인 직업 작곡가였습니다. 오늘 하이든의 음악을 들으신다면, 우아한 선율 뒤에 자리한 18세기 출판업자들의 활기와 런던 유료 관객들의 뜨거운 환호성을 함께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작품 한눈에 보기
• 작곡가: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Franz Joseph Haydn, 1732~1809)
• 작품: 오라토리오 《천지창조(Die Schöpfung)》 Hob.XXI:2
• 편성: 독창(소프라노·테너·베이스), 혼성 합창, 오케스트라
• 대본: 창세기와 시편, 존 밀턴 《실낙원》을 바탕으로 한 익명 리브레토(독일어판은 판 슈비텐이 정리)
• 작곡·초연: 1796~1798년 작곡, 1798년 4월 30일 빈 슈바르첸베르크 궁전에서 초청 초연
이 글의 중심 질문
• 하이든은 형태 이전의 혼돈과 빛의 탄생을 어떻게 소리로 그렸을까요.
• 신앙과 계몽주의라는 서로 다른 두 시선이 어떻게 한 작품 안에서 만날까요.
하이든(1732~1809)이 남긴 오라토리오 《천지창조(Die Schöpfung)》는 성경 창세기를 음악으로 옮긴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 작품에는 한 인간의 신앙과, 자연을 이성으로 바라본 계몽주의의 낙관, 그리고 소리로 사물을 그리는 톤 페인팅의 재미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이 글은 작품의 배경과 구조를 정리하고, 혼돈에서 빛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세 갈래 청취 동선으로 안내합니다.
신앙과 계몽주의가 만난 자리
하이든의 신앙은 그의 악보에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많은 자필 악보의 첫머리에 ‘하나님의 이름으로(In nomine Domini)’라고 적고, 끝에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Laus Deo)’라고 자주 써넣었습니다. 모든 악보에 예외 없이 그랬다고 단정할 자료는 없지만, 자주 반복된 이 습관만으로도 그의 신앙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천지창조》는 신앙만의 작품이 아닙니다. 18세기 후반 유럽을 관통한 계몽주의는 자연을 관찰하고 질서를 발견하는 이성의 시선을 강조했습니다. 이 작품은 어둠과 혼돈에서 빛과 질서로 나아가는 서사를 따라가는데, 그 빛의 이야기는 무엇보다 창세기 본문 자체에 이미 들어 있습니다. 여기에 자연을 향한 계몽주의적 경외가 더해지면서, 신앙과 이성이 한 작품 안에서 나란히 울립니다.
런던의 헨델, 그리고 판 슈비텐
《천지창조》의 씨앗은 하이든의 두 차례 런던 체류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런던에서 헨델의 대규모 오라토리오 공연을 접하고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수백 명의 합창이 만드는 웅장한 소리는 그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주었고, 이 헨델 수용의 경험이 두 차례의 방문에 걸쳐 쌓였습니다.
런던에서 하이든은 창세기와 시편, 존 밀턴의 《실낙원》을 바탕으로 한 익명의 영어 리브레토를 얻었습니다. 이 원 대본의 정확한 작성자는 오늘날까지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오스트리아로 돌아온 하이든은 외교관이자 음악 애호가였던 고트프리트 판 슈비텐 남작과 함께 작업했습니다. 판 슈비텐은 독일어판 대본을 다듬고 음악적 처리에 의견을 보탠 협업자였습니다. 하이든과 판 슈비텐이 모두 프리메이슨과 관련이 있었고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사상을 공유했다는 독해도 있지만, 이는 작품을 읽는 여러 수용사적 해석 가운데 하나로 보는 편이 알맞습니다.
초연과 만년의 하이든
1808년 3월 27일 빈에서 열린 《천지창조》 기념 공연. 중앙 아래 모자를 쓴 인물이 하이든입니다.
《천지창조》의 초연은 1798년 4월 30일 빈의 슈바르첸베르크 궁전에서 초청 공연으로 이루어졌고, 첫 공개 공연은 이듬해인 1799년 3월 19일이었습니다. 초연 이후 작품은 유럽 전역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808년 3월 27일의 기념 공연은 하이든이 참석한 마지막 공개 행사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제자 베토벤이 노스승에게 다가가 손에 입을 맞추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동시대의 전승으로 남은 장면이니, 사실처럼 과장하기보다 전해지는 이야기로 두는 편이 정확합니다. 한편 《천지창조》와 《사계》의 여러 공연은 음악가 유족을 돕던 연금 단체 톤퀸스틀러 소치에테트(Tonkünstler-Societät)를 비롯한 자선 목적에 기여했습니다.
미켈란젤로 《아담의 창조》. 《천지창조》 제3부의 인간 창조 장면을 시각적으로 보완합니다.
세 부분으로 읽는 구조
《천지창조》는 전체 3부로 이루어지며, 기본 전개는 레치타티보로 줄거리를 펼치고, 아리아로 정서와 상징을 노래하며, 합창으로 함께 선포하고 확장하는 구도가 반복됩니다. 제1부는 빛과 땅과 천체, 제2부는 물과 하늘의 생명과 동물과 인간, 제3부는 아담과 이브를 중심으로 합니다.
이 작품에서 오케스트라는 단순한 반주를 넘어 또 하나의 이야기꾼처럼 움직입니다. 하이든은 콘트라바순의 낮은 소리로 큰 짐승의 무게를, 플루트의 트릴로 새의 날갯짓을 그리는 등 소리로 사물을 묘사하는 톤 페인팅을 곳곳에 두었습니다. 제1부 종결 합창 〈Die Himmel erzählen(하늘이 전하네)〉, 제2부의 소프라노 아리아 〈Nun beut die Flur(이제 들판은 싱그러운 초록을 펼치고)〉, 제3부의 합창 〈Stimmt an die Saiten(현을 울려라)〉 같은 대목이 각 부의 성격을 잘 보여 줍니다.
세 갈래 청취 동선
악장들을 길게 나열하기보다, 작품의 흐름을 따라가는 세 갈래로 좁혀 듣기를 권합니다. 판본에 따라 악장 번호와 언어가 다르므로, 아래에서는 악장의 이름과 낱말을 기준으로 짚습니다.
동선 1. 혼돈에서 빛으로. 서곡 〈혼돈의 묘사(Die Vorstellung des Chaos)〉는 예상되는 종지를 피하고 조성의 중심을 흔들며 형태 이전의 세계를 들려줍니다. 이어 라파엘의 낮은 레치타티보가 지나간 뒤, ‘빛이 있으라(Und es ward Licht)’라는 낱말에서 C장조의 대합창과 전 관현악이 한 번에 들어옵니다. 불안정한 화성이 이어지다 빛의 낱말에서 소리가 한꺼번에 켜지는 이 대비가 작품의 정체성을 규정합니다.
동선 2. 제2부의 동물 묘사. 제2부에서 라파엘이 땅의 짐승을 노래하는 레치타티보를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같은 구간 안에서 사자의 무게를 만드는 저음 관악과, 작은 생물의 꿈틀거림을 그리는 빠른 현악 음형이 나란히 놓입니다. 유머러스하다는 감상은 이 기보의 사실을 확인한 뒤에 붙이면 더 분명해집니다.
동선 3. 독창에서 합창으로 넓어지는 구조. 제1부를 닫는 합창 〈Die Himmel erzählen(하늘이 전하네)〉을 택해, 세 천사의 삼중창과 독창이 합창과 교대하고 겹치는 흐름을 따라가 보시기 바랍니다. 짧은 동기가 각 성부로 모방되며 진입하고, 편성이 넓어지며 질서와 균형의 이미지가 소리로 세워집니다.
전곡으로 듣기
작품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경험하고 싶다면, 한글 자막이 제공되는 아래 영상을 권합니다. 혼돈에서 시작해 빛과 생명, 그리고 인간의 사랑으로 이어지는 여정이 결국 감사와 영광의 합창으로 완성되는 큰 흐름을 한자리에서 따라갈 수 있습니다.
인물 한눈에 보기
– 한 줄 정의: 교향곡·현악사중주·소나타 형식의 뼈대를 완성해 빈 고전주의의 설계자가 된 오스트리아 작곡가
– 생몰: 1732년 3월 31일 오스트리아 로라우(Rohrau) ~ 1809년 5월 31일 빈
– 국적·활동지: 오스트리아 — 에스테르하지 궁정(아이젠슈타트·에스테르하자) 30년, 만년의 빈, 두 차례의 런던
– 작품 식별: 호보켄 번호(Hob.) — 네덜란드 음악학자 안소니 반 호보켄(Anthony van Hoboken)이 1957~1978년 편찬한 작품 목록
– 대표작 3개: 〈천지창조〉, 〈놀람 교향곡〉, 〈황제 4중주〉
하이든 시작하기 – 처음 듣는 분을 위한 가이드
– 처음 접한다면: 〈교향곡 94번 ‘놀람’〉 2악장 안단테 — 약 6분, 하이든 유머의 정수
– 그다음 한 곡: 〈트럼펫 협주곡 E♭장조〉 1악장 알레그로 — 약 6분 30초, 호칸 하르덴베리에르(Håkan Hardenberger) 또는 모리스 안드레(Maurice André) 음반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출처: classicfm.com)
하이든은 누구인가 — 빈 고전주의의 설계자
요제프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1809)은 교향곡과 현악 4중주, 그리고 소나타 형식의 뼈대를 완성해 빈 고전주의 음악의 설계자가 된 오스트리아 작곡가입니다. 그가 남긴 작품은 네덜란드 음악학자 안소니 반 호보켄(Anthony van Hoboken)이 정리한 호보켄 카탈로그(Hob.)에 약 750여 항목으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를 ‘교향곡의 아버지’라 부르는 이유는 단순히 100곡이 넘는 교향곡을 작곡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30여 년 동안 한 궁정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이 형식이 어떤 구조와 균형을 가져야 하는지 실험으로 직접 증명했고, 그 결과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같은 형식 위에서 자유롭게 도약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이든의 진짜 혁신은 단순히 4악장 구조를 만든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짧은 리듬 동기 하나를 곡 전체로 확장시키는 ‘동기 발전(motivic development)’의 대가였습니다. 몇 음에 불과한 단순한 아이디어가 반복·전조·리듬 변형을 거치며 거대한 악장 전체를 조직하는 방식은 후일 베토벤이 더욱 극적으로 계승하게 됩니다.
입문자가 가장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예는 〈교향곡 101번 ‘시계’〉 2악장입니다. 시계추처럼 반복되는 단순한 리듬이 처음에는 익살스러운 배경처럼 들리지만, 악장이 진행될수록 변주와 음색 변화, 긴장과 이완을 이끌어 가는 중심 장치가 됩니다. 하이든의 음악은 큰 감정을 먼저 외치는 방식보다, 작은 재료가 어떻게 질서와 놀라움으로 커지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에 가깝습니다.
물론 오늘날의 소나타 형식이 하이든 한 사람에 의해 갑자기 탄생한 것은 아닙니다. 만하임 악파와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C.P.E. Bach), 이탈리아 신포니아 전통 등 18세기 중반 유럽 음악계의 여러 흐름이 이미 형성되고 있었고, 하이든은 그것을 가장 정교하고 지속 가능한 구조로 조직한 인물이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흔히 잘못 알려진 사실이 있습니다. 모차르트가 그를 ‘파파(Papa)’라 부른 것은 사실이지만, 이 호칭의 진짜 기원은 모차르트가 아니라 에스테르하지 궁정에서 30년 넘게 그의 지휘 아래 있었던 단원들입니다. 그들에게 자상하고 끈질긴 변호자였던 하이든의 인품이 이 별명을 만들었습니다.
로라우의 수레공 아들에서 슈테판 대성당 합창단원으로
하이든은 1732년 3월 31일 헝가리 국경 근처의 작은 마을 로라우(Rohrau)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마티아스 하이든(Mathias Haydn)은 마을의 수레공이자 하프를 즐기는 음악 애호가였고, 어머니 안나 마리아 콜러는 결혼 전 인근 영주 가문의 요리사였습니다.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12남매 중 둘째 아들이었고, 그의 둘째 동생 미하엘 하이든(Johann Michael Haydn, 1737~1806)도 후일 잘츠부르크 궁정작곡가로 성장합니다.
1740년경, 8세의 하이든은 빈 슈테판 대성당의 음악감독 게오르크 폰 로이터(Georg von Reutter)에게 발탁되어 빈 슈테판 대성당의 합창단원이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약 10년 동안 노래하며 라틴어·수학·바이올린·건반악기를 배웠고, 빈 궁정의 종교음악 레퍼토리를 귀로 익혔습니다.
변성기와 함께 합창단을 떠난 사정에 관해서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집니다. 슈테판 대성당의 합창단원이었던 그가 호기심에 앞자리 동료의 꽁지머리를 가위로 잘랐고, 이 사건이 직접적인 퇴단의 계기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일화는 19세기 초 하이든 본인을 직접 인터뷰한 그리징어(Georg August Griesinger)와 디스(Albert Christoph Dies)의 전기에 실려 있어 1차 사료 근거가 분명하지만, 학자에 따라서는 퇴단의 결정적 이유보다는 변성기와 함께 찾아온 자연스러운 결말로 봅니다.
중요한 것은 결과입니다. 17~18세의 하이든은 안정된 소속을 잃고 빈 거리에서 스스로 생계를 꾸려야 했고, 거리 악사로 바이올린을 켜고 건반을 두드리며 독학으로 작곡을 익혔습니다. 다락방에서 추위를 견디며 보낸 이 시기의 끈질긴 자립심은 평생 그를 지탱했습니다. 이 무렵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 니콜라 포르포라(Nicola Porpora)의 반주자로 일하며 정식 작곡 수업을 사실상 처음 받았습니다.
에스테르하지 30년 — 고립이 만든 음악 실험실
에스테르하자 궁전
1761년 5월, 하이든의 인생에 결정적 전환점이 찾아옵니다. 헝가리의 대귀족 에스테르하지(Esterházy) 가문의 부악장으로 고용된 것입니다. 1766년 전임 악장 베르너의 사망 후 정악장으로 승진한 그는 이후 1790년까지 약 30년 동안 궁정의 음악 생활 전체를 책임졌습니다.
에스테르하지 궁정에서 그의 업무는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단순히 곡을 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약 15~20명 규모의 전속 오케스트라를 훈련시키고, 매주 두 차례 콘서트를 준비하며, 후작이 직접 연주하던 바리톤(viol 계열 옛 악기) 트리오를 약 125곡이나 따로 작곡했습니다. 후작 니콜라우스 1세를 위한 오페라 공연도 매번 무대에 올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환경은 오히려 그에게 완벽한 음악 실험실을 제공했습니다. 활동 본거지는 1767년부터 빈에서 동남쪽으로 약 100킬로미터 떨어진 시골 궁전 에스테르하자(Eszterháza)로 옮겨졌고, 빈의 최신 유행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그곳에서 하이든은 전속 오케스트라를 도구 삼아 새로운 화성과 형식을 마음껏 실험하고 그날 저녁에 곧바로 소리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810년 그의 첫 전기 작가 그리징어에게 하이든은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있었기에 누구도 나를 불안하게 만들거나 괴롭힐 수 없었고, 그래서 나는 독창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물리적 고립이 그를 빈 고전주의의 가장 정교한 형식 설계자로 만든 셈입니다.
💡 하이든의 유머 — 〈고별 교향곡〉(Hob.I:45)에 숨은 메시지
1772년에 작곡된 〈교향곡 45번 f♯단조 ‘고별’〉의 4악장 후반부는 연주자들이 한 명씩 차례로 촛불을 끄고 무대를 떠나는 독특한 연출로 유명합니다. 이는 단순한 무대 효과가 아니라 에스테르하자 궁정에 오래 머물며 가족과 떨어져 있던 단원들이 아이젠슈타트의 고향으로 휴가를 보내고 싶다는 청원을 음악을 통해 후작에게 우회적으로 전한 빛나는 재치였습니다. 다음 날 후작은 휴가를 허락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런던에서의 만개와 〈천지창조〉의 영감
1790년, 음악을 깊이 사랑했던 후작 니콜라우스 1세가 세상을 떠납니다. 뒤를 이은 안톤 후작은 음악에 큰 관심이 없어 궁정악단의 규모를 대폭 줄였습니다. 갑작스러운 실직 상태에 놓인 듯했지만, 악장 타이틀과 연금은 유지한 채 의무에서 풀려난 하이든에게 이는 사실상 자유였습니다.
때마침 영국의 음악 기획자 요한 페터 잘로몬(Johann Peter Salomon)이 빈으로 찾아와 그를 런던으로 초청합니다. 하이든은 1790년 12월부터 1792년 7월까지(첫 번째 방문), 그리고 1794년 1월부터 1795년 8월까지(두 번째 방문) 두 차례에 걸쳐 런던에 머물렀고, 이 두 시기에 12곡의 ‘런던 교향곡(교향곡 93~104번)’을 작곡했습니다.
당시 런던의 공개 연주회는 새 작품과 최신 유행을 만나는 거대한 축제였습니다. 빈에서 일생의 거의 전부를 후작 한 사람의 청중을 위해 작곡해 온 하이든은 처음으로 수천 명의 시민 청중을 직접 만났고, 그들의 환호 속에서 작곡가는 자기 음악의 가장 자유롭고 화려한 정점에 도달했습니다. 〈놀람〉(94번), 〈군대〉(100번), 〈시계〉(101번), 그리고 마지막 작품인 〈런던〉(104번)이 모두 이 시기 작품입니다.
런던 교향곡 104번 자필 악보
1791년 웨스트민스터 사원 — 〈천지창조〉의 직접 출발점
첫 런던 방문 중인 1791년, 59세의 하이든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린 핸델 페스티벌에 참석합니다. 1,000명 안팎의 합창단과 오케스트라가 한자리에 모여 핸델의 〈메시아〉와 〈이스라엘인 이집트에서〉를 연주하는 모습에 그는 압도되었습니다. 그가 빈에서 평생 작곡해 온 실내 규모의 종교음악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합창 음향이었습니다.
이 경험이 그의 만년 걸작 두 편의 직접 출발점입니다. 빈으로 돌아온 그는 1796년 10월부터 약 2년에 걸쳐 오라토리오〈천지창조(Die Schöpfung)〉를 작곡했고, 1798년 4월 29일과 30일 빈 슈바르첸베르크 궁전에서 하이든 본인의 지휘로 초연했습니다. 대본은 후원자였던 고트프리트 판 스비텐(Gottfried van Swieten) 남작이 밀턴의 『실낙원』과 창세기, 시편에서 발췌해 독일어로 정리했습니다.
1798년 빈에서 초연된 천지창조 초판 표지
1801년 4월 24일 같은 슈바르첸베르크 궁전에서 두 번째 오라토리오 〈사계(Die Jahreszeiten)〉가 초연되었습니다. 이미 건강이 쇠퇴하기 시작한 하이든에게 작곡 과정은 큰 부담이었지만, 두 작품은 그의 만년 예술 세계를 숭고하게 마무리하는 정점이 되었습니다.
모차르트와 베토벤, 그리고 ‘파파 하이든’
하이든의 음악사적 위치는 빈 고전파 3대 거장 중 다른 두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는 모차르트의 친구이자 멘토였고, 베토벤의 스승이었습니다.
모차르트와의 우정 — 1785년 〈하이든 사중주〉 헌정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우정은 1780년대 초 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24살 차이가 났지만 서로의 음악을 깊이 존중했고, 함께 현악사중주를 연주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1785년 모차르트는 자신의 현악 4중주 6곡(K. 387, 421, 428, 458, 464, 465)을 하이든에게 헌정하면서 헌정사에 “내 가장 사랑하는 친구 하이든에게”라고 적었습니다.
이 6곡은 모두 하이든의 현악사중주 Op.33 〈러시아〉(1781) 6곡에서 직접 영감을 받아 작곡된 작품으로, 모차르트가 헌정사에서 스스로 “이 곡들을 완성하기까지 오랫동안 힘든 노동이 필요했다”고 고백할 만큼 모차르트가 하이든의 어법을 깊이 흡수한 결과물입니다. 모차르트가 하이든을 친근하게 ‘파파’라 부른 것이 사료에 처음 명확히 등장하는 시기도 이 무렵입니다.
1791년 모차르트가 35세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뒤에도 하이든은 모차르트의 미망인 콘스탄체와 자녀들을 돌보았고, 모차르트의 아들이 음악을 시작하자 무료로 가르쳤습니다.
베토벤과의 사사 관계 — 1792년 11월부터 약 1년
1792년 7월, 두 번째 런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던 하이든은 본(Bonn)에서 22세의 베토벤을 만났습니다. 그해 11월 베토벤은 빈으로 이주해 하이든에게 작곡을 사사하기 시작했고, 이 사제 관계는 약 1년간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그리 매끄럽지 못했습니다. 베토벤은 하이든의 가르침에 만족하지 못해 알브레히츠베르거(Johann Georg Albrechtsberger)에게 따로 대위법을 사사했고, 후일 회고에서는 “하이든에게서 배운 것이 없다”고까지 표현했습니다. 두 사람의 성격 차이도 한몫했습니다. 베토벤의 격한 자아와 하이든의 온화한 권위는 잘 맞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시간이 흐른 뒤 만년의 베토벤은 하이든을 깊이 존경했습니다. 당시 기록과 후대 회고에 따르면, 1809년 하이든의 마지막 생일 직전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지휘한 〈천지창조〉 공연에서 베토벤은 다른 음악가들과 함께 노쇠한 하이든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손에 입을 맞췄다고 전해집니다.
‘파파 하이든’ — 단원이 시작한 호칭
‘파파 하이든’이라는 별명은 모차르트가 처음 붙인 것이 아니라 에스테르하지 궁정 단원들이 그들의 자상한 악장에게 붙인 애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이든은 단원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후작에게 직접 청원하는 권위 있는 변호자였고, 30년 넘게 같은 단원들을 이끌면서 그가 평균 단원보다 점점 더 나이가 들어가자 이 호칭은 자연스레 굳어졌습니다. 후일 모차르트와 다른 음악가들이 이 별명을 함께 쓰면서 ‘파파 하이든’은 그의 두 번째 이름이 되었습니다.
방대한 유산 — 호보켄 카탈로그가 정리한 750여 작품
하이든의 작품 수는 그야말로 방대하며, 오늘날 학계는 이를 호보켄 카탈로그(Hoboken-Verzeichnis, 약칭 Hob.)로 정리합니다. 네덜란드 음악학자 안소니 반 호보켄(Anthony van Hoboken, 1887~1983)이 1934년부터 작성을 시작해 1957년부터 1978년에 걸쳐 3권으로 출간한 이 카탈로그는 약 750여 항목을 장르별로 분류합니다.
교향곡(Hob. I): 전통적으로 1~104번까지 알려져 있으나, 호보켄 분류상은 105번(신포니아 콘체르탄테)과 추가 발견된 106~108번까지 포함해 총 108개입니다.
현악 4중주(Hob. III): 호보켄 카탈로그에는 83곡이 분류되어 있지만, 이후 학계의 재평가로 편곡과 위작이 제외되어 진작으로 확고히 인정되는 곡은 68곡입니다. 두 대의 바이올린·비올라·첼로가 만들어내는 대등한 대화 형식을 그가 사실상 완성했습니다.
건반 소나타(Hob. XVI): 약 47곡 —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어법의 직접 출발점.
피아노 트리오(Hob. XV): 약 29곡 — 피아노·바이올린·첼로 편성의 표준을 잡은 작품군.
바리톤 트리오(Hob. XI): 약 126곡 — 후작 니콜라우스 1세가 연주하던 옛 악기 바리톤(viol 계열)을 위해 작곡한 실내악으로, 오늘날 거의 연주되지 않지만 그의 직업적 다작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영역.
협주곡(Hob. VII): 약 35곡 — 트럼펫·첼로·바이올린·건반 협주곡 포함.
오라토리오·미사·종교음악: 〈천지창조〉·〈사계〉·14개의 미사곡 등.
오페라: 약 20여 편 — 대부분 에스테르하자 궁정 공연용.
당대 평가와 사후 수용사의 굴곡
하이든에 대한 평가는 그의 생전과 사후 사이에서 흥미로운 굴곡을 거쳤습니다. 한 시대 유럽 최고의 작곡가로 인정받았던 그가 19세기에는 ‘점잖고 지루한 파파’로 평가절하되었다가, 20세기에 다시 본격적으로 재발견된 것입니다.
생전 — 유럽 최고의 명성
살아있을 당시 하이든은 동시대 유럽 최고의 명성을 누렸습니다. 그의 두 차례 런던 방문은 열광적 환영을 받았고, 1791년에는 옥스퍼드 대학교로부터 명예 음악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809년 5월 그가 빈에서 임종을 앞두고 있을 때, 빈을 점령한 나폴레옹은 하이든의 집 주변에 명예 호위병을 배치해 그의 마지막 순간을 보호했다고 전해집니다.
1809년 5월 31일 그가 77세로 세상을 떠난 뒤, 빈에서 열린 추모식에서는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연주되었습니다. 다만 그의 유해는 이후 다소 기구한 길을 걸었습니다. 사망 직후 두개골이 도굴되어 약 145년 동안 본체와 떨어져 있다가 1954년에야 다시 결합되었고, 오늘날 그의 유해는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본거지였던 아이젠슈타트의 베르크키르헤(Bergkirche)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19세기 — 낭만주의 시각의 평가절하
그의 사후 명성은 의외로 빠르게 식었습니다. 19세기 낭만주의가 베토벤의 영웅적 인격과 슈만·바그너의 격정적 음악 언어를 음악사의 주역으로 세우면서, 균형과 형식의 완성자였던 하이든은 상대적으로 점잖고 무난한 작곡가로 비치게 되었습니다. 한 음악사가의 표현대로 “친근한 파파 하이든의 이미지가 모차르트와 베토벤 옆에서 그를 다소 따분해 보이게 만들었다”는 평가가 19세기 후반의 일반적 시각이었습니다.
20세기 — 본격 재발견
그의 위상이 본격적으로 회복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입니다. 1907년 만디체프스키(Eusebius Mandyczewski)의 첫 전집 출간을 시작으로 학계의 본격 연구가 시작되었고, 1957~1978년 호보켄 카탈로그가 완성되면서 그의 방대한 작품 세계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었습니다.
특히 1961년 체코 음악학자 올드르지흐 풀케르트(Oldřich Pulkert)가 프라하 국립박물관 라데닌 컬렉션에서 사라진 〈첼로 협주곡 1번 C장조〉의 사본을 발견한 사건은 20세기 하이든 연구의 가장 극적인 순간 중 하나로 꼽힙니다. 약 200년 동안 카탈로그에만 존재했던 곡이 다시 무대로 돌아왔고, 1962년 5월 19일 첼리스트 밀로시 사들로(Miloš Sádlo)와 찰스 매커러스 지휘 체코슬로바키아 라디오 심포니의 현대 초연 이후 오늘날 첼로 표준 레퍼토리의 핵심으로 자리잡았습니다.
1958~1974년 안탈 도라티(Antal Doráti) 지휘로 데카에서 진행한 하이든 교향곡 전곡 녹음 프로젝트는 20세기 하이든 재평가의 결정적 사건이었고, 그 흐름은 21세기 조반니 안토니니의 ‘Haydn 2032’ 프로젝트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라토리오 〈사계〉 Hob.XXI:3 (1799~1801) — 대자연의 변화와 소박한 인간 삶을 그린 만년 걸작
미사곡 ‘넬슨 미사’ Hob.XXII:11 (1798) — 14개의 미사곡 중 가장 잘 알려진 작품
하이든 시작하기 — 처음 듣는 분을 위한 가이드
하이든이 처음에는 조금 밋밋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베토벤처럼 거대한 운명을 정면으로 밀어붙이지도 않고, 모차르트처럼 선율이 즉시 눈부시게 떠오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음악이 약해서가 아니라, 하이든의 긴장이 겉으로 폭발하기보다 구조 안에서 치밀하게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하이든을 들을 때는 “이 선율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보다 “방금 나온 작은 리듬과 동기가 어디로 이동하는가”에 귀를 두면 훨씬 잘 들립니다. 반복처럼 들리던 구절이 어느 순간 전혀 다른 조성으로 미끄러지고, 단순한 장난처럼 보이던 쉼표나 강약 변화가 악장 전체의 균형을 바꿉니다. 그래서 하이든은 처음에는 친절하지만, 오래 들을수록 무서운 작곡가입니다.
하이든 입문에 가장 친절한 첫 곡은 〈교향곡 94번 ‘놀람’〉의 2악장 안단테입니다. 약 6분 분량이고, 조용한 선율이 흐르다가 갑자기 팀파니와 전 관현악이 강타하는 그 유명한 ‘놀람’의 순간이 25초 무렵에 등장합니다. 사이먼 래틀(Sir Simon Rattle)과 베를린 필의 EMI 녹음, 또는 콜린 데이비스 경(Sir Colin Davis)과 콘체르트헤보우의 필립스 녹음이 권할 만한 표준입니다.
그다음 단계는 〈트럼펫 협주곡 E♭장조〉의 1악장 알레그로입니다. 약 6분 30초 분량으로, 1796년 안톤 바이딩거의 키 트럼펫 발명을 위해 작곡된 이 곡은 트럼펫이라는 악기가 단순한 팡파르 도구에서 서정적인 솔로 악기로 완전히 변모하는 순간을 담고 있습니다. 호칸 하르덴베리에르(Håkan Hardenberger)와 네빌 마리너 경의 필립스 녹음, 또는 모리스 안드레(Maurice André)의 EMI 음반이 고전적 기준입니다.
실내악으로 들어가시려면 현악 4중주 Op.76 No.3 〈황제〉의 2악장 포코 아다지오 칸타빌레가 가장 친절한 진입로입니다. 약 7분 분량이고, 이 변주곡의 주제 선율은 오늘날 독일 국가의 멜로디로 사용될 만큼 익숙합니다. 알반 베르크 4중주단(Alban Berg Quartett)이 EMI에서 녹음한 Op.76 전집이 권할 만한 결정판입니다.
여기까지 친숙해지셨다면 본격 후기작 〈천지창조〉로 들어갈 차례입니다. 약 1시간 50분 분량이지만, 1부 시작의 ‘혼돈의 표상(Die Vorstellung des Chaos)’에서 빛이 처음 터져 나오는 그 유명한 ‘Es werde Licht — und es ward Licht(빛이 있으라 — 빛이 있었다)’ 부분만 들어도 하이든 만년의 종교음악이 어떤 수준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카라얀-베를린 필의 도이체 그라모폰 녹음, 또는 존 엘리엇 가디너 경의 시대 악기 연주가 양극단의 대표 음반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왜 하이든을 ‘교향곡의 아버지’라고 부르나요?
하이든이 고전주의 교향곡의 4악장 구조와 소나타 형식의 운용, 그리고 현악 4중주에서 네 악기의 대등한 대화 구조를 가장 안정적인 표준으로 다듬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100곡이 넘는 교향곡을 통해 이 형식이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를 실험으로 증명했고, 그 덕분에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같은 형식 위에서 자유롭게 도약할 수 있었습니다.
Q. ‘파파 하이든’이라는 별명은 누가 처음 붙였나요?
‘파파 하이든’이라는 호칭은 에스테르하지 궁정의 단원들이 그들의 자상한 악장이었던 하이든에게 붙인 애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30년 넘게 같은 단원들을 이끈 하이든은 그들의 처우 개선을 후작에게 직접 청원할 만큼 따뜻한 상사였고, 이 호칭이 후일 모차르트와 다른 음악가들에게로 확장되었습니다.
Q. 하이든은 정말 베토벤의 스승이었나요?
하이든은 1792년 11월부터 약 1년간 빈에서 베토벤에게 작곡을 가르쳤지만, 두 사람의 사제 관계는 그리 매끄럽지 못했습니다. 베토벤은 하이든의 가르침에 만족하지 못해 알브레히츠베르거에게 따로 대위법을 사사했고, 그럼에도 만년에는 하이든을 깊이 존경하며 그의 영향을 인정했습니다.
Q. 하이든의 〈천지창조〉는 어떻게 작곡되었나요?
〈천지창조〉의 출발점은 1791년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린 헨델 페스티벌입니다. 당시 59세의 하이든은 1,000명 안팎의 합창단과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헨델의 〈메시아〉에 압도되었고, 빈으로 돌아온 뒤 1796년부터 약 2년에 걸쳐 이 오라토리오를 완성했습니다. 초연은 1798년 4월 29일과 30일 빈 슈바르첸베르크 궁전에서 하이든 본인의 지휘로 이루어졌습니다.
Q. 하이든 첼로 협주곡 1번은 어떻게 발견되었나요?
하이든의 첼로 협주곡 1번 C장조는 1961년 체코 음악학자 올드르지흐 풀케르트(Oldřich Pulkert)가 프라하 국립박물관의 라데닌 컬렉션에서 발견하면서 약 200년 만에 다시 빛을 보았습니다. 1962년 5월 19일 첼리스트 밀로시 사들로와 찰스 매커러스 지휘 체코슬로바키아 라디오 심포니에 의해 현대 초연되었으며, 오늘날 첼로 표준 레퍼토리의 핵심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마무리 — 형식을 만든 사람이 가장 먼저 잊혀진다
요제프 하이든은 77년의 긴 생애 동안 약 750여 작품으로 빈 고전주의의 뼈대를 완성한 작곡가입니다. 교향곡과 현악 4중주가 어떤 구조와 균형을 가져야 하는지를 그가 30년의 에스테르하지 실험실에서 증명한 덕분에, 모차르트의 화려한 영감도 베토벤의 영웅적 도약도 그 형식 위에서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형식을 만든 사람이 늘 그 형식을 빛낸 사람보다 먼저 잊혀지는 것이 음악사의 묘한 법칙입니다. 19세기 낭만주의는 하이든을 점잖고 무난한 파파로 격하했고, 20세기에 들어 호보켄 카탈로그(1957~1978)와 도라티의 교향곡 전곡 녹음(1958~1974), 그리고 1961년 풀케르트의 첼로 협주곡 1번 발견을 거치며 비로소 그의 음악사적 자리가 본격적으로 재평가되었습니다. 그의 유산은 본인이 만든 만큼이나 후대의 발견이 만든 자리입니다.
왜 2026년에 하이든을 다시 들어야 할까요. 모차르트보다 구조가 명확하고, 베토벤보다 부담이 적습니다. 바로크 음악보다 리듬이 현대적이며, 유머와 균형감 덕분에 입문 장벽이 낮습니다. 특히 시대악기 연주(HIP)의 부흥으로 최근 그의 작품이 새롭게 재평가되고 있습니다.
오늘 한 번 시도해 보실 만한 일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교향곡 94번 ‘놀람’〉의 2악장을 6분 동안 끝까지 들어 보십시오. 25초 무렵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놀람’의 순간만으로도, 빈 사람들이 그를 왜 ‘파파 하이든’이라 부르며 사랑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둘째, 시간이 허락한다면 〈천지창조〉 1부의 ‘빛이 있으라’ 합창을 한 번 들어 보십시오. 1791년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헨델 페스티벌에서 받은 영감이 만년의 그를 어떤 자리까지 데려갔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