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1809)이 남긴 오라토리오 "천지창조(Die Schöpfung)"는 단순히 성경 창세기를 음악으로 옮긴 작품을 넘어섭니다. 이 곡은 한 인간의 깊은 신앙고백이자, 전 유럽을 관통한 계몽주의의 낙관적 세계관, 자연에 대한 과학적 경외감, 그리고 인간 존재에 대한 긍정이 총체적으로 어우러진 기념비적인 걸작입니다. 이 글은 작품의 탄생 배경과 철학부터, 음악의 구체적인 구조와 감상법까지 모든 것을 안내합니다.
제1부: 작품의 세계 - 왜 "천지창조"는 위대한가
1. 신실한 기도자, 하이든
"천지창조"를 이해하기 위해선 작곡가 하이든의 독실한 신앙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한 명이자,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집에는 작은 기도의 골방이 있습니다. 오늘날 내가 있게 된 것은 그 골방의 기도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그의 악보에도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그는 악보의 앞부분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In nomine Domini)"라는 문구를, 작곡을 마칠 때마다 맨 끝에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Laus Deo)"라고 기록하며 모든 영광을 창조주께 돌렸습니다. "천지창조"는 바로 이 깊은 신앙의 토대 위에서 피어난 꽃입니다.
2. 창작 배경 : 시대를 담은 걸작을 꿈꾸다
"천지창조"의 씨앗은 하이든이 1791년 영국 런던을 방문했을 때 심어졌습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헨델의 "메시아" 같은 대규모 오라토리오 공연을 보고 엄청난 충격과 감동을 받았습니다. 수백 명의 합창단이 만들어내는 웅장한 사운드는 그에게 완전히 새로운 음악적 영감을 주었고, 하이든은 헨델을 뛰어넘는 자신만의 오라토리오를 만들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런던에서 그는 창세기를 바탕으로 한 익명의 리브레토(대본)를 얻게 되는데, 이는 성경, 존 밀턴의 "실낙원" 등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로 돌아온 하이든은 네덜란드 태생의 외교관이자 음악 애호가였던 고트프리트 판 슈비텐 남작과 함께 2년여에 걸쳐 작품을 완성합니다. 특히 하이든과 판 슈비텐은 모두 프리메이슨(Freemasonry) 단원이었는데, 무지(어둠/혼돈)에서 이성(빛/지혜)으로 나아가는 이들의 사상은 작품의 서사 구조와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이러한 구성은 성경의 간결한 서사에 존 밀턴의 장엄하고 시적인 언어를 더해, 단순한 사건의 나열을 넘어 창조의 경이로움을 문학적 깊이로 체험하게 만드는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3. '파파 하이든'의 아름다운 유산
"천지창조"는 초연 이후 전 유럽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808년 하이든의 76세 생일 기념 연주회는 그가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마지막 공식 행사였습니다. 1부가 끝난 뒤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가 자리를 뜨려 할 때, 제자 베토벤이 다가와 스승의 손에 경건하게 입을 맞추었던 장면은 음악사의 가슴 뭉클한 순간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하이든의 선행입니다. 그는 '천지창조' 공연으로 얻은 수익의 일부를 꾸준히 떼어 빈의 음향예술가협회에 기부하여, 가난하고 재능 있는 젊은 음악가들을 도왔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존경과 애정을 담아 붙여준 '파파 하이든(Papa Haydn)'이라는 별명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따뜻한 인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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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 |
제2부: 음악의 구조와 내용
"천지창조"는 전체 3부로 구성되며, 기본 전개는 레치타티보(줄거리 전개) → 아리아(정서·상징) → 합창(공동의 선포·확대)의 구도가 반복됩니다. 특히 이 작품에서 오케스트라는 단순한 반주를 넘어, 또 하나의 성악가처럼 창조의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하이든은 콘트라바순을 사용해 사자의 포효를 그리고, 플루트의 트릴로 새의 날갯짓을 묘사하는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악기 편성으로 소리의 팔레트를 극대화했습니다.
제1부 – “혼돈이 음악이 될 때”
- 서곡 〈Representation of Chaos〉(혼돈의 묘사) : 예상되는 종지를 피하고 장·단조 중심을 흔들어 형태 이전의 세계를 들려줍니다. 불협과 느슨한 진행이지만 긴장감이 꺼지지 않는 것이 포인트입니다.
- 레치타티보 (라파엘·유리엘·가브리엘) : 독창이 이야기의 프레임을 제공합니다. 반주는 건반+통주저음의 간결한 세코(secco)와 오케스트라가 받쳐주는 풍성한 아콤파냐토(accompagnato)가 교차합니다.
- 클라이맥스 “Let there be light” : 조용한 레치타티보 뒤, C장조의 대합창과 관현악이 한 번에 터지며 사운드 자체가 ‘켜지는’ 듯한 연출을 합니다. 이 극적인 명암 대비가 작품의 정체성을 규정합니다.
- 피날레 합창 〈The Heavens are telling〉: 삼중창(세 천사)과 합창이 교대·중첩되며 질서와 균형의 이미지를 소리로 만듭니다. 동기 반복과 명료한 프레이징으로 “법칙을 얻은 우주”를 체감하게 합니다.
제2부 – “자연 다큐를 오디오로 듣는 즐거움”
- 조류·해양 생명 묘사 : 플루트·오보에의 장식음, 현의 아르페지오가 새의 지저귐과 물결을 그립니다. 소프라노 아리아에선 트릴과 가벼운 도약이 ‘날갯짓’처럼 들립니다.
- 들짐승·곤충의 톤 페인팅 : 거친 관악기와 저역 현으로 사자의 위용을, 짧고 분주한 음형으로 작은 벌레의 꿈틀거림을 묘사합니다. 진지함 속에 담긴 하이든 특유의 유머가 돋보입니다.
- 인간 창조 장면의 ‘격조’ : 테너 아리아 〈In native worth〉는 균형·존엄·이성의 이상을 고상한 선율과 안정된 화성으로 노래합니다. 이어지는 합창은 푸가 형식으로 환희를 확장하며 2부를 장엄하게 닫습니다.
제3부 – “사랑의 목가와 공동의 찬양”
- 아담·이브 듀엣 : 목관의 온화한 음색과 현의 부드러운 반주 위에 소박한 행복이 펼쳐집니다. 개인의 사랑에서 질서 정연한 세계의 평화로 시야가 넓어지는 지점입니다.
- 최종 합창 (이중 푸가) : 여러 주제들이 차례로 쌓이며 감사의 코러스가 거대하게 확장됩니다. 이 최종 합창은 단순히 신을 찬양하는 것을 넘어, 혼돈에서 시작하여 질서, 생명, 그리고 인간의 사랑으로 완성된 이 장대한 여정이 결국에는 '감사(Dank)'와 '영광(Ehre)'으로 귀결되어야 함을 선포하는, 작품 전체의 대주제(Leitmotiv)를 완성하는 장엄한 마침표입니다.
감상을 위한 길잡이 - 무엇을 어떻게 들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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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Representation of Chaos〉
음악사에서 가장 혁신적인 서곡 중 하나입니다. 고전주의의 명료함과 달리, 형태가 생기기 이전의 물질을 소리로 그린 대담한 설정을 직접 느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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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 there be light” (빛이 있으라)
음악사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입니다. 어둠을 상징하는 낮은 레치타티보에서 빛을 상징하는 C장조 대합창이 폭발할 때의 전율을 체험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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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창 〈Awake the harp!〉 (하프를 깨워라!)
짧은 동기를 층층이 쌓아 흥분을 고조시키는 방식에 주목하며 찬양의 에너지를 느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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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창 〈The Heavens are telling〉 (하늘이 전한다)
세 명의 솔리스트가 섬세하게 설명하고, 전체 합창이 장엄하게 선포하는 '질서와 균형'의 구조를 감상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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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라노 아리아 〈Nun beut die Flur〉 (이제 들은 푸른 옷 입고)
플루트와 오보에가 새의 날갯짓처럼 지저귀고, 소프라노의 목소리가 하늘로 솟아오르는 듯한 아름다운 톤 페인팅의 정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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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묘사 (사자·작은 벌레 등)
콘트라바순이 묘사하는 사자의 포효, 현악기가 그리는 벌레의 꿈틀거림 등 하이든 특유의 유머와 관찰력을 즐겨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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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너 아리아 〈In native worth〉 (존엄과 위엄을 갖추고)
과시보다 절제가 만드는 숭고함으로 계몽주의적 인간상을 노래하는, 품위 있고 안정적인 아리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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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창 〈Achieved is the glorious work〉 (영광의 업은 이루어졌네)
하나의 주제가 각 성부에서 모방(푸가)되며 거대한 건축물처럼 쌓여가는, '완성'의 환희를 느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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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합창 〈Singt dem Herren alle Stimmen!〉 (주께 노래하라 모든 소리여!)
개인의 사랑이 공동체의 장엄한 찬양으로 확장되는 감동적인 피날레입니다.
전곡 감상하기
작품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경험하고 싶다면, 한글 자막이 제공되는 아래의 영상을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