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곡가: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Franz Joseph Haydn, 1732~1809)
• 작품: 오라토리오 《천지창조(Die Schöpfung)》 Hob.XXI:2
• 편성: 독창(소프라노·테너·베이스), 혼성 합창, 오케스트라
• 대본: 창세기와 시편, 존 밀턴 《실낙원》을 바탕으로 한 익명 리브레토(독일어판은 판 슈비텐이 정리)
• 작곡·초연: 1796~1798년 작곡, 1798년 4월 30일 빈 슈바르첸베르크 궁전에서 초청 초연
• 하이든은 형태 이전의 혼돈과 빛의 탄생을 어떻게 소리로 그렸을까요.
• 신앙과 계몽주의라는 서로 다른 두 시선이 어떻게 한 작품 안에서 만날까요.
하이든(1732~1809)이 남긴 오라토리오 《천지창조(Die Schöpfung)》는 성경 창세기를 음악으로 옮긴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 작품에는 한 인간의 신앙과, 자연을 이성으로 바라본 계몽주의의 낙관, 그리고 소리로 사물을 그리는 톤 페인팅의 재미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이 글은 작품의 배경과 구조를 정리하고, 혼돈에서 빛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세 갈래 청취 동선으로 안내합니다.
신앙과 계몽주의가 만난 자리
하이든의 신앙은 그의 악보에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많은 자필 악보의 첫머리에 '하나님의 이름으로(In nomine Domini)'라고 적고, 끝에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Laus Deo)'라고 자주 써넣었습니다. 모든 악보에 예외 없이 그랬다고 단정할 자료는 없지만, 자주 반복된 이 습관만으로도 그의 신앙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천지창조》는 신앙만의 작품이 아닙니다. 18세기 후반 유럽을 관통한 계몽주의는 자연을 관찰하고 질서를 발견하는 이성의 시선을 강조했습니다. 이 작품은 어둠과 혼돈에서 빛과 질서로 나아가는 서사를 따라가는데, 그 빛의 이야기는 무엇보다 창세기 본문 자체에 이미 들어 있습니다. 여기에 자연을 향한 계몽주의적 경외가 더해지면서, 신앙과 이성이 한 작품 안에서 나란히 울립니다.
런던의 헨델, 그리고 판 슈비텐
《천지창조》의 씨앗은 하이든의 두 차례 런던 체류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런던에서 헨델의 대규모 오라토리오 공연을 접하고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수백 명의 합창이 만드는 웅장한 소리는 그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주었고, 이 헨델 수용의 경험이 두 차례의 방문에 걸쳐 쌓였습니다.
런던에서 하이든은 창세기와 시편, 존 밀턴의 《실낙원》을 바탕으로 한 익명의 영어 리브레토를 얻었습니다. 이 원 대본의 정확한 작성자는 오늘날까지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오스트리아로 돌아온 하이든은 외교관이자 음악 애호가였던 고트프리트 판 슈비텐 남작과 함께 작업했습니다. 판 슈비텐은 독일어판 대본을 다듬고 음악적 처리에 의견을 보탠 협업자였습니다. 하이든과 판 슈비텐이 모두 프리메이슨과 관련이 있었고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사상을 공유했다는 독해도 있지만, 이는 작품을 읽는 여러 수용사적 해석 가운데 하나로 보는 편이 알맞습니다.
초연과 만년의 하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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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08년 3월 27일 빈에서 열린 《천지창조》 기념 공연. 중앙 아래 모자를 쓴 인물이 하이든입니다. |
《천지창조》의 초연은 1798년 4월 30일 빈의 슈바르첸베르크 궁전에서 초청 공연으로 이루어졌고, 첫 공개 공연은 이듬해인 1799년 3월 19일이었습니다. 초연 이후 작품은 유럽 전역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808년 3월 27일의 기념 공연은 하이든이 참석한 마지막 공개 행사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제자 베토벤이 노스승에게 다가가 손에 입을 맞추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동시대의 전승으로 남은 장면이니, 사실처럼 과장하기보다 전해지는 이야기로 두는 편이 정확합니다. 한편 《천지창조》와 《사계》의 여러 공연은 음악가 유족을 돕던 연금 단체 톤퀸스틀러 소치에테트(Tonkünstler-Societät)를 비롯한 자선 목적에 기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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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켈란젤로 《아담의 창조》. 《천지창조》 제3부의 인간 창조 장면을 시각적으로 보완합니다. |
세 부분으로 읽는 구조
《천지창조》는 전체 3부로 이루어지며, 기본 전개는 레치타티보로 줄거리를 펼치고, 아리아로 정서와 상징을 노래하며, 합창으로 함께 선포하고 확장하는 구도가 반복됩니다. 제1부는 빛과 땅과 천체, 제2부는 물과 하늘의 생명과 동물과 인간, 제3부는 아담과 이브를 중심으로 합니다.
이 작품에서 오케스트라는 단순한 반주를 넘어 또 하나의 이야기꾼처럼 움직입니다. 하이든은 콘트라바순의 낮은 소리로 큰 짐승의 무게를, 플루트의 트릴로 새의 날갯짓을 그리는 등 소리로 사물을 묘사하는 톤 페인팅을 곳곳에 두었습니다. 제1부 종결 합창 〈Die Himmel erzählen(하늘이 전하네)〉, 제2부의 소프라노 아리아 〈Nun beut die Flur(이제 들판은 싱그러운 초록을 펼치고)〉, 제3부의 합창 〈Stimmt an die Saiten(현을 울려라)〉 같은 대목이 각 부의 성격을 잘 보여 줍니다.
세 갈래 청취 동선
악장들을 길게 나열하기보다, 작품의 흐름을 따라가는 세 갈래로 좁혀 듣기를 권합니다. 판본에 따라 악장 번호와 언어가 다르므로, 아래에서는 악장의 이름과 낱말을 기준으로 짚습니다.
동선 1. 혼돈에서 빛으로. 서곡 〈혼돈의 묘사(Die Vorstellung des Chaos)〉는 예상되는 종지를 피하고 조성의 중심을 흔들며 형태 이전의 세계를 들려줍니다. 이어 라파엘의 낮은 레치타티보가 지나간 뒤, '빛이 있으라(Und es ward Licht)'라는 낱말에서 C장조의 대합창과 전 관현악이 한 번에 들어옵니다. 불안정한 화성이 이어지다 빛의 낱말에서 소리가 한꺼번에 켜지는 이 대비가 작품의 정체성을 규정합니다.
동선 2. 제2부의 동물 묘사. 제2부에서 라파엘이 땅의 짐승을 노래하는 레치타티보를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같은 구간 안에서 사자의 무게를 만드는 저음 관악과, 작은 생물의 꿈틀거림을 그리는 빠른 현악 음형이 나란히 놓입니다. 유머러스하다는 감상은 이 기보의 사실을 확인한 뒤에 붙이면 더 분명해집니다.
동선 3. 독창에서 합창으로 넓어지는 구조. 제1부를 닫는 합창 〈Die Himmel erzählen(하늘이 전하네)〉을 택해, 세 천사의 삼중창과 독창이 합창과 교대하고 겹치는 흐름을 따라가 보시기 바랍니다. 짧은 동기가 각 성부로 모방되며 진입하고, 편성이 넓어지며 질서와 균형의 이미지가 소리로 세워집니다.
전곡으로 듣기
작품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경험하고 싶다면, 한글 자막이 제공되는 아래 영상을 권합니다. 혼돈에서 시작해 빛과 생명, 그리고 인간의 사랑으로 이어지는 여정이 결국 감사와 영광의 합창으로 완성되는 큰 흐름을 한자리에서 따라갈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