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제전 초연의 소동, 그날 비평가들이 화낸 것은 리듬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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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5월 29일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1882~1971)의 발레 〈봄의 제전〉이 초연됐고, 그날 저녁 객석은 조용하지 않았다. 소동은 실제로 있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었던 두 비평가가 며칠 뒤 지면에 남긴 문장을 읽어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와 어긋나는 대목이 나온다. 앙리 키타르는 5월 31일 르 피가로에, 피에르 랄로는 6월 3일 르 탕에 썼다.

우리는 보통 이렇게 알고 있다. 리듬이 너무 낯설어서 청중이 견디지 못했다고. 그런데 두 사람 중 한 명은 리듬을 칭찬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정작 견디지 못한 것은 따로 있었다고 적었다. 이 글은 그 두 편의 비평을 원문으로 읽고, 그날 밤 무엇이 실제로 문제였는지를 다시 세워 보려는 글이다.

니콜라스 로에리히가 1912년에 그린 봄의 제전 무대 스케치
로에리히가 그린 무대 스케치 「대지에의 입맞춤」, 1912년.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나

공연장은 파리 샹젤리제 극장(Théâtre des Champs-Élysées)이었다. 몽테뉴 대로에 있는 그 극장이다. 1913년 3월 31일에 문을 연 새 극장이었으니, 〈봄의 제전〉이 올라간 5월 29일은 개관하고 두 달쯤 지난 시점이다. 무대에 올린 것은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였고, 안무는 바슬라프 니진스키가 맡았다. 그날 아침 르 피가로의 공연 예고란은 이 작품을 스트라빈스키와 로에리히와 니진스키, 세 사람의 것으로 적었다. 같은 지면 광고란에 따르면 그날 저녁 공연은 여덟 시 사십오 분에 시작했다. 그 시즌 발레 뤼스의 지휘자는 피에르 몽퇴였다.

객석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피에르 랄로가 가장 분명하게 적었다. 그는 이 음악을 초연 저녁에는 아주 잘못 들었다고 썼다. 소란 때문이었고, 관객이 공연 내내 그 소란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이것은 평가가 아니라 그가 그 자리에서 겪은 일이다. 음악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는 진술에는 당대의 근거가 있다.

다만 그가 쓴 낱말은 소란(tapage)소란스러운 소동(manifestations tumultueuses)이다. 앙리 키타르 쪽에서 나온 낱말은 폭소(hilarité)다. 두 사람 어느 쪽에서도 난투나 경찰 개입, 공연 중단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그날 밤을 폭동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 두 편에서 확인되는 것은 여기까지다. 객석은 시끄러웠고, 랄로는 그 때문에 음악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고 적었고, 그 상태가 공연 내내 이어졌다. 두 글에 난투나 경찰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일이 없었다는 증거가 아니라, 이 두 글이 그것을 적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 글이 딛고 선 증거는 1913년 당대의 지면뿐이다. 스트라빈스키나 몽퇴가 수십 년 뒤에 남긴 회고는 층위가 다른 자료여서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

한 가지가 더 있다. 르 피가로 6월 1일자에 실린 그 주의 공연 일정에 〈봄의 제전〉이 그대로 들어 있다. 월요일에도 수요일에도 올랐다. 초연의 소동에도 공연은 취소되지 않았고, 작품은 그 주 내내 무대에 올랐다.

비평가들이 화낸 것은 리듬이 아니었다

여기서부터가 통념과 갈라지는 지점이다. 키타르는 이 곡의 리듬을 깎지 않았다. 오히려 리듬 감각이 훌륭한 활력과 때로는 놀라운 다양성으로 나타난다고 적었다. 그가 이 무대 전체를 두고 쓴 말은 「어설프고 유치한 야만(une barbarie laborieuse et puérile)」이었는데, 그 야만의 자리에 리듬은 들어 있지 않았다. 그가 문제 삼은 것은 그다음 문장에 있다. 선율의 창안이 극도로 빈약하다는 것이었다. 화성 감각도 꽤 평범해 보인다고 했고, 착상을 배치하고 펼쳐 나가는 방식에 두드러진 것이 없다고 썼다.

랄로도 비슷한 자리에 섰다. 그가 보기에 이 음악은 지금까지 쓰인 음악 중 가장 불협하고 가장 어긋나는 음악(la musique la plus dissonante et la plus discordante que l’on ait encore écrite)이었다. 어떤 음을 기다리든 오는 것은 그 음이 아니라 옆의 음(la note d’à côté)이라고 썼다. 그런데 같은 글에서 그는 작곡가를 놀랍도록 독창적이고 능란한 음악가라고 불렀다. 겉보기의 야만은 기예로 만들어 낸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니까 랄로의 불만은 「이렇게 쓸 줄 모른다」가 아니었다. 「이렇게 쓸 줄 아는 사람이 왜 이것밖에 안 되는 것을 쓰는가」에 가깝다. 그는 이 곡의 착상이 그리 풍부해 보이지 않는다고 적었고, 〈페트루슈카〉나 〈불새〉보다 덜 풍부하다고 못 박았다. 키타르 역시 그 두 작품은 전혀 다른 생명력으로 살아 있었다고 썼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신문에서, 같은 비교를 했다.

키타르는 자기가 어느 편에 서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는 이런 태도를 취하면 새로운 시도에 닫힌 낡은 정신으로 보일 위험이 있다고 스스로 적었다. 음악사가 비평가의 몰이해가 드러난 일화로 가득하다는 것도 안다고 했다. 그러고는 그것은 감수해야 할 위험이라고 썼다. 모르고 헛디딘 사람이 아니라, 알고도 그렇게 판단한 사람의 문장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키타르는 리듬 감각을 높이 샀고, 랄로는 작곡가의 독창성과 솜씨를 인정했다. 그러면서 두 사람 모두 선율과 착상이 빈약하다고 판단했다. 「리듬이 청중을 때렸다」는 통념은 적어도 이 두 편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1913년 봄의 제전 초연 프로덕션의 무용수들이 로에리히의 의상을 입고 배경막 앞에 선 모습
1913년 초연 프로덕션의 무용수들. 의상과 배경막은 로에리히가 맡았다.

두 비평이 더 혹독했던 쪽은 안무였다

두 비평이 지면을 가장 많이 쓴 대상은 음악이 아니라 무대 위 몸이었다.

랄로는 안무가 유감스러울 만큼 범용하다고 적었다. 그의 묘사는 구체적이다. 무용수들은 결코 춤추지 않는다고 그는 썼다. 제자리에서 들썩이고, 발을 구르고, 짓밟고, 경련하듯 떨 뿐이라고. 2부에서 희생되는 처녀를 맡은 무용수는 족히 십오 분을 꼼짝 않고 굳어 있었고, 그 자세는 발끝을 안쪽으로 돌리고 무릎을 안짱으로 모은 것이었다.

키타르는 니진스키를 격앙된 초보자라고 불렀다. 그가 스트라빈스키를 두고 안타까워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만한 음악가가 어떻게 무용가의 미학에 물들어 그것을 자기 예술로 옮겨 놓았느냐는 것이었다.

다만 랄로는 마지막에 한 줄을 덧붙였다. 니진스키는 비할 데 없는 무용수이며 그 영예로 충분할 수 있었다고. 안무가로서의 그를 부정하면서 무용수로서의 그는 인정한 것이다. 이 대목들은 모두 두 사람의 판단이지 관객 전체의 반응이 아니라는 점은 함께 적어 둔다.

그날 밤에도 이미 갈렸다

야유 일변도였다는 인상도 두 신문과는 맞지 않는다.

랄로는 젊은 음악가들이 이 곡에 공격적인 열광을 바치며 걸작이니 천재니 말한다고 적었다. 그에게는 못마땅한 현상이었지만, 그 문장은 적어도 당시 젊은 음악가들 사이에 열렬한 지지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 키타르 쪽에서도 같은 것이 나온다. 그는 달리 생각한 이들이 무대 위로 갈채를 보냈다고 썼고, 다만 그들이 많지는 않았다고 덧붙였다.

키타르는 5월 31일 르 피가로에, 랄로는 6월 3일 르 탕에 썼다. 날짜도 지면도 달랐던 두 글이 나란히 지지자의 존재를 적어 두었다. 그날 저녁의 객석은 한 덩어리가 아니었다.

당대가 이미 계보에 놓았다

랄로의 글에는 오늘 읽어도 눈에 걸리는 문장이 하나 있다. 그는 관객의 무례를 나무라다가 이렇게 적었다. 〈봄의 제전〉이 걸작인지 자기는 모르고 관객도 모른다고. 그러고는 덧붙였다. 그러나 결국 이들은 〈탄호이저〉를 조롱하고 야유했던 바로 그 관객이라고.

1861년 3월 파리 오페라에서 바그너의 〈탄호이저〉가 야유에 시달리다 사흘 만에 막을 내린 일을 끌어온 것이다. 이 문장이 말해 주는 것은 하나다. 이 공연을 음악사의 유명한 소동 계보에 놓아 보는 시선이 당대에 이미 있었다. 후대가 나중에 만들어 붙인 틀이 아니라는 뜻이다.

다만 그 이상으로 넓히지는 않겠다. 비평가 한 사람이 그렇게 보았다는 것과, 그날의 이야기가 그 지면에서 시작됐다는 것은 다른 주장이다. 우리가 원문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앞의 것까지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듣는가

곡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1부 「대지의 숭배」와 2부 「희생」이고, 전체 길이는 보통 삼십삼 분 안팎이고, 지휘에 따라 삼십 분에서 삼십칠 분까지 벌어진다.

첫 소리는 바순이다. 당시 관현악에서 바순에 좀처럼 맡기지 않던 높은 음역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바순의 어둡고 두꺼운 소리와 다르게 들린다. 랄로가 남긴 관찰이 여기에 닿는다. 그는 이 작곡가가 악기마다 낯선 음역에서 쓰는 짓궂은 즐거움을 누리며 청중에게 일련의 악기 수수께끼를 내놓은 것 같다고 적었다. 당대의 귀에도 악기의 정체가 흔들려 들렸다는 기록이 이렇게 남아 있다.

1부의 「봄의 조짐」에서는 현악기가 화음 하나를 계속 내려찍는다. 이 화음은 내림마 속7화음과 내림바 장3화음을 겹쳐 쌓은 복화음이다. 내림바 장3화음은 이명동음으로 마 장3화음과 같으니, 피아노 앞에서 확인하려면 그렇게 짚으면 된다. 두 개의 화음이 한꺼번에 울리니 어느 쪽으로도 풀리지 않는다. 여기에 강세가 규칙적으로 돌아오지 않고 자리를 옮긴다. 몸이 박자에 얹히려다 계속 미끄러지는 느낌이 이 대목에서 온다.

랄로는 겹침에 대해서도 적었다. 두 주제가 포개질 때 이 작곡가는 서로 어울리는 것을 고르기는커녕 정반대로, 겹쳤을 때 가장 거슬리는 마찰과 삐걱거림이 나도록 골랐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흠으로 적었지만, 지금 우리가 이 곡에서 듣는 긴장은 정확히 그 선택에서 나온다.

키타르가 남긴 지적 하나도 여기 붙는다. 그는 한 선율이 오십 마디 동안 위나 아래 2도로, 때로는 양쪽으로 동시에 겹쳐진다고 썼다. 그가 빈약함의 증거로 든 이 겹침이, 오늘 우리가 이 곡의 두께로 듣는 바로 그것이다.

2부는 더 어둡고 더 압축돼 있다. 마지막 「희생의 춤」에서 선택된 처녀는 홀로 춤을 추다 쓰러진다. 박자가 몇 마디 가지 않아 계속 바뀌기 때문에 지휘자와 연주자 모두에게 까다로운 악장으로 꼽힌다.

처음 듣는 사람을 위한 감상 안내

처음 들을 때는 줄거리를 따라가려 하지 않는 편이 낫다. 세 군데만 잡으면 된다.

첫째, 맨 처음 삼십 초. 무슨 악기인지 헷갈리는 그 소리가 바순이라는 것만 알고 들으면, 이 곡이 시작부터 악기의 평소 자리를 흔들고 들어온다는 것이 잡힌다.

둘째, 「봄의 조짐」의 내려찍는 화음. 박자를 세려 하지 말고 강세가 어디로 옮겨 다니는지만 느끼면 된다. 예측이 빗나가는 그 감각이 이 곡의 핵심이다.

셋째, 마지막 「희생의 춤」. 앞의 삼십 분이 여기로 모인다. 여기까지 오면 첫 소절을 다시 듣고 싶어지는데, 그때 이 곡은 처음보다 훨씬 또렷하게 들린다.

1913년의 두 비평가는 이 음악의 리듬과 솜씨를 알아보았고, 착상이 얇다고 판단했다. 앞의 절반은 지금도 그대로 유효하다. 뒤의 절반은 달라졌다. 두 사람이 빈약하다고 본 선율과 착상이, 백십삼 년을 지나며 이 곡의 독창성을 이루는 요소로 다시 읽혔다. 그 뒤집힘이 어디서 일어났는지는 결국 듣는 사람이 각자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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