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를 좋아했던 드보르자크(Antonín Dvořák)의 생애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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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닌 드보르자크(Antonín Leopold Dvořák, 드보르작)는 1841년 보헤미아의 작은 마을 넬라호제베스에서 태어나 1904년 프라하에서 세상을 떠난 체코 작곡가입니다.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 〈슬라브 무곡〉, 첼로 협주곡 b단조, 오페라 〈루살카〉를 남겼습니다. 그를 소개하는 글에는 거의 언제나 세 가지 이야기가 따라붙습니다. 정육점 집 아들이었다는 것, 오랫동안 이름 없는 비올라 주자였다는 것, 그리고 기차를 몹시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세 이야기 모두 사실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다만 흔히 덧붙는 장면 가운데 몇은 기록이 받쳐 주지 않습니다. 이 글은 그 이야기들을 당시의 편지와 주변 사람들의 회고에 맞추어 보면서, 무명의 극장 비올라 주자가 어떻게 서른이 넘어서야 세상에 이름을 알렸는지를 따라갑니다.

실크해트와 정장 차림의 수염 난 드보르자크가 맨 오른쪽에 서 있고, 여성과 아이들 여러 명이 판자벽 앞에 모여 선 흑백 사진

1893년 미국 체류 시절의 사진. 맨 오른쪽에 실크해트를 쓰고 선 사람이 드보르자크다.

인물 한눈에 보기
• 한 줄 정의: 극장 오케스트라의 비올라 주자에서 출발해 보헤미아의 춤과 노래를 교향곡과 실내악의 언어로 옮긴 체코 작곡가
• 생몰: 1841년 9월 8일 넬라호제베스(보헤미아) ~ 1904년 5월 1일 프라하
• 국적·활동지: 체코(당시 오스트리아 제국) / 프라하, 런던을 비롯한 영국 여러 도시, 뉴욕, 미국 아이오와주 스필빌
• 활동 분야: 작곡가, 비올라 연주자, 오르가니스트, 지휘자, 음악원 교수·원장
• 대표작 3개: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 첼로 협주곡 b단조, 오페라 〈루살카〉

드보르자크 시작하기
• 처음 접한다면: 〈슬라브 무곡〉 Op.46 1번 → 교향곡 9번 2악장 → 현악 4중주 〈아메리카〉 1악장 → 〈루살카〉 중 〈달에게 부치는 노래〉 순서가 좋습니다.
• 들을 곳: Spotify · Apple Music · YouTube에서 「Dvorak Slavonic Dance Op.46 No.1」, 「Dvorak New World Largo」, 「Song to the Moon Rusalka」로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드보르자크(드보르작)의 어린 시절, 여관과 정육점 집의 맏아들

드보르자크는 1841년 9월 8일 프라하에서 블타바(Vltava)강을 따라 북쪽으로 내려간 강가 마을 넬라호제베스(Nelahozeves)에서 아홉 남매의 맏이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프란티셰크는 여관을 빌려 운영하면서 고기도 팔던 사람이었습니다. 체코의 드보르자크 공식 자료는 이 집안의 아버지 쪽 조상이 모두 정육점 주인이거나 여관 주인이었고, 맏아들이 가업을 잇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고 적습니다. 아버지는 치터를 연주했고, 집안에서 음악은 일상의 즐거움이자 부업이었습니다.

1847년 마을 학교에 들어간 소년은 교사 요제프 슈피츠에게 노래와 바이올린을 배웠고, 곧 마을 잔치와 성당에서 연주했습니다. 훗날 그는 아버지를 따라 가축 시장에 다니던 시절을 떠올리며, 맡겨진 소가 고삐를 끌고 달아나 자기를 연못에 처박곤 했다고 웃으며 이야기했습니다. 그때 울면서 정육점 주인은 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는 말도 전합니다.

기차와의 인연도 이 마을에서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가 아홉 살 무렵 넬라호제베스를 지나는 철길이 놓였고, 1851년 여름 첫 증기기관차가 마을을 지나갔습니다. 체코 공식 자료는 이 어린 시절의 인상이 평생의 철도 사랑으로 이어졌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추정이지만, 철길이 집 앞을 지나간 소년이 훗날 프라하의 역들을 아침마다 돌아다니는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은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가업 대신 음악, 즐로니체와 프라하 오르간 학교

1853년, 열두 살의 드보르자크는 친척이 사는 소도시 즐로니체(Zlonice)로 갔습니다. 장사를 하려면 독일어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를 붙든 것은 독일어보다 음악이었습니다. 성가대 지휘자이자 오르가니스트인 안토닌 리만(Antonín Liehmann)이 그에게 화성과 오르간, 바이올린, 피아노를 가르쳤습니다. 드보르자크가 훗날 제자에게 들려준 리만은 성미가 급한 선생이었습니다. 한 대목을 못 치면 악보에 적힌 음표 수만큼 따귀를 맞았다고 그는 회고했습니다. 그래도 화성과 숫자 저음을 제대로 배운 곳이 여기였습니다.

흔히 이 시기에 드보르자크가 정식으로 도축 기술을 배워 수료증까지 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1856년에 즐로니체 정육 조합이 발급했다는 수료증 문서도 여러 책에 실렸습니다. 그러나 이 문서는 1937년에야 「발견」된 것이고, 체코의 드보르자크 연구자 야르밀 부르크하우저(Jarmil Burghauser)는 1987년 논문에서 그것이 위조임을 밝혔습니다. 그 시절 정육 도제라면 반드시 다녀야 했던 주일학교 명부에도, 즐로니체의 정육 도제 명부에도 드보르자크의 이름은 없습니다. 체코 공식 자료 역시 그가 정육 기술을 끝내 배워 마치지 않았다고 적습니다. 집안이 그에게 가업을 물려주려 했고 그가 아버지의 가게 일을 도왔다는 것까지가 확인되는 사실입니다.

독일어를 더 익히라고 체스카 카메니체(Česká Kamenice)에서 한 해를 보낸 뒤, 리만이 아버지를 설득했습니다. 이 아이의 재능에는 제대로 된 음악 학교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1857년 가을, 열여섯 살의 드보르자크는 프라하 오르간 학교(Pražská varhanická škola)에 들어갔습니다. 2년 과정을 마친 그는 1859년 여름 졸업 연주회에서 바흐와 함께 자작 전주곡과 푸가를 연주했고, 반에서 두 번째 성적으로 졸업했습니다. 훗날 그는 그 학교를 「모든 것에서 곰팡이 냄새가 났다」고 기억했습니다. 독일어를 잘하는 학생이 1등을 하던 곳이었고, 자기는 독일어를 못해서 아는 것도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임시극장의 비올라 주자, 오페라 오케스트라에서 보낸 9년

졸업 무렵 그는 성 인드르지흐 성당의 오르가니스트 자리에 응모했습니다. 지원자 여섯 명 가운데 가장 잘했지만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떨어졌습니다. 그 대신 들어간 곳이 카렐 콤자크(Karel Komzák) 악단이었습니다. 무도회와 식당, 산책 연주회에서 가벼운 음악을 연주하는 작은 악단이었고, 드보르자크는 여기서 비올라를 맡았습니다. 부모의 도움을 더 받을 수 없던 그는 친척 집과 셋방을 옮겨 다니며 지냈습니다.

전환점은 1862년 가을에 왔습니다. 체코어 오페라를 올릴 임시극장(Prozatímní divadlo)이 프라하에 문을 열면서 콤자크 악단 전체가 극장 오케스트라의 바탕으로 채용된 것입니다. 드보르자크는 그해 11월부터 1871년 여름까지 거의 9년 동안 매일 저녁 오페라의 비올라 파트를 연주했습니다. 1866년부터 이 극장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사람이 체코 국민 음악의 선구자 베드르지흐 스메타나(Bedřich Smetana)였습니다. 드보르자크는 스메타나의 지휘로 〈브란덴부르크 사람들〉과 〈팔려 간 신부〉의 초연에서 연주했습니다. 흔히 스메타나가 이 극장을 세웠다고 쓰지만, 극장은 그보다 먼저 문을 열었고 스메타나는 몇 해 뒤 지휘자로 들어왔습니다.

비올라는 오케스트라의 가운데 성부를 맡는 악기입니다.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은 선율 뒤에서 화음이 어떻게 쌓이고 관악기가 어디서 묻히는지를 날마다 몸으로 듣게 됩니다. 드보르자크는 극장에서 베르디와 마이어베어, 도니체티의 오페라를 연주하며 그런 귀를 길렀고, 악보를 살 돈이 없어 친구에게 총보를 빌려다 집에서 공부했습니다. 그 사이 혼자 쓴 곡이 쌓였지만 무대에 오른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1861년의 현악 5중주에 처음으로 작품 번호 1을 붙였고, 1865년에는 교향곡 1번 「즐로니체의 종」을 썼습니다.

작곡가로서의 첫 성공, 〈찬가〉와 결혼과 세 아이

극장에서 오페라를 날마다 들은 그는 오페라도 쓰고 싶어 했습니다. 1870년에 완성한 첫 오페라 〈알프레드〉는 그가 살아 있는 동안 한 번도 무대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 오페라 〈왕과 숯장이〉는 극장이 연주할 수 없다며 악보를 돌려보냈고, 드보르자크는 같은 대본에 음악을 처음부터 다시 썼습니다.

이름을 처음 알린 작품은 1873년 3월 9일 프라하에서 초연된 혼성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찬가: 빌라 호라의 상속자들〉 Op.30입니다. 체코의 옛 영광을 노래한 비톄슬라프 할레크의 시에 붙인 곡으로, 체코 공식 자료는 이 공연이 드보르자크의 첫 큰 작곡가 성공이었다고 적습니다. 그때까지 극장 오케스트라의 이름 없는 비올라 주자였던 그는 서른한 살에 비로소 작곡가로 이름을 얻었습니다. 같은 해 가을 그는 그동안 쓴 원고 상당수를 스스로 없앴습니다. 성공한 뒤에 오히려 자기 작품을 엄하게 다시 본 것입니다.

1873년 11월, 그는 피아노를 가르치러 드나들던 금세공인 집안의 딸 안나 체르마코바와 결혼했습니다. 이듬해부터 성 보이테흐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일했는데, 1874년 6월 프라하 시청이 그의 장학금 신청을 위해 발급한 증명서에는 수입이 오르가니스트 연봉 126굴덴과 개인 레슨으로 버는 한 달 60굴덴이 전부이고 재산은 없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 몇 해 사이 부부는 아이 셋을 모두 잃었습니다. 1875년 딸 요제파가 태어난 지 이틀 만에, 1877년 여름 딸 루제나가, 그리고 한 달 뒤 아들 오타카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첫 아이를 잃은 뒤 피아노 반주로 스케치해 두었던 〈스타바트 마테르(슬픔의 성모)〉를, 그는 두 아이를 더 잃은 뒤 관현악과 합창을 위한 곡으로 완성했습니다.

브람스와 짐로크, 〈슬라브 무곡〉이 연 문

가난한 젊은 작곡가에게 길을 연 것은 빈의 오스트리아 문교부가 해마다 주던 국가 예술가 장학금이었습니다. 「젊고 가난하며 재능 있는 예술가」에게 주는 돈이었습니다. 드보르자크는 1875년 1월 처음으로 이 장학금을 받았는데 액수는 줄 수 있는 최고액인 400굴덴이었고, 오르가니스트 연봉의 세 배가 넘었습니다. 그는 이 장학금을 그 해부터 다섯 해 연이어 받았습니다. 그의 두 번째 신청부터 심사위원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였습니다.

1877년 말, 브람스는 드보르자크가 제출한 악보 가운데 체코어 이중창 모음 〈모라비아 이중창〉에 특히 끌렸고, 자기 악보를 내던 베를린의 출판업자 프리츠 짐로크(Fritz Simrock)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한번 쳐 보면 나처럼 기뻐할 것이고, 출판업자로서는 그 톡 쏘는 매력에 더욱 기뻐할 것」이라는 추천이었습니다. 드보르자크는 1877년 12월 브람스에게 감사 편지를 보냈고, 두 사람의 교류는 브람스가 세상을 떠난 1897년까지 이어졌습니다. 드보르자크는 그해 봄 죽어 가는 브람스를 빈으로 찾아갔고 장례식에도 참석했습니다.

1878년 초 짐로크는 〈모라비아 이중창〉을 출판했고, 곧 드보르자크에게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같은 피아노 연탄곡을 청했습니다. 그해 3월부터 5월 사이에 쓴 〈슬라브 무곡〉 1집 Op.46의 고료는 300마르크였습니다. 드보르자크는 브람스와 달리 민요 선율을 가져다 쓰지 않고 슬라브 춤의 리듬과 성격만 빌려 선율을 새로 지었습니다. 그해 11월 베를린의 평론가 루이스 에를레르트(Louis Ehlert)가 신문에 이 곡을 소개하며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처럼 세계를 돌 작품」이라고 썼고, 이 평이 독일어권에서 드보르자크의 이름을 퍼뜨렸습니다. 곧 관현악판도 나왔습니다. 출판 당일 악보가 다 팔렸다는 이야기도 흔히 전하지만, 이번에 살핀 당시 기록에서는 그 근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브람스와 짐로크를 출판과 돈의 흐름으로 다시 읽어 보면, 브람스의 지갑 사정과 짐로크 이야기와도 이어집니다.

영국이 먼저 알아본 체코 작곡가

독일어권 다음으로 그를 크게 맞아들인 곳은 영국이었습니다. 1883년 3월 런던에서 〈스타바트 마테르〉가 처음 연주되어 호평을 받았고, 이듬해 3월 드보르자크는 런던 필하모닉 협회의 초청으로 처음 영국 땅을 밟았습니다. 그 뒤 1896년까지 그는 모두 아홉 번 영국을 찾았습니다. 오라토리오와 칸타타를 사랑하는 영국의 합창 축제들이 새 작품을 주문했고, 교향곡 7번은 런던을 위해, 오라토리오 〈성 루드밀라〉는 리즈 축제를 위해, 칸타타 〈유령의 신부〉와 〈레퀴엠〉은 버밍엄 축제를 위해 썼습니다.

1891년은 영예가 겹친 해였습니다. 그해 1월 그는 프라하 음악원 작곡 교수가 되었고, 3월에는 프라하의 체코 대학(카렐 대학)에서, 6월에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 무렵 그는 여름마다 프라하 남서쪽 비소카(Vysoká)의 시골집에 머물며 비둘기를 길렀습니다. 1891년 8월 그곳에서 쓴 편지에서 그는 「온종일 정원을 거닐며 비둘기들과 노는 것이 여기서 하는 일」이라고 적었습니다. 그 편지의 다음 대목에 미국에서 온 계약서 이야기가 나옵니다.

신세계를 향해, 뉴욕 국립음악원 시절 (1892~1895)

1891년 6월, 미국의 음악 후원자 저넷 서버(Jeannette Thurber)가 파리에서 전보를 보냈습니다. 자신이 세운 뉴욕의 국립음악원(National Conservatory of Music of America) 원장을 맡아 달라는 제안이었습니다. 드보르자크가 친구에게 쓴 편지에 따르면 조건은 여덟 달 일하고 넉 달 쉬며, 하루 세 시간 작곡과 관현악법을 가르치고, 학생 연주회와 미국 여러 도시의 연주회를 열고, 연봉 1만 5천 달러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돈을 「체코 돈으로 3만 5천 굴덴」이라고 환산했습니다. 체코 공식 자료는 이를 프라하 음악원이 줄 수 있던 보수의 30배라고 적습니다. 오래 망설이던 그는 계약서에 서명했고, 1892년 9월 아내와 두 아이를 데리고 대서양을 건넜습니다. 나머지 네 아이는 프라하에 남았다가 이듬해 5월 말에야 뉴욕에 왔습니다. 코바르지크의 회고에 따르면, 여름에 귀국하면 교향곡을 끝낼 수 없겠다고 판단한 드보르자크가 귀국 대신 아이들을 미국으로 부르기로 한 것입니다.

뉴욕에서 그는 미국에 고유한 음악이 어디서 나올 수 있는가 하는 물음 한가운데 섰습니다. 1893년 5월 21일 신문 「뉴욕 헤럴드」에는 「이 나라의 미래 음악은 이른바 흑인 선율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그의 말이 실렸고, 큰 논쟁이 일었습니다. 다만 이 기사를 누가 받아 적고 다듬었는지는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고, 음악학자 마이클 베커먼은 기자 제임스 크릴먼이 그의 생각을 받아 정리했을 것으로 봅니다. 음악원의 흑인 학생이던 해리 T. 버리(Harry T. Burleigh)는 저녁 식사 뒤면 그에게 영가를 불러 주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해 1월부터 쓰기 시작한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는 1893년 5월 24일 뉴욕에서 완성되었고, 12월 16일 카네기홀에서 안톤 자이들이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닉의 연주로 초연되었습니다. 미국 선율을 그대로 가져다 썼느냐는 물음에 드보르자크는 초연 전날 신문에서 「실제 선율은 하나도 쓰지 않았고 그 특징을 담은 내 주제를 썼다」고 답했고, 7년 뒤 지휘자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인디언과 미국 선율을 썼다는 해설은 「거짓말」이니 빼라고 했습니다. 1악장의 한 주제가 영가 〈스윙 로, 스위트 채리엇〉과 닮았다는 지적은 여러 연구자가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본인의 말과 연구자들의 판단을 함께 놓고 듣는 편이 정확합니다.

1893년 여름, 드보르자크 가족은 체코계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아이오와주의 마을 스필빌(Spillville)에서 휴가를 보냈습니다. 그는 새벽 네 시에 일어나 개울가를 걷고, 아침 일곱 시면 성당에서 오르간을 쳤고, 오후에는 철도 공사장에서 일하며 정착한 이민 1세대 노인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곳에서 6월 8일부터 23일 사이에 현악 4중주 F장조 Op.96 〈아메리카〉를, 이어 8월 1일까지 현악 5중주 E♭장조 Op.97을 썼습니다.

뉴욕에서 그가 가장 아쉬워한 것은 비둘기와 기관차였다고 조수 요제프 얀 코바르지크(Josef Jan Kovařík)는 회고했습니다. 비둘기는 센트럴 파크 동물원의 커다란 새장에서 만날 수 있었지만, 기관차는 어려웠습니다. 큰 역은 승객이 아니면 플랫폼에 들여보내 주지 않았고, 두 사람은 고가 전차를 타고 한 시간 걸려 맨해튼 북쪽 155번가까지 가서 둑 위에서 시카고행, 보스턴행 급행열차가 지나가기를 오후 내내 기다렸습니다. 너무 시간이 많이 들자 드보르자크는 새 취미를 찾았습니다. 항구의 증기선이었습니다. 출항일에는 사람들이 배에 오를 수 있었고, 그는 선장과 항해사들의 이름까지 외울 만큼 배를 드나들었습니다. 아침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신문의 선박 소식을 읽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1894년 여름을 고향에서 보내고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 첼로 협주곡 b단조를 썼고, 1895년 4월 완전히 귀국했습니다. 1897년 음악원이 다시 원장 자리를 제안했지만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미국 시기의 돈 이야기는 드보르자크의 지갑 사정에서 따로 다룹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글 :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

귀국과 마지막 십 년, 교향시와 〈루살카〉

1895년 11월 프라하 음악원으로 돌아간 그는 오스카르 네드발, 비톄슬라프 노바크, 요제프 수크 같은 제자들을 길렀습니다. 수크는 1898년 그의 맏딸 오틸리에와 결혼해 사위가 되었습니다. 1896년 1월에는 새로 생긴 체코 필하모닉의 첫 연주회를 자기 작품으로 지휘했습니다. 귀국 뒤 그는 교향곡을 더 쓰지 않고 체코 시인 카렐 야로미르 에르벤(Karel Jaromír Erben)의 시집 『꽃다발(Kytice)』의 담시에 바탕을 둔 교향시 〈물의 요정〉, 〈한낮의 마녀〉, 〈황금 물레〉, 〈산비둘기〉를 썼습니다. 줄거리가 있는 관현악곡은 그의 작품 가운데 드문 편입니다.

그리고 1901년 3월 31일, 프라하 국민극장에서 오페라 〈루살카(Rusalka)〉가 초연되었습니다. 인간 왕자를 사랑한 물의 요정 이야기로, 1막의 아리아 〈달에게 부치는 노래〉는 지금도 소프라노들이 독창회에서 즐겨 부르는 곡입니다. 오랫동안 교향곡과 실내악의 작곡가로 여겨지던 그에게 이 오페라는 무대에서의 성공을 안겨 주었고, 오늘날 그의 오페라 가운데 가장 자주 공연됩니다. 대본을 쓴 시인 야로슬라프 크바필은 드보르자크가 아침 일곱 시가 넘으면 자기를 찾아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프라하의 철도역들을 돌며 기관차를 보고 오는 길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대본 이야기를 하러 와서는 방금 본 기관차와 비둘기 이야기만 하다가, 무엇 때문에 왔는지 잊은 채 돌아가곤 했다는 것입니다.

같은 해 그는 오스트리아 귀족원의 종신 의원에 임명되었고, 7월에는 프라하 음악원 원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마지막 오페라 〈아르미다〉는 1904년 3월 25일 초연되었지만, 그는 신장 통증 때문에 공연 도중 극장을 나와야 했습니다. 의사는 안정을 명했는데, 며칠 뒤 그는 비노흐라디 역까지 산책을 나갔다가 감기에 걸렸고 다시 자리에 누웠습니다. 체코 공식 연표에 남은 그의 마지막 외출은 기차역이었습니다.

1904년 5월 1일 일요일, 한 달 넘게 누워 있던 그는 몸이 조금 나아졌다며 가족과 점심 식탁에 앉았습니다. 수프를 다 먹은 뒤 어지럽다고 말했고, 곧 의식을 잃었습니다. 향년 62세였습니다. 공식 사인은 뇌졸중으로 기록되었고, 당시 한 음악 잡지는 심장 발작이라고 보도했으며, 오늘날의 의학으로는 오래 누워 지낸 끝에 온 폐색전이었을 가능성이 거론됩니다. 5월 5일 장례에는 체코 학술원과 카렐 대학, 프라하시, 국민극장, 음악원이 함께 나섰고, 운구 행렬은 국민극장 앞에서 멈춰 발코니에서 울리는 그의 〈레퀴엠〉을 들은 뒤 비셰흐라드(Vyšehrad) 묘지로 향했습니다. 체코 공식 자료는 그 규모가 가장 중요한 국장들과 견줄 만했다고 적습니다.

드보르자크(드보르작) 음악의 세 가지 특징

  • 민속의 리듬, 자기의 선율 : 〈슬라브 무곡〉에서처럼 그는 민요를 그대로 옮기기보다 푸리안트(furiant, 박자가 엇갈리는 빠른 체코 춤)와 둠카(dumka, 느린 슬픔과 빠른 기쁨이 번갈아 나오는 슬라브 노래) 같은 춤과 노래의 형식을 빌려 선율을 새로 지었습니다. 미국 시기에도 그는 같은 방식으로 썼다고 스스로 밝혔습니다.
  • 독일 형식 위의 체코 소리 : 교향곡과 현악 4중주처럼 베토벤과 브람스가 다진 형식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안을 보헤미아의 춤과 노래로 채웠습니다. 브람스가 그를 출판업자에게 소개한 것도 이 결합을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 안쪽 성부를 아는 관현악 : 9년 동안 극장의 비올라 자리에 앉았던 사람답게 그는 가운데 성부에 자주 노래를 맡겼습니다. 현악 4중주 〈아메리카〉의 첫 주제를 비올라가 여는 것이 한 예입니다. 교향곡 9번 2악장의 잉글리시 호른 선율처럼 한 악기에 긴 노래를 맡기는 것도 그의 관현악이 기억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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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보르자크에 대해 자주 묻는 질문

Q1. 드보르자크는 정말 도축 기술을 배운 정육사였나요?

아닙니다. 집안이 여관과 정육점을 하며 맏아들에게 가업을 물려주려 했고 그가 가게 일을 도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식으로 기술을 배워 마쳤다는 근거로 쓰이던 1856년 정육 조합 수료증은 1937년에 처음 나타난 문서였고, 연구자 부르크하우저가 1987년에 위조로 판정했습니다. 당시 도제가 다녀야 했던 주일학교 명부에도 그의 이름은 없습니다.

Q2. 기차를 좋아했다는 이야기는 어디까지 사실인가요?

상당 부분 사실입니다. 프라하에서 아침 산책 때마다 여러 역을 돌며 어느 기관차가 어느 노선을 달리는지 알았고 기관사들과도 알고 지냈다고 그의 서간집 편자는 적고, 〈루살카〉의 대본가 크바필과 뉴욕의 조수 코바르지크도 각자 기관차를 보러 다니던 그를 회고했습니다. 뉴욕에서 기차를 보기 어려워지자 증기선으로 취미를 옮긴 일도 코바르지크의 회고에 있습니다. 반면 기차 시간표를 통째로 외웠다거나, 레슨을 시작하기 전 학생에게 기차 이야기부터 물었다는 이야기는 이번에 살핀 회고와 서간에서 출처를 찾지 못했습니다.

Q3. 교향곡 9번에 흑인 영가를 그대로 가져다 썼나요?

드보르자크 자신은 두 번 부인했습니다. 1893년 초연 전날 신문에서 실제 선율은 쓰지 않고 그 특징을 담은 자기 주제를 썼다고 했고, 1900년 편지에서도 미국 선율을 썼다는 해설은 거짓이라고 했습니다. 다만 1악장의 한 주제가 영가 〈스윙 로, 스위트 채리엇〉과 닮았다는 데에는 여러 연구자가 동의하고, 그에게 영가를 불러 준 해리 버리도 그렇게 회고했습니다. 그대로 베낀 것은 아니지만 영가의 울림이 들어와 있다는 정도가 현재의 판단입니다. 2악장 선율에 영어 가사를 붙인 영가풍 노래 〈고잉 홈〉은 그의 제자가 1922년에 만든 것이므로, 교향곡이 먼저이고 노래가 나중입니다.

Q4. 스메타나와 드보르자크는 무엇이 다른가요?

두 사람 모두 체코 음악을 세운 작곡가로 꼽히고, 드보르자크는 젊은 시절 스메타나가 지휘하는 극장 오케스트라에서 비올라를 켰습니다. 스메타나는 〈팔려 간 신부〉 같은 오페라와 연작 교향시 〈나의 조국〉처럼 체코의 이야기와 풍경을 담은 무대 음악과 표제 음악에서 큰 자취를 남겼습니다. 드보르자크도 오페라와 교향시를 썼지만, 그를 국제적으로 알린 것은 교향곡과 실내악, 합창곡이었고 그 길을 열어 준 사람은 브람스였습니다. 같은 체코 음악을 한 사람은 주로 무대와 이야기로, 다른 한 사람은 주로 교향곡과 실내악으로 세계에 내보냈다고 보면 차이가 잡힙니다.

드보르자크(드보르작) 대표곡 추천 가이드 : 처음 듣는다면 이것부터

작품명 장르 추천 이유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 Op.95 교향곡 1893년 뉴욕에서 완성해 카네기홀에서 초연했습니다. 2악장의 잉글리시 호른 선율부터 들어 보면 좋습니다.
교향곡 8번 G장조 Op.88 교향곡 1890년 프라하에서 작곡가가 직접 지휘해 초연했습니다. 9번보다 밝고 전원적인 분위기입니다.
슬라브 무곡 Op.46 & Op.72 관현악 1878년 1집이 그의 이름을 유럽에 알렸습니다. 피아노 연탄곡으로 먼저 썼고 곧 관현악판이 나왔습니다. 곡마다 다른 춤의 리듬을 비교해 들을 수 있습니다.
첼로 협주곡 b단조 Op.104 협주곡 뉴욕에서 쓴 마지막 협주곡입니다. 브람스가 첼리스트 하우스만에게 「이런 첼로 협주곡을 쓸 수 있는 줄 알았다면 나도 써 보았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하우스만을 거쳐 브람스 전기 작가들에게 전해졌습니다.
현악 4중주 12번 〈아메리카〉 Op.96 실내악 1893년 6월 스필빌에서 16일 만에 썼습니다. 첫 주제를 비올라가 엽니다.
오페라 〈루살카〉 Op.114 오페라 1901년 초연. 1막 아리아 〈달에게 부치는 노래〉는 소프라노 독창회의 단골 곡입니다.
어머니가 가르쳐 주신 노래 Op.55-4 가곡 가곡집 〈집시의 노래〉의 넷째 곡입니다. 짧고 단순한 선율이라 처음 듣는 사람도 따라가기 쉽습니다.

정리: 드보르자크는 정육점 집 맏아들로 태어나 가업 대신 음악을 택했고, 극장 오케스트라의 비올라 자리에서 9년을 보낸 뒤 서른한 살에야 작곡가로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를 세상에 내보낸 것은 빈의 장학금 심사에 앉아 있던 브람스였고, 영국의 합창 축제와 뉴욕의 음악원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수료증 이야기처럼 기록이 받쳐 주지 않는 이야기를 걷어 내도, 비둘기를 기르고 기관차를 보러 역을 돌던 사람은 남습니다. 뉴욕에서도 프라하에서도 그는 아침마다 역과 항구로 나갔고, 마지막 외출도 기차역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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