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발디는 피에타 고아원의 음악교사로 일했고, 협주곡을 출판했고, 필사본을 직접 팔았고, 오페라를 작곡하고 극장 제작과 흥행 운영에 참여했습니다. 수입원이 하나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여러 수입원 가운데 어느 것도 그의 말년까지 남지 않았습니다.
그는 음악을 많이 썼지만, 그것이 곧 재산을 남겼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이 글은 그가 오갔던 수입원들을 하나씩 따라가며, 왜 그중 무엇도 끝까지 그를 지켜 주지 못했는지를 봅니다.
• 한 줄 정의: 급여·출판·필사본 판매·오페라 제작을 오갔지만 그중 무엇도 말년까지 지켜내지 못한 바로크 작곡가
• 생몰: 1678년 3월 4일 ~ 1741년 7월 28일
• 국적·활동지: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생, 말년에 베네치아를 떠나 빈으로 이동했으나 정착하지 못한 채 사망
• 활동 분야: 협주곡 형식의 표준을 세우고, 오페라 작곡과 제작·공연 운영에도 깊이 관여한 임프레사리오
• 대표작 3개: 사계(Op.8), 화성의 영감(Op.3), 라 스트라바간차(Op.4)
오늘의 진입점
• 처음 접한다면: 사계 중 ‘봄’ 1악장부터 들어 보시길 권합니다. 그의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이면서, 이 글에서 다루는 여러 수입원 가운데 어느 하나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 곡이기도 합니다.
피에타가 제공한 반복적인 일자리와 작품 주문
비발디는 1703년 베네치아의 자선 고아원 겸 음악원인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와 첫 계약을 맺고 바이올린 교사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자리는 그의 경력 내내 이어진 것이 아니라, 매년 다시 심사받고 여러 차례 중단되기도 한 반복적인 고용이었습니다. 이후 공명현을 갖춘 비올 계열 악기인 비올라 알링글레제 지도까지 겸했습니다.
1723년 7월, 피에타는 그와 새로운 조건을 정했습니다. 매달 협주곡 두 곡을 납품하면 곡당 1제키노를 지급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실제로 1723년부터 1733년까지 10년 동안 그가 지급받은 협주곡은 140곡으로 기록에 남아 있어, 이 계약 속도와 대체로 들어맞습니다. 다만 이 계약 하나로 그의 생애 협주곡 500여 곡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그가 방대한 양의 협주곡을 쓸 수 있었던 여러 조건 가운데 하나였을 뿐입니다.
급여 규모를 보여 주는 일화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제자 안나 마리아가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피에타는 그를 위해 마련한 바이올린 비용으로 20두카트를 지급했습니다. 피에타가 제자를 위해 이만한 금액을 지급했다는 기록은, 이 기관이 연주 교육에 상당한 비용을 투입했음을 보여 줍니다. 이 돈을 준 것은 비발디 개인이 아니라 피에타였다는 점에서, 이 일화는 그의 개인 자선이 아니라 피에타의 교육 투자를 보여 주는 사례에 가깝습니다.
암스테르담 출판, 그러나 한 가지 유통망만은 아니었다
1711년, 비발디는 이탈리아가 아니라 암스테르담의 출판업자 에스티엔 로제를 통해 작품3 《화성의 영감》(협주곡 12곡)을 펴냈습니다. 이 모음집은 1743년까지 약 스무 차례 재판됐습니다. 다만 그의 유럽 명성을 이 유통망 하나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화성의 영감과 뒤이은 작품4 《라 스트라바간차》 이후, 로제가 펴낸 후속 출판물에는 비발디가 직접 제공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작품도 섞여 들어갔습니다. 이후 그를 통한 그의 인쇄 출판은 점차 줄어들었습니다.
출판사 대신 필사본을 직접 판 이유
1730년대에 접어들며 비발디는 정식 인쇄 출판 대신 개별 협주곡의 필사본을 직접 파는 쪽을 택하기 시작했습니다. 1733년 베네치아를 방문한 한 영국인 여행자가 남긴 편지에는, 비발디가 필사본을 한 곡당 1기니에 파는 것이 인쇄본을 내는 것보다 이득이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인쇄·유통 과정에서 출판업자가 가져가던 몫을 건너뛰고 자신의 이름값을 직접 현금화하려 한 것으로, 이는 앞선 출판 관계와는 별개의 독자적인 사업 판단이었습니다.
또 다른 수입원, 오페라 극장 경영
1713년 5월 비첸차에서 첫 오페라 《오토네 인 빌라》를 무대에 올린 직후, 비발디는 1714년부터 베네치아 산탄젤로 극장에서 임프레사리오 겸 음악 책임자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임프레사리오란 공연을 기획하고 제작하는 흥행 책임자를 뜻합니다. 그는 가수를 섭외하고 제작을 맡으며 흥행의 위험도 상당 부분 짊어졌지만, 구체적인 비용을 얼마나 부담했는지는 시즌과 계약마다 달랐습니다.
오페라 사업은 협주곡 납품이나 악보 출판·판매와는 성격이 다른 수입원이었습니다. 당대 베네치아에서 오페라는 가장 인기 있는 오락이었던 만큼 수익을 크게 낼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만큼 흥행에 좌우되는 위험도 큰 사업이었습니다.
빈에서 찾지 못한 다음 자리
1740년 비발디는 베네치아를 떠나 빈으로 향했습니다. 그가 그곳에서 기대할 수 있었던 가장 유력한 궁정 후원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6세였습니다. 그러나 카를 6세는 1740년 10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빈 이주의 정확한 목적으로 오페라 공연 가능성 등이 거론되지만, 이를 확정할 만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1741년 7월 27일에서 28일로 넘어가는 밤, 비발디는 빈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63세였습니다. 장례는 성 슈테판 대성당에서 치러졌는데, 호상꾼 여섯 명과 소년 합창단 여섯 명이 함께했고 비용은 19플로린 45크로이처, 조종은 가장 낮은 등급으로 울렸습니다. 그의 유해는 공공병원 기금이 관리하던 뷔르거슈피탈 묘지에 소박하게 묻혔습니다.
베네치아에 전해진 당대의 연대기 《콤메모리알리 그라데니고》는 그를 두고 "5만 두카트 이상을 벌었으나 무질서한 낭비로 빈에서 궁핍하게 죽었다"고 전합니다. 다만 이는 회계 장부가 아니라 그의 부고가 베네치아에 전해진 뒤 남겨진 인물평입니다. 낭비를 원인으로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그가 거쳐 온 여러 수입원 가운데 어느 것도 끝까지 지속되지 않았다는 사실 쪽이 더 분명합니다.
많이 쓴 것과 남긴 것은 별개였다
비발디의 지갑 사정을 안정과 위험의 단순한 대립으로 읽기는 어렵습니다. 피에타의 곡당 납품 계약도, 암스테르담을 통한 출판도, 필사본 직접 판매도, 오페라 극장 경영도 각자 한 시기의 수입원이었을 뿐, 그중 무엇도 평생 유지되는 자산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생애 500곡이 넘는 협주곡을 남겼지만, 많이 쓴 것과 재산을 남긴 것은 서로 다른 문제였습니다.
꼭 들어야 할 비발디의 작품들
사계(Op.8)는 1718년에서 1723년 무렵 작곡되어 보헤미아의 모르친 백작에게 헌정되고 1725년 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된 곡입니다. 이 시기 비발디는 피에타가 아니라 만토바 궁정 악장이라는 또 다른 자리에도 있었습니다. 그의 대표작조차 어느 한 수입원에 매여 있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 주는 예입니다. 화성의 영감(Op.3)은 그를 이탈리아 밖으로 처음 알린 출판작입니다. 라 스트라바간차(Op.4)는 화성의 영감 이후 로제가 출판한 바이올린 협주곡집으로, 비발디의 국제 유통을 이어간 작품입니다.
비발디 시작하기
사계의 ‘봄’ 1악장부터 들어 보시길 권합니다. 이어서 화성의 영감의 한 곡을 들으면, 암스테르담을 거쳐 유럽 전역에 퍼진 그의 이름이 실제로 어떤 소리였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곡이 서로 다른 시기, 서로 다른 수입원과 맞닿아 있었다는 것을 알고 들으면, 그의 음악과 그의 지갑 사정이 얼마나 다른 궤적을 그렸는지가 더 또렷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