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의 생애와 작품, 조명을 끄고 무대에 선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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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리흐테르가 연주하는 무대는 어두웠습니다. 객석 조명이 꺼지고 무대 조명도 내려간 상태에서, 피아노 위 악보를 비추는 작은 램프 하나만 켜져 있었습니다. 청중은 연주자의 얼굴도 손도 거의 볼 수 없었습니다.

이유는 그가 직접 밝혔습니다. 연주자의 표정이나 몸짓 같은 것에 주의를 빼앗기지 않고 음악만 듣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느 연주회 프로그램에 그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우리는 관음의 시대에 살고 있으며, 음악에 그보다 치명적인 것은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인물 한눈에 보기
• 한 줄 정의: 20세기 후반 피아노 연주의 기준을 세운 러시아 피아니스트
• 생몰: 1915년 3월 20일 지토미르 출생, 1997년 8월 1일 모스크바에서 사망
• 국적·활동지: 소련과 러시아, 만년에는 유럽과 일본을 포함한 전 세계
• 활동 분야: 피아노 독주와 실내악, 바흐부터 동시대 음악까지의 광범위한 레퍼토리
• 대표 연주: 무소륵스키 〈전람회의 그림〉 소피아 실황,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소나타, 슈베르트 후기 소나타, 바흐 〈평균율〉

처음 들을 작품
• 처음 접한다면: 무소륵스키 〈전람회의 그림〉, 1958년 소피아 실황 녹음. 음질은 좋지 않지만 30분 안에 이 연주자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분명해집니다.

왜 조명을 껐는가

연주자를 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만년의 그는 예고 없이 작은 도시의 작은 홀에서 연주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대형 공연장의 화려한 무대를 피했고, 프로그램을 미리 공지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명을 껐습니다.

이 선택은 두 가지를 동시에 겨냥합니다. 하나는 청중입니다. 무대가 보이지 않으면 감상은 청각으로만 이루어집니다. 다른 하나는 연주자 자신입니다.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는 연주자도 자기를 연출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같은 시기에 그는 암보를 그만두고 악보를 보며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기억력 쇠퇴로 설명하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는 이 방식으로 오히려 레퍼토리를 계속 넓혔습니다. 외워야 한다는 제약이 사라지면 새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속도가 빨라집니다. 실제로 그가 평생 무대에 올린 곡은 900곡에 이르고, 연주회 횟수는 3,589회로 집계됩니다. 다만 그 넓이가 전부를 훑는 방식은 아니었습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곡 가운데 그가 손댄 것은 22곡뿐이고, 나머지는 끝내 치지 않았습니다.

독학으로 시작해 스물두 살에 음악원에 들어가다

그는 어린 신동으로 훈련받은 연주자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 테오필 리흐테르는 빈에서 공부한 독일계 피아니스트이자 오르간 연주자였고, 어머니 쪽도 독일계였습니다. 아들은 정식 피아노 교습을 체계적으로 받지 않았습니다. 대신 집에 있던 악보를 스스로 읽어 나갔고, 십 대 후반에는 오데사의 오페라 극장에서 가수들의 연습을 반주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 경력이 그의 음악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오페라 반주자는 매일 새로운 악보를 처음 보고 바로 쳐야 하고, 관현악 총보를 피아노 한 대로 옮겨 소리 내야 합니다. 훗날 그의 연주에서 나타나는 관현악적인 음향과 방대한 초견 능력이 여기서 만들어졌습니다.

1937년, 스물두 살에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의 하인리히 네이가우스 문하로 들어갑니다. 네이가우스는 이 늦깎이 학생을 두고 자기가 평생 기다려 온 재능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리흐테르는 음악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필수 과목을 소홀히 해 한때 제적되기도 했습니다.

소련이라는 조건

그가 서방에 알려진 것은 마흔다섯이 되어서였습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그날 그는 성악가 니나 도를리아크(Nina Dorliac)를 처음 만났습니다. 뒤에 평생의 반주 상대이자 반려가 되는 사람입니다. 같은 해 독일계라는 것이 죄가 되었습니다. 아버지 테오필 리흐테르는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스승 하인리히 네이가우스도 독일계라는 이유로 붙잡혀 우랄로 추방됐습니다. 아들은 이 일에 대해 공개적으로 거의 말하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을 만난 날과 아버지를 잃은 해가 같은 해에 겹쳐 있습니다.

1948년에는 당이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를 비롯한 작곡가들을 형식주의로 몰아세웠습니다. 음악계 인사들에게 비난 성명에 이름을 올리라는 요구가 돌았고, 리흐테르는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가로 음악원 강의 자리를 잃었습니다. 다만 이 이야기의 출처는 그가 만년에 남긴 대담이고, 당시 문서로 확인되는 것은 아닙니다.

전후에 그는 소련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로 인정받았고 1949년에 스탈린상을 받았습니다. 해외 연주는 1950년부터 체코슬로바키아를 비롯한 동구권에서는 이루어졌지만, 서방 무대는 오랫동안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서방 청중이 그의 연주를 처음 실황으로 들은 것은 1960년 5월 헬싱키였고, 카네기홀 데뷔는 그해 10월 19일이었습니다. 그 전까지 서방에서 그는 소문과 몇 장의 음반으로만 존재하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공을 가장 인정하지 않은 사람이 본인이었습니다. 그는 무대에서 마이크가 보이지 않게 해 달라고 요구했고, 뉴욕 연주의 녹음이 음반으로 나오는 것을 막으려 했습니다. 음반사가 소련 측에 지불한 금액은 6만 달러였다고 전해지지만 연주자 본인에게 돌아온 것은 없었습니다.

2년 전인 1958년, 그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회 차이콥스키 콩쿠르 심사위원이었습니다. 미국의 스물세 살 반 클라이번에게 최고점을 주었고, 냉전의 한복판에서 미국인이 우승했습니다. 그 뒤로 그는 콩쿠르 심사를 맡지 않았습니다.

쇼스타코비치를 비롯한 동시대 작곡가들과의 관계도 이 조건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리흐테르는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소나타 여러 곡을 초연했습니다. 소나타 7번은 악보를 받고 나흘 만에 외워 1943년에 처음 연주했고, 9번은 그에게 헌정되어 1951년 작곡가의 예순 살 생일에 초연했습니다. 새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일이 정치적 위험을 동반할 수 있던 시기에 그는 그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 관계는 한 번 더 특이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1952년 2월 18일, 프로코피예프의 〈첼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교향 협주곡〉이 초연될 때 지휘대에 선 사람이 리흐테르였습니다. 독주는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연주는 모스크바 청년 오케스트라였습니다. 그가 지휘봉을 든 것은 평생 이날 한 번뿐입니다. 젊은 시절 그는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지휘자가 되고 싶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듬해 봄, 1953년 3월 5일에 프로코피예프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같은 날 스탈린도 죽었습니다. 신문 지면이 온통 조문으로 덮여 작곡가의 부고는 한참 뒤로 밀렸고, 장례에 쓸 꽃조차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그의 연주는 무엇이 달랐는가

해석을 앞세우지 않고 악보에 적힌 것을 그대로 세우려 했습니다.

리흐테르의 연주를 처음 들으면 두 가지가 먼저 옵니다. 하나는 음량의 폭입니다. 거의 들리지 않는 소리에서 오케스트라 같은 총주까지, 같은 곡 안에서 층이 극단적으로 벌어집니다. 다른 하나는 속도의 선택입니다. 그는 통상적인 템포에서 크게 벗어나는 경우가 잦은데, 빠를 때는 위태로울 만큼 빠르고 느릴 때는 음악이 멈출 것처럼 느립니다.

그런데 이것이 개성을 드러내려는 시도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는 자기 해석을 얹기보다 악보에 적힌 지시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쪽이었습니다. 작곡가가 아주 여리게 치라고 적었으면 정말로 들릴락 말락 하게 쳤고, 아주 빠르게라고 적었으면 연주 가능성의 한계까지 갔습니다. 결과가 극단적으로 들리는 것은 지시가 극단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독주자로만 기억되기 쉽지만 그는 남과 함께 연주한 시간이 많았습니다. 첼리스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와 오랜 기간 함께 무대에 섰고, 바이올리니스트 다비트 오이스트라흐와도 실내악을 남겼습니다. 영국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벤저민 브리튼과의 협연도 만년의 중요한 기록입니다. 자기를 지우려 한 연주자가 협연에서는 상대의 소리를 오래 들었다는 점이 함께 읽힙니다.

자기 연주에 대한 평가는 냉혹했습니다. 그는 자기 녹음 대부분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만년에 남긴 기록에는 자기 연주를 실패로 규정한 대목이 여럿 있습니다. 조명을 끈 무대와 이 자기 평가는 같은 태도의 두 얼굴로 보입니다. 연주자는 음악 앞에서 지워져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헛간과 12월의 밤

그는 무대를 고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직접 만들기도 했습니다.

1963년 프랑스 투렌 지방을 지나다 그는 메슬레라는 마을의 낡은 헛간을 발견했습니다. 건초가 쌓이고 닭이 드나들던 12세기 곡물창고였습니다. 소리가 좋다는 이유 하나로 그는 그곳을 연주장으로 삼기로 했고, 이듬해 6월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소나타 2번으로 첫 연주회를 열었습니다. 이 축제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림 쪽에서 왔습니다. 리흐테르는 파스텔로 그림을 그렸고 그중 여러 점이 모스크바 푸시킨 미술관에 남아 있습니다. 그는 작곡가를 화가와 짝지어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쇼팽에게는 들라크루아를, 슈만에게는 고야와 실레를, 브람스에게는 브뤼헐을 붙였습니다. 소리와 화면을 같은 자리에 두고 생각한 것입니다.

1981년 그는 푸시킨 미술관 관장 이리나 안토노바와 함께 미술관 안에서 열리는 음악제를 만들었습니다. 이름은 〈12월의 밤〉입니다. 그림이 걸린 전시실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이 행사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연주자가 자기를 지우려 한 사람이 무대만은 여러 개 만들어 놓고 떠난 셈입니다.

대표 음반

대표 음반

무소륵스키

  • 〈전람회의 그림〉 1958년 소피아 실황 · 음질은 거칠지만 그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연주

프로코피예프

  • 피아노 소나타 6번·7번·9번 · 6번과 7번을 초연했고 9번은 그에게 헌정된 작품

슈베르트

  • 후기 피아노 소나타 · 극단적으로 느린 템포로 논쟁을 부른 연주

바흐

  •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 현대 피아노로 연주하면서 낭만적 윤색을 걷어낸 접근

자주 묻는 질문

Q. 리흐테르의 연주를 처음 듣는다면 무엇부터 좋을까요?

A. 1958년 소피아 실황의 〈전람회의 그림〉을 권합니다. 30분 남짓이고 곡 자체가 그림을 따라가는 구성이라 따라 듣기 쉽습니다. 녹음 상태가 좋은 쪽을 원하신다면 슈베르트 즉흥곡이나 바흐 〈평균율〉이 무난합니다.

Q. 왜 악보를 보고 연주했나요?

A. 본인의 설명에 따르면 레퍼토리를 계속 넓히기 위해서였습니다. 외우는 데 드는 시간을 새 작품을 익히는 데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억력 문제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이 시기에도 그는 새로운 곡을 계속 무대에 올렸습니다.

Q. 실황 녹음이 유독 많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A. 그가 스튜디오 녹음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 번 다시 연주해 이어 붙이는 방식이 음악을 죽인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대표적인 기록 대부분이 연주회장에서 그대로 담긴 것이고, 음질이 고르지 않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작은 램프

연주자가 자기를 보여 주는 것이 공연의 일부가 된 시대에, 그는 반대 방향으로 갔습니다. 홀을 어둡게 하고, 악보 위에 램프 하나만 두고, 예고 없이 작은 도시에 나타나 연주하고 떠났습니다. 그가 남긴 문장 하나가 그 선택을 요약합니다. 우리는 관음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어둠 속에서 그는 소리만 남기려 했습니다.

모스크바에 그가 살던 집이 기념관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집 피아노의 악보대에는 지금도 악보 한 권이 펼쳐져 있습니다. 슈베르트의 D 459, 펼쳐진 곳은 48쪽입니다. 1997년 가을 연주회에서 칠 곡이었습니다. 그는 그해 8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램프 아래 있던 것은 결국 이것입니다. 다음에 칠 곡이 펼쳐진 악보 한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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