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스타코비치(Dmitri Shostakovich, 1906-1975)는 정치적인 논란으로 현대에 이르러 아직도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많은 작곡가이자 음악가이다. 쇼스타코비치의 작품 성향은 크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당의 억압을 받지 않은 청년 시절의 작품, 당의 억압과 그 영향에 있었던 시기, 1953년 스탈린이 죽고 크나큰 명성을 통해 당에서도 쉽게 건드리지 못했던 해빙기 시절의 쇼스타코비치 작품으로 분류할 수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러시아의 작곡가로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에서 음악가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측량처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으며, 어머니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졸업한 피아노 연주자였다. 그는 9세 때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림스키 코르사코프(Nikolai Rimsky-Korsakovs, 1844-1908)의 공연을 본 이후 음악 공부에 대한 열정을 가지게 되었다.
1919년 13세의 쇼스타코비치는 페트로그라드 음악원에 입학하여 니콜라이예프(Leonid Nikolayev)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스타인버그(Maximilian Steinberg)에게 작곡을 공부하였다. 쇼스타코비치의 천재성을 눈여겨 본 음악원의 음악 감독 글라주노프(Alexander Glazunov)는 적극적으로 그를 지원하였고, 쇼스타코비치는 열정적으로 음악 공부를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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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스타코비치 (출처 : newyorker.com) |
1922년 2월 아버지가 사망하자 어머니는 여러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였으며, 쇼스타코비치도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화관 피아니스트로 일하며 가족의 생계를 위해 노력했다.
1925년 졸업 작품인 <교향곡 1번>이 1926년 레닌그라드에서 초연한 이후, 그에게 명성이 퍼져나가 러시아 천재 음악가로 불리우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1927년 바르샤바 쇼팽 콩쿠르에 입상하면서 피아니스트로서 충분한 자질을 보였지만, 그는 작곡가의 길을 택했다. 같은 해 <교향곡 1번>을 작곡할 당시 프롤레타리아 러시아 음악가 협회(RAPM)와 현대음악협회(ASM)이 혁명 전통의 계승을 이유로 대립하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았던 쇼스타코비치는 양측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소련 국립 출판소 소속 음악국 선전부에서 혁명 10주년 기념작으로 위촉을 받은 <교향곡 2번>에는 시인 알레산드르 베즈미엔스키(Alexander Bezimensky)가 쓴 시 구절을 토대로 한 합창이 포함되어야 했다. 쇼스타코비치는 가사가 너무 선동적이라 불만을 표했지만 큰 수정 없이 곡에 도입되어 완성되었고 서구의 혁신적인 기법 적용과 선동성을 접목한 새로운 시도로 호평받았다. 1930년에 초연된 <교향곡 3번>은 노동과 혁명을 주제로 하였으나 전작과 다르게 선동성 있는 가사는 아니었다.
1903년 쇼스타코비치가 처음으로 작곡한 오페라 <코 The Nose>는 그의 개방적이고 실험적인 정신을 표현하는데 탁월한 본보기로 볼 수 있다. 알반 베르크(Alban Berg)의 영향을 받은 오페라 <므첸스크의 레이디 맥베스>는 1934년에 말리 극장에서 초연된 이후 5달 동안에 36번이나 공연되었으며, 모스크바에서는 두 시즌 동안 36번이나 공연되었다. 국제적인 성공도 거두웠는데, 로진스키(Artur Rodzinski)가 지휘한 미국 초연은 굉장한 호평과 평가가 이루어졌다. 시민들의 반응도 굉장히 호평이였으나, 스탈린이 이 오페라를 관람하는 도중 자리를 박차고 떠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936년 1월 공산당의 일간 기관지인 프라우다(Pravda)에서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음악이 아닌 혼돈”이라는 내용으로 기사가 실렸고, 졸지에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한동한 음악 활동을 금지당했다.
활동을 금지당하면서 <교향곡 4번>은 발표를 하지 못하게 되었고, 이후 1937년 11월 발표한 <교향곡 5번>이 스탈린과 소련 당국의 극찬을 받으면서 그는 대숙청에서 피해갈 수 있었다. 명예를 되찾은 쇼스타코비치는 레닌그라드 음악원 교수로 임명되고, 1939년 11월 5일에는 <교향곡 6번>을 초연하게 되었으며 1940년에 작곡한 <피아노 5중주 G단조>를 통해 제1회 스탈린상을 받게 되었다.
이후 쇼스타코비치는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제7번 교향곡>을 시작으로 <제9번 교향곡>까지 전쟁 교향곡이라 불리는 작품들을 뽑아내게 되었는데, 스탈린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에 나온 작품은 베토벤의 <제9번 교향곡> ‘합창’과 같은 혁명과 숭고한 이념을 나타내는 스타일의 곡을 원했었다. 하지만 쇼스타코비치는 이러한 기대를 저버리고 간결하고 가벼운 느낌의 곡을 썼다. 이에 스탈린은 굉장히 분노하였고, 스탈린주의에 추종자였던 즈다노프프(Andrei Zhdanov, 1896-1948)에게 서구의 영향을 받은 형식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
이로 인해 음악원의 교수직을 내놓고 스탈린이 사망한 해인 1953년까지 교향곡을 작곡하지 않게 되었으며, 전쟁을 소재로 한 스탈린 선전용 영화 음악을 작곡하거나 다시 한번 스탈린상을 받게 했던 <숲의 노래>같은 스탈린 정책을 찬양하는 음악을 발표하기도 하면서 소신에 따른 행동의 후폭풍을 모면하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1953년 스탈린의 사망 이후, 창작 활동에 큰 제약을 받지 않아 사회주의 리얼리즘 스타일의 작곡 형식과는 전혀 상관없는 작곡을 하기도 하였다. 그 해에 8년 만에 <제10번 교향곡>을 발표하였으며 1905년과 1917년에 있었던 혁명을 부제로 붙인 <제11번 교향곡>과 <제12번 교향곡>을 1957년과 1961년에 각각 초연하였다. 이 당시 혁명에 대한 부제를 붙인 사건으로 서구에선 소련 정권의 기회주의자로 비판이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1960년에 소련 공산당에 입당한 적이 있는데, 이 일도 기회주의자라는 수식어의 의견을 증폭시키는 사건이었다. 그의 입당이 자의에 의한 것인지 강제 입당이었는지 밝혀진 바가 없다. <교향곡 13번>이 1962년 12월 초연되었을 때 당시 정부 고위층의 초대석은 텅 비어 있었는데, 이는 당의 불쾌한 심기를 표출한 것이었다. 1969년 9월 초연된 <교향곡 14번>도 소련 정부가 좋아할만한 작품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쇼스타코비치의 국제적 명성이 소련 정부도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기에 전처럼 대놓고 불쾌감을 표시하기보다 무시하고 방관하였다.
1970년에 이르러 쇼스타코비치는 폐렴에 심근경색이 발병하여 건강이 굉장히 좋지 않은 상황이였다. 쇼스타코비치는 지속적인 치료를 받으면서 요양 생활을 하는 중 1971년에 <제15번 교향곡>을 작곡하였다. 이 곡은 1972년 1월 8일에 아들인 막심 쇼스타코비치(Maxim Shostakovich)에 의해 초연 되었으며, <비올라 소나타, Op. 147>을 마지막 작품으로 남긴 후 1975년 8월 9일에 급작스런 심장 발작으로 인해 모스크바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쇼스타코비치 사후 출판된 음악학자 솔로몬 볼코프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스탈린과 공산주의에 대하여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는 쇼스타코비치의 아들 막심은 “아버지는 평생 공산주의를 신봉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책에 대한 신빙성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었다. 쇼스타코비치의 정치적인 입장에 대한 부분은 논란은 피할 수 없지만 그의 음악적인 열정은 진실했고 생의 마지막까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