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배역, 같은 가수인데 녹음마다 전혀 다르게 들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리아 칼라스의 노르마가 그렇습니다. 칼라스는 이 배역을 스튜디오에서 두 번, 무대 실황으로도 여러 차례 녹음으로 남겼습니다. 1954년과 1960년 사이에는 6년이 있고, 그 사이에 1958년 로마의 스캔들이 있었습니다. 세 기록을 나란히 놓고 들으면 같은 악보가 한 사람의 목소리 안에서 어떻게 달라지는지가 들립니다.
• 1954년 스튜디오(EMI): 지휘 툴리오 세라핀 · 폴리오네 마리오 필리페스키 · 아달지사 에베 스티냐니 · 오로베소 니콜라 로시레메니
• 1955년 12월 7일 실황(밀라노 라 스칼라): 지휘 안토니노 보토 · 폴리오네 마리오 델 모나코 · 아달지사 줄리에타 시미오나토 · 오로베소 니콜라 자카리아
• 1960년 스튜디오(EMI): 지휘 툴리오 세라핀 · 폴리오네 프랑코 코렐리 · 아달지사 크리스타 루트비히 · 오로베소 니콜라 자카리아
• 이후: 1964년 서덜랜드(데카) · 1972년 카바예(RCA) · 겐체르는 정식 스튜디오 녹음 없음
칼라스는 노르마를 몇 번 스튜디오에 담았나
칼라스가 정식 스튜디오에서 완성한 노르마 녹음은 두 개뿐입니다. 첫 번째는 1954년 4월 23일부터 5월 3일 사이 밀라노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지휘는 툴리오 세라핀이었고, 폴리오네는 테너 마리오 필리페스키, 아달지사는 당대 최고의 이탈리아 메조소프라노로 꼽히던 에베 스티냐니, 오로베소는 니콜라 로시레메니가 맡았습니다. 두 번째는 그로부터 6년 뒤인 1960년 9월 5일부터 12일까지, 역시 세라핀의 지휘로 라 스칼라에서 녹음됐습니다. 이번에는 프랑코 코렐리가 폴리오네, 크리스타 루트비히가 아달지사, 니콜라 자카리아가 오로베소를 맡았습니다. 세라핀은 1948년 칼라스에게 이 배역을 처음 가르친 지휘자이기도 합니다.
칼라스는 무대에서는 이보다 훨씬 많이 노르마를 불렀고, 그 실황 중 상당수가 방송이나 녹음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글은 그중에서도 자료가 가장 잘 남아 있고 서로 뚜렷하게 대비되는 세 기록, 1954년 스튜디오와 1955년 12월 라 스칼라 실황, 1960년 스튜디오를 나란히 놓고 비교합니다.
1954년과 1960년, 같은 목소리가 어떻게 달라지는가
1954년 반은 칼라스의 목소리가 이른 전성기의 위엄을 그대로 지니고 있던 시기의 기록입니다. 평자들 사이에서 이 녹음은 종종 칼라스가 음반에 남긴 성취 중 최고로 꼽힙니다. 스티냐니와 함께 부르는 두 개의 이중창에서, 스물아홉 살의 소프라노는 이탈리아 벨칸토 메조의 정상급 목소리와 대등하게 맞섭니다.
1960년 반은 다른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같은 세라핀의 지휘, 같은 라 스칼라의 악단이지만, 코렐리라는 더 크고 화려한 폴리오네, 루트비히라는 더 부드럽고 짙은 아달지사를 상대로 칼라스는 훨씬 더 많은 뉘앙스를 배역에 쌓아 올립니다. 이 녹음은 칼라스가 완성한 마지막 노르마 전곡 기록이기도 합니다. 이후 그는 다시는 이 배역을 스튜디오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녹음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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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렐리·칼라스·자카리아가 노르마 녹음 세션 중 무대 위에서 함께 노래하는 모습(밀라노 라 스칼라). 출처: Touring Club Italiano 아카이브(Wikimedia Commons), 사진 기록 연도는 1962년으로 표기되어 있다 — 이 세 사람이 함께한 노르마 정식 스튜디오 녹음은 1960년반이다. CC BY-SA 4.0. |
같은 배역을 6년 간격으로 두 번 완성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례적입니다. 그런데 이 6년 사이에는 단순한 시간의 흐름 이상의 것이 있었습니다.
두 스튜디오 녹음 사이, 1958년 로마에서 있었던 일
1958년 1월 2일, 로마 오페라 극장. 이탈리아 대통령 조반니 그론키를 비롯한 로마 사교계 인사들이 총출동한 갈라 공연에서, 칼라스는 노르마 1막이 끝난 뒤 무대를 떠났습니다. 몸이 아프다는 이유였습니다. 뒤에 남은 것은 국가원수가 지켜보는 자리에서 공연을 중단시켰다는 스캔들이었습니다.
비판은 거셌습니다. 의회에서는 한 의원이 칼라스를 이탈리아의 모든 국립 극장 무대에서 배제하자는 동의안을 내놓기까지 했습니다. 칼라스 쪽은 급성 기관지염을 이유로 들었고 담당 의사들도 무대에 세우려 애썼다고 밝혔지만, 이 설명에 만족하지 못한 평자들 다수는 그가 단순히 목소리를 잃어 가고 있다고 의심했습니다. 그날 공연은 1막이 끝난 뒤 그대로 중단됐고, 이틀 뒤 로마 시즌이 재개되면서 아니타 체르케티가 대역으로 노르마를 이어받았습니다. 같은 시기 나폴리에서도 같은 배역으로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1958년의 이 사건이 곧바로 은퇴나 몰락으로 이어진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1954년의 위엄 있는 젊은 목소리와 1960년의 깊어진 목소리 사이에, 이런 위기의 순간이 놓여 있었다는 사실은 두 스튜디오 녹음을 비교해서 들을 때 함께 알아 둘 만한 배경입니다.
1955년 12월 7일, 라 스칼라 실황은 왜 다르게 들리는가
두 스튜디오 녹음 사이에는 무대에서 직접 잡힌 기록도 있습니다. 1955년 12월 7일 밀라노 라 스칼라 실황입니다. 지휘는 안토니노 보토, 폴리오네는 마리오 델 모나코, 아달지사는 줄리에타 시미오나토, 오로베소는 자카리아였습니다(자카리아는 5년 뒤 1960년 스튜디오반에서도 같은 배역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이 실황에는 스튜디오 녹음과는 다른 사정이 있습니다. 당시 녹음 장비가 공연 시작과 동시에 돌아가지 못해 이 실황의 첫 15분은 아예 녹음되지 않았습니다. 이후 나온 LP와 CD판들은 이 빈 부분을 다른 출처의 녹음으로 메워 왔는데, 그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로였습니다. 2004년 복원 작업을 진행한 디비나 레코즈는 이런 편집 없이, 남아 있는 원반 그대로를 복원해 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불완전하고 음질도 스튜디오반에 미치지 못하지만, 이 실황이 따로 값어치를 인정받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통제된 스튜디오가 아니라 실제 무대 위에서, 그것도 칼라스의 절정기로 꼽히는 시기에 객석 앞에서 실시간으로 만들어진 노르마이기 때문입니다.
칼라스 이후, 노르마는 세 갈래로 갈라졌다
칼라스 이후 이 배역을 대표한 세 명의 소프라노는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노르마에 답했습니다.
조앤 서덜랜드는 1964년 7월 런던에서 지휘자 리처드 보닝게, 런던 심포니와 함께 데카에 노르마를 녹음했습니다. 아달지사는 매릴린 혼, 폴리오네는 존 알렉산더가 맡았습니다. 카스타 디바를 원래 조성으로 되짚은 이야기는 앞서 벨리니 노르마 해설에서 다뤘습니다. 이 녹음에는 또 다른 복원도 있습니다. 보닝게는 악보를 다시 조사해 그동안 공연에서 관행적으로 잘려 나가던 대목들을 되살렸는데, 1막의 노르마·아달지사 이중창에 덧붙는 부분이 대표적입니다. 서덜랜드의 노르마는 극적인 무게보다 정확하고 유연한 기교로 이 배역에 접근한 결과물입니다.
몬세라 카바예는 1972년 9월 런던에서 카를로 펠리체 칠라리오의 지휘, 런던 필하모닉과 함께 RCA에 노르마를 녹음했습니다. 폴리오네는 플라시도 도밍고, 아달지사는 피오렌차 코소토, 오로베소는 루제로 라이몬디였습니다. 이 녹음은 전체 노르마 음반 목록 가운데서도 가창만 놓고 보면 가장 뛰어난 판 중 하나로 꼽힙니다. 카바예는 극적인 대결보다 길게 이어지는 레가토와 부드럽게 정점에 오르는 소리로 이 배역을 그려 냈습니다.
레일라 겐체르는 이 셋과 전혀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노르마를 스튜디오에서 정식으로 녹음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남아 있는 것은 저작권료 없이 유통된 무대 실황 녹음들뿐이고, 이런 음원이 워낙 많다는 이유로 겐체르에게는 '해적판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정작 겐체르 자신은 이 별명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정식 녹음이 적은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는 그 문제를 신경 써 본 적이 없으며 오히려 이렇게 남은 해적판 실황들이 있어 기쁘다고 답했습니다. 1964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콜론 극장에서 브루노 바르톨레티의 지휘로 부른 노르마가 이런 방식으로 남아 있는 기록 중 하나입니다.
정확함을 택한 서덜랜드, 성량과 레가토를 택한 카바예, 그리고 스튜디오의 통제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은 겐체르. 세 사람의 노르마가 이렇게 다른 방향으로 갈라진 것은, 애초에 칼라스 자신의 노르마부터가 스튜디오의 완성본과 무대의 실황본이 서로 다른 답을 내놓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처음 듣는다면, 이 순서를 권합니다
먼저 1954년 스튜디오반부터 듣는 것을 권합니다. 음질이 가장 잘 보존돼 있고, 칼라스의 목소리가 지닌 위엄을 가장 깨끗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다음 1955년 12월 라 스칼라 실황을 이어서 들어 보시길 권합니다. 음질은 떨어지지만, 스튜디오에서는 잡히지 않는 무대 위의 긴장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같은 사람이 같은 배역을 스튜디오와 무대에서 얼마나 다르게 만들어 내는지 확인하는 데는 이 두 녹음의 조합이 가장 좋습니다.
여기에 서덜랜드의 1964년반을 하나 더 얹어 들어 보면, 노르마라는 배역이 정확함과 극적 무게 사이에서 얼마나 다르게 지어질 수 있는지가 뚜렷해집니다. 칼라스가 감정을 목소리에 실어 나르는 쪽이라면, 서덜랜드는 그 감정을 정교한 발성 그 자체로 옮기는 쪽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칼라스의 노르마 정식 스튜디오 녹음은 몇 개인가요?
두 개입니다. 1954년 4월 23일부터 5월 3일 사이 밀라노에서 툴리오 세라핀의 지휘로 마리오 필리페스키, 에베 스티냐니, 니콜라 로시레메니와 만든 녹음이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1960년 9월 5일부터 12일까지 같은 세라핀의 지휘로 프랑코 코렐리, 크리스타 루트비히, 니콜라 자카리아와 남긴 녹음이며, 이것이 칼라스가 완성한 마지막 노르마 전곡 기록입니다.
Q. 레일라 겐체르의 노르마 음반은 정식으로 발매되었나요?
겐체르는 노르마를 스튜디오에서 정식으로 녹음한 적이 없습니다. 무대에서 부른 실황이 녹음되어 남은 것들뿐이며, 저작권료 없이 유통된 이런 실황 음원이 많다는 이유로 겐체르는 '해적판의 여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1964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콜론 극장 실황(지휘 브루노 바르톨레티) 등이 이런 방식으로 남은 대표적인 기록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