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1월,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 극장. 마리아 칼라스는 여드레 전 바그너의 발퀴레에서 무장한 여전사 브륀힐데를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청교도인들의 엘비라를 부르기로 했던 소프라노가 갑자기 병으로 쓰러졌고, 대신할 가수를 구하지 못한 극장은 지휘자 툴리오 세라핀에게 매달렸습니다. 세라핀이 떠올린 이름은 바로 며칠 전 브륀힐데를 부른 칼라스였습니다. 무겁고 육중한 바그너의 여신에서 가볍고 섬세한 벨리니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 그것도 엿새 만에 옮겨 가라는 요구였습니다. 1월 19일, 칼라스는 그 자리에 섰고 성공적으로 청교도인들의 엘비라를 불렀습니다. 성악계에서 이 두 배역을 함께 소화할 수 있는 목소리는 거의 없었습니다. 이 열하루가 오페라 역사상 가장 논쟁적이면서도 가장 큰 영향을 남긴 목소리의 탄생을 알렸습니다.
• 한 줄 정의: 드라마틱과 콜로라투라를 한 목소리로 소화하며 잊혀 가던 벨칸토 오페라를 무대로 되돌린 소프라노
• 생몰: 1923년 12월 2일(미국 뉴욕) ~ 1977년 9월 16일(프랑스 파리)
• 국적·활동지: 그리스계 미국 출생, 그리스에서 수학하고 이탈리아·유럽을 중심으로 활동
• 활동 분야: 20세기 오페라 소프라노, 벨칸토 부흥의 중심 인물
• 대표작: 벨리니 노르마, 푸치니 토스카, 도니체티 루치아 디 람메르무어(Lucia di Lammermoor, 람메르무어 가문의 루치아),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 케루비니 메데아(Medea)
처음 들을 작품
• 처음 접한다면: 1953년 스튜디오 토스카(빅토르 데 사바타 지휘, 주세페 디 스테파노·티토 고비 출연). 오페라 전곡 음반 가운데 손꼽히는 완성도로 꼽히는 판입니다.
칼라스는 아테네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칼라스는 1923년 12월 2일 뉴욕에서 그리스 이민자 부부 요르요스 칼로예로풀로스와 에반겔리아 디미트리아두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발음하기 힘든 성을 칼로스로, 다시 칼라스로 줄였습니다. 부모의 불화가 깊어지자 1937년 3월, 열세 살의 칼라스는 어머니, 언니와 함께 아테네로 돌아갔습니다. 아버지는 뉴욕에 남았습니다.
아테네에서 처음 그의 목소리를 다듬은 사람은 그리스 국립 음악원의 마리아 트리벨라였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스승은 1939년부터 사사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엘비라 데 이달고였습니다. 스페인 출신으로 자신도 화려한 무대 경력을 가졌던 데 이달고는 벨칸토, 즉 19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확립된 유려한 발성 전통을 철저히 가르쳤고, 훗날 자신의 제자를 두고 "현상"이라 회고했습니다. 1942년 8월, 열여덟 살의 칼라스는 아테네에서 푸치니의 토스카로 정식 데뷔했습니다. 나치 점령 아래의 궁핍한 시기였지만, 칼라스는 이 그리스 시절을 자기 경력의 토대로 여겼습니다. 1945년 뉴욕으로 돌아갈 무렵, 그는 이미 일곱 개 오페라에서 쉰여섯 차례 무대에 오른 경험을 쌓은 뒤였습니다.
스물네 살, 이탈리아로 건너가다
뉴욕에서 별다른 계약을 얻지 못한 칼라스에게 기회가 온 것은 1947년입니다. 베로나 아레나 축제의 예술감독이 미국에서 신인을 물색하다 그를 발견했고, 그해 8월 2일 칼라스는 폰키엘리의 라 조콘다로 이탈리아 데뷔 무대에 섰습니다. 지휘는 훗날 그의 평생의 조언자가 되는 툴리오 세라핀이었습니다. 이 공연에서 칼라스는 미래의 남편이 될 베로나의 사업가 조반니 바티스타 메네기니도 만났습니다. 두 사람은 1949년 결혼했습니다.
1949년 베네치아에서의 열하루는 이 시기의 정점이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칼라스는 드라마틱한 무게와 콜로라투라의 기교를 동시에 요구하는 배역을 잇달아 맡으며, 성량 위주의 창법에 밀려 무대에서 자취를 감췄던 노르마·루치아 디 람메르무어·안나 볼레나 같은 벨칸토 오페라를 되살리는 흐름의 중심에 섰습니다.
1953년에서 1954년 사이, 칼라스는 몸무게를 30킬로그램 넘게 줄이며 완전히 다른 외모로 무대에 올랐습니다. 당시 언론은 그가 촌충 치료로 살을 뺐다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실제로 그는 덜 익힌 고기를 먹다 촌충에 감염된 적이 있지만, 본인은 일부러 촌충을 삼켰다는 이야기를 부인했고 그 정도의 감염만으로 그런 체중 감량이 일어나기도 어렵습니다. 1954년 초 스위스의 한 병원에서 받은 호르몬 치료와 이어진 갑상선 치료가 실제 원인으로 보입니다. 이 변화로 칼라스는 목소리뿐 아니라 무대 위의 몸까지 배역에 맞춰 만들어 낸 최초의 오페라 가수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칼라스는 왜 다른 소프라노들과 달랐는가
칼라스가 다른 소프라노들과 달랐던 첫 번째 지점은 목소리 자체의 폭이었습니다. 대개 소프라노는 무겁고 극적인 배역(드라마틱)과 가볍고 기교적인 배역(콜로라투라) 중 한쪽에 특화됩니다. 칼라스는 두 영역을 한 목소리 안에 지니고 있었고, 그 덕분에 바그너의 브륀힐데와 벨리니의 엘비라를 같은 시즌에 넘나들 수 있었습니다. 이 흔치 않은 폭이 그를 벨칸토 부흥의 중심에 세운 실질적인 이유였습니다. 노르마·루치아 같은 배역은 극적인 무게와 화려한 기교를 동시에 요구했는데, 이 조건을 채울 수 있는 목소리가 당시 거의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소리의 아름다움보다 인물의 감정을 우선하는 태도였습니다. 칼라스의 음색은 균질하지 않았고 음역에 따라 색이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평자들은 이 불균질함을 결함으로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특징이 인물의 격정과 광기, 체념을 표현하는 데는 오히려 무기가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소리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순간 인물이 느끼는 감정을 목소리로 만들어 내는 것이 목적이라는 접근이었습니다.
이 접근은 연출가 루키노 비스콘티와 만나면서 무대 전체로 확장되었습니다. 1955년 라 스칼라의 라 트라비아타에서 비스콘티는 2막을 가을빛 정원으로 구상했고, 칼라스는 노래와 연기를 분리하지 않는 무대를 만들어 냈습니다. 지휘를 맡았던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는 훗날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칼라스의 노래를 들으며 울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비스콘티는 칼라스를 자신이 아는 가장 성실하고 훈련된 공연자라고 평했습니다. 목소리로 시작된 차별성이 무대 전체의 연기로 완성된 순간이었습니다.
세라핀과 비스콘티, 그리고 만들어진 라이벌
세라핀은 칼라스를 발견하고 평생 조언자 역할을 한 지휘자였고, 비스콘티는 그의 노래를 무대 연기로 확장시킨 연출가였습니다. 두 사람과의 관계가 협업이었다면, 같은 시기 활동한 소프라노 레나타 테발디와의 관계는 실제와 다르게 세상에 알려진 경우입니다.
언론은 두 사람을 라이벌로 몰아갔습니다. 균질하고 부드러운 음색의 테발디와, 인물의 감정을 앞세우는 칼라스를 대립시켜 "목소리인가 영혼인가"라는 구도로 소비했습니다. 그러나 테발디 본인은 칼라스가 세상을 떠난 뒤 이 라이벌 구도를 두고 신문과 팬들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직접 밝혔습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애초에 다른 종류였으니 질투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 테발디의 말이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의 실제 긴장보다, 경쟁 구도를 만들어야 했던 언론과 레코드사의 사정이 이 라이벌 신화의 더 큰 원인이었습니다.
1959년, 크리스티나 호에서 시작된 것
1959년 7월, 모나코에 정박한 그리스 선박왕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의 요트 크리스티나 호에서 칼라스는 남편 메네기니와 함께 저녁 식사에 초대받았습니다. 오나시스는 첫날부터 칼라스에게 구애했고, 칼라스는 훗날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격정적인 사랑을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이 항해를 계기로 그의 결혼 생활은 사실상 끝났습니다. 이탈리아 법이 이혼을 허용하지 않아 메네기니와의 법적 이혼은 12년 뒤인 1971년에야 마무리됐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1959년에 이미 끝나 있었습니다.
오나시스와 함께한 9년 동안 칼라스는 무대 활동을 크게 줄였습니다. 그사이인 1958년 1월, 로마에서 대통령이 지켜보는 갈라 공연 도중 노르마 1막만 부르고 무대를 내려온 사건으로 큰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자세한 경위는 칼라스 노르마 녹음 비교에서 다뤘습니다). 오나시스와의 관계는 1968년, 그가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재클린 케네디와 결혼하면서 사실상 끝났습니다. 칼라스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인연은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고, 1975년 오나시스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목소리를 잃었다는 것은 무슨 뜻이었나
1960년대에 접어들며 칼라스의 목소리는 눈에 띄게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당대의 평자들은 그 이유를 두고 무리한 연습, 급격한 체중 감량,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까다롭고 변덕스러운 성격을 지목했습니다. 목소리를 잃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무너뜨렸다는 식의 서술이 오랫동안 정설처럼 통용됐습니다.
그러나 후대의 연구는 다른 설명을 내놓습니다. 칼라스는 1975년, 그러니까 세상을 떠나기 2년 전 피부근육염(dermatomyositis, 근육과 결합 조직에 염증이 생겨 근력이 약해지는 자가면역 질환)을 공식 진단받았습니다. 연구자들은 이 병이 1960년대부터 이미 그의 몸 안에서 진행되고 있었을 가능성을 지목합니다. 성대를 움직이는 근육 역시 이 질환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부위입니다. 당대에는 변덕과 자기 관리 실패로 읽혔던 현상이, 실은 진단되지 않은 병이 서서히 목소리의 근력을 갉아먹고 있었던 결과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젊은 시절의 급격한 체중 감량과 혹독한 무대 일정 역시 목소리에 누적된 부담을 줬을 가능성이 함께 거론됩니다. 어느 한 가지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금도 이 문제는 여러 원인이 겹친 결과로 다뤄집니다.
대표 음반과 전설적 공연
푸치니
- 토스카(1953년, 빅토르 데 사바타 지휘) — 프로듀서 월터 레그가 "칼라스 최고의 녹음"이라 불렀고, 오페라 전곡 음반 중 최고로 꼽히는 판입니다.
베르디
- 라 트라비아타(1955년 5월 28일, 라 스칼라 실황) — 지휘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연출 루키노 비스콘티. 무대를 직접 본 사람들 사이에서 신화처럼 회자되는 공연입니다.
벨리니
- 노르마 — 칼라스가 가장 많이 부른 배역으로, 여러 시기의 녹음이 남아 있습니다. 자세한 비교는 칼라스 노르마 녹음 비교에서 다룹니다.
무대를 떠난 뒤, 마지막 십 년
1965년 런던 코벤트 가든의 토스카를 끝으로 칼라스는 오페라 무대에 정식으로 오르지 않았습니다. 이후 그가 다시 대중 앞에 선 것은 노래가 아니라 가르치는 자리였습니다. 1971년 10월부터 1972년 3월까지 그는 뉴욕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스물세 차례의 마스터클래스를 열었습니다. 삼백 명이 넘는 지원자 중 스물다섯 명을 골라 일흔다섯 개 장면과 아리아를 다뤘습니다. 육 년 동안 대중 앞에서 노래하지 않았던 그에게, 가르치는 형식으로 다시 목소리를 내는 이 자리는 무대 공포를 다스리는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1973년과 1974년에는 오랜 동료 테너 주세페 디 스테파노와 함께 세계 순회 콘서트에 나섰습니다. 흥행은 성공적이었지만, 이미 예전 같지 않은 목소리는 그의 명성에 보탬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후 칼라스는 파리의 아파트에서 은둔하듯 지내다 1977년 9월 16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쉰세 살이었습니다. 유해는 화장되어 파리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치됐다가, 1979년 6월 3일 본인의 뜻에 따라 에게해에 뿌려졌습니다.
줄리아드의 학생들에게 그가 마지막으로 넘겨주려 한 것은 완벽한 소리가 아니라, 노래로 인물을 살아내는 법이었습니다. 무대를 잃은 뒤에도 그가 붙들고 있던 것은 결국 그것이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칼라스가 남긴 노르마 녹음들은 서로 어떻게 다른가요?
칼라스는 노르마를 스튜디오에서 두 번(1954년, 1960년) 완성했고, 그 사이인 1955년 밀라노 라 스칼라 실황도 유명합니다. 같은 배역이 6년 사이, 그리고 스튜디오와 무대 사이에서 어떻게 달라지는지는 이 블로그의 칼라스 노르마 녹음 비교 글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Q. 칼라스는 정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프라노였나요?
이 평가 자체가 지금도 갈립니다. 순수하게 아름다운 소리만 기준으로 삼으면 칼라스보다 고른 성량과 매끄러운 음색을 가진 소프라노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래로 인물의 감정을 무대 위에서 실제로 살아내는 능력, 그리고 잊혀 가던 벨칸토 오페라를 다시 무대에 올린 실질적인 영향력에서는 지금도 그를 대체할 이름이 마땅치 않다는 데 많은 평자들이 동의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