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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자 시리즈] 세르지우 첼리비다케 — 같은 연주는 두 번 없다고 믿은 지휘자

인물 한눈에 보기
• 한 줄 정의: 녹음을 거부하고 오직 실황의 순간만을 믿은 지휘자
• 생몰: 1912년 6월 28일 ~ 1996년 8월 14일
• 국적·주 활동지: 루마니아 출생, 독일(베를린·뮌헨) 중심 활동
• 핵심 자리: 베를린필하모닉 상임지휘자 1945~1952, 뮌헨필하모닉 수석지휘자 1979~1996
• 대표 실황: 브루크너 교향곡 7번(베를린필, 1992년 복귀 공연), 브람스 교향곡 전곡(뮌헨필)

첼리비다케 시작하기 좋은 
• 처음이라면: 뮌헨필하모닉과 남긴 브루크너 교향곡 7번 실황

도입: 1992년 3월, 37년여 만의 재회

1992년 3월 31일, 베를린 샤우슈필하우스(현재의 콘체르트하우스). 무대에 오른 것은 80세의 세르지우 첼리비다케(Sergiu Celibidache)였습니다. 37년여 만에 다시 선 자리였습니다.

그는 브루크너 교향곡 7번을 지휘했습니다. 독일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의 초청으로 열린, 루마니아 아동시설 지원 자선 공연이었습니다. 냉전보다 오래 이어진 한 지휘자와 한 오케스트라의 오랜 단절을 끝내는 순간이 그 자리에 겹쳐졌습니다.

37년 전, 이 오케스트라는 그가 아니라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을 선택했습니다. 그날 이후 첼리비다케는 이 무대를 다시 밟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평생 스튜디오에서 음반을 남기는 일도 극도로 거부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왜 한 지휘자가 기록을 남기는 일 자체를 거부하며 살았는가를 추적해 보려합니다.

1969년 정장 차림으로 앉아 있는 지휘자 세르지우 첼리비다케
세르지우 첼리비다케, 1969년. 스웨덴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이스라엘 방문 당시 촬영

1945년, 무명의 지휘자가 등판하다

루마니아에서 태어난 첼리비다케는 베를린으로 건너와 철학과 음악학을 공부했습니다. 그가 세상에 알려진 계기는 뜻밖의 비극에서 비롯됐습니다.

2차대전 종전 직후 베를린필을 이끌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나치 협력 혐의로 연합군의 탈나치화 재판을 받으며 지휘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 공백을 메운 것은 반나치 이력 덕분에 소련 점령당국의 신임을 얻은 지휘자 레오 보르하르트였습니다. 그런데 1945년 8월 23일, 보르하르트는 연합군 검문소를 지나던 중 오인사격으로 갑작스레 목숨을 잃었습니다.

마침 첼리비다케는 베를린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주최한 지휘 콩쿠르에서 이미 우승을 거둔 상태였습니다. 이 급작스러운 공백은 무명이었던 그에게 뜻밖의 기회가 되었고, 그는 이렇게 발탁되어 역대 최연소로 베를린필의 상임지휘자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후 푸르트벵글러가 탈나치화 심사를 마치고 1947년 복귀할 때까지, 나아가 1952년까지 사실상 이 오케스트라를 이끌었습니다.

베를린필의 선택, 그리고 37년여의 단절

1954년 11월 푸르트벵글러가 세상을 떠나자, 베를린필 상임지휘자 자리를 두고 첼리비다케가 유력한 후보로 거론됐습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55년, 베를린필이 최종적으로 선택한 지휘자는 카라얀이었습니다.

이 결정은 첼리비다케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는 이후 37년여 동안 베를린필 무대에 서지 않았습니다. 첼리비다케와 베를린필의 단절은 카라얀이 세상을 떠난 뒤에야 끝났습니다. 1992년 3월 31일, 독일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의 초청으로 첼리비다케는 다시 베를린필의 지휘봉을 잡았습니다. 루마니아 아동시설 지원 자선 공연이었습니다.

녹음을 거부한 철학, 선(禪)과 현상학

첼리비다케는 평생 스튜디오 녹음을 극도로 꺼렸습니다. 그가 생전에 공식적으로 승인한 녹음은 극히 드물었고, 오늘날 전해지는 그의 음반 대부분은 사후에 유족의 허락을 얻어 공개된 실황 녹음입니다.

이 신념은 두 갈래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는 베를린 유학 시절 스승 마르틴 슈타인케를 통해 접한 선불교였습니다. 그는 1986년 한 인터뷰에서 슈타인케를 통해 선의 길을 찾았고, 선 없이는 이 낯선 원리를 알 수 없었을 것이라고 직접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어로 일기일회, 곧 지금 이 만남은 생애 단 한 번뿐이라는 개념이 그의 음악관에 깊이 스며들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이었습니다. 그는 후설의 개념을 끌어와 음악의 현상학이라 부를 만한 독자적인 이론을 세웠고, 이를 1960년대 이탈리아 치지아나 음악원 강의와 1978년부터 1992년까지 이어진 독일 마인츠 대학 강의에서 직접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이 두 갈래가 합쳐져, 그에게 연주란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와 청중이 그 순간에만 함께 완성하는 일회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녹음은 이 생생한 순간을 죽은 물건으로 박제하는 행위였습니다.

뮌헨필하모닉과 후기 활동

1979년부터 199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첼리비다케는 뮌헨필하모닉의 수석지휘자로 재직했습니다. 베를린필을 떠난 뒤 여러 악단을 거친 그가 가장 오랫동안 머문 자리였습니다.

극단적으로 느린 템포, 옹호와 비판

첼리비다케의 후기 연주를 이야기할 때 가장 자주 언급되는 특징은 유난히 느린 템포입니다. 브루크너나 브람스 같은 후기 낭만주의 교향곡에서 특히 두드러졌습니다.

이를 둘러싼 평가는 크게 둘로 나뉩니다.

시각 핵심 주장
시간을 초월한 깊이론 느린 템포는 작품 속 화성과 울림이 완전히 펼쳐지고 사라질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려는 선택이다. 서두르지 않는 이 호흡에서 다른 지휘자들이 놓치는 깊이가 드러난다는 시각이다.
과도한 늘어짐 비판론 지나치게 느려진 템포는 긴장을 지속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집중을 흐트러뜨린다. 음악적 설득력보다 지휘자 개인의 고집이 앞선다는 비판이다.

첼리비다케 본인은 이런 논쟁에 크게 개의치 않았습니다. 애초에 녹음을 근거로 한 평가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 그의 오랜 신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례적으로 긴 리허설, 완벽주의

첼리비다케는 다른 지휘자들보다 훨씬 긴 리허설 시간을 요구하는 것으로도 유명했습니다. 정확히 몇 시간, 며칠에 걸쳐 진행했는지 같은 구체적인 수치까지는 이번 조사로 확인하지 못했지만, 그가 유난히 방대한 리허설 시간을 요구했다는 점은 여러 자료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됩니다. 이 완벽주의적 태도는 녹음을 거부한 신념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단 한 번의 실황을 위해 오케스트라가 그 순간에 완전히 도달할 때까지 시간을 아끼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어디서부터 들을까

처음이라면 뮌헨필하모닉과 남긴 브루크너 교향곡 7번 실황입니다. 그가 평생 지켜 온 느린 호흡과 깊은 울림을 가장 직관적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한 발 더 들어간다면 1992년 3월 31일 베를린필 복귀 공연의 브루크너 교향곡 7번입니다. 같은 곡, 다른 오케스트라, 그리고 37년여의 시간이 어떻게 다른 해석을 낳는지 비교할 수 있습니다.

비교 청취를 해본다면 같은 브루크너 교향곡을 카라얀의 베를린필 녹음과 이어 들어보세요. 한 시대, 두 라이벌이 같은 작곡가에게 내놓은 서로 다른 답을 직접 판단할 수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첼리비다케는 어떻게 무명에서 베를린필 지휘자가 됐나요?
1945년 8월 23일, 종전 직후 베를린필을 이끌던 지휘자가 검문소에서 벌어진 오인사격으로 갑작스레 목숨을 잃었습니다. 마침 베를린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주최한 지휘 콩쿠르에서 이미 우승해 있던 무명의 그에게 이 빈자리는 뜻밖의 기회가 되었고, 그는 역대 최연소로 이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 자리에 올랐습니다.

Q. 첼리비다케가 왜 카라얀에게 밀려났나요?
전임 지휘자의 사망 이후 후임 자리를 두고 물망에 올랐지만, 최종 선택을 받은 것은 카라얀이었습니다. 자신이 오랫동안 실질적으로 이끌어 온 악단에서 밀려난 이 경험은 이후 그를 37년여나 그 무대에서 등을 돌리게 만들 만큼 깊은 앙금으로 남았습니다.

Q. 첼리비다케는 왜 음반 녹음을 거부했나요?
스승을 통해 접한 선불교의 영향과, 철학자 후설의 현상학을 스스로 음악에 접목한 이론이 함께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그에게 연주는 그 순간 오케스트라와 청중이 함께 완성하는 일회적 사건이었고, 녹음은 이 살아 있는 순간을 죽은 기록으로 남기는 행위라고 여겼습니다.

Q. 첼리비다케가 베를린필과 화해한 적이 있나요?
있습니다. 카라얀이 세상을 떠난 뒤인 1992년 3월 31일, 독일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의 초청으로 그는 37년여 만에 베를린필 무대에 다시 서서 브루크너 교향곡 7번을 지휘했습니다. 루마니아 아동시설 지원 자선 공연이었습니다.

Q. 첼리비다케는 어느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오래 활동했나요?
뮌헨필하모닉입니다. 1979년부터 세상을 떠난 해인 1996년까지, 그는 이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여러 악단을 거친 경력 가운데 가장 긴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습니다.

Q. 첼리비다케의 느린 템포는 왜 논쟁거리가 됐나요?
브루크너나 브람스 같은 곡에서 유독 느려지는 그의 템포를 두고, 화성이 충분히 펼쳐질 시간을 확보한 깊이 있는 해석이라는 평가와, 긴장을 지속시키지 못하고 늘어질 뿐이라는 비판이 함께 존재했습니다.

Q. 첼리비다케의 리허설이 유난히 길었다는 게 사실인가요?
유별날 정도로 리허설에 공을 들였다는 점은 여러 자료가 한목소리로 전합니다. 다만 그 시간이 정확히 얼마였는지 숫자로 못박을 만한 근거까지는 이번 조사로 찾지 못해, 두루뭉술하게 확인된 사실 수준으로만 남겨 둡니다.

마무리

첼리비다케는 카라얀과 정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카라얀이 스튜디오에서 소리를 다듬고 이를 세계 곳곳에 실어 날랐다면, 첼리비다케는 단 한 번의 실황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믿으며 기록을 거부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오래지만, 오늘날 우리가 듣는 그의 음반은 대부분 그 신념을 거스르며 사후에 세상에 나온 것들입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을 향한 한 지휘자의 고집이 남긴 가장 역설적인 유산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