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우리가 아는 그 첫머리는 그가 쓴 그대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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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협주곡 가운데 첫머리가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을 하나 꼽으라면 아마 이 곡일 것입니다. 호른이 짧게 부르고, 피아노가 두 손으로 큰 화음을 연달아 짚고, 그 위로 넓은 선율이 흐릅니다. 차이콥스키(Пётр Ильич Чайковский, Pyotr Ilyich Tchaikovsky)의 피아노 협주곡 1번 b♭단조 작품 23입니다. 광고에서도, 시상식에서도, 피아노 학원 복도에서도 들리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이 곡의 악보를 들여다보면 우리가 그 소리에 대해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들이 하나씩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이 글은 1875년에 필사된 총보, 그 뒤에 나온 인쇄 악보들, 그리고 작곡가가 직접 쓴 편지들을 따라가면서 그 어긋나는 자리들을 적어 본 것입니다. 먼저 한 문장으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아는 이 곡의 첫머리는, 차이콥스키가 처음 쓴 그대로가 아닙니다.

이 글이 확인한 것은 넷입니다. 첫째, 그 유명한 첫머리에서 피아노는 다섯 마디를 쉬고 여섯째 마디에 들어옵니다. 둘째, 1875년과 1879년의 악보에서 피아노의 그 큰 화음들은 한꺼번에 내리치는 화음이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굴려 치는 화음입니다. 셋째, 그 첫머리의 선율은 1악장이 끝나는 자리에도, 곡 전체가 끝나는 자리에도 없습니다. 넷째, 오늘 세계가 연주하는 판은 신구 러시아 학술 전집이 모두 싣지 않는 판입니다. 다만 그 판을 작곡가와 무관한 판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1악장 첫머리, 피아노가 쉬는 다섯 마디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 글이 무엇을 들여다보고 있는지부터 밝혀 두겠습니다. 이 곡의 악보는 한 종이 아니라 여러 겹으로 남아 있고, 그 겹을 구분하지 않으면 뒤에 나올 이야기가 뒤엉킵니다. 순서는 이렇습니다. 차이콥스키가 피아노 두 대짜리 편곡본을 자기 손으로 먼저 썼고, 이어서 관현악 총보를 썼습니다. 그 총보에서 관현악 성부는 작곡가의 글씨이지만 피아노 성부는 필사자가 그의 편곡본을 보고 옮겨 적은 것입니다. 그다음이 1875년 여름에 만들어진 필사 총보이고, 같은 해에 파트보와 두 대짜리 편곡본이 인쇄됩니다. 1879년에 총보가 처음 인쇄되고, 1889년에 세 번째 판이 나옵니다.

이 글이 직접 열어 본 것은 그 가운데 1875년 필사 총보와, 1875년판을 본문으로 삼고 1879년판을 작은 음표로 나란히 실은 학술 전집 악보입니다. 필사 총보는 2012년 가을에 한 연구자가 목록을 조회하다가 한스 폰 뷜로(Hans von Bülow)의 유품 속에서 찾아냈고, 이듬해 초에 디지털로 공개되었습니다. 표제지에는 뷜로의 아내 마리 폰 뷜로가 적은 쪽지가 붙어 있습니다. 작곡가의 동생 모데스트 차이콥스키가 그렇게 말했다면서, 이 악보는 작곡가의 손이 아니라 필사자의 손에서 나온 것이라고 적은 글입니다. 곧 남편의 유품을 정리하던 사람이 동생에게 물어 확인한 내용을 악보에 남긴 것입니다. 이 악보는 자필보가 아니라 베껴 쓴 총보입니다.

그렇다면 베껴 쓴 악보를 근거로 삼아도 될까요. 이 물음은 이 글 전체에 걸려 있으므로 뒤에서 다시 짚겠습니다. 여기서는 한 가지만 적어 둡니다. 2015년에 나온 러시아 학술 전집은 1875년판 총보를 실으면서 바로 이 필사본을 주된 저본으로 삼았습니다.

이 곡의 조성은 b♭단조입니다. 그런데 누구나 아는 그 첫머리는 단조가 아니라 D♭장조입니다. 곡 전체의 조성과 첫머리의 조성이 다른 것입니다.

이것을 악보로 확인하려 할 때 걸리는 함정이 하나 있습니다. 악보 맨 앞에는 이 곡이 어떤 조인지를 알려 주는 조표가 붙습니다. 조표란 악보 첫머리에 미리 적어 두는 ♯이나 ♭ 표시입니다. 그런데 D♭장조와 b♭단조는 조표가 똑같습니다. 둘 다 ♭이 다섯 개입니다. 이렇게 조표를 함께 쓰는 장조와 단조 한 쌍을 나란한조라고 부릅니다. 그러니 악보 첫머리의 ♭ 다섯 개를 보고 이것이 D♭장조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보고 D♭장조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첫째는 화성입니다. 이 대목의 화음들과 단락이 닫히는 방식이 D♭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둘째는 선율이 어느 음으로 기울어 앉는가입니다. 그리고 셋째가 악보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방증입니다. 1875년 필사 총보의 첫 쪽 맨 위에는 팀파니를 어느 음에 맞추라는 지시가 적혀 있고, 거기 적힌 세 음이 A♭, D♭, E♭입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적혀 있는 음이 아니라 적혀 있지 않은 음입니다. b♭단조라면 으뜸음 B♭과 딸림음 F를 팀파니에 앉히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그 둘이 없습니다. 대신 으뜸음 자리에 D♭이, 딸림음 자리에 A♭이 놓여 있습니다.

이 세 음만으로 조성이 증명되지는 않습니다. A♭도 D♭도 E♭도 b♭단조의 음계 안에 들어 있는 음이기 때문입니다. 팀파니로 알 수 있는 것은 이 대목의 중심이 어디에 놓였다고 작곡가가 보았는가입니다. 조표로는 갈리지 않는 것이 여기서는 눈에 보입니다.

같은 쪽에서 또 하나가 보입니다. 피아노는 첫 다섯 마디 동안 아무것도 치지 않습니다. 양손 모두 온쉼표이고, 소리를 먼저 내는 것은 호른입니다. 피아노가 들어오는 것은 여섯째 마디입니다. 우리가 이 곡의 첫머리라고 기억하는 그 화음은 곡이 시작되고 조금 지나서야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 마디 수는 뒤에 볼 인쇄 악보들에서도 같습니다.

그리고 그 화음이 이 글의 중심입니다. 필사 총보의 둘째 쪽을 크게 확대해서 보면, 피아노의 큰 화음 왼쪽에 세로로 물결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이 물결선은 아르페지오 기호입니다. 화음의 음들을 한꺼번에 누르지 말고 아래에서 위로 재빨리 굴려 치라는 뜻입니다. 후대에 덧그린 연필 자국이 아니라 필사자가 본문을 적은 잉크로 함께 그린 것입니다.

붙어 있는 자리가 정해져 있습니다. 이 대목은 3박자이고 한 마디에 화음이 셋씩 놓이는데, 첫 박의 화음에는 물결선이 없고 둘째와 셋째 박의 화음에만 붙습니다. 마디가 바뀌어도 같은 자리에 같은 모양으로 되풀이됩니다. 「모든 화음을 굴려 친다」가 아니라 한 마디 안에서 첫 박은 짚고 나머지 둘은 굴린다는 것입니다. 첫 박의 화음은 음수도 적고 손이 벌어지는 폭도 좁습니다.

이것이 필사자 한 사람의 버릇이 아니라는 것은 인쇄 악보로 확인됩니다. 1875년판을 본문으로 삼은 학술 전집 악보를 열어 보면 같은 자리에 같은 물결선이 인쇄되어 있고, 같은 쪽에 작은 음표로 나란히 실린 1879년판 피아노 성부에도 그대로 있습니다. 곧 이 기보는 1875년 텍스트와 1879년 텍스트에 공통입니다. 그리고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작곡가가 자기 손으로 쓴 두 대짜리 편곡본에 닿습니다. 총보의 피아노 성부는 바로 그 편곡본을 보고 옮겨 적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화음이 놓인 자리도 오늘과 다릅니다. 이 시기 악보의 화음들은 건반 가운데 영역에 모여 있습니다. 오늘 연주되는 판에서 그 화음들이 건반의 가장 낮은 옥타브부터 가장 높은 옥타브까지 훑는 것과 견주면, 음역도 좁고 한 번에 눌리는 음의 수도 적습니다. 굴려 치라는 지시와 좁은 음역은 한 묶음입니다.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1875년 필사 총보의 피아노 성부 확대, 손으로 그린 큰 화음들이 이어지고 화음마다 그 왼쪽에 세로 물결선이 그어져 있다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b♭단조 작품 23, 1875년 필사 총보, 베를린 국립도서관 Mus.ms. 22057, 2쪽 피아노 성부 확대, Public Domain Mark 1.0. 큰 화음마다 그 왼쪽에 세로로 그어진 물결선을 볼 것. 굴려 치라는 표시다. 오늘 연주되는 판에는 이 기호가 없다.

그러면 그 물결선은 언제 사라졌을까요. 판본을 정리한 연구에 따르면 1889년에 나온 세 번째 판입니다. 그 판에서 1악장 첫머리의 화음들이 손질되었고, 앞의 두 판에 있던 아르페지오 기호가 그 자리에서 빠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듣는 그 단단하게 내리꽂는 소리는 이때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이 셋째 판이 어떤 과정을 거쳐 나왔는지는 5절에서 따로 보겠습니다.

다만 이 해석에는 반론이 따라붙습니다. 하나는 필사본을 근거로 삼는 것 자체에 대한 것입니다. 필사자가 기호를 임의로 더했을 가능성, 당시 조판과 인쇄 과정에서 아르페지오 표기가 온전히 옮겨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지적되어 왔습니다. 다른 하나는 화음을 크게 벌린 오늘의 형태를 누가 고안했는가입니다. 차이콥스키가 셋째 판을 준비하면서 피아니스트 알렉산드르 질로티와 상의한 것은 기록으로 남아 있고, 그래서 그 형태가 질로티의 손에서 나왔으리라는 추정이 오래 제기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추정입니다. 누가 먼저 제안했는지를 적어 둔 기록은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같은 첫머리에서 빠르기말도 한 가지로 정리되지 않습니다. 총보 계통에는 「알레그로 논 트로포 에 몰토 마에스토소」, 곧 너무 빠르지 않게 그리고 매우 장중하게라고 적혀 있습니다. 필사 총보도, 자필 총보도, 1879년에 인쇄된 총보도 모두 이렇습니다. 그런데 차이콥스키가 자기 손으로 쓴 피아노 두 대짜리 편곡본에는 같은 자리가 「안단테 논 트로포 에 몰토 마에스토소」로, 곧 걷는 빠르기로 적혀 있습니다. 자필 편곡본도 1875년에 인쇄된 편곡본도 그렇습니다. 곧 이 차이는 판이 바뀌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총보 계통과 편곡본 계통 사이의 차이입니다. 게다가 필사 총보 첫 쪽 맨 위에는 다른 사람의 필적으로 「안단테」라고 덧적혀 있습니다. 누가 적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1악장의 그 선율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그 큰 선율은 한참을 갑니다. 선율과 그 뒤에 이어지는 전개를 합친 도입부 전체가 필사 총보에서 스무 쪽 가까이 이어지다가, 소리가 차츰 얇아지고 현악기가 짧게 뜯는 가운데 피아노가 빠른 음형을 시작하면서 다리를 놓습니다. 그 다리를 건너면 「알레그로 콘 스피리토」, 곧 활기차게 빠른 부분이 시작되고, 여기서부터가 이 곡의 본론입니다. 조성도 이때 b♭단조로 내려앉습니다.

그러면 그 첫머리의 선율은 언제 다시 돌아올까요. 협주곡에서 이만큼 크게 펼쳐 놓은 선율이라면 되돌아올 만한 자리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1악장이 닫히는 자리이거나, 곡 전체가 닫히는 자리입니다.

그 두 자리를 필사 총보에서 직접 열어 보았습니다. 1악장이 끝나는 쪽에도, 곡 전체가 끝나는 쪽에도 그 선율은 없습니다. 두 자리 모두 피아노의 조표가 ♭ 두 개, 곧 B♭장조로 바뀌어 있고, 첫머리의 그 장중한 선율 대신 빠른 음형과 화음이 쌓아 올라가며 끝납니다.

한 가지는 분명히 해 두겠습니다. 이 필사 총보는 262쪽이고 이 글이 열어 본 것은 그 가운데 아홉 쪽입니다. 그래서 이 글은 그 선율이 통째로 다시 제시되는 자리를 찾지 못했다는 데까지만 말씀드립니다. 선율에서 떼어 낸 짧은 음형이 뒤의 음악과 이어진다고 보는 분석은 따로 있고, 그것은 이 글이 다룬 범위 밖입니다.

왜 돌아오지 않는지에 대해서도 이 글은 답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차이콥스키가 그 이유를 적어 둔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 선율이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같은 곡의 다른 선율에 대해서는 작곡가 본인이 출처를 밝혔습니다. 본론의 활기찬 첫 주제를 두고 차이콥스키는 1879년 편지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눈먼 리라 연주자의 연주를 들었는데 우크라이나의 눈먼 가수들이 모두 똑같은 하나의 민요 가락을 끝없이 연주하는 것이 놀라웠다, 그 가락을 자기 피아노 협주곡 1악장에 부분적으로 썼다는 것입니다.

3악장의 주제도 우크라이나 민요입니다. 〈나오너라, 나오너라 이반카〉(Види, види, Іванку)라는 노래로 문헌에서 식별되어 있습니다. 2악장 가운데 빠른 대목에는 프랑스 노래 〈Il faut s’amuser, danser et rire〉가 쓰였는데, 이것은 동생 모데스트가 남긴 증언입니다. 형과 자기가 1870년대 초에 그 노래를 늘 흥얼거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밝혀진 선율이 몇 개인가가 아니라 근거의 층이 저마다 다르다는 점입니다. 1악장 주제는 작곡가가 편지에 직접 적었습니다. 2악장은 동생의 회상입니다. 3악장은 후대의 문헌이 가려낸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곡에서 가장 유명한 그 첫머리 선율에 대해서는 작곡가의 설명도, 가족의 증언도, 대조할 민요도 찾을 수 없습니다. 이 글이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 곧 무엇이 적혀 있고 무엇이 적혀 있지 않은지를 적는 것까지입니다.

1874년 성탄 전야의 교실

이 곡은 1874년 11월에 시작되어 1875년 2월에 관현악 편성까지 마무리됩니다. 차이콥스키 자신은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꼬박 두 달이 걸렸다고 적었고, 작업 도중에 쓴 편지에는 아주 어렵게 그리고 꽤 나쁘게 진행되고 있다고 적었습니다. 쉽게 나온 곡이 아니었습니다.

곡의 뼈대가 잡히자 그는 이것을 피아니스트에게 보여 주기로 합니다. 이유를 본인이 적어 두었습니다. 자기는 피아니스트가 아니므로, 기교상 연주하기 불편하거나 보람 없거나 효과가 없는 대목을 짚어 줄 전문 연주자가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같은 편지에서 한 번 더 못을 박습니다. 예술적 측면에 대한 판결을 원한 것이 아니라 피아노 기교에 관한 지적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상대는 니콜라이 루빈시테인(Николай Григорьевич Рубинштейн, Nikolay Rubinstein)이었습니다. 차이콥스키가 기교를 물으러 찾아갈 만한 사람, 곧 당대 러시아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였고 자기 이름으로 연주회를 여는 사람이었습니다.

1872년에 찍은 니콜라이 루빈시테인의 흑백 초상 사진, 짙은 상의를 입고 정면을 향해 앉아 있다
니콜라이 루빈시테인, 1872년, 사진, 위키미디어 공용, 퍼블릭 도메인. 아래에 적은 교실 장면보다 두 해 앞서 찍힌 모습이다.

날짜는 1874년의 성탄 전야였습니다. 러시아 달력으로 12월 24일이고, 서유럽 달력으로는 이듬해 1월 5일입니다. 그날 저녁 두 사람은 함께 초대받은 성탄 모임이 있었고, 그 전에 모스크바 음악원의 빈 교실 하나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차이콥스키가 원고를 들고 나타났고, 루빈시테인은 혼자 오지 않았습니다. 음악원 동료인 니콜라이 후베르트가 함께 왔습니다. 단둘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 자리에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차이콥스키 본인의 글로 남아 있습니다. 협주곡이 쓸모가 없고, 연주가 불가능하며, 악구들이 진부하고 어설프고 서툴러서 고칠 수조차 없고, 작품으로서 나쁘고 저속하며, 여기저기서 훔쳐 왔고, 남길 만한 것은 두세 쪽뿐이고 나머지는 버리거나 완전히 다시 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짚어 두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 이야기는 흔히 차이콥스키가 기교에 대한 조언만 구했는데 상대가 엉뚱하게 작품 전체를 심판했다는 식으로 전해집니다. 절반만 맞습니다. 쏟아진 말을 갈라 보면 두 종류가 섞여 있습니다. 연주가 불가능하다, 악구가 어설프고 서툴러서 고칠 수조차 없다는 말은 손가락과 건반에 관한 것이고, 차이콥스키가 물으러 간 바로 그것입니다. 반면 진부하다, 저속하다, 여기저기서 훔쳐 왔다, 남길 만한 것은 두세 쪽뿐이다는 말은 기교와 상관이 없습니다. 작품의 값을 매긴 것입니다.

곧 루빈시테인은 물은 것에 답을 했고, 거기에 더해 묻지 않은 것까지 답했습니다. 차이콥스키가 같은 편지에서 「예술적 측면에 대한 판결을 원한 것이 아니다」라고 한 번 더 못을 박은 것은 이 둘째 묶음을 두고 한 말입니다.

그리고 그날의 마지막 대목에는 조건이 하나 달려 있었습니다. 루빈시테인은 고쳐야 할 곳을 여럿 짚은 뒤, 자기 요구대로 정해진 기한까지 고쳐 온다면 자기 연주회에서 이 곡을 연주해 주는 영광을 베풀겠다고 말합니다. 차이콥스키의 대답이 그 유명한 문장입니다. 「한 음도 고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인쇄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정말 그렇게 했습니다. 이 대사는 흔히 작곡가가 자기 예술을 두고 내놓은 독립된 신념 선언처럼 인용됩니다. 그러나 문장이 놓인 자리를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앞에 놓인 루빈시테인의 조건에 대한 대답입니다. 고쳐 오면 연주해 주겠다는 제안을 거절한 말이지, 허공에 대고 한 선언이 아닙니다. 무엇을 거절한 것인지까지 함께 읽어야 뜻이 맞습니다.

이제 이 장면의 출처를 밝혀 두겠습니다. 이야기가 어디에 어떻게 남아 있는지는 이야기 자체만큼 중요합니다.

  • 사건 열하루 뒤. 차이콥스키는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편지를 씁니다. 본문은 상대의 교향곡에 대한 이야기이고, 맨 끝에 추신처럼 한 줄이 붙어 있습니다. 피아노 협주곡을 썼는데 루빈시테인이 퇴짜를 놓았다, 그럼에도 인쇄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일화의 두 기둥이 이미 여기 다 있습니다. 다만 격한 토로가 아니라 지나가는 한 줄입니다.
  • 사건 열엿새 뒤. 동생 아나톨리에게 보낸 편지에는 자기 작가로서의 자존심에 타격을 입었다고 적혀 있고, 후베르트도 같은 일로 자기를 화나게 했다고 적혀 있으며, 두 사람이 자신들의 불승인을 매우 비우호적이고 모욕적인 방식으로 표현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장면은 없습니다. 대신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직접 만나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 주겠다.」
  • 3년 뒤. 우리가 아는 그 장면은 1878년 초에 후원자 나데즈다 폰 메크(Надежда фон Мекк, Nadezhda von Meck)에게 보낸 긴 편지에 나옵니다. 교실, 쏟아진 말, 그리고 그 대사가 전부 이 한 통에 있습니다.

세 통이 담고 있는 것과 담고 있지 않은 것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간 판단은 이 글이 내리지 않겠습니다.

그 뒤에 남은 날짜들

이 일화는 대개 「한 음도 고치지 않겠다」에서 끝납니다. 그런데 그 뒤로도 기록은 계속 남습니다. 이 절은 그 기록들을 날짜 순서 그대로 늘어놓기만 하겠습니다. 사이를 잇는 설명은 붙이지 않겠습니다.

날짜는 이 절부터 끝까지 서유럽 달력으로 적습니다. 당시 러시아가 쓰던 달력은 이보다 열이틀 느렸습니다. 앞 절의 성탄 전야가 러시아 달력으로 1874년 12월 24일이고 서유럽 달력으로 1875년 1월 5일이었던 것이 그 차이입니다. 두 날짜 사이의 간격을 세는 대목에서는 어느 달력으로 세어도 값이 같습니다.

  • 1875년 12월, 모스크바. 이 곡의 모스크바 초연이 열립니다. 독주는 세르게이 타네예프(Сергей Танеев, Sergey Taneyev)였고, 지휘대에 선 사람은 루빈시테인이었습니다. 교실에서의 그 저녁으로부터 열한 달 뒤입니다.
  • 1875년 12월. 차이콥스키가 뷜로에게 이 곡을 고치고 싶다는 뜻을 알립니다. 뷜로의 답장이 남아 있는데, 고칠 것이 없어 보인다는 내용입니다. 다만 몇몇 총주 대목에서는 자기가 이미 피아노 성부에 음을 더해 두었다고 적습니다.
  • 1876년 3월. 런던에서 이 곡을 처음 연주한 에드워드 대너로이터(Edward Dannreuther)에게도 변경에 관한 편지를 씁니다.
  • 1878년 2월, 산레모와 니스. 위에서 본 그 긴 편지가 쓰입니다. 교실 장면을 적어 내려간 그 편지의 끝에, 차이콥스키는 두 사람의 사이에 대해 이렇게 적습니다. 「그 뒤로 그는 나에게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 그리고 한 문장을 덧붙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기를 끔찍이 사랑하며 무엇이든 해 주겠다고 되뇌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 1878년 3월 21일, 클라랑. 차이콥스키가 모스크바의 카를 알브레히트에게 편지를 씁니다. 루빈시테인이 이 곡을 연주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를 대신해 감사를 전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이렇게 적습니다. 「그가 그것을 연주해 줌으로써 나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이 소식은 나에게 아주, 아주 기뻤다.」
  • 그 이튿날, 모스크바. 러시아음악협회의 특별 연주회에서 루빈시테인이 이 곡의 피아노를 직접 칩니다. 지휘는 에두아르트 랑거(Eduard Langer)였습니다. 1879년에 제2판 총보가 나오기 전의 연주입니다.
  • 1878년 9월, 파리. 만국박람회의 트로카데로에서 열린 제1회 러시아 음악회 무대에 이 곡이 오릅니다. 루빈시테인이 피아노를 쳤고 지휘는 에두아르 콜론(Édouard Colonne)이었습니다.
  • 1878년 11월, 모스크바. 러시아음악협회의 그 해 첫 교향악 연주회에서 루빈시테인이 다시 이 곡을 칩니다.
  • 1879년 8월. 이 곡의 총보가 처음으로 인쇄되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총보의 1악장 피아노 부분이 1875년에 나온 피아노 두 대짜리 편곡본과 달라져 있습니다. 화성과 형식은 그대로입니다. 바뀐 것은 피아노 부분입니다.
  • 1879년 11월, 파리. 폰 메크가 편지로 묻습니다. 지금 쓰고 있는 제2협주곡은 누구에게 헌정할 생각이냐는 것입니다. 차이콥스키의 답은 이렇습니다. 맞히셨다, 루빈시테인에게 헌정하고 싶다, 그가 자기의 제1협주곡과 소나타를 그토록 훌륭하게 연주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 시점의 뜻을 밝힌 것입니다.
1875년 무렵에 찍은 차이콥스키의 흑백 초상 사진, 짙은 양복을 입고 옆을 바라보고 있다
차이콥스키, 1875년 무렵, 사진, 위키미디어 공용, 퍼블릭 도메인. 이 협주곡이 인쇄되고 보스턴에서 초연되던 해의 모습이다.

여기까지가 기록에 남은 날짜들입니다. 이 자리에서 흔히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집니다. 혹평을 받았고, 고치기를 거부했고, 시간이 지나 상대가 결국 그 곡을 연주했고, 화해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자료가 실제로 말하는 것은 넷뿐입니다. 차이콥스키는 기교 점검을 원했습니다. 루빈시테인은 기교를 지적했습니다. 1878년에 루빈시테인이 이 곡을 연주했습니다. 1879년에 1악장 피아노 부분이 달라졌습니다.

이 넷을 잇는 문장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1879년의 손질이 그날의 지적을 받아들인 것인지, 뷜로와 대너로이터가 보낸 제안을 받아들인 것인지, 작곡가가 연주를 들으며 스스로 고친 것인지, 아니면 그와 무관한 다른 사정인지를 차이콥스키도 루빈시테인도 적어 두지 않았습니다. 남아 있는 것은 날짜뿐입니다. 그리고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는 문장도 그 날짜들 사이에 그대로 있습니다.

악보는 세 번 바뀌었다, 세 판본과 오늘의 표준

이 곡은 인쇄된 모습이 세 번 달라졌습니다. 1875년에 처음 나온 것은 연주자들이 쓰는 파트보와 피아노 두 대짜리 편곡본이었고, 총보는 이때 나오지 않았습니다. 총보가 처음 인쇄된 것은 1879년 8월이고, 여기서 1악장의 피아노 부분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화성과 형식은 그대로이고 손댄 것은 독주 성부입니다. 세 번째 판은 1888년 말부터 이듬해에 걸쳐 손질되어 1889년에 함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 나왔습니다. 흔히 보이는 「1888년 최종판」이라는 표기는 손질한 시기와 출판 시기를 섞은 것입니다.

세 번째 판에서 달라진 것은 크게 둘입니다. 하나가 1절에서 본 첫머리 화음이고, 다른 하나가 3악장의 커트입니다. 3악장에서는 원래 열일곱 마디였던 한 구간이 다섯 마디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악장 전체의 마디 수가 313에서 301로, 순수하게 열두 마디 줄었습니다. 기록에 따라 커트의 크기를 열여섯 마디로 세기도 하는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잘린 구간으로 볼 것인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커트는 차이콥스키 자신이 한 것입니다. 1888년 12월 말에 그가 피아니스트 알렉산드르 질로티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는데, 피날레의 그 대목을 이제 고쳤다, 이렇게 하면 더 짧고 나아질 것 같다고 적혀 있습니다. 같은 편지에서 그는 질로티가 제안한 것 가운데 일부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1889년에 함부르크의 출판사는 이 판을 작곡가가 개정한 신판이라고 광고했고, 모스크바의 유르겐손도 같은 시기에 교정한 제3판을 내놓았습니다. 오늘 연주되는 것이 그 텍스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곡의 판본 문제가 묘해집니다. 1955년에 나온 소련 시절의 차이콥스키 전집은 1875년판을 본문으로 삼고 1879년판의 차이를 작은 음표와 주석으로 밝혔으며, 1889년의 손질은 피날레의 커트를 빼고는 반영하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 그 손질이 작곡가 자신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015년에 나온 새 학술 전집의 이 곡 제1~4권도 1875년판과 1879년판의 총보와 편곡본만 싣고 1889년판은 싣지 않습니다. 곧 신구 전집이 모두 오늘의 표준판을 정본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판정은 학계에서 그대로 굳어져 있지 않습니다. 새 전집이 나온 뒤 판본 연구자들은 반대 방향의 근거를 내놓았습니다. 1889년 봄에 차이콥스키가 함부르크의 출판사 직원에게 교정지를 보냈다는 편지가 2012년에 확인되었고, 표제지에 적힌 파리 제휴 출판사의 이름이 1889년 초까지만 쓰이던 형태라는 점, 1889년 10월 잡지에 실린 출판사 광고가 이 판을 예고하고 있다는 점이 함께 제시되었습니다. 그래서 1889년판을 작곡가의 최종 의사가 담긴 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나와 있습니다. 판단이 갈리는 것은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사실을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입니다. 이 글은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오늘의 판을 작곡가 사후에 누군가 마음대로 바꾼 판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까지는 적어 둡니다.

세 판이 귀에 어떻게 다르게 들리는지는 이 글이 답하지 않겠습니다. 음반을 나란히 놓고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만 일러 두겠습니다. 연주 시간으로 판본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3악장에서 열두 마디가 줄어든 것으로 복원 연주자들이 이야기하는 시간은 수십 초 단위인데, 음반마다 전체 길이는 3분 넘게 벌어집니다. 열두 마디의 차이만으로 몇 분의 차이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첫 무대와 명반, 무엇부터 들을 것인가

이 곡이 세상에서 처음 울린 곳은 러시아가 아닙니다. 1875년 10월 25일, 미국 보스턴의 뮤직홀이었습니다. 피아노는 한스 폰 뷜로가 쳤고, 지휘는 벤저민 존슨 랭(Benjamin Johnson Lang)이 맡았습니다. 뷜로가 지휘까지 겸했다는 설명이 종종 보이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건반 앞에 있었습니다.

19세기에 촬영된 한스 폰 뷜로의 흑백 초상, 안경을 쓰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한스 폰 뷜로, 19세기, 사진, 위키미디어 공용, 퍼블릭 도메인. 이 곡의 헌정을 받은 사람이자 보스턴에서 처음 연주한 사람이다.

헌정도 처음부터 뷜로였던 것은 아닙니다. 자필 총보에는 원래 세르게이 타네예프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 이름을 작곡가 자신이 지웠습니다. 지워진 자리에 들어간 것이 뷜로입니다. 뷜로는 악보를 받고 1875년 6월에 프랑스어로 답장을 보냈는데, 거기에는 이 곡이 자기에게 그토록 빛나 보이며 「이 진정한 보석은 모든 피아니스트의 감사를 받게 될 것입니다」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같은 악보를 두고 반년 사이에 정반대의 평가가 남은 셈입니다. 다만 증거의 층이 다릅니다. 루빈시테인 쪽은 차이콥스키가 전한 말이고, 뷜로 쪽은 뷜로 자신이 쓴 편지입니다.

러시아에서의 초연은 보스턴보다 열아흐레 늦은 1875년 11월 13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렸습니다. 독주는 구스타프 크로스(Gustav Kross), 지휘는 에두아르트 나프라브니크(Eduard Nápravník)였습니다. 모스크바는 그보다 더 늦은 12월 3일이었고, 그 무대의 독주자와 지휘자가 앞에서 본 타네예프와 루빈시테인입니다.

들을 때 잡을 자리를 세 군데만 정해 두시기를 권합니다. 첫째는 맨 처음입니다. 피아노가 아직 들어오지 않은 채 호른이 먼저 부르는 대목이 있습니다. 둘째는 피아노가 들어온 뒤입니다. 한 마디에 화음이 셋씩 놓이는데, 오늘의 연주에서는 셋이 다 같은 무게로 내리꽂힙니다. 1875년과 1879년의 악보대로라면 첫 박은 짚고 나머지 둘은 아래에서 위로 굴려 올라갑니다. 어느 쪽으로 들리는지 확인해 보시면 됩니다. 셋째는 곡이 끝나는 자리입니다. 첫머리의 그 선율을 기다리면서 마지막을 들어 보십시오. 기다리던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이 곡의 특이한 경험입니다.

음반은 세 종을 적어 둡니다. 이 글은 이 음반들을 나란히 놓고 들어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어느 쪽이 낫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찾아 들으실 때 필요한 정보만 적습니다.

  • 반 클라이번(Van Cliburn), RCA 빅터 레드 실 LM-2252 및 LSC-2252. 1958년 미국에서 나왔습니다. 협연은 RCA 빅터 교향악단이고 지휘는 키릴 콘드라신(Кирилл Кондрашин)입니다. 같은 연주자가 모스크바에서 남긴 실황 음반이 따로 있으니 혼동하지 않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 도이체 그라모폰 LPM-18822. 1962년 빈에서 녹음해 1963년에 나왔습니다. 협연은 빈 심포니커이고 지휘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입니다. 이 음반의 악단을 베를린 필하모닉으로 적은 글이 많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 마르타 아르헤리치(Martha Argerich), 무자 SX 2149 및 아코르 ACD 0202. 1980년 10월 1일 바르샤바 필하모닉 홀 실황입니다. 협연은 바르샤바 국립 필하모닉 관현악단이고 지휘는 카지미에시 코르트(Kazimierz Kord)입니다. 같은 해에 나온 LP가 먼저이고 1996년 CD가 그 재발매입니다. 이 연주자의 다른 녹음이 여럿 있으니 날짜로 가리시는 것이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덧붙이겠습니다. 차이콥스키가 생애 마지막으로 지휘대에 선 것은 1893년 10월 상트페테르부르크였습니다. 그날 무대에 오른 것이 교향곡 6번 〈비창〉과 이 협주곡이었고, 협주곡의 독주는 아델레 아우스 데어 오에(Adele aus der Ohe)가 맡았습니다. 차이콥스키는 그로부터 아흐레 뒤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교실에서 두세 쪽만 남길 만하다는 말을 들었던 곡이 그의 마지막 무대에 있었습니다.

다음에 이 곡을 들으실 때는 첫머리에서 세 가지만 확인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피아노는 다섯 마디를 쉬고 여섯째 마디에 들어옵니다. 1875년과 1879년의 악보에서 그 화음들은 내리치는 화음이 아니라 굴려 치는 화음이었고, 건반 가운데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선율은 곡이 닫히는 자리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 곡의 얼굴이라고 여기는 그 첫머리는, 정작 곡 안에서 그 모습 그대로는 다시 나타나지 않는 문이었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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