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헨델

  • 헨델 〈왕궁의 불꽃놀이〉 HWV 351, 왜 녹음마다 소리가 다를까: 남아 있는 두 편성

    〈왕궁의 불꽃놀이〉를 음반으로 두 장쯤 들어 보면 금세 이상한 데가 눈에 띕니다. 어떤 녹음에서는 바이올린 소리가 또렷하게 들리는데, 어떤 녹음에서는 관악기와 타악기만 울립니다. 연주자가 취향대로 고른 결과가 아닙니다. 이 곡에는 서로 다른 편성이 둘 남아 있고, 오늘 나와 있는 음반은 그 둘로 갈립니다.

    곡 한눈에 보기
    • 작곡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 작품번호와 조성: HWV 351, 라장조
    • 작곡: 1749년
    • 초연: 1749년 4월 27일, 런던 그린 파크
    • 구성: 서곡, 부레, 평화(La Paix), 환희(La Réjouissance), 미뉴에트 두 곡

    왜 같은 곡인데 녹음마다 소리가 다를까

    초연 때의 편성과 한 달 뒤의 편성이 둘 다 악보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먼저 밝혀 둘 것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말하는 편성은 누가 나중에 회고한 이야기가 아니라 헨델이 직접 쓴 총보에 적힌 숫자입니다. 이 곡을 둘러싼 다른 이야기들과 근거의 급이 다릅니다.

    총보가 최종적으로 요구하는 편성은 오보에 24, 바순 12, 트럼펫 9, 호른 9, 그리고 팀파니 세 쌍과 작은 북입니다. 바순 열둘 가운데 하나는 콘트라바순입니다. 오보에 스물넷이라는 숫자가 낯설게 들리겠지만 이것은 실내악의 셈법이 아닙니다. 같은 성부를 여럿이 겹쳐 불어 소리를 멀리 보내는 야외 악대의 셈법입니다.

    이 숫자가 왜 필요했는지는 그날의 자리를 보면 짐작이 갑니다. 1749년 4월 27일 저녁, 런던의 공원 한복판에는 길이 410피트, 높이 114피트짜리 나무 구조물이 서 있었습니다. 겉은 돌로 지은 도리스식 신전처럼 보였지만 실제 재료는 나무와 회칠한 캔버스였습니다. 벽도 천장도 없는 야외에서, 저만한 크기의 구조물을 앞에 두고 소리를 채워야 하는 편성이었습니다.

    공원에 세워진 거대한 목조 구조물을 정면에서 그린 18세기 판화입니다. 가운데에 기둥이 늘어선 신전 모양의 본체가 서 있고 그 꼭대기에 왕실 문장이 얹혀 있으며, 좌우로 낮은 아치 회랑이 길게 뻗어 각각 끝에 작은 정자 모양의 파빌리온으로 마무리됩니다. 앞쪽 잔디밭에는 구경하는 사람들이 작게 그려져 있습니다.

    불꽃놀이를 위해 공원에 세운 목조 구조물을 저수지 쪽에서 바라본 그림이다. 앞쪽 울타리 곁의 사람들과 견주어 보면 가운데 본체와 좌우로 뻗은 회랑의 크기가 가늠된다.

    참고로 이 곡에 따라다니는 트럼펫 40, 호른 20 같은 큰 숫자는 실제 편성이 아닙니다. 그 숫자는 행사 석 달 전인 1749년 1월 런던의 한 잡지가 실은 사전 예고 기사에 나옵니다. 소문 단계의 계획이 활자가 되어 남은 것이고, 총보의 숫자와는 계열이 다릅니다. 둘을 한 문장에 섞으면 없던 편성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한 달 뒤인 5월 27일, 헨델은 파운들링 병원 자선 연주회에서 이 곡을 다시 올렸습니다. 이번에는 현악기가 들어갔습니다. 악보에 남은 지시를 보면 바이올린이 오보에 성부를,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바순 성부를 맡고, 비올라는 낮은 관악 성부나 베이스 성부를 따라갑니다. 오늘 우리가 음반과 연주회에서 만나는 〈왕궁의 불꽃놀이〉는 대개 이쪽 계열입니다. 처음에 말한 두 소리는 여기서 갈립니다.

    바이올린은 왜 빠졌다가 돌아왔을까

    국왕이 군악기만 쓰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 말이 오간 자리가 편지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병기국 총재였던 몬터규 공작이 불꽃놀이 감독관 찰스 프레더릭에게 보낸 1749년 3월 28일 자 편지입니다. 철자가 지금 기준으로 엉망인데, 이것은 옮겨 적으며 생긴 오류가 아니라 공작이 원래 그렇게 쓴 것입니다.

    “헨델은 이제 트럼펫 12에 프렌치 호른 12만 쓰겠다고 하는 것 같소. 처음에는 각각 열여섯이었지요. 내가 왕께 그렇게 말씀드린 기억이 납니다. 그때 왕께서는 음악이 있다는 것 자체를 못마땅해하셨는데, 군악기가 얼마나 많이 들어가는지 말씀드리자 한결 흡족해하시며 바이올린은 없기를 바란다고 하셨소. 그런데 지금 헨델은 트럼펫 수를 줄이고 바이올린을 넣겠다고 하는군요. 왕께서 이 소식을 들으시면 몹시 언짢아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편지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왕을 확실히 만족시키려면 군악기 외의 악기는 하나도 들어가서는 안 되며, 그러니 헨델은 바이올린을 물리지 않더라도 트럼펫과 군악기를 최대한 많이 넣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자기 생각에는 헨델이 바이올린을 빼야 마땅하지만, 그를 설득할 수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는다고요.

    이것이 왕 한 사람의 취향에 그치지 않았다는 것은 행사 공식 인쇄물에서도 드러납니다. 병기국이 국왕의 명으로 펴낸 1749년 인쇄물은 헨델의 곡을 그냥 서곡이라 부르지 않고 전쟁 악기들의 대서곡이라고 부릅니다. 군사 악기 편성은 뒷이야기가 아니라 그날 행사 문서에 박힌 곡의 이름 자체였습니다.

    열흘 남짓 뒤인 4월 9일 편지에서는 압박이 훨씬 노골적으로 바뀝니다. 쟁점은 복스홀 정원에서 공개 리허설을 할 것인가였습니다. 정원 주인이 등불과 램프 일습에 하인 서른 명까지 빌려주겠다고 나선 조건이 헨델의 서곡을 거기서 예행 연주하는 것이었는데, 헨델이 계속 거절하자 공작은 이렇게 씁니다. “헨델이 국왕에 대한 충성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겠다면, 나는 그의 서곡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접고 다른 사람 것을 구하도록 조치하겠소.”

    편지를 따라가면 다툼의 성격이 보입니다. 트럼펫과 호른의 수는 각각 열여섯에서 열둘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아홉까지 내려갑니다. 그 숫자가 내려가는 동안에도 헨델은 바이올린을 놓지 않았습니다. 여기까지는 편지에 적힌 그대로입니다.

    그다음부터는 해석입니다. 팩시밀리 악보를 편집한 연구자는 헨델이 이 협상에서 시간을 벌고 있었다고 봅니다. 애초에 예고된 규모로는 악곡이 성립할 수 없었고, 군악대에 악보를 읽을 수 있는 연주자가 그만큼 없었으리라는 것입니다.

    편지의 결말은 악보 위에 있습니다. 뒤쪽 악장들에는 현악기가 관악 성부를 함께 연주하라는 지시가 적혔다가 지워졌습니다. 왕이 바라던 대로 그날 밤 바이올린은 울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헨델은 그 지시를 애초에 적어 두었고, 지운 자국은 남았습니다. 같은 총보의 콘트라바순 자리에도, 당시 야외 악대에서 저음을 받치던 구불구불한 목관 세르팡(serpent)을 적었다가 지운 흔적이 있습니다.

    이 곡이 〈수상음악〉과 자주 나란히 놓이면서도 소리의 성격이 전혀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수상음악〉에는 현이 있고, 이 곡의 초연에는 없었습니다.

    어디서부터 들으면 되는가

    〈환희〉에서 트럼펫 아래를 들으면 됩니다. 이 악장은 이 곡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부분이고, 처음 들을 때는 앞으로 나온 트럼펫이 같은 형태를 반복하는 인상만 남습니다. 두 번째로 들을 때 그 아래에서 오보에와 바순 무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화려한 층 아래에 두꺼운 층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이 잡히면, 오보에 스물넷이라는 숫자가 왜 필요했는지가 그 자리에서 이해됩니다.

    〈서곡〉은 프랑스풍 서곡의 틀을 그대로 씁니다. 느리고 위엄 있는 도입부가 점을 찍는 리듬으로 걸어 나오다가 빠른 부분으로 넘어가고, 다시 한 번 느려졌다가 빠르게 마무리됩니다. 여기서 두드러지는 것은 트럼펫 무리와 호른 무리가 서로를 받아 넘기는 대목입니다. 한 대와 한 대가 아니라 아홉 대와 아홉 대가 덩어리로 주고받기 때문에, 소리가 좌우로 옮겨 다니는 것처럼 들리는 순간이 있습니다.

    〈부레〉는 짧습니다. 큰 소리를 한참 낸 뒤에 잠깐 숨을 고르는 자리라고 생각하고 들으면 됩니다. 바로 이어지는 〈평화〉는 이 모음곡에서 가장 조용한 곡입니다. 시칠리아나 특유의 흔들리는 박 위로 호른이 긴 음을 늘어뜨리는데, 대포와 불꽃을 앞둔 행사의 음악 한가운데에 이 악장이 놓여 있습니다. 이 행사가 기념한 것은 전쟁의 끝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떠올리며 들으면 이 악장의 자리가 달리 보입니다.

    마지막은 미뉴에트 두 곡입니다. 하나는 단조이고 하나는 장조인데, 이 판본을 만든 연구자는 단조 미뉴에트가 나중에 덧붙었고 장조 미뉴에트의 가운데 대비 부분 구실을 하도록 쓰였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 마지막 대목은 밝은 곡, 어두운 곡, 다시 밝은 곡의 순서로 들으면 짜임이 자연스럽게 잡힙니다.

    여유가 되면 다른 계열의 녹음을 한 장 더 들어 볼 만합니다. 오늘 유통되는 음반은 대개 현악이 든 쪽이고, 관악만으로 연주한 녹음도 나와 있습니다. 같은 〈환희〉를 이어서 들으면 바이올린이 오보에 성부에 얹히면서 안쪽 결이 달라지는 것이 잡힙니다. 초연과 한 달 뒤가 갈리는 자리가 바로 거기입니다.

    그런데 이 곡에는 이상한 빈자리가 하나 있습니다. 리허설에도 본 행사에도 수많은 사람이 왔고 신문과 잡지와 개인 편지가 그날을 상세히 전하는데, 헨델의 음악이 어땠는지 적은 문장은 공적 기록에도 사적 기록에도 없습니다.

    18세기 동판화입니다. 화면 가운데에 기둥과 아치로 이루어진 신전 모양의 긴 구조물이 서 있고 그 꼭대기 위로 긴 장대에 얹힌 해 모양 장식이 솟아 있으며, 좌우로 낮은 아치 회랑이 뻗어 각각 끝에 지붕이 얹힌 파빌리온으로 마무리됩니다. 앞쪽 넓은 잔디밭에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작게 그려져 있고, 그림 아래에는 각 부분에 번호를 붙여 설명하는 글이 여러 줄 인쇄되어 있습니다.

    행사를 위해 세운 구조물을 정면에서 길게 펼쳐 그린 판화다. 가운데 본체 위로 긴 장대에 얹힌 해 모양 장식이 하나 솟아 있다.

    그날의 광경은 이렇게 판화로도 남았습니다. 그림 아래에는 구조물의 어느 자리가 무엇인지 번호를 붙여 짚어 놓은 설명까지 딸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서 울린 소리를 적어 둔 사람은 없습니다. 이 곡에 관해 우리에게 남은 문서는 헨델의 악보뿐이라고, 팩시밀리 서문은 그렇게 끝을 맺습니다. 그래서 이 곡은 읽어서 확인할 수 없고 들어서 확인해야 합니다. 왕이 원한 소리는 총보의 숫자에, 헨델이 적어 둔 소리는 지워진 자국에 남아 있습니다.

  • 무너진 오페라 시장에서 헨델은 어떻게 《메시아》를 만들었나

    18세기 런던, 조지 프리드릭 헨델(George Frideric Handel)의 영어 오라토리오는 단순한 종교적 감동의 산물이 아니라, 오페라 사업의 붕괴를 눈앞에 둔 공연 기획자가 시장의 제약을 뚫고 만들어낸 대안 콘텐츠였습니다. 흔히 헨델을 위대한 작곡가로만 기억하지만, 사실 그는 직접 투자를 유치하고 극장을 대관하며 관객의 지갑을 열게 만들던 철저한 공연 기획자이자 극장 사업가에 가까웠습니다.

    이 글에서는 많은 이들이 순수한 예술적 영감의 결과물로만 알고 있는 헨델의 《메시아(Messiah)》와 오라토리오(oratorio, 성서 등의 종교적 내용을 바탕으로 무대 장치나 연기 없이 연주하는 대규모 극음악) 장르가, 재정 위기와 사순절 공연 규제라는 구체적인 제약 조건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형식으로 방향을 틀게 되었는지 그 경제사적 맥락을 파헤쳐 봅니다. 다만 ‘위기가 명작을 낳았다’는 식의 감동적 인과로 단순화하지는 않겠습니다. 실제로 추적할 것은 시장과 규제 조건이 바뀔 때마다 헨델이 선택할 수 있었던 형식·청중·언어의 조합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라졌는가입니다.

    주제 한눈에 보기

    • 핵심 인물: 조지 프리드릭 헨델(George Frideric Handel)
    • 분석 대상: 이탈리아 오페라 세리아에서 영어 오라토리오로의 전환
    • 전환 기점: 1728~29년 왕립 음악 아카데미 붕괴 및 1737년 오페라 사업 위기
    • 대표 성공작: 《메시아(Messiah)》, 작품번호 HWV 56
    • 역사적 초연: 1742년 4월 13일 아일랜드 더블린 피샘블 스트리트의 뉴 뮤직홀(닐스 뮤직홀, Neal’s Musick Hall)

    스타 시스템의 몰락: 이탈리아 오페라의 구조적 모순

    1720년대 런던 음악 시장을 주도하던 헨델의 이탈리아 오페라 사업은 스타 가수의 천문학적인 개런티와 경쟁 극단과의 심화된 대립으로 인해 점차 구조적인 붕괴 상태에 직면했습니다. 영국의 정재계 귀족들이 막대한 자본을 모아 1719년 야심 차게 출범시켰던 왕립 음악 아카데미(Royal Academy of Music)는 막대한 귀족 구독 자본을 바탕으로 출범했지만, 고비용 오페라 운영과 흥행 부진 속에서 1728~29년 시즌을 끝으로 사실상 활동을 중단하는 길을 걷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왕립 음악 아카데미는 오늘날의 동명 음악원이 아니라, 18세기 런던에서 이탈리아 오페라 공연을 위해 조직된 귀족 후원 오페라 회사였습니다. 붕괴에는 개런티 부담뿐 아니라, 같은 해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The Beggar’s Opera)》가 크게 흥행하며 관객의 취향 자체가 값싸고 풍자적인 영어 대중극 쪽으로 옮겨간 것도 함께 작용했습니다.

    당시 런던 무대를 지배했던 이탈리아 오페라 세리아(opera seria, 18세기 전반 유럽을 지배한 비극적이고 현란한 오페라 양식)는 철저한 ‘스타 시스템’에 의존하는 맹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네시노(Senesino) 같은 톱클래스 카스트라토(castrato, 거세 가수)나 프란체스카 쿠초니(Francesca Cuzzoni) 등 프리마돈나의 몸값은 시즌당 1,500~3,000기니에 각종 보너스가 더해질 만큼 폭등하여 극장 예산의 상당 부분을 집어삼켰습니다.

    ⚠️ 치명적인 공급망 리스크와 출혈 경쟁

    1733년, 헨델을 견제하기 위해 궁정 반대파가 창단한 ‘귀족 오페라단(Opera of the Nobility)’은 이후 1734~35년경 파리넬리(Farinelli) 같은 초대형 카스트라토까지 끌어들이며 관객 유치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제한된 귀족 청중을 두고 벌인 가수의 몸값 인상과 과시적인 무대 장치 경쟁은 양쪽 극장 모두를 재정적 나락으로 밀어넣었습니다.

    결국 귀족의 후원금이라는 좁은 우물 안에서 생산 단가의 통제권을 잃어버린 오페라 세리아 비즈니스는 수익을 낼 수 없는 파탄 구조가 되었습니다. 스타 가수 개런티가 헨델 자신의 작곡료를 정확히 몇 배 앞질렀는지까지는 명확한 근거를 찾기 어렵지만, 당대 최고 수준 작곡가의 수입을 훌쩍 뛰어넘는 액수였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러한 재정적 모순은 극장 사업의 한계를 절감한 헨델에게 새로운 수익 모델의 전면적인 재편을 강요하고 있었습니다.

    막대한 제작비가 투입되던 18세기 런던 오페라 무대의 공연 장면
    18세기 런던 오페라무대의 공연 장면(출처: englishhistoryauthors.blogspot.com)

    1737년의 전환: 쓰러진 헨델, 오라토리오로 방향을 틀다

    1737년 4월, 극심한 과로와 경쟁 오페라단과의 출혈 경쟁이 낳은 극장 사업 붕괴의 압박 속에서 헨델은 우측 편마비를 동반한 중풍 추정 질환으로 쓰러졌습니다. 음악가로서 생명인 오른손의 마비는 기획자 헨델에게 치명적인 위기였고, 당시 런던의 많은 평론가는 그의 시대가 끝났다고 비관했습니다.

    하지만 헨델은 독일 아헨(Aachen, 당시는 Aix-la-Chapelle)의 온천 휴양지로 떠나 약 6주간 온천 치료와 재활에 매달렸고, 몸을 회복해 그해 가을 런던 무대로 돌아왔습니다. 당시 런던 데일리 포스트(London Daily Post)는 11월 7일 그가 “건강을 크게 회복해” 돌아왔다고 보도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복귀 직후 낭만적인 신화처럼 어느 날 갑자기 《메시아》를 떠올린 것이 아니라, 오페라 시장의 붕괴를 예견하고 이미 준비해 두었던 ‘영어 오라토리오’라는 카드를 본격적으로 꺼내 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음악학자 도널드 버로우즈(Donald Burrows, 헨델 연구의 대표적 권위자)의 연구에 따르면, 헨델은 이미 1730년대 초반부터 영어 오라토리오의 대중성과 상업성을 실험해 두고 있었습니다. 《에스더(Esther)》는 1732년 5월 킹스 시어터에서 확장판으로 초연됐고, 《데보라(Deborah)》는 1733년 3월 17일, 《아탈리아(Athalia)》는 같은 해 옥스퍼드 셸도니언 극장에서 무대에 올랐습니다. 옥스퍼드 공연 때는 학생들이 5실링짜리 티켓값을 마련하려 가구까지 내다 팔았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화제를 모았습니다. 1737년의 신체적 위기와 재정적 압박은 헨델에게 오페라라는 과거의 비즈니스를 과감히 정리하고, 이미 실험을 마친 새 장르로 전면 전환하는 결정적인 방아쇠가 되었습니다.

    합창이 답이었다: 규제가 만든 새로운 형식

    헨델이 돌파구로 선택한 영어 오라토리오는 애초부터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 규제의 산물에 가까웠습니다. 헨델은 처음에는 성서 소재를 정극 오페라처럼 무대 장치와 연기를 갖춰 상연하려 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런던 주교 측이 이를 가로막았습니다. 당시 코벤트가든 같은 극장은 매춘과도 연관된 세속적 공간으로 여겨졌고, 그런 곳에서 성서 내용을 연기로 재현하는 것은 신성모독에 가깝다고 본 것입니다. 결국 무대 장치도, 의상도, 연기도 없이 성가대가 오케스트라 옆에 그대로 서서 노래하는 ‘오라토리오’라는 형식은 교회 음악과 극장 음악 사이에서 나온 일종의 타협안이었습니다. 귀족 후원 시장이 닫히자 사순절이라는 새로운 시장이 열렸고, 그 시장에 진입하기 위한 종교적 규제 조건이 ‘무대 없는 합창 중심’이라는 매우 구체적인 형식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오라토리오의 내부 음악 구조가 왜 ‘독창’에서 ‘합창’ 중심으로 옮겨갔는지도 함께 설명됩니다. 천문학적인 돈을 줘야 하는 이탈리아 스타 카스트라토 의존도를 낮춰야 했던 헨델은, 영국과 아일랜드의 성가대 전통 속에서 고도로 훈련된 현지 합창 자원을 극음악의 중심축으로 전면 배치했습니다.

    💡 사순절이라는 틈새시장의 공략

    18세기 런던에서는 관습과 면허 규제로 인해 부활절 전 40일인 사순절 기간에 무대 오락과 오페라 공연이 사실상 제한되었습니다. 하지만 성서 본문을 바탕으로 연기 없이 연주되는 오라토리오는 그 공백을 메울 수 있는 명분을 얻기 쉬웠고, 상대적으로 경쟁이 줄어든 시기에 청중을 모을 수 있는 중요한 틈새시장이 되었습니다.

    청중들은 스타 가수의 개인기를 구경하는 대신, 모국어인 영어로 장엄하게 뻗어나가는 대규모 합창 사운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시장 조건의 변화가 청중층을 귀족에서 시민으로 넓혔고, 규제 조건의 변화가 형식을 ‘무대 있는 독창’에서 ‘무대 없는 합창’으로 바꾼 셈입니다.

    비즈니스 비교 항목 이탈리아 오페라 세리아 영어 합창 오라토리오
    수익 모델 귀족 구독료 선납(고정적, 확장 한계) 티켓 현장 판매 및 자선 공연으로 브랜드 구축
    핵심 타깃 청중 국왕 및 최상위 귀족 중심 신흥 중산층 및 일반 시민
    사용 언어 이탈리아어(배타적인 고급화 전략) 영어(직관적 이해와 접근성 극대화)
    무대 및 연출 비용 거대한 세트, 화려한 의상 필수(제작비 과다) 연기와 무대 장치 생략(종교적 규제에 따른 결과이자 제작비 절감)
    핵심 출연진 비중 해외 스타 카스트라토(시즌당 1,500~3,000기니 수준) 현지 성가대 전통과 합창 자원 중심
    제도적 환경(사순절) 관습적 규제로 인해 사실상 공연 제한 예외적 공연 허용으로 틈새 청중 수요 흡수

    1742년 더블린의 반전: 메시아가 남긴 진정한 경제학적 유산

    1741년 작곡된 헨델의 《메시아》는 1742년 4월 13일 아일랜드 더블린 피샘블 스트리트의 뉴 뮤직홀(닐스 뮤직홀)에서 자선 공연으로 역사적인 초연을 가졌습니다. 헨델이 24일 만에 대작을 완성했다는 것은 사실에 가깝습니다. 1741년 8월 22일 작곡을 시작해 1부는 8월 28일, 2부는 9월 6일, 3부는 9월 12일에 마쳤고, 이틀 뒤인 9월 14일 전곡을 완성했습니다. 다만 이를 “신들린 듯 식음을 전폐하고 쓴 기적”으로만 설명하는 이야기는 후대에 덧입혀진 낭만적 신화에 가깝습니다.

    당대 자필 악보와 연구를 종합해 보면, 헨델은 한정된 시간 안에 최고 품질의 음악을 완성하기 위해 여러 악장에서 패러디 기법(parody technique, 기존에 자신이 작곡한 칸타타 등의 선율을 새 작품에 효율적으로 재활용하는 방식)을 고도로 발휘했습니다. 20년 전 곡부터 불과 두 달 전에 쓴 곡까지 재료로 삼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곡이 어떻게 쓰였는지는 하단 FAQ에서 다룹니다. 이는 영감에만 의존하는 예술가가 아니라 납기일과 품질을 정확히 맞추는 프로페셔널 콘텐츠 제작자의 시간 경영 노하우였습니다.

    다만 《메시아》가 더블린의 성공 직후 곧바로 런던에서 국민적 명작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런던에서는 성서 본문을 세속적인 극장에서 연주하는 문제를 둘러싼 논란도 있었고, 이 작품의 압도적 명성은 이후 자선 공연과 반복 연주를 거치며 서서히 굳어졌습니다(자세한 내용은 하단 FAQ 참고). 더블린 초연 수익은 채무자 구제, 머서 병원(Mercer’s Hospital), 자선 의무실(Charitable Infirmary) 등 세 자선기관을 위해 사용됐습니다.

    1742년 더블린에서 열린 메시아 초연 악보
    1742년 더블린에서 열린 메시아 초연 악보

    그렇다고 해서 《메시아》의 종교적 감동이 단순한 마케팅 포장에 불과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시 정리하면, 헨델의 전환을 이끈 것은 ‘위기가 명작을 낳았다’는 감동적 서사가 아니라 구체적인 인과의 사슬이었습니다. 귀족 후원 시장의 붕괴가 새로운 시장(사순절 틈새)을 찾게 만들었고, 그 시장에 진입하려면 종교적 규제(주교의 무대상연 금지)를 통과해야 했으며, 그 규제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무대 없는 합창 중심’이라는 구체적 형식이 나왔습니다. 같은 재능이라도 시장과 규제 조건이 달랐다면 전혀 다른 형식의 작품이 나왔을 것입니다. 헨델은 이 형식 안에서 종교적 메시지, 자선 공연의 공익성, 시민 청중의 참여, 낮아진 제작비라는 요소를 하나의 지속 가능한 공연 모델로 결합해 냈고, 1750년부터 시작된 파운들링 병원 자선 공연이 거의 매년 정례화되면서 그의 사망(1759년) 무렵에는 명성이 확고히 자리 잡았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메시아는 더블린에서 성공했다는데, 왜 런던에서는 곧바로 명작 대접을 못 받았나요?

    런던 초연은 더블린보다 약 1년 늦은 1743년 3월 23일 코벤트가든에서 열렸는데, 종교적 색채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메시아’라는 제목 대신 ‘신성한 오라토리오(A Sacred Oratorio)’로 표기해 상연해야 했습니다. 사순절 기간 세속 극장에서 성서 내용을 다루는 것에 성직자들의 반발이 있었고, 당시 신문 논쟁에서는 ‘너무 성스러워서 극장에 올릴 수 없고, 너무 연극적이어서 교회에 올릴 수도 없다’는 유명한 비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 시즌 예정됐던 6회 공연은 3회로 줄었습니다. 메시아가 명작으로 확고히 자리 잡은 진짜 계기는 1750년부터 시작된 파운들링 병원(고아원) 자선 공연이 거의 매년 정례화되면서였고, 헨델이 세상을 떠난 1759년 무렵에는 명성이 확립돼 있었습니다.

    Q. 메시아의 유명한 합창곡들이 예전에 쓴 곡을 재활용한 것이라던데, 구체적으로 어떤 곡들인가요?

    몇 개의 구체적인 사례가 확인됩니다. 20년 전인 1722년에 쓴 이탈리아어 실내 이중창 ‘Se tu non lasci amore'(HWV 193)의 선율은 ‘O Death, where is thy sting'(죽음아, 너의 독침은 어디 있느냐)으로 옮겨졌습니다. 메시아 작곡 불과 두 달 전인 1741년 7월에 완성한 이중창 ‘Quel fior che all’alba ride'(HWV 192)의 선율은 ‘His yoke is easy'(그의 멍에는 편하고)와 ‘And he shall purify'(그가 정결케 하리니)에 쓰였습니다. 또 다른 이중창 ‘Nò, di voi non vo’ fidarmi’의 선율은 ‘For unto us a child is born'(우리에게 한 아기가 나셨고)과 ‘All we like sheep'(우리는 모두 양 같아서)의 바탕이 됐습니다. 시간에 쫓기던 프로 작곡가가 이미 검증된 좋은 선율을 새 가사에 맞춰 재활용한 실용적 작업 방식이었습니다.

    Q. 더블린 초연 때 합창단은 어떤 사람들로, 어떤 규모로 꾸려졌나요?

    더블린의 두 대성당인 성 패트릭 대성당과 크라이스트처치 대성당의 성가대원들을 합쳐 남성 16명과 소년 16명, 총 32명으로 합창단을 꾸렸고 일부는 독창 파트도 겸했습니다. 1742년 4월 13일 초연 당시 객석은 약 700명이 채웠고, 수익은 약 400파운드로 집계됩니다. 이 수익 전액이 채무자 구제, 머서 병원, 자선 의무실 세 자선기관에 나뉘어 전달됐습니다. 오늘날 대편성 합창단이 부르는 것과 비교하면 매우 아담한 규모에서 시작된 셈입니다.

    Q. 스타 가수의 개런티가 정확히 헨델 작곡료의 몇 배나 됐나요?

    정확한 배수를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세네시노는 시즌당 1,500~3,000기니, 쿠초니와 파우스티나도 1,500기니 안팎에 각종 보너스를 더 받은 것으로 기록돼 있어 ‘£2,000 내외’라는 수준 자체는 대체로 맞습니다. 다만 이를 헨델의 작곡료와 정확히 몇 배로 비교한 근거 자료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명확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금액이 그 시대 정상급 작곡가의 수입 수준을 크게 웃돌아 극장 예산의 상당 부분을 잠식할 만큼 컸다는 사실입니다.

    이탈리아 오페라 사업 붕괴의 위기 속에서 탄생한 헨델의 오라토리오는 소수 귀족의 전유물이던 18세기 음악 시장을 시민 청중 중심으로 재편한 역사적인 분기점입니다. 시장의 붕괴, 종교적 규제, 그리고 그 안에서 새로운 형식을 찾아낸 기획력이 맞물려 지금 우리가 듣는 합창 오라토리오라는 장르를 만들어냈습니다.

    오늘 하루는 시장의 제약을 정면으로 돌파해 낸 기획자 헨델의 관점에서 《메시아》 중 가장 유명한 ‘할렐루야(Hallelujah)’ 합창을 다시 한번 들어보시면 어떨까요? 그 웅장한 사운드 속에 숨겨진 18세기 극장 비즈니스의 맥락이 여러분의 귓가에 새로운 전율로 다가갈 것입니다.

  • 헨델의 수상음악(Water Music) – 정치적 화해를 담은 여름날의 선율

      장대한 서곡으로 시작해 짧고 명랑한 춤곡이 이어지는 <수상음악 Water Music. HWV 349>은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 HWV 351>과 더불어 헨델(George Frideric Handel, 1685-1759)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꼽힌다. 이 곡은 단순한 궁정 음악을 넘어, 정치적 긴장과 화해의 도구로 활용된 흥미로운 배경을 지니고 있다.

    1. 헨델과 조지 1세 – <수상음악>이 탄생한 정치적 배경

      수상음악은 헨델과 하노버 선제후이자 영국 국왕 조지 1세(George I, 1660-1727)와의 관계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곡이다. 헨델이 25세 하노버 선제후의 궁정 악장으로 임명된 이듬 해에 휴가를 받아 영국 런던에서 오페라 <리날도>를 발표하였다. 대성공을 거둔 헨델은 영국 왕실의 관심을 얻게 되었다. 1713년 28세 때 헨델은 다시 영국을 방문하였는데, 앤 여왕의 눈에 든 헨델은 하노버로 돌아가지 않고 영국에 정착하였다.

      하지만 1714년 앤 여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하노버의 선제후가 영국의 국왕 조지 1세로 즉위하게 된다. 조지 1세의 입장에서는 헨델의 행동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고, 헨델도 조지 1세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런 운명의 장난 때문이었는지, 헨델이 조지 1세의 마음을 풀어 주기 위해 수상음악을 작곡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헨델을 돕기 위해 친구인 카르만제케 남작과 바린톤 백작이 왕이 뱃놀이를 할 때 흥을 돋우기 위해 뱃노래 작곡의 아이디어를 냈다는 일화도 있지만, 정확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당시 선상 파티가 유행이었고 1717년 7월 17일 조지 1세가 템즈강에서 유람하며 선상 파티를 할 때 <수상음악>이 초연되었다는 것이다. 물 위에서 연주하는 음악이라는 의미에서 ‘수상음악’이라 불리게 되었다.

    [2026년 7월 재검토 기록] 위 1장의 서술 가운데 두 가지를 보충한다. 첫째, 헨델이 조지 1세의 노여움을 샀고 수상음악으로 화해했다는 이야기는 헨델 사후에 나온 존 메인워링의 전기(1760)에서 비롯된 전승이다. 현대 연구는 1717년 무렵이면 두 사람의 관계가 이미 회복돼 있었다고 본다 — 조지 1세는 즉위 후 3년 가까이 영국에서 헨델의 음악을 여러 차례 들었다. 본문이 적었듯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므로, 분노와 화해라는 구도는 확정된 사실이라기보다 널리 퍼진 이야기로 읽는 편이 안전하다. 둘째, 헨델이 하노버를 떠나 런던에 다시 온 것은 1712년 가을이다. 1713년은 앤 여왕이 헨델에게 연 200파운드의 연금을 하사한 해다. 셋째, 이 글 도입부는 수상음악 전체를 <수상음악 Water Music. HWV 349>로 적었으나, HWV 349는 아래 2장에 나오듯 제2모음곡(D장조)의 번호다. 전곡을 가리킬 때는 HWV 348~350으로 적는 것이 맞다.

    트레버 피노크의 수상음악 앨범 전면을 보여주는 이미지

    트레버 피노크의 수상음악 앨범(ARCHIV)  

    2. 수상음악의 구성 – 세 개의 모음곡과 특징

      <수상음악>은 당시 유행하던 춤곡을 모아서 엮은 3개의 관현악 모음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모음곡 (F장조 HWV 348): 서곡, 알레망드, 부레, 혼파이프 등

    제2모음곡 (D장조 HWV 349): 트럼펫과 호른이 강조되는 화려한 악장 포함

    제3모음곡 (G장조 HWV 350): 미뉴에트, 리고동 등 가벼운 춤곡 중심

      이탈리아풍 합주 협주곡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전부 22곡으로 이뤄진 모음곡 형식의 세레나데이다. 하지만 헨델의 <수상음악>은 여러 판본이 존재하고 오늘날 연주나 음반 녹음을 할 때 곡의 순서가 달라지거나 몇 곡만 발췌되기도 한다.

    3. 강 위에서 울려 퍼진 음악 – 독특한 악기 편성과 야외 사운드

      실내가 아닌 강 위에서 연주할 목적으로 작곡되어 악기편성이 독특하다.

    – 금관악기(호른, 트럼펫) : 직진성이 좋고 소리가 크며 화려한 사운드가 특징

    – 목관악기(플루트, 오보에, 바순 등) : 선율의 아름다움을 담당

    – 현악기 : 야외에서 들리지 않을 뿐더러 온도나 습도에 민감해서 물이 튀어오를지 모르는 강 위에서 연주하는 것은 위험한 특성상 보조 역할로 사용

      특히 관악기의 높고 가는 선율은 여름 강바람처럼 듣는 이의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 그래서 <수상음악>은 여름철 클래식 추천곡으로도 자주 언급된다.

      그날 연주에 흡족해한 조지 1세가 세 번이나 더 연주하라고 지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연주자들이 왕과 귀족들이 탄 배를 빙글빙글 돌면서 서라운드로 연주했으니 선상 파티가 제법 신이 났을 듯하다. <수상음악>의 제2모음곡은 전 곡이 D장조로 작곡되었다. 작곡가들이 화려하고 밝은 곡을 쓰고 싶을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조성으로, 아마 헨델도 조지 1세를 위해 화려한 곡을 선물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헨델은 왕의 총애를 받게 되고, 연금도 두 배나 올랐다.

    [2026년 7월 재검토 기록] 위 ‘세 번이나 더 연주하라고 지시했다’는 대목은 횟수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당대 관찰자 프리드리히 보네가 남긴 기록의 원문은 “폐하께서 매우 흡족해하시어 통틀어 세 번 연주하게 하셨다(played three times in all)”이다. 추가로 세 번이 아니라 그날 통틀어 세 번이라는 뜻이며, 연주가 한 번에 한 시간씩 걸렸다는 언급도 함께 남아 있다.

    4. 감상포인트 – 꼭 들어야 할 악장들

      <수상음악>은 밝고 화려한 화성과 출렁이는 리듬이 매력적인 곡이다. 추천 악장은 다음과 같다.

    – 서곡: 힘차고 당당한 도입부

    – 알라 혼파이프(Alla Hornpipe, 제2모음곡 2번): 알라 혼파이프(Alla Hornpipe)

    – 부레, 미뉴에트, 렌토 : 각기 다른 춤곡의 느낌을 전달하며, 전체적인 흐름에 변화를 줌

      특히 알라 혼파이프는 화려하면서도 경쾌한 리듬이 인상적이며, 야외 음악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대표곡이다.

    5.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과 비교

      헨델의 또 다른 대표 관현악곡인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 HWV 351>은 왕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작곡된 곡으로, 더 큰 규모의 군악 스타일과 강렬한 금관 사운드를 특징으로 한다.

    수상음악: 유려하고 세련된 분위기, 춤곡 중심, 비교적 부드러움

    불꽃놀이 음악: 장엄하고 군사적인 느낌, 타악기 강조, 곡의 규모가 큼

      두 작품 모두 야외 음악으로 작곡되었으며, 헨델이 공간과 상황에 맞게 음악을 어떻게 조율했는지를 비교하며 감상하면 더욱 흥미롭다.

    [2026년 7월 재검토 기록] 위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 HWV 351>의 작곡 배경은 정정이 필요하다. 이 곡은 왕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곡이 아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을 끝낸 1748년 엑스라샤펠 조약(아헨 조약)을 축하하는 1749년 축전을 위해 작곡되었다. 발주한 왕도 조지 1세가 아니라 조지 2세이며, 초연은 1749년 4월 27일 런던 그린파크에서 있었다.

    6. 감상하기

      원전연주의 거장 트레버 피노크(Trevor David Pinnock, 1946년 생)가 지휘하고 더잉글리시 콘서트(The English Concert)가 연주한 음반(ARCHIV)을 추천한다. 바로크 연주에 정통하여 곡의 생동감을 가장 잘 살려낸다는 평가를 받는다.

      <수상음악>은 헨델의 대표적 관현악곡으로 오늘날까지도 널리 사랑받고 있는데, 여름철 감상하기에 제격인 작품이다. 여름에 어울리는 클래식 음악을 찾는 분, 화려하고 밝은 고전음악을 좋아하는 분, 입문자용 클래식으로 부담 없는 곡을 찾는 분, 트럼펫과 호른 등 금관악기의 매력을 느끼고 싶은 분은 헨델의 <수상음악>을 반드시 들어보시기를 바란다.

  • 헨델 생애와 작품, 음악의 어머니가 남긴 오페라·오라토리오·기악곡

      같은 해, 같은 중부 독일 땅에서 태어난 두 거장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평생 독일을 떠나지 않고 교회 음악의 한 봉우리를 세웠고, 다른 한 사람은 독일을 떠나 이탈리아에서 단련을 거치고 영국에서 꽃을 피웠습니다. 한국에서 흔히 ‘음악의 아버지’ 바흐와 짝을 이루어 ‘음악의 어머니’라 불리는 헨델, 그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깊이 들여다봅니다.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 1685~1759)은 1685년 독일 작센 지방의 할레에서 궁정 이발사 겸 외과의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후기 바로크 음악을 마지막 정점으로 끌어올린 작곡가입니다. 같은 해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난 바흐와 더불어 후기 바로크의 두 봉우리로 손꼽히지만, 평생 독일 안에 머문 바흐와 달리 헨델은 독일·이탈리아·영국 세 음악 문화를 직접 흡수하고 결합한 코스모폴리탄 작곡가였습니다.

    — 작곡가 프로필 —

    본명 Georg Friedrich Händel (영국 귀화 후 George Frideric Handel)
    생몰 1685년 2월 23일 할레 ~ 1759년 4월 14일 런던 (향년 74세)
    시대 후기 바로크
    주요 장르 이탈리아어 오페라 · 영어 오라토리오 · 협주곡 · 관현악 모음곡 · 건반악곡
    작품 수 HWV 카탈로그 기준 약 612곡 (오페라 42편, 오라토리오 약 25편 포함)
    대표작 [메시아] · [수상음악] · [왕궁의 불꽃놀이] · [리날도] · [세르세] (※ 카탈로그 기준에 따라 작품 수에 차이)

    1. 헨델의 생애

      헨델의 인생은 크게 네 시기로 나뉩니다. 음악적 재능을 발견한 할레 시기(1685~1703), 직업 음악가로 첫걸음을 뗀 함부르크 시기(1703~1706), 이탈리아 오페라 양식을 흡수한 이탈리아 시기(1706~1710), 그리고 평생의 무대가 된 영국 시기(1710~1759)입니다. 헨델은 이 네 무대 사이를 단순히 이동한 것이 아니라, 각 음악 문화를 자신의 양식 안에 차례로 녹여 들였습니다.

    할레 시기: 다락방의 클라비코드와 차하우의 가르침

      헨델의 아버지 게오르크 헨델은 작센-바이센펠스 공작 궁정의 이발사 겸 외과의였고, 아들이 음악가가 되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법률가의 길을 권한 아버지를 피해 어린 헨델이 다락방에 클라비코드를 숨겨 두고 몰래 연주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이 이야기는 헨델 사후 처음 출간된 전기에 실린 가장 이른 기록이지만, 그 전기 자체가 헨델이 죽은 뒤 주변 사람의 회고를 엮은 책이라 1차 자료는 아닙니다.

      작센-바이센펠스의 요한 아돌프 1세 공작이 어린 헨델의 즉흥연주에 감탄해 아버지를 설득한 뒤, 헨델은 할레 마리엔교회의 오르가니스트 차하우(Friedrich Wilhelm Zachow, 1663~1712)의 제자가 됩니다. 차하우는 어린 헨델에게 대위법, 푸가, 다양한 작곡가의 양식을 두루 가르쳤고, 헨델 자신이 평생 인정한 거의 유일한 작곡 스승이었습니다. 1702년 17세 헨델은 할레 대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임명되어 첫 직업 음악가의 자리에 섭니다.

    함부르크 시기: 마타이슨과의 결투, 그리고 첫 오페라

      1703년 헨델은 할레를 떠나 독일에서 거의 유일하게 시민극장식 오페라가 운영되던 함부르크의 갠제마르크트 극장에 합류합니다. 처음에는 제2 바이올린, 곧 하프시코드 연주자로 활동했고, 이곳에서 평생의 친구이자 라이벌이 될 동료 작곡가 마타이슨(Johann Mattheson, 1681~1764)을 만나게 됩니다.

      1704년 12월 5일, 마타이슨이 자작 오페라 「클레오파트라」에서 안토니우스 역을 맡아 무대에서 노래를 마치고 하프시코드 자리로 돌아왔는데, 그 자리에는 이미 헨델이 앉아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격렬히 다투었고, 결국 극장 앞 광장에서 검을 빼들었습니다. 마타이슨이 찌른 검이 헨델의 외투에 달린 큰 금속 단추에 부딪혀 부러진 덕분에 헨델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이 일화는 흥미 위주의 야사가 아니라 마타이슨 본인이 만년에 펴낸 음악인 회고록에 직접 적어 남긴 기록이라, 출처가 분명한 일화로 다루어집니다. 두 사람은 곧 화해했고 평생의 음악 동료로 지냈으며, 마타이슨이 남긴 헨델 관련 기록은 헨델 함부르크 시기를 재구성하는 핵심 자료가 됩니다. 1705년 1월 헨델의 첫 오페라 [알미라]가 갠제마르크트 극장에서 초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고, 같은 해 [네로]가 뒤따랐습니다(악보 소실).

    이탈리아 시기: 로마와 베네치아의 단련

      1706년 가을 헨델은 이탈리아 오페라의 본고장에서 직접 단련받기 위해 알프스를 넘습니다. 피렌체의 페르디난도 데 메디치 공의 후원, 로마의 콜론나·오토보니·판필리 추기경의 살롱, 베네치아의 카니발 시즌이 이어지는 약 4년의 여정에서 헨델은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 코렐리,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같은 당대 거장들과 직접 교류했습니다.

      로마에서는 교황령이 오페라 공연을 금지했기에 라틴어 모테트와 이탈리아어 칸타타, 두 편의 오라토리오([부활], [시간과 깨달음의 승리])를 작곡하며 성악 어법을 다듬었습니다. 1707년 피렌체에서 초연된 [로드리고]의 성공에 이어, 1709년 12월 베네치아에서 초연된 [아그리피나]가 27회 연속 공연을 기록하며 폭발적 성공을 거두었고, 베네치아 청중이 “Viva il caro Sassone(독일 친구 만세)”라 외쳤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영국 정착: 우연이 운명이 되다

      1710년 헨델은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루트비히의 궁정악장에 임명됩니다. 그러나 곧 휴가를 얻어 런던을 방문했고, 1711년 2월 헤이마켓 퀸즈 극장에서 초연된 [리날도]가 런던을 휩쓸었습니다. 영국에서 작곡된 최초의 본격 이탈리아어 오페라였고, ‘Lascia ch’io pianga(나를 울게 하소서)’가 들어 있는 작품입니다.

    후기 바로크의 거장 헨델의 초상
    헨델의 초상

      1714년 앤 여왕이 사망하고 그의 옛 고용주 게오르크 루트비히가 영국 왕 조지 1세로 즉위합니다. 한국 자료에서 흔히 “하노버 궁정을 무단 이탈한 헨델이 조지 1세의 환심을 사려고 1717년 [수상음악]을 작곡해 강 위에서 연주했다”고 전해지지만, 이 화해 서사는 후대에 덧붙여진 윤색일 가능성이 큽니다. 동시대 영국 신문은 1717년 7월 17일 템스강 선상 음악회를 단순히 보도할 뿐 화해의 의도를 명시하지 않으며, 헨델과 조지 1세의 관계는 1714년 즉위 직후부터 이미 정상화되어 있었다는 것이 현대 헨델 연구자들의 정리입니다.

      1719년 영국 왕립음악원(Royal Academy of Music)이 설립되어 헨델은 음악감독으로 이탈리아어 오페라 시리즈를 이끕니다. [줄리어스 시저(Giulio Cesare)](1724)는 그의 오페라 가운데 후대 가장 많이 부활된 작품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1727년 정식으로 영국에 귀화한 헨델 앞에는 곧 시련이 닥칩니다. 1726/27 시즌 무대 위에서 소프라노 쿠초니보르도니 두 디바의 충돌과 후원 귀족들의 분파 다툼이 격해지며 왕립음악원이 1728년 해체되었고, 헨델은 두 차례나 새 오페라단을 직접 운영했지만 1733년 등장한 라이벌 ‘귀족 오페라단(Opera of the Nobility)’과의 경쟁 끝에 1737년 결국 파산 직전까지 몰립니다.

    만년: 뇌졸중, 시력 상실, 그리고 부활절

      1737년 4월 헨델은 중풍 또는 마비성 질환으로 해석되어 온 심각한 발작을 겪었습니다. 전통 전기에는 오른팔을 제대로 쓰지 못했고, 한동안 정신적 혼란도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다만 오늘날에는 이를 단순한 ‘뇌졸중’ 하나로 확정하기보다, 반복성 마비 증상과 당시 건강 상태를 함께 보려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는 독일 아헨의 온천에서 6주간 요양한 끝에 회복했고, 1738년 [세르세]의 ‘Ombra mai fù'(흔히 ‘헨델의 라르고’로 알려진 곡)를 비롯한 새 오페라를 작곡하며 무대로 복귀했습니다.

      그러나 런던의 이탈리아 오페라 시장은 이미 무너진 뒤였습니다. 헨델은 1741년을 끝으로 오페라 작곡을 사실상 중단하고 영어 오라토리오로 노선을 완전히 옮깁니다. [메시아](1741년 작곡, 1742년 초연), [삼손](1741년 작곡, 1743년 초연), [솔로몬](1748년 작곡, 1749년 초연), [예프타](1751년 작곡, 1752년 초연)가 이 시기에 이어졌습니다. 1750년 8월에는 네덜란드 헤이그 근처에서 영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차 전복 사고를 겪었고, 그 직후부터 시력이 빠르게 나빠져 1753년 무렵에는 거의 완전히 실명한 상태로 [예프타]를 마무리하고 옛 작품을 개정하며 마지막 시기를 보냈습니다.

      1759년 4월 14일 성토요일, 헨델은 런던 브룩 가의 자택에서 74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헨델의 친구 제임스 스미스(James Smyth)가 버나드 그렌빌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헨델은 부활의 날에 구원자를 만나기를 바라며 성금요일에 눈감기를 원했는데, 실제로는 하루 늦은 성토요일 아침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그를 안장한 영국은, 독일에서 태어나 영국 시민이 된 이 작곡가를 사실상 국민적 영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1762년 사원 본관에는 [메시아] ‘I know that my Redeemer liveth’의 악보를 손에 든 헨델 입상이 세워져 오늘날까지 남아 있습니다.

    2. 헨델 오페라의 음악사적 의의

      오늘날 한국 청중에게 헨델은 [메시아]의 작곡가로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그러나 헨델 자신이 평생 가장 많은 시간을 쏟은 장르는 이탈리아어 오페라 세리아(opera seria)였습니다. 1705년 [알미라]에서 1741년 [데이다미아]까지 약 36년간 그는 42편에 이르는 오페라를 작곡했고, 이 작품들은 18세기 전반 유럽 오페라의 한 정점을 이룹니다.

      헨델 오페라의 핵심은 다 카포 아리아(da capo aria)의 양식적 완성과 인물 심리의 음악적 묘사입니다. A-B-A 구조의 다 카포 아리아에서 가수는 처음 A를 그대로 부르지 않고 즉흥 장식음을 더해 다시 부르며 인물의 감정 변화를 표현했고, 헨델은 이 형식 안에서 분노·절망·사랑·복수·체념의 색채를 인물별로 정밀하게 분리해냈습니다. [줄리어스 시저]에서 포로가 된 클레오파트라가 절망 속에 내뱉는 아리아 ‘Piangerò la sorte mia(나는 내 운명을 슬퍼하리라)’, [리날도]의 ‘Lascia ch’io pianga(나를 울게 하소서)’, 그리고 나무 그늘에 감사하는 왕의 느릿하고 깊은 독백으로 흔히 ‘헨델의 라르고’라 불리는 [세르세]의 ‘Ombra mai fù‘가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헨델 사후 오페라 세리아 양식 자체가 빠르게 구식이 되면서 그의 오페라는 19세기 내내 거의 무대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헨델 오페라 부활은 1920년대 독일 괴팅엔의 오스카 한(Oskar Hagen)이 시작한 ‘헨델 르네상스’와, 20세기 후반 카운터테너의 부활로 카스트라토 역할이 다시 무대에서 가능해진 흐름이 만나면서 본격화되었습니다. 오늘날 [줄리어스 시저], [아리오단테], [알치나], [로델린다], [리날도], [세르세]는 세계 주요 오페라하우스의 정규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헨델 자신이 자신의 음악 자료를 자유롭게 재활용했다는 사실입니다. 한 오페라의 아리아를 다른 오페라로 옮기거나, 옛 칸타타의 선율을 오라토리오로 가져오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이는 도덕적 의미의 표절이라기보다 18세기 작곡가 일반의 직업적 관행이었으며, 헨델 작품을 추적하는 흥미로운 단서이기도 합니다.

    3. 오라토리오의 거장: 메시아와 그 너머

      헨델의 진정한 음악사적 업적은 영어 오라토리오라는 새로운 장르를 사실상 창조했다는 데 있습니다. 1730년대 후반 런던의 이탈리아 오페라 시장이 무너지자, 헨델은 무대 장치 없이 콘서트 형식으로 상연되는 영어 오라토리오로 노선을 옮겼습니다. 이 전환은 단순한 후퇴가 아니라, 그가 평생 쌓아온 음악적 자원이 영국이라는 시장과 만나면서 일어난 자연스러운 결과였습니다.

    왜 오라토리오였나

      외부 조건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영국 중산층이 이탈리아어 오페라보다 자기 언어로 부르는 작품을 원했습니다. 둘째, 무대 장치와 외국인 가수가 필요한 오페라보다 무대 없이 합창단과 솔리스트만으로 상연되는 오라토리오가 비용이 훨씬 적게 들었습니다. 셋째, 사순절 같이 무대 공연이 금지되는 시기에도 종교적 주제의 오라토리오는 상연이 가능했습니다.

      작품 내부 자원도 결정적이었습니다. 헨델은 함부르크 시기부터 독일 루터교 칸타타와 코랄 전통을, 이탈리아 시기에 라틴어 모테트와 합창 구성을, 영국 시기에 헨리 퍼셀의 영어 합창 전통과 영국 대관식 앤섬을 차례로 흡수해 두었습니다. 1727년 조지 2세 대관식을 위해 작곡한 [제사장 사독(Zadok the Priest)]은 이 모든 자원이 응축된 영어 합창의 시금석이었고, 이 한 곡 안에 이미 [메시아]의 합창 어법이 예고되어 있습니다. 이런 합창적 자원이 없었다면 다 카포 아리아 위주의 오페라 양식만 가지고는 영어 오라토리오로의 전환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메시아: 24일의 기적과 더블린 초연

      [메시아]의 작곡 기간은 1741년 8월 22일부터 9월 14일까지 정확히 24일입니다. 자필 악보에 헨델 본인이 적어 둔 작곡 시작일과 종료일이 그대로 남아 있어, 이 24일이라는 기간은 후대의 과장이 아니라 헨델 자신의 손이 증명한 사실입니다. 24일 만의 작곡은 동시대 다른 작곡가에게도 드물지 않은 속도였지만, [메시아]의 음악적 완성도와 결합되면서 후대에 ‘신성한 영감’의 일화로 각색되었습니다. “헨델이 작곡 중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자신을 보았다’고 말했다”는 일화는 헨델 사망 직후 출간된 첫 전기에는 등장하지 않고 100년 가까이 흐른 19세기 자료에서야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후대에 덧붙여진 신화로 보는 편이 안전합니다.

      대본은 영국의 부유한 지주이자 아마추어 음악가 찰스 제넨스(Charles Jennens)가 흠정역(KJV) 성서와 공동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의 시편에서 직접 발췌·편집해 헨델에게 전달했습니다. 일반 오라토리오와 달리 [메시아]에는 등장인물도, 줄거리 전개도 없습니다. 제1부는 그리스도 탄생의 예언과 강림, 제2부는 수난과 속죄와 부활, 제3부는 영원한 생명과 최후의 승리를 다루지만, 인물의 대사 형식이 아니라 성경 본문을 합창과 독창이 명상하듯 펼치는 구조입니다.

      초연은 1742년 4월 13일 더블린의 피셤블 거리 음악당에서 자선 공연으로 이루어졌고, 600명 남짓 들어가는 공간에 700명이 넘는 관객이 몰려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메시아]가 처음부터 교회를 위한 음악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더블린과 1743년 런던 공연 모두 콘서트홀에서 자선 모금을 위해 상연되었으며, 이 점에서 [메시아]는 세속 콘서트홀용 오라토리오의 전형이라 부를 만합니다.

    할렐루야 기립 전통의 진실

      한국과 일본 자료에서는 흔히 “1743년 런던 코벤트 가든 초연 때 조지 2세가 할렐루야 합창 첫 마디에서 자리에서 일어났고 청중도 따라 일어선 이래 오늘까지 그 전통이 이어진다”고 표현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동시대 영국 신문이나 일기·서한 어디에도 이 기립 사건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이 일화는 19세기 중반 자료에서야 회고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도널드 버로우즈(Donald Burrows)를 비롯한 현대 헨델 연구자들은 이를 후대에 만들어진 일화로 보거나 신중하게 의심하는 입장을 취합니다. 다만 할렐루야 기립이라는 공연 관습 자체는 19세기 영어권에서 정착해 오늘까지 이어지는 살아 있는 전통이며, 그 기원이 1743년 조지 2세에게 있다는 서사가 후대의 신화화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 지금 학계의 중심 견해입니다.

    “For unto us a Child is born”, “Hallelujah”, “I know that my Redeemer liveth”, “Worthy is the Lamb that was slain”… [메시아]의 합창과 독창들은 음악사상 가장 보편적으로 사랑받는 영어 성악곡들로 자리 잡았습니다.

    메시아 너머의 오라토리오: 솔로몬·예프타·삼손

      [메시아]는 헨델 오라토리오 중 가장 유명하지만, 음악적으로 더 야심찬 작품들이 그 옆에 있습니다. [삼손](1741)은 밀턴의 「Samson Agonistes」를 바탕으로 한 극적 오라토리오로 [메시아]보다 무대적 성격이 강하고, [솔로몬](1748)의 3막 도입 합창 ‘Arrival of the Queen of Sheba(시바 여왕의 도착)’는 오늘날에도 자주 단독으로 연주됩니다. 헨델 자신이 마지막으로 완성한 오라토리오 [예프타](1751)는 작곡 도중 시력을 잃기 시작한 작품으로, 자필 악보 한 페이지에 헨델이 직접 “여기까지 작곡한 1751년 2월 13일 수요일, 왼쪽 눈의 시력이 약해져 더 나아갈 수 없었다”고 적어 둔 메모가 남아 있어, 그가 시력을 잃어가던 정확한 순간을 후대에 알려줍니다.

    4. 헨델 vs 바흐: 후기 바로크의 두 봉우리

      같은 1685년에 태어나, 같은 1750년대에 시력을 잃고 세상을 떠난 두 거장, 헨델과 바흐의 동시대성은 자주 강조되지만, 두 사람의 동시대 평가는 결코 대등하지 않았습니다. 헨델은 살아생전 유럽적 명성을 누리고 영국에서 국민적 영웅이 된 반면, 바흐는 죽은 뒤 거의 잊혔다가 1829년 멘델스존의 [마태 수난곡] 부활 연주를 계기로 19세기에 재발견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만난 적은 없습니다. 바흐가 두 차례 헨델을 직접 찾아가려 시도했으나, 헨델이 마침 영국에 머물거나 다른 도시로 이동한 뒤여서 어긋났다는 일화가 양측 자료에 함께 전해집니다. 두 거장은 한 번도 같은 방에 앉아본 적이 없는 채, 한 사람은 라이프치히 토마스교회의 칸토르 자리에서 평생 독일 교회를 위한 음악을 쓰고, 다른 한 사람은 런던 무대를 위한 이탈리아어 오페라와 영어 오라토리오를 쏟아냈습니다.

    항목 헨델 바흐
    출생·사망 1685 할레 ~ 1759 런던 1685 아이제나흐 ~ 1750 라이프치히
    활동지 독일·이탈리아·영국 (코스모폴리탄) 중부 독일 한정 (튀링엔·작센)
    음악 무대 극장·콘서트홀 교회·궁정
    주요 장르 오페라(42편)·오라토리오·관현악 칸타타·수난곡·건반·기악곡 (오페라 없음)
    작품 수 HWV 약 612곡 BWV 약 1,128곡
    대표작 [메시아], [수상음악], [리날도] [마태 수난곡], [평균율], [b단조 미사]
    동시대 명성 유럽적 명성, 영국 국민 영웅 독일 지역 한정, 사후 거의 잊힘
    후대 부활 [메시아] 중심, 1920년대 오페라 르네상스 1829년 [마태] 연주 이후 재발견

      한국에서 헨델은 바흐의 ‘음악의 아버지’라는 별칭과 짝을 이루어 ‘음악의 어머니’로 불려 왔습니다. 다만 이 표현은 영미·독일어권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별칭은 아니며, 한국과 일본식 음악 교육 문화 안에서 정착한 표현으로 보는 편이 안전합니다. 베토벤은 만년에 “헨델은 우리 모두 가운데 가장 위대했다(Handel was the greatest of us all)”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동시대성과 후대 평가의 비대칭이 빚어낸 한 단면입니다.

    5. 기악곡: 수상음악과 왕궁의 불꽃놀이

      헨델은 성악곡 위주의 작곡가였지만, 그가 남긴 기악곡은 후기 바로크 관현악의 정점에 자리합니다. 가장 유명한 두 곡, [수상음악]과 [왕궁의 불꽃놀이]는 모두 영국 왕실의 야외 의식을 위해 작곡된 모음곡으로, 32년의 시간차를 두고 헨델 영국 시기의 시작과 끝을 상징합니다.

      [수상음악(Water Music)]은 1717년 7월 17일 조지 1세가 템스강 선상 음악회를 즐기기 위해 위촉한 곡으로, 동시대 영국 신문이 선상 50명의 음악가가 헨델의 새 음악을 세 차례 반복 연주했다고 보도했습니다. F장조·D장조·G장조 세 모음곡 약 22개 악장으로 구성되며, 호른·트럼펫·오보에·바순·현악이 어우러지는 야외 음악 특유의 밝고 의식적인 분위기가 특징입니다.

      [왕궁의 불꽃놀이(Music for the Royal Fireworks)]는 1749년 4월 27일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을 마무리한 엑스라샤펠 조약을 기념해 런던 그린파크에서 열린 대규모 불꽃놀이를 위해 작곡되었습니다. 조지 2세는 군악적 효과를 위해 현악을 빼고 관악·타악만으로 작곡할 것을 요구했고, 헨델은 24개의 오보에·12개의 바순·9개의 호른·9개의 트럼펫·팀파니 3쌍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관악·타악 편성을 마련했습니다. 4월 21일 복스홀에서 열린 공개 리허설에 1만 2천 명이 몰려 런던 다리가 막혔다는 동시대 신문 기록이 남아 있어, 18세기 야외 음악의 흥행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두 모음곡 외에도 헨델 기악곡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합주 협주곡 Op.6 12곡(1739)입니다. 코렐리의 합주 협주곡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더 풍부한 화성과 다양한 악장 구조를 도입한 이 12곡은, 합주 협주곡 장르의 마지막 정점으로 자주 꼽힙니다. 그밖에 오르간 협주곡 Op.4·Op.7(헨델 자신이 오라토리오 막간에 직접 연주한 작품), 하프시코드 모음곡 8곡(1720), 합주 협주곡 Op.3 등이 그의 기악곡 핵심 목록을 이룹니다.

    [메시아] 완전 해설 · [수상음악]: 정치적 화해를 담은 여름날의 선율 · [왕궁의 불꽃놀이] 자세히 보기

    6. 헨델 주요 작품 목록

      HWV(Händel-Werke-Verzeichnis) 카탈로그를 기준으로 헨델은 약 612곡을 남겼습니다. 아래는 입문 또는 감상 우선순위가 높은 장르별 대표곡 정리입니다.

    오페라 (42편 중 대표 8편)

    작품 초연 특징
    [알미라] 1705 함부르크 현존하는 첫 오페라
    [아그리피나] 1709 베네치아 이탈리아 시기 정점, 27회 연속 공연
    [리날도] 1711 런던 ‘Lascia ch’io pianga’, 영국 진출의 대성공
    [줄리어스 시저] 1724 런던 왕립음악원 시기 대표작
    [로델린다] 1725 런던 서정적 정점, ‘Dove sei’
    [아리오단테] 1735 런던 코벤트가든 첫 시즌
    [알치나] 1735 런던 마법 오페라의 걸작
    [세르세] 1738 런던 ‘Ombra mai fù'(헨델의 라르고)

    오라토리오 (약 25편 중 대표 8편)

    작품 초연 특징
    [부활] 1708 로마 이탈리아 시기 이탈리아어 오라토리오
    [에스더] 1732 런던 최초의 영어 오라토리오
    [이집트의 이스라엘인] 1739 런던 합창 비중이 압도적인 작품
    [메시아] 1742 더블린 24일 만에 작곡, ‘Hallelujah’
    [삼손] 1743 런던 밀턴 원작, 극적 오라토리오
    [유다 마카베우스] 1747 런던 ‘See the conqu’ring hero comes’
    [솔로몬] 1749 런던 ‘시바 여왕의 도착’
    [예프타] 1752 런던 마지막 오라토리오, 시력 상실 자필 메모

    관현악·협주곡

    장르 대표곡
    관현악 모음곡 [수상음악](1717) · [왕궁의 불꽃놀이](1749)
    합주 협주곡 Op.3 (6곡, 1734) · Op.6 (12곡, 1739)
    독주 협주곡 오르간 협주곡 Op.4(6곡, 1738) · Op.7(6곡, 1761 출판) · 하프 협주곡
    건반악곡 하프시코드 모음곡 제1집(8곡, 1720): ‘쾌활한 대장장이’ 변주곡 포함

    합창·앤섬

    장르 대표곡
    대관식 앤섬 [제사장 사독(Zadok the Priest)](1727): 1727년 이래 모든 영국 군주 대관식에서 연주
    송가 [디틴겐 테 데움](1743) · [성 세실리아 송가](1739)
    기타 합창 [알렉산더의 향연](1736, 드라이든 시 기반)

    자주 묻는 질문

    Q. 헨델은 왜 ‘음악의 어머니’로 불리는가?

    한국에서 헨델은 바흐의 ‘음악의 아버지’라는 별칭과 짝을 이루어 ‘음악의 어머니’로 불려 왔습니다. 다만 이 표현은 영미·독일어권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별칭은 아니며, 한국과 일본식 음악 교육 문화 안에서 정착한 표현으로 보는 편이 안전합니다.

    Q. 헨델과 바흐는 만난 적 있는가?

    같은 해(1685년) 같은 중부 독일 지역에서 태어났지만, 두 사람이 직접 만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바흐가 두 차례 헨델을 찾아가려 했으나 헨델이 마침 영국에 있거나 다른 도시로 떠난 뒤여서 어긋났다는 일화가 양측 자료에 함께 전해집니다.

    Q. 헨델은 왜 영국에 정착했나?

    1710년 하노버 궁정악장에 임명되었으나 곧 휴가를 얻어 런던으로 향한 헨델은 1711년 [리날도]의 대성공으로 런던 무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후 앤 여왕의 연금과 귀족 후원이 그를 영국에 묶어두었고, 1714년 그의 옛 고용주 게오르크 루트비히가 조지 1세로 영국 왕위에 오르면서 정치적으로도 자연스러워졌습니다. 1727년에는 의회법으로 정식 영국 시민이 됩니다.

    Q. 메시아 할렐루야 합창 기립 전통은 사실인가?

    1743년 런던 초연 때 조지 2세가 할렐루야 합창에서 기립했고 그 이래 청중도 따라 일어나게 되었다는 일화가 통설처럼 전해지지만, 동시대 신문 기사나 일기에는 이 사건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며 100년쯤 뒤인 19세기 자료에서야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후대에 만들어진 일화로 의심하는 견해가 우세합니다. 다만 할렐루야 기립 관습 자체는 19세기 이래 영어권 공연 전통으로 오늘까지 이어집니다.

    Q. 수상음악과 왕궁의 불꽃놀이는 어떻게 다른가?

    두 곡 모두 헨델의 대표 관현악 모음곡이지만 시기와 목적이 다릅니다. [수상음악](1717)은 조지 1세를 위해 템스강 선상에서 연주된 야외 음악이며, [왕궁의 불꽃놀이](1749)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종전을 기념한 그린파크 불꽃놀이를 위한 음악입니다. 후자는 왕이 현악 없이 군악 편성으로 작곡할 것을 요구해 거대한 관악·타악 편성으로 초연되었고, 헨델은 후일 현악을 보강한 콘서트홀 버전을 따로 마련했습니다.

    Q. 헨델 입문에 추천하는 작품은?

    오라토리오 [메시아](특히 ‘Hallelujah’ 합창과 ‘I know that my Redeemer liveth’), 관현악 [수상음악]과 [왕궁의 불꽃놀이], 오페라 [리날도]의 ‘Lascia ch’io pianga’, [세르세]의 ‘Ombra mai fù'(헨델의 라르고)가 입문에 적합합니다. 깊이 들어가려면 오라토리오 [솔로몬]·[예프타], 오페라 [줄리어스 시저], 합주 협주곡 Op.6를 권합니다.

      헨델은 한 도시에 머물지 않고 한 장르에 갇히지도 않은 작곡가입니다. 할레의 어린 오르가니스트에서 함부르크의 신예 오페라 작곡가로, 이탈리아 살롱의 사랑받는 외국인에서 영국 왕실의 국민 작곡가로, 그는 18세기 유럽의 주요 음악 문화를 자신의 양식 안에 차례로 끌어안았습니다. 동시대 청중이 사랑한 이탈리아어 오페라 작곡가 헨델과, 후대가 기억하는 영어 오라토리오의 거장 헨델 사이에는 분명한 거리가 있고, 그 거리를 메우는 작업이 20세기 이래 헨델 르네상스의 핵심이었습니다. 오늘 처음 헨델을 만나신다면 [메시아]의 ‘Hallelujah’ 합창과 [수상음악]으로 시작해 보시고, 이미 그의 음악과 친숙하시다면 오페라 [줄리어스 시저]나 합주 협주곡 Op.6의 문을 두드려 보시기를 권합니다. 

📌 문의 및 쪽지함
반갑습니다!
문의사항은 이 쪽지함으로 남겨주세요!
🔒 관리자에게만 안전하게 전송됩니다.
⏰ 현재:
🚀 최초:
🕐 방금 접속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