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쉼이 필요할 때 자주 듣는 음악 중 하나를 소개합니다. 헨델의 오페라 세르세 중에서 아름다운 아리아인 ‘Ombra mai fu’ 입니다. 쉼이 필요한 페르시아 대왕 세르세가 나무 아래서 부르는 아리아인데, 너무 아름다워 악기로 연주되기도 합니다.
헨델의 세르세(HWV 40): 실패에서 걸작으로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 1685~1759)의 오페라 세르세(영문명 Xerxes)는 오늘날 그의 가장 독창적이고 사랑받는 작품 중 하나로 꼽힙니다.
이 오페라의 심장이자 상징인 불멸의 아리아 "Ombra mai fu"는 대중적으로 ‘헨델의 라르고(Handel’s Largo)’라 불리지만, 원전 악보의 표기는 Larghetto입니다. 이는 단지 템포의 차이를 넘어, 장중하게 ‘늘이는’ 곡이 아니라, 부드럽고 고요한 호흡으로 기도를 빚어내는 음악이라는 본질을 알려줍니다. 지치고 쉼이 필요한 페르시아 대왕 세르세가 나무 아래서 부르는 이 아리아는 너무나 아름다워, 성악곡뿐만 아니라 다양한 악기로도 편곡되어 연주되고 있습니다.
시대적 배경 : 바로크 오페라와 카스트라토
헨델이 활동하던 바로크 시대 오페라는 몇 가지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 다 카포 아리아 (Da Capo Aria) : 오페라는 수많은 아리아로 구성되었는데, 특히 '다 카포 아리아' 형식이 주를 이뤘습니다. 이는 A-B-A' 구조로, 노래의 첫 부분(A)으로 다시 돌아와 성악가가 화려한 기교를 뽐내며 마무리하는 형식입니다.
- 카스트라토 (Castrato) : 바로크 오페라의 가장 큰 특징은 카스트라토의 존재입니다. 거세를 통해 소년 시절의 높은 목소리를 유지한 남자 가수로, 당시 카스트라토는 엄청난 부와 명예를 누렸던 음악 역사상 최초의 슈퍼스타였습니다. 이들의 인기가 높아지자 너도나도 거세를 하려는 유행이 번졌고, 결국 교황청에서 이를 금지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오늘날 카스트라토의 역할은 주로 여성 메조소프라노나 남성 고음역 성악가인 카운터테너(countertenor)가 대신합니다.
오페라 세르세(Xerxes)의 징과 줄거리
헨델이 작곡한 40편에 가까운 오페라 중 37번째 작품인 세르세는 그의 가장 유명한 오페라 중 하나입니다. 총 3막, 50여 개의 아리아로 구성되어 있으며, 내용은 페르시아의 왕 세르세가 자신의 동생이 사랑하는 여인을 탐내면서 벌어지는 혼란과 질투, 복수를 다루다 마지막에는 용서와 화해로 마무리됩니다.
장르의 융합: 엄숙함과 희극성의 조화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장엄한 비극(seria)과 익살스러운 희극(buffa)의 결합입니다. 진지한 사랑의 고뇌와 우스꽝스러운 질투가 한 무대에서 펼쳐지는 것은 삶의 부조리함을 묘사하는 현대적인 기법입니다.
혁명적 캐릭터 분석
저명한 음악학자 윈턴 딘(Winton Dean, 1916~2013)은 주인공 세르세를 전통적인 오페라 영웅이 아닌, "왕족 바보(a royal ass)" 혹은 "희극적인 폭군(a comic tyrant)"이라고 과감하게 정의했습니다. 이는 세르세가 절대 권력을 가졌음에도 자신의 변덕스러운 감정(나무에 대한 집착, 즉흥적인 사랑)을 통제하지 못하는 미성숙하고 허영심 많은 인물이라는 분석입니다. 이렇게 결점 많고 인간적인 주인공은 당시 관객에게는 매우 낯설었지만, 현대 관객에게는 깊은 공감을 주는 핵심적인 매력 포인트가 됩니다.
"Ombra mai fu": 작은 텍스트, 거대한 위로
"Ombra mai fu"는 이탈리아어로 "이토록 소중한 그늘은 없었네 (Never was a shade so dear)"라는 뜻입니다. 오페라의 문을 여는 이 아리아는, 이처럼 왕이 버즘나무 그늘의 안온함을 찬미하는 소박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헨델은 이 미미한 텍스트를 인간 보편의 평화와 위로의 차원으로 확장합니다. 왕의 감상적 성정이 드러나는 이 아리아는 역설적으로 작품 전체의 가벼운 풍자를 예고하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작품의 첫인상은 ‘정지’에 가깝습니다. 현악기들이 만드는 얇은 장막 위로 매끈한 성악부가 떠오르고, 긴 호흡으로 이어지는 선율은 "ombra(그늘)"라는 단어의 길이를 따라 고요히 늘어납니다. 과장되지 않은 장식, 간헐적인 서스펜션(지연음)과 그 해소가 일으키는 미세한 파동 덕분에 음악은 굳이 느리게 연주하지 않아도 깊은 공간감을 자아냅니다.
이 아리아의 멜로디는 헨델의 경쟁자였던 조반니 보논치니(Giovanni Bononcini, 1670~1747)에게서 차용한 것이지만, 헨델의 천재적인 편곡과 화성 처리를 통해 불멸의 명곡으로 승화되었습니다.
음악은 이러한 장치들을 통해 폭군 세르세를 덕망 있는 인물로 재창조했습니다.
- 악기 편성 (Instrumentation) : 아리아는 오직 현악기만으로 연주됩니다. 권력이나 전쟁을 상징하는 금관악기나 타악기를 완전히 배제함으로써, 헨델은 세르세의 권위적인 면모를 지우고 그의 따뜻하고 온화한 성격을 음악적으로 표현했습니다.
- 성악 배역 (Vocal Casting) : 이 곡은 남성 소프라노인 카스트라토를 위해 작곡되었습니다. 당시 영웅의 목소리로 여겨졌던 카스트라토가 힘을 과시하는 대신 지극히 서정적이고 부드러운 노래를 부르게 함으로써, 헨델은 왕의 권력 이면에 숨겨진 섬세한 감성을 극적으로 드러냈습니다.
- 단순하고 우아한 멜로디 (Simple and Elegant Melody) : 복잡한 기교나 화려한 장식음 없이, 단순하고 아름다운 선율이 흐릅니다. 이는 세르세가 느끼는 순수한 기쁨과 평온함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며, 관객이 그를 순수한 마음을 지닌 인물로 받아들이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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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스며드는 나무 그늘 (출처 : vecteezy.com) |
초연과 잊힘 : 런던에서의 실패
- 날짜와 장소 : 1738년 4월 15일, 런던 킹스 시어터(King's Theatre).
- 관객의 반응 :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습니다. 최고의 카스트라토 가수였던 카파렐리가 주역을 맡았음에도, 단 5회 공연을 끝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 실패의 원인 : 런던 관객들은 오페라에서 기대하던 영웅 서사와 비극적 장엄함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위에서 윈턴 딘이 분석했듯, 비극과 희극의 혼합, 그리고 '왕족 바보' 같은 비영웅적인 주인공은 당시 관객에게 혼란스럽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이 실패로 세르세는 거의 200년 동안 무대에서 잊혔습니다.
음악사적 의미 : 재발견과 부활
흥미롭게도 세르세의 부활은 독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924년 괴팅겐 국제 헨델 페스티벌에서 작품을 현대적으로 부활시키며, 과거의 단점을 시대를 앞서간 '심리적 리얼리즘'으로 재평가했습니다. 이후 윈턴 딘과 같은 저명한 음악학자들이 세르세의 혁신적인 캐릭터 묘사와 극적 구조를 학문적으로 뒷받침하며 작품의 가치를 재정립했습니다.
오페라 세르세 자체는 초연에 실패했지만, 아리아 "Ombra mai fu"는 19세기 이후 독립적으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살롱 음악회, 교회 예식, 심지어 장례식장을 위한 다양한 편곡으로 재탄생하며 대중적인 히트 레퍼토리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통용되는 별명 ‘헨델의 라르고’도 바로 이 과정에서 굳어졌습니다.
흥미로운 에피소드
- "헨델의 라르고"라는 오해 : 헨델이 악보에 표기한 템포는 'Larghetto(조금 느리게)'였지만, 19세기 편곡 과정에서 장엄하고 매우 느린 'Largo'로 연주되는 관습이 굳어졌습니다.
- 왕과 나무 (헤로도토스의 기록) : 오페라의 설정은 고대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그의 저서 역사에서,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가 원정길에 한 버즘나무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나무를 황금으로 장식하고 특별히 수호인을 붙여 지키게 했다고 기록했습니다. ‘나무에 매혹된 왕’이라는 이 일화는 후대에 여러 방식으로 변주되었고, 1738년 인쇄된 오페라 대본 역시 왕의 이러한 기벽(奇癖)을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헨델은 이 과장된 설정을 ‘정원의 한순간’으로 재배치하여 풍자와 진정성 사이의 미묘한 균형을 창조했습니다.
- 슈퍼스타 카스트라토 : 세르세 역은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카스트라토 카파렐리를 위해 작곡되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실력만큼이나 괴팍한 성격으로 헨델과 잦은 갈등을 빚었다고 전해집니다.
감상하기
"Ombra mai fu"를 더 깊이 있게 감상하고 싶다면, 몇 가지 포인트를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좋은 해석은 속도를 더 끌어내리기보다 소리의 입자와 활의 압력, 즉 ‘어떻게’ 울리느냐에 집중합니다.
레치타티보와 함께 듣기
이 아리아는 앞선 레치타티보 "Frondi tenere e belle(부드럽고 아름다운 잎사귀여...)"가 끝난 후, 숨을 멈추듯 곧바로 붙어서(아타카, attacca) 시작됩니다. 반드시 이 레치타티보와 함께 감상하기를 권합니다. 구체적인 텍스트가 음악의 추상성에 온기를 부여하며, 나무 그늘의 ‘촉감’이 단숨에 설득력을 얻습니다.
최상의 연주를 구별하는 법
- 호흡의 문장 : 문장 끝에서 과장된 비브라토를 걷어내고 긴 호흡을 하나의 덩어리로 유지하는 연주가 가사의 평온함을 살립니다.
- 섬세한 가사 표현 : "mai(결코)"에서의 미묘한 강조, "caro(사랑스러운)"의 어미를 애무하듯 부드럽게 처리하는 것은 과장이 아닌 미세한 색조 변화만으로 충분합니다.
- 다 카포(Da Capo)의 품격 : 아리아의 첫 부분으로 돌아와 반복할 때는 짧은 전타음이나 종지 직전의 우아한 턴(turn) 한두 번이면 족합니다. 과도한 콜로라투라 기교는 이 곡의 미덕과 거리가 멉니다.
반주의 역할 : 그늘의 온도를 만드는 소리
반주는 통주저음과 현악기가 만드는 얕은 파문 위에 성악부가 ‘메사 디 보체(messa di voce, 한 음을 미세하게 부풀렸다가 다시 가라앉히는 호흡 기법)’를 얹을 때, 시간은 느리게 확장됩니다. 바로크 악기는 가벼운 어택으로 투명함을, 현대 악기는 음량을 줄이고 활의 압력을 낮춰 유사한 공기를 만듭니다. 어느 쪽이든 목표는 동일합니다—그늘의 온도와 공기 밀도를 소리로 재현하는 것입니다.
가수의 음색
성악가가 카운터테너든 메조소프라노든,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음색의 고요한 중심입니다. 소리가 크지 않아도 음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 가수의 노래를 들을 때, 청자는 자연스럽게 그 평화로운 그늘 아래로 들어가게 됩니다.
포르타멘토와 시대적 해석
20세기 초의 녹음(예: 엔리코 카루소)을 들어보면, 음과 음 사이를 미끄러지듯 연결하는 포르타멘토(Portamento)기법을 풍부하게 사용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현대의 깔끔한 원전 연주와는 전혀 다른 감성적 접근으로, 시대에 따라 아름다움의 기준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비교하며 듣는 것도 흥미로운 감상법입니다.
마무리하며
「Ombra mai fu」는 잠깐의 그늘, 한 줄의 선율이 인간의 피로를 따뜻하게 품어 안습니다. 혹시 당신의 몸과 마음도 쉴 곳이 필요하다면, 이 노래를 통해 잠시나마 쉼과 평안을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요란할수록, 조용한 그늘이 더 절실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