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해, 같은 중부 독일 땅에서 태어난 두 작곡가가 있습니다. 한 사람은 평생 독일어권을 중심으로 일하며 교회 음악의 한 봉우리를 세웠고, 다른 한 사람은 독일을 떠나 이탈리아에서 단련을 거치고 영국에서 꽃을 피웠습니다. 한국에서 흔히 「음악의 아버지」 바흐와 짝을 이루어 「음악의 어머니」라 불리는 헨델, 그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깊이 들여다봅니다.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 1685~1759)은 1685년 할레에서 이발사 겸 외과의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할레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다스리던 마그데부르크 공국의 도시였습니다. 같은 해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난 바흐와 더불어 후기 바로크의 두 봉우리로 꼽히지만, 주로 독일어권에서 활동한 바흐와 달리 헨델은 독일·이탈리아·영국 세 음악 문화를 직접 흡수한 코스모폴리탄 작곡가였습니다. 젊은 시절 교회 오르가니스트와 하노버 궁정악장을 지냈지만, 런던 정착 뒤에는 극장과 공개 공연을 주된 무대로 살았습니다. 교회 음악가로 살지 않은 사람이 해마다 연말이면 세계 곳곳에서 불리는 종교 음악 〈메시아〉를 남겼다는 것, 이 글은 그 역설을 따라갑니다.
| 본명 | Georg Friedrich Händel (영국 귀화 후 George Frideric Handel) |
| 생몰 | 1685년 2월 23일 할레 ~ 1759년 4월 14일 런던 (향년 74세) |
| 활동지 | 할레 · 함부르크 · 이탈리아(피렌체·로마·베네치아) · 하노버 · 런던 |
| 시대 | 후기 바로크 |
| 주요 장르 | 이탈리아어 오페라 · 영어 오라토리오 · 협주곡 · 관현악 모음곡 · 건반악곡 |
| 작품 수 | HWV 번호 1~612 (오페라 42편, 오라토리오 약 25편 포함) (※ 카탈로그 기준에 따라 작품 수에 차이) |
| 대표작 | 〈메시아〉 · 〈수상음악〉 · 〈왕궁의 불꽃놀이〉 · 〈리날도〉 · 〈세르세〉 |
헨델의 생애
헨델의 인생은 크게 네 시기로 나뉩니다. 음악적 재능을 발견한 할레 시기(1685~1703), 직업 음악가로 첫걸음을 뗀 함부르크 시기(1703~1706), 이탈리아 오페라 양식을 흡수한 이탈리아 시기(1706~1710), 그리고 평생의 무대가 된 영국 시기(1710~1759)입니다. 헨델은 이 네 무대 사이를 단순히 이동한 것이 아니라, 각 음악 문화를 자신의 양식 안에 차례로 녹여 들였습니다.
할레 시기: 다락방의 건반과 차하우의 가르침
아버지 게오르크 헨델은 작센-바이센펠스 공작의 시의 겸 시종을 지낸 외과의였고, 헨델이 태어날 때 이미 만 예순둘이었습니다. 헨델은 아버지의 두 번째 결혼에서 얻은 아들이었고, 아래로 1687년과 1690년에 태어난 두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법률가로 키우려 했고 음악가가 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어린 헨델이 다락방에 작은 건반 악기를 숨겨 두고 몰래 연습했다는 일화는 헨델이 죽은 이듬해인 1760년 런던에서 나온 첫 전기(존 메인웨링 저)에 실린 것입니다. 어린 시절을 전하는 거의 유일한 기록이지만, 헨델 사후 주변 사람들의 회고를 바탕으로 쓴 책이라 세부까지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작센-바이센펠스의 요한 아돌프 1세 공작이 어린 헨델의 오르간 연주를 듣고 아버지를 설득한 뒤, 헨델은 할레 성모 교회의 오르가니스트 차하우(Friedrich Wilhelm Zachow, 1663~1712)에게 배웁니다. 차하우는 대위법과 여러 나라 작곡가의 양식을 두루 가르쳤습니다. 아버지는 1697년 2월 세상을 떠났고, 헨델은 아버지의 뜻대로 1702년 2월 할레 대학에 법학생으로 등록합니다. 같은 해 3월에는 할레 대성당의 오르가니스트 자리를 1년 수습으로 맡았습니다. 루터교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열일곱 살 청년이 칼뱅파(개혁교회) 대성당의 오르간을 친 것입니다. 수습 기간이 끝나자 헨델은 계약을 잇지 않고 1703년 할레를 떠났습니다.
함부르크 시기: 마테존과의 결투, 그리고 첫 오페라
1703년 여름 헨델은 함부르크의 겐제마르크트 오페라 극장에 합류합니다. 1678년 문을 연 이 극장은 독일 최초의 공공 오페라 극장이었고, 당시 독일의 대표적인 비궁정 오페라 중심지였습니다. 처음에는 제2 바이올린을 맡았고, 하프시코드 주자가 빠진 날 그 자리를 대신하며 실력을 드러냈다고 동료 작곡가 마테존(Johann Mattheson, 1681~1764)은 적었습니다. 같은 해 두 사람은 함께 뤼베크로 가서 노년의 오르가니스트 북스테후데를 찾아갔습니다. 북스테후데의 자리를 이으려면 그의 딸과 결혼해야 했는데, 두 사람 모두 그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1704년 12월 5일, 마테존이 자작 오페라 〈클레오파트라〉에서 안토니우스 역을 맡아 무대에서 노래를 마치고 하프시코드 자리로 돌아왔는데, 그 자리에는 이미 헨델이 앉아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격렬히 다투었고, 결국 극장 앞 광장에서 검을 빼들었습니다. 마테존이 찌른 검이 헨델의 외투에 달린 넓은 금속 단추에 부딪혀 부러진 덕분에 헨델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이 일화는 흥미 위주의 야사가 아니라 당사자인 마테존이 36년 뒤인 1740년 펴낸 음악가 인명록 『명예의 문』에 직접 적어 남긴 기록입니다. 출처는 분명하지만, 다툼의 한쪽 당사자가 오래 뒤에 쓴 회고라는 점은 감안해야 합니다. 마테존은 두 사람이 곧 화해했다고 적었고, 그가 남긴 헨델 관련 기록은 함부르크 시기를 재구성하는 핵심 자료가 됩니다. 1705년 1월 8일 헨델의 첫 오페라 〈알미라〉가 겐제마르크트 극장에서 초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고, 몇 주 뒤 〈네로〉가 뒤따랐습니다(악보 소실).
이탈리아 시기: 로마와 베네치아의 단련
1706년 헨델은 이탈리아 오페라의 본고장에서 직접 단련받기 위해 자기 돈으로 알프스를 넘습니다. 피렌체의 페르디난도 데 메디치 공의 후원, 로마의 콜론나·오토보니·판필리 추기경의 살롱, 베네치아의 카니발 시즌이 이어지는 약 4년의 여정에서 헨델은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 코렐리,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같은 당대 거장들과 직접 교류했습니다.
로마에서는 교황령이 오페라 공연을 금지했기에 라틴어 모테트와 이탈리아어 칸타타, 두 편의 오라토리오(〈부활〉, 〈시간과 깨달음의 승리〉)를 작곡하며 성악 어법을 다듬었습니다. 1707년 피렌체에서 초연된 〈로드리고〉에 이어, 1709년 12월 베네치아에서 초연된 〈아그리피나〉가 27회 공연을 이어 가며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베네치아 청중이 「Viva il caro Sassone(사랑하는 작센 사람 만세)」라 외쳤다는 일화가 첫 전기에 전해집니다. 브란덴부르크의 신민으로 태어났지만, 헨델은 평생 「작센 사람」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영국 정착: 우연이 운명이 되다
1710년 헨델은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루트비히의 궁정악장에 임명됩니다. 그러나 곧 휴가를 얻어 런던을 방문했고, 1711년 2월 24일 헤이마켓 퀸즈 극장에서 초연된 〈리날도〉가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런던 무대를 위해 처음부터 작곡된 첫 이탈리아어 오페라였고, 「Lascia ch’io pianga(나를 울게 하소서)」가 들어 있는 작품입니다. 1712년 다시 런던으로 건너간 헨델은 이후 런던을 주된 근거지로 삼았지만, 1716~1717년 무렵에는 다시 하노버에 머문 기록이 있습니다.
| 가발을 쓴 헨델의 초상 옆에 영문 이름과 생몰 연도(1685~1759)를 넣은 이미지다. |
1714년 앤 여왕이 사망하고 그의 옛 고용주 게오르크 루트비히가 영국 왕 조지 1세로 즉위합니다. 한국 자료에서 흔히 「하노버 궁정을 무단 이탈한 헨델이 조지 1세의 환심을 사려고 1717년 〈수상음악〉을 작곡해 강 위에서 연주했다」고 전해지지만, 이 화해 서사는 후대에 덧붙여진 윤색일 가능성이 큽니다. 동시대 영국 신문은 1717년 7월 17일 템스강 선상 음악회를 단순히 보도할 뿐 화해의 의도를 명시하지 않으며, 헨델과 조지 1세의 관계는 1714년 즉위 직후부터 이미 정상화되어 있었다는 것이 현대 헨델 연구자들의 정리입니다.
오페라 회사의 음악감독에서 흥행주로
1719년 결성된 왕립 음악 아카데미(Royal Academy of Music)는 이름과 달리 학교가 아니라 오페라 회사였습니다. 국왕이 주식회사 설립을 허가하고 해마다 1,000파운드를 보탰으며, 귀족들이 출자하고 관람권을 샀습니다. 헨델은 봉급을 받는 음악감독으로서 유럽을 돌며 가수를 뽑아 왔습니다. 〈줄리어스 시저(Giulio Cesare)〉(1724)와 〈로델린다〉(1725)가 이 시기에 나왔습니다. 1723년부터는 런던 브룩 가의 집에 세 들어 평생 그곳에서 살았고, 1727년 2월 의회법으로 영국 시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727년 시즌 소프라노 쿠초니와 보르도니 두 디바의 무대 위 충돌과 후원 귀족들의 분파 다툼, 이듬해 영어 노래극 〈거지 오페라〉의 흥행이 겹치며 아카데미는 1728년 6월 1일 마지막 공연으로 문을 닫았습니다. 헨델은 극장 지배인 하이데거와 손잡고 오페라단을 다시 꾸렸고, 하이데거와 결별한 뒤 1734년부터는 존 리치와 협력해 코벤트 가든 극장에서 오페라 시즌을 이끌었습니다. 1733년 왕세자가 후원한 라이벌 「귀족 오페라단(Opera of the Nobility)」과의 경쟁 끝에 1737년 그의 오페라 사업은 무너졌습니다. 가수 섭외와 극장 임대, 관람권 판매까지 떠안은 이 시절의 헨델을, 궁정이나 교회에 매이지 않고 시장에서 산 작곡가로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오라토리오로 옮겨 간 사업적 맥락은 무너진 오페라 시장에서 헨델이 〈메시아〉를 만든 과정에서 따로 다루었습니다.
만년: 뇌졸중, 시력 상실, 그리고 성토요일
1737년 봄 헨델은 쓰러졌습니다. 오른팔을 제대로 쓰지 못했고 한동안 정신적 혼란도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오늘날에는 이를 단순한 「뇌졸중」 하나로 확정하기보다 반복성 마비 증상과 당시 건강 상태를 함께 보려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해 늦여름 독일 아헨의 온천에서 땀을 빼는 요법으로 빠르게 회복했고, 감사의 뜻으로 아헨 대성당에서 오르간을 연주했다고 전합니다. 1738년 〈세르세〉의 「Ombra mai fu」(흔히 「헨델의 라르고」로 알려진 곡)를 비롯한 새 오페라로 무대에 돌아왔지만, 런던의 이탈리아 오페라는 다시 예전의 인기를 되찾지 못했습니다. 1741년 1월 〈데이다미아〉가 그의 마지막 오페라가 되었고, 이후 헨델은 영어 오라토리오로 노선을 완전히 옮깁니다. 〈메시아〉(1741년 작곡, 1742년 초연), 〈삼손〉(1741년 작곡, 1743년 초연), 〈솔로몬〉(1748년 작곡, 1749년 초연), 〈예프타〉(1751년 작곡, 1752년 초연)가 이 시기에 이어졌습니다.
1751년 2월 〈예프타〉를 쓰던 중 왼쪽 눈의 시력이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1752년 11월 수술을 받았지만 효과는 잠깐이었고, 1753년 1월에는 시력을 거의 잃었다는 보도가 나옵니다. 그 뒤에도 헨델은 제자 존 크리스토퍼 스미스에게 지휘를 맡기고 해마다 오라토리오 시즌을 이어 갔고, 막간에는 직접 오르간을 연주했습니다. 〈삼손〉에서 눈먼 삼손이 빛을 잃은 어둠을 노래하는 아리아가 나오면, 오르간 곁에 앉은 헨델이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쯤 전까지도 헨델은 〈메시아〉 공연에서 오르간 곁에 있었습니다. 1759년 4월 14일 성토요일 아침, 헨델은 런던 브룩 가의 자택에서 74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헨델의 친구 제임스 스미스(James Smyth)가 버나드 그렌빌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헨델은 부활의 날에 구원자를 만나기를 바라며 성금요일에 눈감기를 원했는데, 실제로는 하루 늦은 성토요일 아침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그를 안장한 영국은, 독일에서 태어나 영국 시민이 된 이 작곡가를 사실상 국민적 인물로 받아들였습니다. 1762년 사원에는 〈메시아〉 「I know that my Redeemer liveth」의 악보를 손에 든 헨델 입상이 세워져 오늘날까지 남아 있습니다.
사후: 1784년 기념제와 헨델 숭배
헨델은 결혼하지 않았고 약 2만 파운드의 재산을 남겼습니다. 유산 대부분은 독일에 사는 조카딸에게 갔고, 하인과 친구, 자선 단체에도 몫을 나누었습니다. 1784년 영국은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판테온에서 다섯 차례에 걸쳐 대규모 헨델 기념 공연을 열었습니다. 전국에서 모은 대합창과 대관현악, 국왕 조지 3세의 열성적인 후원이 더해진 이 행사는 음악사에 전례가 없던 것이었고, 이후 대형 음악제의 유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탄생 100주년이라는 명분이었지만 헨델이 태어난 해는 1685년입니다. 첫 전기가 출생 연도를 1684년으로 잘못 적은 탓이었습니다. 음악사가 찰스 버니는 이듬해 이 공연의 기록을 책으로 펴냈습니다.
19세기 영국에서 헨델의 오라토리오는 런던 극장을 넘어 지방 도시의 음악제와 아마추어 합창단의 레퍼토리로 퍼져 나갔습니다. 반면 그가 생전에 가장 많은 시간을 쏟은 오페라는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메시아〉의 헨델」은 이렇게 사후에 만들어진 모습이기도 합니다.
헨델 오페라의 음악사적 의의
오늘날 한국 청중에게 헨델은 〈메시아〉의 작곡가로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그러나 헨델 자신이 평생 가장 많은 시간을 쏟은 장르는 이탈리아어 오페라 세리아(opera seria, 진지한 내용의 정가극)였습니다. 1705년 〈알미라〉에서 1741년 〈데이다미아〉까지 약 36년간 그는 42편에 이르는 오페라를 작곡했습니다.
헨델 오페라의 핵심은 다 카포 아리아(da capo aria)의 양식적 완성과 인물 심리의 음악적 묘사입니다. A-B-A 구조의 다 카포 아리아에서 가수는 처음 A를 그대로 부르지 않고 즉흥 장식음을 더해 다시 부르며 인물의 감정 변화를 표현했고, 헨델은 이 형식 안에서 분노·절망·사랑·복수·체념의 색채를 인물별로 정밀하게 분리해냈습니다. 〈줄리어스 시저〉에서 포로가 된 클레오파트라가 절망 속에 내뱉는 아리아 「Piangerò la sorte mia(나는 내 운명을 슬퍼하리라)」, 〈리날도〉의 「Lascia ch’io pianga(나를 울게 하소서)」, 그리고 나무 그늘에 감사하는 왕의 느릿하고 깊은 독백으로 흔히 「헨델의 라르고」라 불리는 〈세르세〉의 「Ombra mai fu」가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헨델 사후 오페라 세리아 양식 자체가 빠르게 구식이 되면서 그의 오페라는 19세기 내내 거의 무대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헨델 오페라 부활은 1920년 독일 괴팅겐에서 오스카 하겐(Oskar Hagen)이 〈로델린다〉를 무대에 올린 것을 시작으로 한 「헨델 르네상스」와, 20세기 후반 카운터테너의 부활로 카스트라토 역할이 다시 무대에서 가능해진 흐름이 만나면서 본격화되었습니다. 오늘날 〈줄리어스 시저〉, 〈아리오단테〉, 〈알치나〉, 〈로델린다〉, 〈리날도〉, 〈세르세〉는 세계 주요 오페라하우스의 정규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헨델 자신이 자신의 음악 자료를 자유롭게 재활용했다는 사실입니다. 한 오페라의 아리아를 다른 오페라로 옮기거나, 옛 칸타타의 선율을 오라토리오로 가져오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이는 도덕적 의미의 표절이라기보다 18세기 작곡가 일반의 직업적 관행이었으며, 헨델 작품을 추적하는 흥미로운 단서이기도 합니다.
헨델 메시아와 오라토리오의 거장
헨델의 음악사적 업적으로 가장 먼저 꼽히는 것은 영어 오라토리오라는 장르를 사실상 새로 세운 일입니다. 1730년대 후반 런던의 이탈리아 오페라 시장이 무너지자, 헨델은 무대 장치 없이 콘서트 형식으로 상연되는 영어 오라토리오로 노선을 옮겼습니다. 오라토리오는 교회 예배의 일부가 아니었고 연기도 없었으니 교회 음악도 오페라도 아니었습니다. 헨델은 성경 이야기를 극장으로 가져왔고, 그 덕분에 종교 음악이 교회 밖의 청중을 만났습니다.
왜 오라토리오였나
외부 조건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영국 중산층이 이탈리아어 오페라보다 자기 언어로 부르는 작품을 원했습니다. 둘째, 무대 장치와 이탈리아 스타 가수가 필요한 오페라보다 무대 없이 합창단과 영국 가수들로 상연하는 오라토리오가 비용이 훨씬 적게 들었습니다. 셋째, 사순절에는 오페라 상연이 제한되었지만 종교적 주제의 오라토리오는 올릴 수 있었습니다.
작품 내부 자원도 있었습니다. 헨델은 함부르크 시기에 독일 루터교 전통을, 이탈리아 시기에 라틴어 모테트와 오라토리오를, 영국 시기에 헨리 퍼셀의 영어 합창 전통과 영국 앤섬(성가대용 합창곡)을 차례로 흡수해 두었습니다. 1727년 조지 2세 대관식을 위해 작곡한 〈제사장 사독(Zadok the Priest)〉은 그 영어 합창 어법이 응축된 곡이고, 그 뒤 모든 영국 군주의 대관식에서 연주되었습니다. 이 곡에서 이미 〈메시아〉의 합창 어법을 읽어 내는 해석도 있습니다.
메시아: 24일의 작곡과 더블린 초연
〈메시아〉의 작곡 기간은 1741년 8월 22일부터 9월 14일까지 24일입니다. 자필 악보에 헨델 본인이 적어 둔 날짜가 남아 있어, 이 24일이라는 기간은 후대의 과장이 아니라 헨델 자신의 손이 증명한 사실입니다. 헨델은 쉬지 않았습니다. 〈메시아〉를 끝내고 2주 남짓 뒤에 〈삼손〉의 1막을 마쳤고, 10월 29일에는 〈삼손〉 전체를 끝냈습니다. 두 대작이 열 주 남짓한 기간에 연달아 나온 것입니다. 「헨델이 작곡 중 눈물을 흘리며 하늘과 하나님 자신을 보았다고 말했다」는 일화는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전승이라, 후대에 덧붙여진 이야기로 보는 편이 안전합니다.
대본은 영국의 부유한 지주이자 아마추어 음악가 찰스 제넨스(Charles Jennens)가 흠정역(KJV) 성서와 공동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의 시편에서 직접 발췌·편집해 헨델에게 전달했습니다. 일반 오라토리오와 달리 〈메시아〉에는 등장인물도, 줄거리 전개도 없습니다. 제1부는 그리스도 탄생의 예언과 강림, 제2부는 수난과 속죄와 승리, 제3부는 영원한 생명과 최후의 승리를 다루지만, 인물의 대사 형식이 아니라 성경 본문을 합창과 독창이 명상하듯 펼치는 구조입니다.
1741년 11월 더블린에 도착한 헨델은 그곳에서 연주회 시즌을 열었고, 1742년 4월 13일 더블린 피셤블 거리의 새 음악당에서 〈메시아〉를 처음 무대에 올렸습니다. 수익은 빚 때문에 갇힌 사람들의 구제와 머서 병원, 자선 진료소 세 곳에 돌아갔고, 700명이 넘는 청중이 몰렸습니다. 〈메시아〉는 처음부터 교회 예배를 위한 음악이 아니라 음악당에서 표를 사서 듣는 음악이었습니다.
교회 밖의 종교 음악: 런던의 반발과 파운들링 병원
런던 첫 공연은 1743년 3월 23일 코벤트 가든 극장에서 열렸습니다. 이번에는 자선 공연이 아니라 헨델 자신의 사순절 오라토리오 시즌이었고, 열두 번의 공연 가운데 여덟 번이 〈삼손〉, 〈메시아〉는 세 번이었습니다. 반응은 엇갈렸습니다. 공연을 며칠 앞두고 한 신문에는 「하나님의 이름과 말씀을 오락거리로 쓰는 것은 신성 모독」이라는 투고가 실렸습니다. 성경 말씀을 배우가 서는 극장에서 부른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메시아〉가 런던에 자리 잡은 곳은 교회가 아니라 버려진 아이들을 기르던 파운들링 병원(고아원)이었습니다. 헨델은 1749년 5월 병원 예배당을 위한 기금 음악회를 열었고, 1750년 5월 1일에는 그 예배당에서 〈메시아〉를 지휘했습니다. 그달 9일 병원은 예배당에 오르간을 기증한 헨델을 이사로 뽑았고, 헨델은 이후 해마다 이곳에서 〈메시아〉를 올렸으며, 유언으로 〈메시아〉 악보 사본을 병원에 남겼습니다. 첫 전기 작가 메인웨링은 공연마다 모인 돈도 컸지만 더 큰 것은 헨델이라는 이름의 힘이었고, 그 덕에 수많은 귀족과 신사가 병원을 찾게 되었다고 적었습니다. 자선 공연의 자세한 이야기는 〈메시아〉 완전 해설에 정리했습니다.
할렐루야 기립 전통의 진실
한국과 일본 자료에서는 흔히 「1743년 런던 초연 때 조지 2세가 할렐루야 합창 첫 마디에서 자리에서 일어났고 청중도 따라 일어선 이래 오늘까지 그 전통이 이어진다」고 표현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국왕이 그 공연에 있었다는 확실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1739년 이후 조지 2세가 헨델의 오라토리오를 관람한 것이 확실히 입증되는 기록이 없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국왕이 일어섰다는 이야기는 공연 뒤 수십 년이 지나서야 글로 나타납니다.
도널드 버로우즈(Donald Burrows)를 비롯한 현대 헨델 연구자들은 이를 후대에 만들어진 일화로 보거나 신중하게 의심하는 입장을 취합니다. 다만 할렐루야 합창에서 일어서는 공연 관습 자체는 영어권에서 자리 잡아 오늘까지 이어지는 살아 있는 전통입니다. 기립 전통을 끝까지 따져 본 이야기는 할렐루야에서 왜 일어서는가에서 이어집니다.
「For unto us a Child is born」, 「Hallelujah」, 「I know that my Redeemer liveth」, 「Worthy is the Lamb that was slain」 같은 〈메시아〉의 합창과 독창은 지금도 따로 떼어 자주 불리는 곡들입니다.
메시아 너머의 오라토리오: 솔로몬·예프타·삼손
〈메시아〉는 헨델 오라토리오 중 가장 유명하지만, 음악적으로 더 야심찬 작품들이 그 옆에 있습니다. 〈삼손〉(1741)은 밀턴의 「Samson Agonistes」를 바탕으로 한 극적 오라토리오로 〈메시아〉보다 무대적 성격이 강하고, 〈솔로몬〉(1748)의 3막을 여는 기악곡 「Arrival of the Queen of Sheba(시바 여왕의 도착)」는 오늘날에도 자주 단독으로 연주됩니다. 헨델이 마지막으로 새로 쓴 오라토리오 〈예프타〉(1751)는 작곡 도중 시력을 잃기 시작한 작품입니다. 2부를 끝맺는 합창 「How dark, O Lord, are thy decrees(주여, 당신의 뜻은 어찌 이리 어두운지)」에 이르렀을 때, 헨델은 자필 악보에 「1751년 2월 13일 여기까지 왔으나, 왼쪽 눈의 시력이 약해져 더 나아갈 수 없었다」고 적어 두었습니다.
헨델과 바흐, 짝지어 부르기 어려운 두 사람
같은 1685년에 태어나, 둘 다 말년에 눈 수술을 받고 시력을 잃은 두 작곡가, 헨델과 바흐의 동시대성은 자주 강조되지만, 두 사람의 동시대 평가는 결코 대등하지 않았습니다. 헨델은 살아생전 유럽적 명성을 누리고 영국에서 국민적 인물이 된 반면, 바흐의 이름은 생전에 독일 몇몇 도시 밖으로 크게 퍼지지 않았고, 1829년 멘델스존의 〈마태 수난곡〉 부활 연주가 그 재발견의 상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만난 기록은 없습니다. 1719년 헨델이 가수를 구하러 독일에 왔을 때 바흐가 쾨텐에서 할레까지 찾아갔지만 헨델은 이미 드레스덴으로 떠난 뒤였고, 1729년 헨델이 어머니를 보러 할레에 왔을 때는 바흐가 맏아들 빌헬름 프리데만을 보내 라이프치히로 초대했지만 헨델이 가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두 사람은 한 번도 같은 방에 앉아본 적이 없는 채, 한 사람은 라이프치히 토마스교회의 칸토르 자리에서 평생 독일 교회를 위한 음악을 쓰고(바흐의 생애와 작품), 다른 한 사람은 런던 무대를 위한 이탈리아어 오페라와 영어 오라토리오를 쏟아냈습니다.
| 항목 | 헨델 | 바흐 |
|---|---|---|
| 출생·사망 | 1685 할레 ~ 1759 런던 | 1685 아이제나흐 ~ 1750 라이프치히 |
| 활동지 | 독일·이탈리아·영국 (코스모폴리탄) | 주로 독일어권 (튀링엔·작센·뤼네부르크·쾨텐 등) |
| 음악 무대 | 극장·콘서트홀 | 교회·궁정 |
| 주요 장르 | 오페라(42편)·오라토리오·관현악 | 칸타타·수난곡·건반·기악곡 (오페라 없음) |
| 작품 목록 | HWV 번호 1~612 | BWV 번호 1,100여 개 |
| 대표작 | 〈메시아〉, 〈수상음악〉, 〈리날도〉 | 〈마태 수난곡〉, 〈평균율〉, 〈b단조 미사〉 |
| 동시대 명성 | 유럽적 명성, 영국의 국민적 인물 | 독일 지역 중심, 사후 작곡가로서는 오래 가려짐 |
| 후대 부활 | 〈메시아〉 중심, 1920년대 오페라 르네상스 | 1829년 〈마태〉 연주 이후 재발견 |
한국에서 헨델은 바흐의 「음악의 아버지」라는 별칭과 짝을 이루어 「음악의 어머니」로 불려 왔습니다. 다만 이 표현은 영미·독일어권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별칭은 아니며, 한국과 일본식 음악 교육 문화 안에서 정착한 표현으로 보는 편이 안전합니다. 베토벤은 「헨델은 지금까지 살았던 가장 위대한 작곡가다. 그의 무덤 앞에서 모자를 벗고 무릎을 꿇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동시대성과 후대 평가의 비대칭이 빚어낸 한 단면입니다.
이 별칭에는 한 가지 함정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로 묶어 놓으면 두 사람이 한 쌍처럼 보이는데, 위의 표가 보여 주는 것은 그 반대입니다. 한 사람은 독일어권을 거의 벗어나지 않고 교회와 궁정에서 일했고, 다른 한 사람은 세 나라를 옮겨 다니며 극장을 운영하다 오페라 사업이 두 번 무너지는 것을 겪었습니다. 한 사람은 오페라를 한 편도 쓰지 않았고, 다른 한 사람은 마흔두 편을 썼습니다. 같은 해에 태어났다는 것 말고는 겹치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두 이름을 나란히 부르는 습관이 오히려 헨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가립니다. 그는 바흐의 짝이 아니라, 음악으로 사업을 하고 실패하고 다시 일어선 흥행가였습니다.
기악곡: 수상음악과 왕궁의 불꽃놀이
헨델은 성악곡 위주의 작곡가였지만, 그가 남긴 기악곡은 후기 바로크 관현악의 한가운데에 자리합니다. 가장 유명한 두 곡, 〈수상음악〉과 〈왕궁의 불꽃놀이〉는 모두 영국 왕실의 야외 행사를 위해 작곡된 모음곡으로, 32년의 시간차를 두고 헨델 영국 시기의 앞뒤를 보여 줍니다.
〈수상음악(Water Music)〉은 1717년 7월 17일 조지 1세의 템스강 뱃놀이를 위해 쓴 곡으로, 당시 기록에 따르면 왕의 배를 따라간 배 위에서 50명가량의 음악가가 헨델의 새 음악을 연주했고, 왕이 마음에 들어 세 차례나 되풀이하게 했다고 합니다. F장조·D장조·G장조 세 모음곡 약 22개 악장으로 구성되며, 호른·트럼펫·오보에·바순·현악이 어우러지는 야외 음악 특유의 밝고 의식적인 분위기가 특징입니다.
〈왕궁의 불꽃놀이(Music for the Royal Fireworks)〉는 1749년 4월 27일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을 마무리한 엑스라샤펠 조약을 기념해 런던 그린파크에서 열린 대규모 불꽃놀이를 위해 작곡되었습니다. 조지 2세는 군악적 효과를 위해 현악을 빼고 관악·타악만으로 작곡할 것을 요구했고, 헨델은 24개의 오보에·12개의 바순·9개의 호른·9개의 트럼펫·팀파니 3쌍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관악·타악 편성을 마련했습니다. 4월 21일 복스홀에서 열린 공개 리허설에는 1만 2천 명가량이 몰려 교통이 몇 시간 동안 막혔다고 전합니다.
두 모음곡 외에도 헨델 기악곡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합주 협주곡 Op.6 12곡(1739)입니다. 코렐리의 합주 협주곡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더 풍부한 화성과 다양한 악장 구조를 도입한 이 12곡은, 합주 협주곡 장르의 마지막 정점으로 자주 꼽힙니다. 그밖에 오르간 협주곡 Op.4·Op.7(헨델 자신이 오라토리오 막간에 직접 연주한 작품), 하프시코드 모음곡 8곡(1720), 합주 협주곡 Op.3 등이 그의 기악곡 핵심 목록을 이룹니다.
▶ 〈메시아〉 완전 해설 · 〈수상음악〉 이야기 · 〈왕궁의 불꽃놀이〉 자세히 보기
헨델 대표곡과 주요 작품 목록
헨델의 작품에는 HWV(Händel-Werke-Verzeichnis)라는 목록 번호가 붙습니다. 번호는 1번부터 612번까지 이어지는데, 결번과 이본이 섞여 있어 번호의 끝자리가 곧 작품 수는 아닙니다. 아래는 입문 또는 감상 우선순위가 높은 장르별 대표곡 정리입니다.
오페라 (42편 중 대표 8편)
| 작품 | 초연 | 특징 |
|---|---|---|
| 〈알미라〉 | 1705 함부르크 | 현존하는 첫 오페라 |
| 〈아그리피나〉 | 1709 베네치아 | 이탈리아 시기 정점, 27회 공연 |
| 〈리날도〉 | 1711 런던 | 「Lascia ch’io pianga」, 영국 진출의 대성공 |
| 〈줄리어스 시저〉 | 1724 런던 | 왕립 음악 아카데미 시기 대표작 |
| 〈로델린다〉 | 1725 런던 | 서정적 정점, 「Dove sei」 |
| 〈아리오단테〉 | 1735 런던 | 코벤트가든 첫 시즌 |
| 〈알치나〉 | 1735 런던 | 마법을 다룬 오페라 |
| 〈세르세〉 | 1738 런던 | 「Ombra mai fu」(헨델의 라르고) |
오라토리오 (약 25편 중 대표 8편)
| 작품 | 초연 | 특징 |
|---|---|---|
| 〈부활〉 | 1708 로마 | 이탈리아 시기 이탈리아어 오라토리오 |
| 〈에스더〉 | 1732 런던 | 공개 무대에 오른 첫 영어 오라토리오 |
| 〈이집트의 이스라엘인〉 | 1739 런던 | 합창이 곡의 중심에 놓인 작품 |
| 〈메시아〉 | 1742 더블린 | 24일 만에 작곡, 「Hallelujah」 |
| 〈삼손〉 | 1743 런던 | 밀턴 원작, 극적 오라토리오 |
| 〈유다 마카베우스〉 | 1747 런던 | 「See the conquering hero comes」(1748년 〈여호수아〉에서 옮겨 옴) |
| 〈솔로몬〉 | 1749 런던 | 「시바 여왕의 도착」 |
| 〈예프타〉 | 1752 런던 | 마지막 오라토리오, 시력 상실 자필 메모 |
관현악·협주곡
| 장르 | 대표곡 |
|---|---|
| 관현악 모음곡 | 〈수상음악〉(1717) · 〈왕궁의 불꽃놀이〉(1749) |
| 합주 협주곡 | Op.3 (6곡, 1734) · Op.6 (12곡, 1739) |
| 독주 협주곡 | 오르간 협주곡 Op.4(6곡, 1738) · Op.7(6곡, 1761 출판) · 하프 협주곡 |
| 건반악곡 | 하프시코드 모음곡 제1집(8곡, 1720): 「쾌활한 대장장이」 변주곡 포함 |
합창·앤섬
| 장르 | 대표곡 |
|---|---|
| 대관식 앤섬 | 〈제사장 사독(Zadok the Priest)〉(1727): 1727년 이래 모든 영국 군주 대관식에서 연주 |
| 송가 | 〈디틴겐 테 데움〉(1743) · 〈성 세실리아 송가〉(1739) |
| 기타 합창 | 〈알렉산더의 향연〉(1736, 드라이든 시 기반) |
함께 읽을 글
이 글에서 이름만 짚고 지나간 작품들은 각각 따로 다루었습니다.
| 주제 | 읽으면 좋은 분 |
|---|---|
| 헨델 메시아 완전 해설 | 24일 만에 쓴 그 작품을 더 알고 싶은 분 |
| 할렐루야에서 왜 일어서는가 | 기립 전통의 진실을 끝까지 따져 보고 싶은 분 |
| 오페라 시장의 붕괴와 오라토리오 | 흥행주 헨델이 왜 오라토리오로 옮겨 갔는지 궁금한 분 |
| 헨델의 수상음악 | 1717년 템스강의 그날을 자세히 알고 싶은 분 |
| 왕궁의 불꽃놀이 | 녹음마다 소리가 다른 이유가 궁금한 분 |
| Ombra mai fu, 헨델의 라르고 | 실패한 오페라에서 살아남은 한 곡을 듣고 싶은 분 |
| 보아라 정복의 용사 오신다 | 이 합창이 원래 어느 자리의 음악이었는지 궁금한 분 |
자주 묻는 질문
Q. 헨델은 왜 「음악의 어머니」로 불리는가?
한국에서 헨델은 바흐의 「음악의 아버지」라는 별칭과 짝을 이루어 「음악의 어머니」로 불려 왔습니다. 다만 이 표현은 영미·독일어권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별칭은 아니며, 한국과 일본식 음악 교육 문화 안에서 정착한 표현으로 보는 편이 안전합니다.
Q. 헨델과 바흐는 만난 적 있는가?
같은 해(1685년) 같은 중부 독일 지역에서 태어났지만, 두 사람이 직접 만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1719년 바흐가 할레까지 찾아갔을 때는 헨델이 이미 떠난 뒤였고, 1729년 바흐가 맏아들을 보내 라이프치히로 초대했을 때는 헨델이 가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Q. 헨델은 왜 영국에 정착했나?
1710년 하노버 궁정악장에 임명되었으나 곧 휴가를 얻어 런던으로 향한 헨델은 1711년 〈리날도〉의 대성공으로 런던 무대에 자리를 잡았고, 1712년 다시 런던으로 건너간 뒤 런던을 주된 근거지로 삼았습니다(1716~1717년 무렵 하노버에 다시 머문 기록은 있습니다). 이후 앤 여왕의 연금과 귀족 후원이 그를 영국에 묶어두었고, 1714년 그의 옛 고용주 게오르크 루트비히가 조지 1세로 영국 왕위에 오르면서 정치적으로도 자연스러워졌습니다. 1727년에는 의회법으로 정식 영국 시민이 됩니다.
Q. 메시아 할렐루야 합창 기립 전통은 사실인가?
1743년 런던 첫 공연 때 조지 2세가 할렐루야 합창에서 일어섰고 그 이래 청중도 따라 일어나게 되었다는 일화가 통설처럼 전해지지만, 국왕이 그 공연에 있었다는 확실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고, 국왕이 일어섰다는 이야기는 수십 년이 지나서야 글로 나타납니다. 후대에 만들어진 일화로 의심하는 견해가 우세합니다. 다만 할렐루야에서 일어서는 관습 자체는 영어권 공연 전통으로 오늘까지 이어집니다.
Q. 수상음악과 왕궁의 불꽃놀이는 어떻게 다른가?
두 곡 모두 헨델의 대표 관현악 모음곡이지만 시기와 목적이 다릅니다. 〈수상음악〉(1717)은 조지 1세를 위해 템스강 선상에서 연주된 야외 음악이며, 〈왕궁의 불꽃놀이〉(1749)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종전을 기념한 그린파크 불꽃놀이를 위한 음악입니다. 후자는 왕이 현악 없이 군악 편성으로 작곡할 것을 요구해 거대한 관악·타악 편성으로 초연되었고, 헨델은 후일 현악을 보강한 콘서트홀 버전을 따로 마련했습니다.
Q. 헨델 입문에 추천하는 작품은?
오라토리오 〈메시아〉(특히 「Hallelujah」 합창과 「I know that my Redeemer liveth」), 관현악 〈수상음악〉과 〈왕궁의 불꽃놀이〉, 오페라 〈리날도〉의 「Lascia ch’io pianga」, 〈세르세〉의 「Ombra mai fu」(헨델의 라르고)가 입문에 적합합니다. 깊이 들어가려면 오라토리오 〈솔로몬〉·〈예프타〉, 오페라 〈줄리어스 시저〉, 합주 협주곡 Op.6를 권합니다.
헨델은 한 도시에 머물지 않고 한 장르에 갇히지도 않은 작곡가입니다. 할레의 어린 오르가니스트에서 함부르크의 신예 오페라 작곡가로, 이탈리아 살롱의 사랑받는 외국인에서 런던의 오페라 흥행주로, 그리고 오페라 사업이 무너진 뒤에는 극장과 고아원 예배당에서 영어 오라토리오를 올리는 작곡가로 옮겨 갔습니다. 동시대 청중이 사랑한 이탈리아어 오페라 작곡가 헨델과, 후대가 기억하는 영어 오라토리오의 헨델 사이에는 분명한 거리가 있고, 그 거리를 메우는 작업이 20세기 이래 헨델 르네상스의 핵심이었습니다. 다음에 연말 공연장에서 〈메시아〉를 듣게 되면, 이 음악이 처음에는 교회가 아니라 표를 사서 들어가는 음악당과 극장, 고아원 예배당에서 울렸다는 것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Hallelujah」의 합창이 예배의 노래이기 전에 런던 시민 앞에 선 한 흥행주의 무대였다는 것을 알고 들으면, 그 소리가 조금 다르게 들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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