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연말이 되면 왜 전 세계는 헨델의 메시아 ‘할렐루야’를 노래할까요? 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 Messiah>는 단순한 클래식 명곡을 넘어, 한 예술가의 인생을 구원하고 역사를 바꾼 거대한 서사시입니다. 작품의 탄생 배경부터 오늘날의 문화적 현상이 되기까지, 그 깊고 풍성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여다봅니다.
1. 작곡 배경: 절망의 끝에서 쓴 구원의 서사시
1741년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 1685~1759)은 인생 최악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라이벌 오페라단과의 과도한 경쟁으로 파산 직전에 몰린 데다, 뇌졸중 후유증까지 겹치며 수십 년간 쌓아온 명성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위기였죠. 그때, 아일랜드 더블린의 자선 음악회로부터 새로운 오라토리오 작곡 및 연주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평소 그를 후원하던 독실한 지주 찰스 제넨스가 성경 구절을 엮은 대본 하나를 건넸습니다. 헨델은 런던을 떠나 작업에 몰두했고, 단 24일 만에 이 대작을 완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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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Hudson의 헨델의 초상화 (출처 : 브리태니커) |
이 경이적인 속도는 그의 음악적 천재성뿐만 아니라 신앙적인 영감도 한몫을 했습니다. 당시 그의 하인은 작업에 몰두한 헨델이 종종 식사도 잊은 채 눈물을 흘리며 악보를 써 내려갔다고 증언했습니다. 특히 '할렐루야' 합창을 완성한 뒤에는 감격에 차 "온 하늘과 위대하신 하나님 그분을 뵌 것만 같았다"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런 영감 때문인지 저는 메시아는 아무리 들어도 경건하면서도 가슴뭉클한 전율을 느끼게 있는 것 같네요.
오라토리오가 헨델에게 다시 성공을 안겨준 데에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영어로 된 가사는 대중이 쉽게 공감할 수 있었고, 오페라와 달리 무대장치나 의상이 필요 없어 제작비 부담이 적었기 때문이죠.
2. 대본의 신학적 의미: 시대에 맞선 치밀한 선언
메시아의 대본은 아름다운 성경 구절의 모음집이 아니었습니다. 대본가 찰스 제넨스는 당시 영국 사회에 퍼져나가던 이신론(Deism)에 깊은 우려를 표했습니다. 이신론은 신이 세상을 창조했지만 더 이상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합리주의적 사상으로, 예수의 신성과 기적을 부정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제넨스는 이에 맞서, 구약의 예언이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성경 말씀 자체로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영문학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킹 제임스 성경(King James Version)'에서 직접 구절들을 선별하고, 3부 구조에 맞춰 하나의 거대한 신학적 논증을 구축했습니다.
- 1부 : 메시아의 강림에 대한 구약의 예언과 예수의 탄생을 통해 '약속'을 제시하고,
- 2부 : 예수의 수난, 죽음, 부활, 복음 전파를 통해 그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보여주며,
- 3부 : 최후의 심판과 영원한 생명을 통해 그 성취가 인류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는지를 설명합니다.
3. 음악적 구조: 소리로 체험하는 성서
다채로운 형식의 역할 분담
레치타티보(Recitativo)는 성직자가 성경을 낭독하듯 사건을 객관적으로 전달하고, 감정이 고조될 때는 오케스트라가 함께하는 '아콤파냐토'로 극적인 긴장감을 높입니다. 뒤이어 나오는 아리아(Aria)는 시간을 멈추고 한 개인의 내면으로 깊이 파고들어, 슬픔, 환희, 확신과 같은 감정을 절절하게 노래합니다. 그리고 합창(Chorus)은 천사들의 무리가 되거나, 믿음을 고백하는 인류 전체의 목소리가 되어 장엄한 울림을 만들어냅니다.
'말씀 그리기(Word-Painting)'의 정수
헨델은 소리로 그림을 그리는 대가였습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The people that walked in darkness)"에서는 베이스 라인이 불확실하게 헤매듯 움직이고, "모든 골짜기 높아지리라(Ev'ry valley shall be exalted)"에서는 '높아지리라'는 가사에 맞춰 선율이 실제로 솟구칩니다. 예수가 채찍질당하는 장면을 묘사할 때는 날카롭고 짧게 끊어지는 현악기 리듬으로 고통의 순간을 소리로 직접 체험하게 합니다.
4. 초연: '구제의 음악'으로 세상에 나오다
더블린의 심장을 울린 자선 공연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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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더블린 거리 풍경 |
런던을 감동시킨 나눔의 정신
1년 뒤 런던의 반응은 차가웠습니다. "신성한 작품을 세속적인 극장에서 연주한다"는 비판에 직면했죠. 이 냉랭한 분위기를 바꾼 것은 국왕의 기립이라는 우연한 사건만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헨델의 꾸준하고 진심 어린 실천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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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파운들링 병원 예배당 내부 |
그는 런던의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파운들링 병원(Foundling Hospital)'과 특별한 인연을 맺습니다. 헨델은 이 병원의 초기 후원자를 넘어, 직접 이사회에 참여하며 운영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병원 예배당에 오르간을 기증하고, 1750년부터는 매년 <메시아> 자선 공연을 열어 병원의 가장 큰 재정적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한때 비판에 휩싸였던 <메시아>는 헨델의 숭고한 실천을 통해 런던 시민들의 마음속에 가장 도덕적이고 권위 있는 작품으로 각인되었습니다. 헨델은 세상을 떠나기 전, <메시아>의 악보 수입마저 이 병원에 기부하도록 유언장에 기록하며, 작품에 '나눔'이라는 DNA를 영원히 새겨 넣었습니다.
5. 음악사적 의의: 거장들의 어깨와 시민들의 목소리
거장들의 교과서
모차르트는 1789년 메시아를 직접 독일어로 편곡(KV 572)하며 고전주의 시대의 색채를 입혔고, 이 버전은 작품이 독일어권에 퍼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하이든은 런던에서 메시아의 대규모 공연을 듣고 받은 충격과 영감으로 자신의 위대한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와 <사계>를 작곡했습니다. 베토벤은 헨델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라 칭하며, 그의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작곡 기법에 평생의 존경심을 표했습니다.
미국의 '싱어롱' 문화
유럽에서 이 작품이 주로 전문 연주가들의 경건한 감상 대상으로 자리 잡은 반면, 미국에서는 매우 독특하고 대중적인 문화 현상으로 진화했습니다. 바로 '싱어롱 메시아(Sing-Along Messiah)'입니다. 이는 1818년 보스턴에서 미국 초연이 이루어진 이래, 메시아가 크리스마스 시즌의 상징으로 자리 잡으며 나타난 미국 특유의 전통입니다. '싱어롱 메시아'는 전문 합창단이 노래하는 것을 수동적으로 듣는 공연이 아닙니다. 객석에 앉은 청중이 바로 합창단이 되는 참여형 공연입니다. 관객들은 각자 자신의 파트 악보(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를 들고 와서, 지휘자의 지휘에 맞춰 '할렐루야'를 비롯한 모든 합창 부분을 함께 노래합니다. 이러한 형태는 전문가와 아마추어, 연주자와 감상자의 경계를 허무는 민주적인 축제의 장을 만듭니다. 음악적 완성도보다는 참여의 기쁨과 공동체적 유대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죠.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미국 전역의 크고 작은 교회와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싱어롱 메시아'는, 한 해를 마무리하며 이웃과 함께 위대한 음악을 직접 부르는 소중한 경험을 선사합니다. 이를 통해 메시아는 미국에서 박물관의 유물이 아닌, 매년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로 재창조되는 살아있는 문화가 되었습니다.
6. 흥미로운 에피소드
할렐루야 합창과 기립 전통
'할렐루야'가 연주될 때 자리에서 일어나는 전통은 조지 2세 국왕의 일화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왕이 일어서자 모든 사람이 따라 일어나야 했고, 이 관습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관행이 널리 퍼진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날에는 강요되기보다 개인의 선택에 맡겨지는 분위기입니다.
덧붙이는 이야기: 계속 진화하는 악보
<메시아>는 단 하나의 고정된 악보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헨델 자신이 공연 상황에 맞춰 계속 곡을 수정했고, 말년에는 제자가 개정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는 헨델의 원본 악보에 의한 연주가 대세가 되었지만, 지금도 교회나 합창단에서는 연주 편의성을 높인 '프라우트 편곡판' 등이 함께 사용되고 있습니다.
7. 헨델의 정신, 오늘날의 '자선 음악회'로 이어지다
헨델이 <메시아>를 통해 보여준 '음악을 통한 나눔'의 정신은 오늘날까지 작품의 핵심 철학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연말이 되면 세계 곳곳의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은 '자선 음악회' 형식으로 <메시아>를 연주합니다. 티켓 수익금의 일부는 노숙인 지원 단체, 결식아동 돕기, 혹은 의료 지원이 필요한 이웃에게 전달되죠.
280여 년 전, 더블린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 울려 퍼졌던 음악이 지금도 우리 사회의 가장 어려운 곳을 비추고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의 웅장한 환희는 단순히 음악적 카타르시스를 넘어,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연대의 희망을 노래합니다. <메시아>를 들을 기회가 생긴다면, 그 음악에 담긴 따뜻한 나눔의 역사를 함께 떠올려보는 것은 어떨까요?
처음이어도 괜찮아! <메시아> 하이라이트 추천곡
메시아 전곡을 감상하려면 약 2시간 30분 정도가 필요합니다. 바쁘고 익숙하지 않은 클래식을 이렇게 오래 듣기에는 힘든 것이 사실이죠. 그래서 메시아가 익숙하지 않은 분들을 위해, 개인적으로 듣기 편안했던 곡들을 선곡해 보았습니다.
- 합창 : For unto us a Child is born (우리를 위해 한 아기 나셨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밝고 환희에 찬 합창곡.
- 합창 : Glory to God in the highest (주께 영광): 천사들의 힘찬 찬양이 느껴지는 짧고 강렬한 곡.
- 아리아(소프라노) : Rejoice greatly, O daughter of Zion (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하라): 화려한 기교와 기쁨이 넘치는 분위기가 매력적인 곡.
- 아리아(알토) : He was despised (주는 모욕받으셨네): 예수의 고난을 묵상하는 깊고 경건한 분위기의 아리아.
- 합창 : All we like sheep have gone astray (우리는 양 떼 같이 헤매었네): '양 떼'라는 가사처럼 흩어지고 방황하는 듯한 음악적 표현이 재미있는 곡.
- 합창 : Lift up your heads, O ye gates (문들아 너의 머리를 들라):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 듯한 구성이 인상적인 승리의 합창.
- 합창 : Hallelujah (할렐루야) : 말이 필요 없는 메시아의 상징. 하늘의 문이 열리는 듯한 웅장함을 느껴보세요.
- 아리아(소프라노) : I know that my Redeemer liveth (내 주는 살아계시니): 부활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노래하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아리아.
- 합창 : Worthy is the Lamb that was slain & Amen (죽임 당하신 어린양 & 아멘): 장엄한 찬미로 2시간 30분의 대장정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두 합창곡.
작품의 이름 ‘메시아’는 ‘구원자’를 의미하는데, 마치 예언과도 같았습니다. 이 음악은 파산 직전의 헨델을 절망으로부터 구원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의 음악이 닿는 모든 곳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구원하는‘시대의 구원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